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짐승의 도전과 교회의 응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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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8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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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계 13:1-10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저서 ‘역사의 연구’에서 ‘문명은 도전에 대한 응전의 산물’이라고 했습니다. 안으로든 밖으로든 어려움을 겪을 때에 사회를 구성한 사람들이 지혜를 발휘하고 응집력을 형성하여 대처해 왔습니다. 그런 결과 응전에 성공한 집단과 문명들이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맞닥뜨린 도전적 과제를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느냐에 따라 존폐여부가 달려 있습니다. 영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악의 세력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악인이 형통한 것을 보면서 공평하지 않다고 불평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성도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습니까? 계시록을 그런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요한은 교회가 직면한 상황을 근거로 교회 공동체를 위협하는 적대적 세력을 언급합니다. 이 내용을 근거로 성도들은 각 시대에 교회를 박해하는 세력이 가진 정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통찰력을 얻게 됩니다. 12-13장에는 하나님의 세 적대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바로 ‘크고 붉은 용’과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그리고 ‘땅에서 올라온 다른 짐승’입니다. 이들은 모두 종말적인 적대자로 서로 다른 모습과 형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12-13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2장은 크고 붉은 용에 관한 내용이고, 13:1-10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즉 첫째 짐승에 관한 내용이고. 13:11-18은 땅에서 올라온 짐승, 즉 둘째 짐승에 관한 내용을 다룹니다. 요한은 이미 하늘에서 패배한 용, 곧 사탄이 땅에서 발악을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언급하면서, 성도들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대항하라고 권면했습니다. 12:17에서 용은 바다 모래 위에 서 있었는데, 13:1에서는 첫째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용이 짐승을 소환하는 듯한 인상입니다. 이는 짐승을 용의 하수인으로 세우기 위한 표현입니다. 요한은 그 짐승이 얼마나 위협적인지를 설명함으로써 교회 공동체가 위험 가운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을 통하여 짐승의 위협과 박해를 극복하는 방법을 알며 지혜롭게 대처하며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1-4절)
용은 여자의 남은 자손과의 최후의 일전을 준비합니다. 이 전투를 위해 바다에서 용을 도울 짐승이 나옵니다. 용과 짐승은 유사하지만, 동일한 존재가 아니며 하는 일도 다릅니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큰 용과 마찬가지로(12:3)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입니다. 그런데 용은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지만(12:3), 짐승은 뿔에 열 왕관이 있습니다. 왕관을 쓴 열 뿔은 열 왕을 상징합니다(17:12). 짐승의 모습을 다니엘 7:2-7과 비교해서 보아야 합니다. 다니엘서에서 열 개의 뿔은 네 짐승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네 번째 짐승의 특징이었습니다. 짐승의 머리가 일곱이라는 것은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짐승의 머리를 모두 합한 숫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다니엘서에 나타난 짐승을 로마제국으로 보았습니다. 요한도 다니엘 7장에 등장하는 종말의 적대적 세력인 짐승의 존재를 언급하면서 그 짐승을 당시 교회 공동체를 박해하는 로마제국으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짐승은 표범처럼 신속하고, 곰의 발처럼 강하고, 사자의 입같이 포학하다고 합니다. 이는 다니엘이 본 환상에 등장하는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제국을 상징하는 짐승들의 특징을 합쳐 놓은 것으로 로마 황제의 폭력적 권세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짐승이 담대하게 신성모독을 하는 것은 용이 그에게 능력과 보좌와 권세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예수님께 권력을 위임하신 것을 풍자(패러디)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의 백성을 박해하는 적그리스도의 세력 뒤에는 사탄이 있다는 것입니다.

3절에서는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때에 내가 작은 뿔이 말하는 큰 목소리로 말미암아 주목하여 보는 사이에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그의 시체가 상한 바 되어 타오르는 불에 던져졌으며”라는 다니엘 7:11의 말씀을 배경으로 합니다. 여기서 요한은 다니엘서와는 달리 죽었다고 묘사하지 않고 ‘죽은 것과 같다’로 바꾸었습니다. 계시록 5:6에서 어린양이 죽임을 당한 것을 소개하며 ‘이미 죽임을 당한 것 같다’고 한 표현과 매우 유사합니다. 이 짐승의 모습은 어린양을 근거해 풍자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풍자는 3하반절에서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았다’고 언급함으로써 계속됩니다. 이는 당시 죽었던 네로가 다시 돌아온다는 소문을 반영합니다. 용에게 능력과 권세를 받은 짐승은 죽은 것 같다가도 다시 살아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흉내 내지만 온전한 부활이 아니라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낫는’수준의 모습으로 통치권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세상 권력을 상징하는 짐승을 경배하고 짐승에게 권력을 부여한 용을 경배하는 것은 세상권력을 신격화 하는 배후에 사탄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한편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는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찬미 구절인 출 15:11의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시 35:10, 113:5)를 모방한 것으로 짐승을 하나님과 비교한 불경스러운 표현입니다. 이제 이 짐승은 인류 전체에게서 숭배를 받기 위해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강한 자인 것처럼 권세를 과시합니다. 모든 사람이 미혹되어 짐승을 경배하는 상황에서 성도들에게 선택이 강요됩니다. 짐승이 성도들의 믿음을 시험하고, 죽음의 위협으로 성도들을 실족시키려 합니다. 세상은 거친 파도처럼, 우는 사자처럼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를 몰아세울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이 땅 위에서는 사탄의 속임이 더욱 교묘해지고 확대됩니다. 그런데 짐승이 성도들의 육체를 해할 수 있으나 성도의 신앙의 절개까지 꺾지는 못합니다. 결국 성도는 순교를 통해 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게 되고 동시에 그리스도와 같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짐승에게 경배하는 자들은 어느 누구도 짐승을 대적할 수 없다고 믿지만, 사실상 짐승에게 권세를 준 용은 12장에서 미가엘, 어린양, 성도들에게 패배했습니다. 용과 짐승은 이미 진 전쟁,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짐승의 박해(5-8절)
사탄의 본성을 그대로 이어받고, 사탄이 좋아하는 일을 행하기 때문에 짐승, 즉 적그리스도는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짐승은 과장되고 신성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았습니다. ‘과장하는 말’이란 교만한 말을 의미하며 ‘신성 모독하는 말’은 하나님을 대놓고 모독하는 말입니다. 1절에서 짐승의 머리들에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다니엘 7:25에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짐승의 행위와 네 번째 짐승이 삼년 반 동안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을 박해하는 행위가 이 구절의 배경입니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고 하나님을 비방하고, 하나님과 하늘에 사는 이들을 비방합니다. 3년 6개월이란 숫자는 완전수를 의미하는 7의 반으로서 이는 하나님에 의해 예정된 제한적 기간을 의미하며 지상에서의 이들의 박해와 위협이 한시적으로 끝나고 말 것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5절에서 ‘받다’가 두 번 사용됩니다. 이 동사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신적 수동형으로 하나님의 신적 행위를 함의합니다. 곧 이 기간 동안 짐승이 용으로부터 권세를 받아 행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활동은 모두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늘에 사는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천사들과 이미 순교한 성도들을 가리키는데, 땅에 거하는 성도들도 종말이 완성되면 하늘에 사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짐승은 땅에 있는 성도들과 싸워 이길 것입니다. 그런데 짐승은 가진 힘을 이용해 일시적으로 성도들을 억누를 수 있지만 궁극적인 승리는 성도들의 몫입니다. 11장에서 짐승이 두 증인, 곧 교회 공동체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일시적인 승리였습니다. 그들이 두 증인을 죽였지만 두 증인은 죽음에서 부활하여 궁극적 승리를 쟁취합니다. 짐승을 이긴 자들은 하늘 유리 바다 옆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15:2). 짐승의 권세가 막강한 만큼 그의 영향력이 세계 곳곳에 미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추종자로 삼을 수 있지만, 그 범위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로 제한됩니다. 모든 능력과 권세의 궁극적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롬 13:1-2). 적그리스도는 강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허용하신 한계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책은 어린양을 믿고 따르는, 구원받은 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에 어린양의 생명책이라 불립니다. 성도들의 이름이 창세부터 기록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하심 가운데 성도들이 확실하게 이기고 구원받을 것을 말합니다. 어린양은 이기는 자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절대 지우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3:5). 우리는 살면서 때로 악인의 형통을 목격합니다. 분명 하나님이 벌주셔야 할 것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승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짐승이 승리를 누릴 시간이 마흔두 달로 한정된 것처럼, 악인의 형통 역시 끝날 때가 옵니다. 그 이후에는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빠르게 사라질 것입니다(시 1:4). 악인들의 형통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어쩌면 지금은 그들이 형통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일 것입니다.

승리의 비결(9-10절)
9-10절은 1-8절의 결론입니다. 권면은 이중적입니다. 어떤 자들은 깨우지만 어떤 자들의 마음은 더 강퍅하게 만들어 권면을 거부하게 합니다. 여기에 인용된 예레미야의 말씀(렘 15:2; 43:11)은 불순종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포로가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빠져나갈 자는 아무도 없는 의미입니다. 물론 계시록 13장의 문맥이 예레미야의 문맥과는 전혀 다릅니다. 계시록 13장에서 짐승이 등장하는 이유는 교회의 불순종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예레미야 말씀을 어떤 관점으로 보았을까요? 요한은 예레미야서에서 남은 자, 곧 의인들의 고난을 보았습니다. 멸망할 이스라엘에 엄연히 존재했던 신실한 남은 자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들도 다른 이들과 함께 고난을 받게 된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바로 이러한 남은 자들이 고난 받았던 상황을 교회 공동체가 짐승으로 인해 고난 받는 것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짐승의 가공할 만한 공격 앞에서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승리를 위한 덕목은 인내와 믿음입니다. 인내는 계시록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계시록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종말론적 환난을 인내하고 이기라는 것입니다. 인내와 믿음은 같이 갑니다. 믿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신실, 성실, 충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박해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믿으며, 죽도록 충성하고 어린양을 끝까지 따릅니다. 물론 믿음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때로 손해 보고, 괴롭고, 피곤합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좁은 길이고, 멍에를 짊어지는 종의 길입니다. 하지만 인내로 믿음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 우리의 자세
말세를 살면서 많은 환난과 박해를 당하는 성도들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계시록에서 용은 사탄을 상징합니다. 용은 직접 나서지 않고 뒤에서 사람들을 미혹하며 조종합니다. 자신의 분신과 같은 짐승, 즉 적그리스도를 불러내어 그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어 세상을 주관하려고 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을 모방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메시아로 믿고 따르게 하려는 술책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많은 면류관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19:12), 짐승도 열 개의 왕관을 가졌습니다. 또한 치명적인 상처로 인해 죽은 것같이 되었다가 상처가 나아 다시 살아난 것처럼 되어 그리스도의 부활을 흉내 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권세를 받으셨듯이, 짐승도 사탄에게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경배를 받으신 것같이, 짐승도 땅에 있는 자들에게서 경배를 받습니다. 짝퉁인 적그리스도는 마치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처럼 이 땅에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속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는 자들도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적그리스도에게 속아 넘어갑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워질수록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사탄의 세력이 허상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잠시 기승을 부리는 사탄의 세력에 놀라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려면 성도는 사탄에게 현혹되어 악한 세력을 추종하지 않도록 영적 분별력을 갖춰야 합니다. 어떻게 분별력을 키웁니까? 위조지폐를 분별하는 훈련을 할 때 세상에 유통되는 위조지폐를 다 모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도리어 진짜 지폐를 오랫동안 그리고 확실히 관찰하도록 합니다. 진짜를 바로 알면 가짜를 잘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단에 관해 아는 것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아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듣고 묵상하고 배워야 합니다. 그럴 때 영적 지혜를 갖게 되고 세상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방심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은 도적과 같이 우리를 미혹할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몸과 마음을 주장하시게 해야 합니다.
- 인내와 믿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짐승은 표범과 곰 그리고 사자와 같은 능력을 갖고 있어서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대적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런 존재들이 성경에 많이 등장합니다. 어느 누구도 애굽의 바로에게 도전하지 못했고, 거인 골리앗 앞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규모와 힘으로 우리를 짓누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압도적인 악의 세력에게 맞서 싸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세가 그랬고, 다윗이 그랬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담대했습니다. 그 담대함은 하나님을 믿는 온전한 믿음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믿음은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게 합니다. 지금은 내가 병에 걸렸지만, 지금은 나의 사업이 힘들지만, 지금은 아직 삶의 뿌리를 내리지 못했지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게 됩니다. 야고보는 말합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2-3) 하나님은 고난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이 한 차원 더 높아지기를 원하십니다. 인내심을 키우기 원합니다. 영적으로 더 성숙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참고 견디는 능력을 가지게 되고, 고난 속에서도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열망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고통은 있었으나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바울도 인내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우리는 고난으로 인하여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양육의 기회로 삼으셔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유익하게 합니다. 교회가 용의 박해를 피해 광야로 나가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그 광야를 성도들의 양육과 성숙의 자리로 바꾸셔서 사탄의 계획을 깨뜨리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우리 영혼을 강권적으로 붙들어 고난의 순간을 뛰어넘어 주님을 향한 순결한 믿음을 가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 우상 숭배를 배격해야 합니다
황제 숭배를 거부한 성도들은 온갖 박해를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이런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인내하며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강변합니다. 로마 황제의 권세가 온 땅을 뒤덮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당시 상황에서 초대교회는 담대히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시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현대에는 정치권력이 이처럼 신성모독을 하고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돈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마 6:24; 눅 16:13) 재물의 위험성을 강력하게 경고하십니다. 우리가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드러나게 합니다. 재물 자체에 인격은 없지만 거기에 사람의 욕심이 개입되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많은 결정을 하게 됩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가지고 싶은 것이 재물입니다. 재물에 마음이 빼앗겨 충성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고 마지막 때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리차드 포스터는 그의 책 ‘money, sex, power'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고 실족시키는 세 가지가 돈, 권력, 권력이라 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신이 될 수 없으며, 신이 아닌 것을 신처럼 섬기는 우상 숭배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단호하게 황제 숭배를 거부했듯이, 우리도 하나님보다 우리의 시간과 정성을 쏟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단호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우상 숭배를 배격하고 재물이든, 시간이든, 달란트든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나가면서
요한이 보고 겪은 실존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의미를 가지고 다가옵니다. 계시록은 종말을 염두에 두고 쓰인 책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사탄의 활동을 파악해서 미혹되지 말고 맞서 싸우며 참된 교회의 의미를 알고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적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는 대표적인 존재가 적그리스도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사탄에게 권세를 받아 강한 힘을 지니고, 하나님을 비방하고 훼방합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모방해서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에 하나님이 허용하신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는 적그리스도의 정체와 능력에 대해 잘 알고 영적 전쟁을 잘 수행해야 합니다. 적그리스도 배후에는 사탄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성도는 온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이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짐승의 통치는 일시적이며 한시적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합니다. 세상의 핍박에 쉽게 좌절하지 않고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오직 인내하며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생명보다 사명을 소중히 여기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우면서 주 안에서 승전가를 부르시고 훗날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상급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