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짐승의 도전과 교회의 응전(2)

Author
hgchoi hgchoi
Date
2023-05-23 00:42
Views
269
성경구절 : 계시록 13:11-18



계 13:11-18 짐승의 도전과 교회의 응전(2)

예수님의 초림 때부터 재림 때까지 성경에서 말세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세의 징조들이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귀도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발버둥을 칩니다. 13장은 두 짐승의 활동을 묘사함으로써 교회가 적대적 세력의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1-10절에서 바다에서 올라온 첫째 짐승을 소개한 요한은 이제 둘째 짐승을 소개합니다. 둘째 짐승 역시 첫째 짐승처럼 용을 보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본문은 둘째 짐승이 어떻게 첫째 짐승을 보좌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해 우상을 만들게 합니다. 또한 모든 자로 하여금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는데, 표를 가진 자 외에는 경제활동을 못하게 합니다.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것은 짐승에게 속한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짐승의 역할을 통해 사탄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교회 공동체를 멸절시키려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은 때로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다가와 사람들을 미혹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섬길 것을 강요합니다. 지금도 많은 교회가 교묘한 수법으로 접근하는 이단들 때문에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세가 가까울수록 거짓 선지자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미혹하는 일들이 많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을 통해 거짓 선지자들의 정체와 그들의 악한 활동을 살펴보며 사탄의 이러한 도전에 신자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11-12)

사도 요한은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는 환상을 봅니다. 그 짐승은 어린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합니다.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는 다니엘 8:3의 ‘두 뿔 가진 숫양’을 배경으로 합니다. 다니엘서에서 그 숫양은 강한 능력을 가진 메데와 바사를 가리킵니다. 어린양같이 두 뿔이 있다는 것은 어린양과 같은 모습으로 위장했다는 것입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어린양처럼 생겼지만, 용처럼 말합니다. 그 짐승은 본질상 용에게 속한 자입니다. 이 짐승은 계시록에서 거짓 선지자로 불립니다(16:13; 19:20; 20:10). 거짓 선지자의 겉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듯하지만, 그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은 전부 거짓입니다. 이는 종말론적 사건들이 진행되는 가운데 거짓 선지자들이 광명의 천사로 위장해 말씀을 왜곡하고 사람들을 미혹할 것임을 암시합니다(고후 11:13-14). 마태복음 24장의 감람산 강화에서 예수님은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에 대해 수차례 경고하셨습니다. 또한 양의 옷을 입었으나 사실은 노략질하는 이리와 같은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마 7:15). 이들은 자칭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며 우리를 미혹시키는 거짓 교사나 이단들을 말합니다. 신자는 이런 사탄의 숨은 전략과 궤계를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모습에 속지 않고, 열매로 그들을 분별해야 합니다. 두 증인이 주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아 행했듯이 둘째 짐승도 바다에서 나온 짐승인 적그리스도로부터 권세를 받아서 행합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이 다 짐승에게 경배한다고 했는데,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들을 부추겨 적그리스도를 경배하게 만듭니다. 13장은 악한세력의 연합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고 세상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 거짓 삼위일체의 정점에 용, 즉 사탄이 있고, 그 뒤에 용에게 권세를 받은 바다 짐승, 즉 적그리스도가 있고, 바다 짐승에게 권세를 받은 땅의 짐승, 곧 거짓 선지자가 그 뒤를 따릅니다.



짐승의 능력(13-15)

둘째 짐승의 역할은 이적으로 사람들을 미혹해 첫째 짐승을 경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짐승은 사람들 앞에서 불을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오게 하는 이적을 행합니다. “내려오게 하고” 문법적으로 현재시제로 되어 있어 불을 하늘로부터 내려오게 하는 일들이 지속적이고 빈번하게 일어날 것을 암시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행하는 이적임을 말해 줍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는 짐승의 능력은 엘리야의 기적을 연상시킵니다(왕상 18:38; 왕하 1:10,12). 또한 이 능력은 11:4에서 입에서 불을 내어 대적하는 자들을 소멸시켰던 두 증인의 능력과 대비됩니다. 곧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교회 공동체를 대적하는 강력한 적대 세력이 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짐승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큰 능력을 행사합니다. 사도 바울은 종말의 때에 불법자가 나타날 것인데, 사탄의 활동을 따라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을 행함으로 멸망할 자들을 속일 것이라고 했습니다(살후 2:8-10). 둘째 짐승이 큰 이적을 행하는 목적이 그의 말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칼에 상했다가 살아난 짐승은 첫째 짐승을 가리키며 이는 3절에서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라고 한 말씀과 상관이 있습니다. ‘칼에 의해 상하였다’는 말은 직역하면 ‘칼의 상함을 가지다’인데 계시록에서 ‘상함’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더 나아가서 ‘살아나다’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연상시키는 풍자에 해당하므로 다시 한 번 첫째 짐승이 그리스도와 비교되고 있습니다. ‘(첫째)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는 것은 12절의 ‘땅에 사는 모든 자들’이 첫째 짐승에게 경배하는 방법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1세기 상황으로 볼 때 첫째 짐승은 네로 황제를 모델로 삼으며, 둘째 짐승은 황제숭배를 추진하는 사제 그룹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15절에 둘째 짐승이 권세를 받는다고 나오지만, ‘권세’라는 단어가 원문에 없습니다. 이 구절을 직역하면 ‘우상에게 생기를 주는 것이 그에게 주어졌다’입니다. ‘생기’로 번역된 단어는 ‘숨’이라는 뜻입니다. ‘생명’을 뜻하는 ‘조에’가 없으므로 진정한 생기가 아니라 허위로 조작된 영임이 드러납니다. ‘주어지다’는 신적 수동형 동사입니다. 둘째 짐승은 표면적으로는 첫째 짐승으로부터 권세를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그 활동의 허용과 제한을 받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상은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아무리 복을 빌고 섬겨도 그들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으며, 결국 무익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허망한 우상을 버리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둘째 짐승이 첫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말하게 합니다. 용으로부터 첫째 짐승을 거쳐 둘째 짐승에게까지 전달된 권세는 초자연적 기적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죽은 두 증인에게 생기를 주어 살리신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는 적그리스도를 우상으로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이 다 짐승에게 경배한다고 했는데, 거짓 선지자는 많은 사람들을 부추겨 적그리스도를 경배하게 만들 것입니다.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일은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느부갓네살의 칙령(단 3:4-6)과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치하에 행해진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주전 167-174년)를 떠올리게 합니다. 플리니우스 2세는 트라야누스 황제(주후 98-117)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고발당한 사람들은 처형의 위협과 더불어 로마의 신들에게 기도하고 황제의 조각상에 제물을 바치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성도는 이런 상황에서 믿음을 지켜 하나님 외에 다른 대상을 의지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짐승의 표(16-18)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우상숭배를 강요할 뿐 아니라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데, 7장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인치심 받게 한 장면을 패러디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은 수사적인 표현으로서 서로 대조를 이루는 어휘를 열거하여 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144,000명의 이마에 찍힌 인은 그들이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표시였습니다. 오른손이나 이마는 신체 부위 가운데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한다는 말은 짐승에게 속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표시하도록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둘째 짐승이 모든 자에게 이러한 ‘표’를 받도록 하는 것은 12절에서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는 행위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짐승의 표는 사탄이 세상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역사 속에 다양하게 등장했고, 앞으로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또한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자, 곧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자들은 물건을 사고 팔 수 없습니다. 1세기 소아시아에서는 경제와 종교가 긴밀하게 얽혀 있었으며(행 19:23-27),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에 대해 충성을 표현하고 지역 동업자 조합에 가입하라는 경제적 압력에 직면했습니다(2:9).



계시록에 나오는 표현들 중에는 문자적으로 볼 것인가 상징적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지기에 그것을 잘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를 직역하면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수이며, 즉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기 때문이다’가 됩니다. 666은 짐승의 이름, 이름의 수, 짐승의 수, 사람의 수입니다. 위의 특성을 종합해 보면 666이 ‘어떤 짐승 같은 사람의 이름을 의미하는 수’로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를 볼 때, 666이라는 숫자는 수많은 해석과 추측을 만들어냈습니다. 고대에는 알파벳으로 숫자를 나타냈는데, 이것은 게마트리아라고 합니다. 게마트리아를 사용해 특정 인물의 이름을 666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네로 황제입니다. ‘네로 카이사르’를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표기하고 해당되는 숫자를 전부 더할 경우 666이 됩니다. 그런데 이 방법을 사용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은 666이라는 숫자에 해당하는 이름이 하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시대에 따라 666을 교황이라고 했다가, 바코드라고 했다가, 얼마 전에는 베리칩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몇 년 전 한국에서 온 카톡에 이런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666 짐승표인 베리칩을 받으면 영원한 불지옥으로 갑니다. 앞으로 전 세계에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베리칩을 강제로 받게 할 것이고 통제와 감시체제가 각 나라마다 시작될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의 자식으로 이전되는 것입니다. 끝까지 거부하고 자기 영혼을 지켜 영원한 천국 주님께 갑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베리칩을 받는다고 구원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여부로 판가름 납니다. 물론 베리칩 때문에 본인의 동의 없이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사생활이 정부나 특정 기관에 의해 통제받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을 반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리칩을 받는다고 구원이 취소된다는 주장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이 개인의 믿음 상태에 달려 있다면 그 구원은 얼마나 불안합니까? 앞으로 닥칠 환난 가운데 우리 믿음이 그대로 유지되리라고 누가 보장합니까? 성경은 설령 우리가 약해서 실패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태초에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예정하셨으므로 신실하신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끝까지 우리를 지키시리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목이 칼이 들어와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줄게 하는 상황에서 예수를 부인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혹시 베리칩이 우리의 몸 안에 이식되어 우리를 조종하여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부인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확신 속에 담대하며 서로를 위로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사탄의 파워 구조

계시록 12-13장에는 하나님의 세 대적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바로 ‘크고 붉은 용’과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그리고 ‘땅에서 올라온 다른 짐승’입니다. 대적자들은 전권의 위임이나 수여를 통해서 서로 종속적인 관계를 갖습니다. 먼저 용은 사탄적인 파워의 근원자로서 스스로 전권을 가진 자이며 동시에 첫째 짐승에게 전권을 수여합니다. 그래서 첫째 짐승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속성을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과 거처와 하나님의 권속들을 모독하고, 지상에 있는 성도들을 대적합니다. 용과 첫째 짐승은 사람들의 경배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우상화의 대상입니다. 둘째 짐승은 사람들에게 첫 번째 짐승의 우상을 만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우상을 숭배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경제적인 제재를 가하고 심지어는 그들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사탄의 파워 구조는 하나님의 파워 구조를 흉내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파워 구조를 살펴보면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선지자(사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이 삼각관계의 주체로 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선지자(사도들)의 활동과 사역은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사역이어야만 합니다. 이 관계의 주체인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인 반면 그리스도와 선지자(사도들)은 지상적이며 역사적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권한을 위임받고, 선지자(사도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세워진 자들로서 권한행사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승리자에게 하나님과 그의 도시인 새 예루살렘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을 그 위에 새깁니다(22:4). 반면에 이마에 어린양의 인침을 받지 못한 자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자세

이적에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적 중심의 신앙과 우상 숭배는 우리를 현혹하는 사탄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땅에서 올라온 두 번째 짐승은 어린양같이 두 개의 뿔을 가지고 용처럼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냅니다.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고, 짐승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권세를 주어 이적을 행하게 합니다. 엘리야 시대에 바알 선지자들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지 못했지만, 거짓 선지자들은 하늘에서 불이 땅으로 내려오게 하는 이적을 행할 것입니다. 땅에 거하는 사람들을 현혹해 처음 짐승의 우상을 만들게 하고, 그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말하게 하며 경배하지 않는 자를 죽입니다. 이처럼 사탄은 교묘한 술수로 사람을 속이며 자신이 구원자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리고 만약 복종하지 않으면 핍박합니다. 현세에도 사탄은 여러 모양의 우상을 만들어 인간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기적이 나타났다고 다 하나님의 역사라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꿀과 같은 달콤한 말로 유혹하나 그 끝은 멸망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는 사탄의 행위를 대적해야 합니다. 이적 중심의 신앙을 추구하면 우상 숭배에 빠질 위험이 큽니다. 우상은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 모든 우상이 허망한 존재임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믿고 믿음으로 나타납니다. 돈, 명예, 권세 등 허망한 것들의 결국은 멸망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망하고 신자들은 11장의 두 증인처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사탄의 세력이 허상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이적보다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은 거짓과 이단이 존재합니다. 사탄의 하수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헛된 것을 만들고, 썩을 것을 경배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자칫하면 썩어질 것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용의 권세가 우상에 생기를 넣자 생명 없는 것이 움직이고 말하게 합니다. ‘생명은 없는데 큰 권세를 가지고 우리를 다스리려는’ 존재가 우상이라면, 우리는 이미 우상이 가득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우상들에는 소망이 없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와 천국의 소망을 외쳐야 합니다. 참된 진리는 기이한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있습니다. 기적을 경험할 때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그 본질을 파악하지 않으면, 우리를 미혹하게 하는 사탄의 계략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땅에서 올라온 두 번째 짐승은 사탄의 명령을 따르는 거짓 선지자로서 성도를 꾀어 적그리스도를 경배하게 합니다. 요한은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이 숫자를 깨달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지막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거짓 종교 지도자들을 포함하여)의 도전 앞에 응전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신비한 이적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며,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나가면서

하나님의 파워와 사탄의 파워가 지상에서 만난 사건 그것이 바로 계시록 저자가 보고 겪고 있는 실존입니다. 그 상황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환상으로 이 장면을 보면서 묵시적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와 로마제국과의 갈등과 대립입니다. 즉 요한이 본 실존은 하나님의 지상적 공동체인 교회들과 사탄의 지상적 대리인인 로마제국의 극한 대립을 잘 보여 줍니다. 실례로 도미티안 황제는 자신을 신격화했으며 이를 추진한 황제사제단의 활동은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위협적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신이라고 주장하는 황제를 숭배할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자들은 경제적 차원을 넘어 목숨까지 위태롭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요한 역시 이런 이유 때문에 그가 밧모섬에 유배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1:9). 거짓 선지자도 참 선지자처럼 능력을 행하며 사람들을 미혹하고 억압합니다. 우상숭배를 강요할 뿐 아니라 ‘짐승의 표’를 받게 합니다. ‘이마’나 ‘오른손’에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은 전심으로 짐승에게 충성함을 시사합니다. 계시록 저자가 보고 겪은 실존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 의미를 가지고 다가옵니다. 교회가 교회의 존재 목적을 분명히 알고 나아가지 않으면 잘못된 사상에 영향을 받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는 잘못된 성장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에 빠지고, 물질만능주의엔 빠질 수 있습니다. 계시록은 1세기 상황을 토대로 종말을 의식하며 쓰였기에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귀중한 책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가이사를 신격화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교회가 세상 권력과 결탁해 가짜 어린양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이단이나 거짓 교사, 세속 종교 등을 통해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도가 싸워야 하는 것은 박해뿐이 아니라 어린양으로 위장한 사탄의 유혹과도 싸워야 합니다. 따라서 거짓 복음에 미혹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미혹되지 않도록 진리의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거짓 우상과 거짓 신앙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거짓의 실체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이적에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적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계시록 13장을 보면 사탄의 사주를 받은 악의 세력들이 무서운 기세로 교회를 무너뜨리고 성도들을 죽였습니다. 이들의 도전은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어려움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짐승과 짐승의 세력이 가하는 고통으로부터 교회 공동체가 언제 자유케 되는지 정확한 때에 대하여 함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제공하는 유일한 대답은 마지막에는 성도들이 반드시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4장을 보면 하나님은 용과 두 짐승의 거센 핍박과 미혹 속에서 사투를 벌인 자기 백성을 하나도 잃지 않고 다 지키신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인 승리는 어린양을 믿는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생명의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딤후 4:2). 어떤 상황에서도 십자가의 군병으로서 살아 계신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분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