주일예배

느헤미야의 개혁

Author
명
Date
2024-04-28 21:38
Views
49
성경구절 : 느 13:1-31

1월 첫 주일부터 느헤미야서를 다루었는데 어느 덧 마지막 장에 도달했습니다. 전에도 느헤미야서로 설교한 적이 있지만 이번에 1장부터 13장까지 차례로 다루면서 느헤미야서가 얼마나 귀한 책인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느헤미야서의 특징을 잘 나태내는 단어를 꼽으라고 한다면 ‘개혁’입니다. 개혁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이요, 그 개혁의 열매가 부흥으로 나타납니다. Catholic에서는 개신교를 Protestant라고 부릅니다. 캐톨릭에 반항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스스로를 Reformed church, 즉 개혁 교회라고 부릅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끊임없이 개혁되면서 거룩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지난주일 살펴보았던 것처럼 우리 모두 하누카의 사람들, 즉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사람들, 하나님의 목적이 이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하누카의 교회,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교회, 하나님의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온 마음으로 헌신하며 개혁을 지속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잠깐은 마음이 도곤도곤하여 열심을 낼 수 있지만 처음 사랑을 잃지 않고 한결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본문이 보여줍니다.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의 수도 수산으로 돌아갔다가, 유다 사회가 급격히 부패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닥사스다 왕 32년에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 여러 가지로 개혁을 단행합니다. 느헤미야는 지도자들의 잘못된 행실을 꾸짖으며, 백성들의 삶을 하나님의 뜻대로 회복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거룩한 삶을 방해했던 장애물들이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여전히 장애물들이 됩니다. 본문의 교훈을 삶에 적용하여 삶의 문제점들이 고침을 받고 열정을 회복하여 온 마음으로 섬기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하누카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섞인 무리를 분리시킵니다(1-3절)
‘그날’은 성전 봉헌식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을 때를 의미합니다. 느헤미야가 율법책을 낭독하게 했기에 이스라엘 자손이 말씀을 들으면서 율법을 어기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신 14:2)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우상 숭배를 하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당시 귀환자들은 대제사장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이방인과 섞여 살았습니다. ‘섞인 무리’란 유다에 귀화하지 않고 상업이나 결혼 등을 이유로 유다 백성들 가운데 거주하는 잡족을 가리킵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에 관한 규례는 신명기 23:3~6에 나옵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23:3)라고 합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총회, 곧 언약 공동체인 하나님 백성의 모임에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는 출애굽 시절에 이스라엘 백성을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롯의 후손인데, 친척인 아브라함의 자손을 홀대했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그들을 배려하셔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들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신 2:9,19). 그런데 모압 왕 발락이 브올에 살던 주술사 발람을 시켜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했습니다(민 22장). 발람은 모압 왕이 제시한 거액의 돈에 미혹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의 입을 주관하셔서 저주 대신 축복을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모압이 이스라엘에게 패배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런 내용의 율법을 들은 유다 백성은 섞여 살던 모압과 암몬의 사람들을 자기들에게서 분리시킵니다. 귀환 공동체의 거룩한 정체성이 절실하게 중요한 시점에서 10:30~31에 기록된 언약 갱신 때 맹세했던 대로 이방 사람들을 축출한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데 있습니다(롬 3:20). 깨달은 말씀대로 순종할 때 우리의 삶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성도와 세상과의 관계는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을 위하여 존재하는’것으로 표현됩니다.

성전을 청결하게 회복시킵니다(4-9절)
‘이전에’라는 표현은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갔다가 돌아오기 전의 기간에 일어난 것임을 가리킵니다. 느헤미야는 12년 동안(주전 445~433) 총독으로서 예루살렘에 있다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잠시 다녀오느라 부재했던 기간이 있었습니다. 이 기간에 성전의 방을 책임지고 있는 제사장 엘리아십이 암몬 사람 도비야에게 성전 뜰에 큰 방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엘리아십이 도비야에게 준 큰 방은 특별히 소제물과 유향과 그릇과 십일조의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거제물들을 두는 곳이었습니다. 이 방은 성전 봉헌식 때도 언급되었고(12:44), 언약 갱신 의식 때도 언급된 성전의 거룩한 방들 가운데 하나입니다(10:38~39). 도비야가 어떤 사람입니까?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총독으로 부임하였을 때 자기가 누리던 기득권이 사라질까 심히 근심했었고(1:10), 성벽 중건을 하려고 할 때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2:19) 하며 비웃었습니다.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4:3)하며 조롱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성벽이 거의 완성이 되어 가는 단계에서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 곳을 요란하게 하자”(4:8)면서 무리를 선동하였습니다. 유대인 귀족들과 인척관계를 맺어(6:18) 그들과 내통하며 지속적으로 느헤미야를 괴롭혔습니다. ‘며칠 후’에 예루살렘에 돌아왔다는 표현을 통해 1년(주전 432년)이 끝나 가는 때에 돌아왔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느헤미야는 도비야가 성전 방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물건을 방 밖으로 내어 던집니다. 느헤미야는 성전 방들을 정결하게 하고 원래대로 성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저장하게 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믿음 사람들의 공동체가 성전이요, 우리 각자는 성령을 모시고 사는 전이기에 이 성전을 더럽히는 죄악의 요소들은 즉시로 제거되어야 하고, 청결하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레위인들의 성전직무를 회복시킵니다(10-14절)
느헤미야가 돌아왔을 때 알게 된 또 한 가지 사실은 백성이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을 위한 십일조를 바치지 않자 그들이 성전의 직무를 버리고 자기들의 밭으로 도망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사건에 대해 ‘하나님의 전이 버려졌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거룩한 직무를 맡은 이들이 성전을 떠나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이 제대로 유지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레위 사람들이 왜 흩어졌습니까? 백성이 성전 봉사자들을 위하여 물질적 지원을 하겠다고 엄숙히 맹세하였음에도 불구하고(9:36-37) 그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에게 제공할 헌물들과 십일조가 제대로 바쳐지지 않았습니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레위 사람들은 성전에서의 직분을 버리고 생계를 찾아 떠났습니다. 레위 사람들에게 공급할 양식을 쌓아 두던 성전의 골방은 비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지지 못하니 세상 것이 들어왔습니다. 이방인인 도비야가 성전을 더럽힌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민장들을 꾸짖은 후 레위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아 성전에서 일하도록 하자, 백성이 다시금 십일조를 바치게 되었습니다. 백성의 이러한 반응은 민장들이 죄를 범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합니다. 즉 백성은 자신들이 바친 십일조가 올바르게 사용되지 않아 레위 사람들이 흩어져 버리자 십일조의 양이 줄였거나 아예 바치지 않았습니다. 결국 지도자들의 나태와 범죄가 온 백성의 신앙을 그릇되게 만들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성전의 방을 다시 정결하게 하고 십일조를 다시 정비한 후에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제사장과 백성이 성전을 소홀히 여기는 심각한 도전 앞에서 성전을 돌보고 섬기기 위해 그가 행한 선한 일들, 곧 충성을 다한 일들을 기억하시고 이 일들이 잘 유지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전통을 회복시킵니다(15-22절)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을 만나고 돌아온 후에 세 번째 불법 행위를 알게 됩니다. 안식일에 예루살렘에서 장사함으로 안식일의 율법을 범한 것입니다. 15절의 ‘그때’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를 의미합니다. 느헤미야가 백성이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운반하고 포도주와 짐들을 지고 예루살렘에서 음식물을 파는 것을 봅니다. 이는 율법 규정을 위반한 것이기도 하지만, 언약 갱신의 의식 때 맹세한 사항들을 깨뜨린 것이기도 합니다(10:31).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밖에 거하는 유다인들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 거하는 이방인인 두로 사람들도 물고기와 각종 물건을 안식일에 유다 사람들에게 팔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범하는 문제로 인해 귀족들을 꾸짖습니다. 그들이 책임 있는 자들로서 이러한 일에 적극 동참했거나 방관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귀족들과 백성이 언약 갱신 의식 때 이방인들이 안식일에 물품을 판다고 하더라도 안식일과 성일에는 사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조상들이 안식일을 범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하고 예루살렘이 파괴되었음을 상기시킵니다(렘 17:27; 겔 20:12-24). 그런데 귀환 공동체가 안식일을 또다시 범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책망은 귀환 공동체가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느헤미야의 긴장과 두려움을 드러냅니다.

느헤미야는 유다 백성과 귀족들을 책망하고 안식일에 장사하는 것을 금지한 후에 실제적인 대책을 마련합니다. 안식일 전날 어두워지기 전부터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성문을 닫고 측근의 부하들을 시켜서 성문으로 어떤 짐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통제합니다. 느헤미야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이방의 장사꾼들이 안식일에도 찾아와 예루살렘 성 밖에서 자는 일이 있었습니다. 성 안에 들어갈 수 없기에 성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느헤미야가 다시 이같이 하면 체포하겠다고 경고하자 그들이 더 이상 안식일에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레위 사람들에게 몸을 정결하게 하고 성문을 지킴으로써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고 지시합니다. 느헤미야의 이와 같은 대책은 예루살렘 성문을 지키는 것이 성전을 지키는 일과 동등하게 거룩한 일임을 보여 줍니다. 이미 성벽을 재건할 때부터 양문을 비롯한 성문과 상벽이 제사장들에 의해 거룩하게 구별되었고(3:1), 성벽이 완성된 후에는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이 성문 감독으로 세워집니다(7:1). 성벽 봉헌식 때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했습니다(12:30). 성벽을 포함한 예루살렘 전체가 거룩한 성으로 불립니다(사 52:1; 욜 3:17). 느헤미야는 안식일 규례를 지키기 위해 레위 사람들을 일반 백성이나 느헤미야의 부하들 대신 성문을 통제하는 자들로 세운 것입니다. 율법과 성벽과 성전이 하나로 연결된다는 사실이 레위 사람들의 성문 파수를 통해 다시 한 번 강조됩니다. 이제 느헤미야는 안식일 율법 준수를 위해 자신이 한 일도 기억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하나님의 변함없는 은혜(헤세드)를 기원합니다.

정체성을 회복시킵니다(23-31절)
23절은 ‘그때에’라는 표현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새로운 주제로 전환됨을 알리는 동시에 이제 전개되는 사건이 6~22절의 사건들과 동일한 시기에 일어난 사건임을 암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느헤미야가 확인한 또 한 가지 사실은 많은 유다 사람이 이방 여인과 결혼한 것입니다. 유다 땅 인근에서 사는 이방 여인들, 곧 서쪽의 블레셋 지역의 아스돗과 동쪽의 암몬과 모압 지역에 거주하는 이방 여인들과 결혼한 것입니다.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라는 표현보다는 ‘아이들 절반쯤이 아스돗 방언은 하여도’라는 표현이 더 적절합니다. 이방인과의 결혼에 대한 문제는 이미 6:18에도 언급되었습니다. 암몬 사람 도비야가 스가냐의 사위가 되었고, 그의 아들은 제사장 므술람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그 경우가 이방 권력자들과 유다 지도자들 사이의 정략결혼 관계를 보여 준다면, 본문의 경우는 일반 백성이 이방 여인들과 결혼한 일을 보여 줍니다. 느헤미야는 이방인과 결혼한 자들을 책망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리고 그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기도 했습니다. 또한 자녀들을 이방인과 결혼시키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했습니다. 이는 이방인과의 결혼이 귀환 공동체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큰 장애가 되는 치명적인 문제임을 인식한 반응입니다. 느헤미야는 유다 백성과 이방인과의 결혼 자체도 문제지만 그 자녀들이 유다 말을 모른다는 사실이 귀환 공동체의 정체성 회복에 있어서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인식했습니다. 느헤미야가 그들을 저주한 이유는 그들이 언약 갱신 의식 때 맹세한 것을 어겼기 때문입니다(10:30). 이제 느헤미야는 그들이 했던 맹세를 하나님 앞에 다시 하게 합니다. 느헤미야는 솔로몬의 경우를 예를 들어 이방인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큰 사랑을 받은 왕이었지만 이방 여인과 혼인해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입어 놀라운 지혜와 부를 누렸던 이스라엘의 왕도 이방 여인들 때문에 넘어졌다면 일반 백성은 얼마나 더 범죄에 빠질 수 있는지를 강조한 것입니다. 이방 여인과 결혼한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이방 여인들과 결혼한 자들에게 이방인 아내와 당장 결별할 것을 촉구합니다.

느헤미야가 이방인들과 결혼한 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운데 알게 된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실은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가 대적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엘리아십의 손자를 귀환 공동체에서 쫓아냅니다. 느헤미야는 이방 여인과 결혼한 제사장의 문제로 인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레위 사람의 언약을 어긴 자들을 기억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느헤미야는 또한 제사장들로 이방 사람과 결별하게 함으로 정결하게 한 것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에게 각각 일을 맡긴 것과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들을 드리게 한 일을 기억하시고 복을 달라고 간구합니다. 언약 갱신 의식 때 맹세한 것들과 이를 위해 힘쓴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잘 유지되고 실행되도록 기도한 것입니다(5:19; 10:28, 34~35). 느헤미야는 강력한 개혁 정책을 펼치게 된 과정과 내용을 소개한 다음 마지막 부분에서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기도와 함께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합니다. 자신의 공로를 인정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한 기도로 보아야 합니다. 혹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친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중심은 부끄럽지 않으니 그 점을 기억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변화를 이끌어 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만 불완전한 선택을 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늘 겸손히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개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떠나 수산 궁에 가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급격히 타락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잠깐 예루살렘을 비웠다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성벽을 재건할 때 가졌던 신앙적 감격과 열심이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성벽 봉헌식 때의 그들이 드린 감사와 찬송은 어디로 갔습니까? 10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들과 동화되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서명하였습니다. 성전 회복을 다짐하면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생계를 책임지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맹세한 것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느헤미야가 안타깝게 절규합니다.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에 의해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흩어졌던 레위 사람들이 성전으로 돌아오고 백성은 다시 십일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게 되었으며,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하게 되었습니다. 부패한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새사람들로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의 활동으로 잠시 동안 이스라엘에 신앙의 부흥이 있었지만, 유다 백성의 신앙은 다시 부패하여 하나님께서 말라기에서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1:10)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3:8)하실 정도였습니다. 말라기 이후 사백년간 하나님은 유다 백성에게 침묵하시고 세례자 요한 때까지 예언자를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개혁이란 무엇입니까?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사 58:12).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황폐되고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우는 자들입니다. 개혁하는 자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깨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부분을 회복시키고, 변화시키고, 새바람을 일으키는 사명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어떻게 개혁을 수행하였습니까? 지금도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느헤미야는 확신하였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안팎으로 많은 방해와 위협이 있었지만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를 주시고, 담대함을 주시고, 추진력을 주시고, 상황을 변화시켜주셨습니다. 그는 말만 앞세우는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뒤에서 콩 놔라 팥 놔라 훈수하면서 자신은 나서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본을 보이며 백성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능력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총독이라는 직책도 그는 지혜롭게 사용하였습니다.

나가면서
느헤미야는 어지러운 시대에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그 시대의 통렬한 죄악상을 비판하면서 그들 속에 만연해 있는 악습을 척결했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고치고, 도탄에 빠진 백성의 마음을 추스르고 책망해서 강인한 이스라엘을 세웠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진정으로 흥왕케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느헤미야의 절규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나태함 때문에 하나님의 전이 황폐하게 되지는 않습니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방황하지는 않습니까? 자기 주위에 있는 신앙인들이 다 그런다고 하며 자신의 불성실한 신앙생활을 합리화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시대를 초월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거룩함을 요구합니다. 한때의 감격이나 잠시 동안의 열심만으로 거룩함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는 거룩해질 수 없고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지속적인 성령 충만함만이 거룩한 성도가 되는 비결입니다. 내가 변화를 받고 다른 사람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세상의 것은 비우고, 날마다 하나님의 것으로 채움을 받을 때 우리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달라져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세속화되어가는 이 세대에서 느헤미야와 같이 영적이면서도 실천력이 있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능력의 종들이 필요합니다. 회복은 영적 개혁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개혁하는 교회를 이루도록 우리 모두가 한 마음으로 열정적으로 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려면 느헤미야와 같이 기도와 말씀으로 든든히 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삶 속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이웃에게는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며, 하누카의 사람들, 하누카의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