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작은 능력으로도 충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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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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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계 3:7-13


사회 경제적 압박으로 인해 많은 것을 포기한 세대를 가리켜서 N포 세대란 단어가 만들어졌습니다. 2010년 경에 처음 나온 단어가 3포 세대입니다.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란 뜻을 일컬으며, 20~30대에 이르는 젊은 층이 좀처럼 연애를 안 하려 들고, 연애를 하더라도 결혼을 꺼리며, 결혼을 하더라도 출산을 포기하는 사회 현상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후 나온 5포 세대는 추가로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를 포기했고, 7포 세대는 꿈과 희망을 포기했고, 9포 세대는 외모와 건강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하였습니다. 희망을 잃으면 끝입니다. 계시록을 강해하면서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1세기 로마제국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은 정말 힘들었기에 신앙을 포기하려는 유혹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본문에 나온 빌라델비아 교회는 어떠하였습니까? 그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대내외적인 환경도 별로 좋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우리도 때때로 연약한 믿음을 환경 탓으로 돌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통해 우리가 환경만 탓할 수는 없음을 보여 주십니다. 주님이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하신 칭찬과 그들에게 약속하신 복이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대로 행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은 계시록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라고 밝힙니다(1:4). 이는 환난과 박해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위해 역사에 개입하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끝까지 세상의 악과 맞서 믿음으로 싸워야 할 것을 권면하기 위함입니다. 일곱 교회는 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계시록은 주님이 교회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교회를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의심해야 하는 현실을 직면하게 되더라도 우리는 주님이 결코 그의 교회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과 담대함을 가져야 합니다. 동시에 주님이 교회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은 교회로 하여금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큰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일곱 교회를 향한 메시지를 통해 주님이 갖고 계신 교회를 향한 깊은 사랑과 기대를 볼 수 있습니다.

금년도 첫 주일예배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다루었고, 신년특별새벽기도회에서 다섯 교회를 다루었습니다. 정리해봅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한 메시지는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사랑이 점차로 퇴색되고 약속에 대한 강한 의무감만 남아 있는 힘겨운 결혼 생활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진리에 바로 서고 좋은 행위가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교회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바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주님과의 다이내믹한 사랑의 교제 가운데서 주님의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생명나무를 먹게 하신다는 약속은 주님과 회복된 관계에서 누리는 영원하고 풍성한 삶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를 향한 메시지는 ‘어두운 환경에서도 끝까지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핍박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역경을 딛고 하나님을 향하여 든든히 섰습니다. 주님이 인정하시는 교회는 심령의 가난함으로 주님에게 위로를 받고자 합니다. 그들에게는 환난 속에서 끝까지 충성하면 생명의 관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버가모 교회를 향한 메시지는 ‘진리를 타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사랑을 잃어버린 채 진리만을 고집했다면 버가모 교회는 사랑이라는 미명아래 거짓된 가르침을 용인하였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주님은 감춰진 만나와 새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메시지는 ‘거짓된 신비주의를 배척하라’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라는 신앙적 덕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세벨로 대표되는 거짓된 가르침에 미혹되어 거짓된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주님을 따른다면 주님은 그들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데 교회를 향한 메시지는 ‘영적인 생명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함께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듣지 못한 교회입니다. 그들은 명목상의 교회일 뿐 실제로는 죽은 교회와 다를 바 없다고 평가하셨습니다. 사데 교회에 필요한 것은 교회의 사자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다시 영적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만일 사데 교회가 주님께 진정으로 돌아선다면 흰옷을 입게 할 것이고, 생명책에 이름을 기록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메시지는 ‘거짓된 자기만족을 거절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때 스스로를 냉철하게 파악하는 영적 감지 능력이 무뎌집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거짓된 자기만족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풍성하기 때문에 영적으로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헛된 자기만족을 거부하고 정확한 자기 진단을 통해 주님 앞으로 빈손 들고 나아와야 합니다. 그들이 거짓된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동안 주님은 교회 밖으로 밀려나셨습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일곱 교회를 향한 메시지는 교회가 처해 있는 저마다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각 교회를 향한 주님의 기대는 같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27에서 교회를 향한 주님의 기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주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수준, 즉 영적 성숙에 이르기까지 그분은 쉬지 않으실 것입니다. 일곱 교회를 향한 메시지를 살펴보면서 교회를 향해 주님이 가지고 계시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교회를 온전히 세우시려는 주님의 의지를 또한 읽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어두운 절망의 환경으로 있어도 우리는 결국 ‘이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소개(7절)
요한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첫째,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잘 표현한 말입니다. 예수님께 이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그분이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아 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해 구별된 거룩하신 분입니다. 둘째, 주님은 진실하신 분입니다. ‘진실하다’는 말은‘완전하다’란 의미를 가집니다. 완전하신 주님이 교회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실하시다는 표현은 1:5의 충성된 증인이신 예수님을 연상시킵니다. 그분의 증거는 진리며 진실입니다. 더불어 6:10에는 복음을 전하다 순교를 당한 자들이 하나님을 가리켜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라고 칭합니다. 여기에서도 거룩과 진실이 예수님과 하나님에게 동시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시고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로 묘사됩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22:22~23을 배경으로 합니다.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다윗의 열쇠’는 왕으로서 통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힐기야의 아들 엘리야김에게 유다를 맡아 통치하도록 ‘다윗 집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유다 왕국이 멸망의 길을 향해 갈 때 주셨던 소망의 말씀이 현재 박해를 받아 고난 중에 있는 교회를 향해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여닫으신다는 것은 구원의 문을 열고 닫는 모든 주권이 그분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신적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8에 의하면 예수님은 또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다윗의 열쇠가 구원을 위한 열쇠라면 사망과 음부의 열쇠는 심판을 위한 열쇠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구원과 사망의 권세를 쥐고 계신 분입니다.

주님의 칭찬(8-9절)
주님은 ‘보라’라는 단어를 8절에 1번, 9절에 2번 사용하면서 아주 중요한 메시지임을 강조합니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는 말씀은 이사야 45:1과 연결됩니다. “내가 ...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라는 예언은, 이스라엘이 대적들과 비교할 때 연약하지만 고레스를 사용하시는 여호와의 능력으로 인해서 강해질 것을 말한 것입니다. ‘열린 문’은 7절의 ‘다윗의 열쇠’와 관련됩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 열면 닫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8절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결국 빌라델비아 성도들 앞에 둔 ‘열린 문’은 그들에게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에 덧붙여 ‘열린 문’은 빌라델비아 성도들이 처한 사회적 처지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빌라델비아 성도들을 회당에서 쫓아내고 들어올 수 없도록 문을 잠가 버렸지만 예수님은 그들 앞에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어서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를 사용해서 구원의 문이 열린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말씀을 지키며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작은 능력’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능력이 거의 없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빌라델비아 교회는 내세울 것 없는 작은 교회입니다. 교회를 흔드는 주변의 악한 세력을 대처할 만큼의 힘도 없었습니다. 교회는 주변에서 이교적 제사를 드리는 제단들이 많아 영적으로 어두운 지역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보신 것은 능력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신실하게 주님을 믿고 따르는 모습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연약할지라도,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며, 현재의 이 믿음의 모습을 끝까지 간직하며 살아가면서 면류관을 빼앗기지 말라고 격려하십니다. 믿음의 싸움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2:9)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실상은 사탄의 회당인 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2:8에도 자칭 유대인이 사탄의 회당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2:2)이나 ‘니골라당(2:15)과 유사한 무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귀가 거짓의 아비이듯(요 8:44) 사탄의 회당인 자칭 유대인들의 특징은 거짓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계시록에서 거짓말은 특히 심각한 죄입니다. 거짓말하는 자들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하고, 불 못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반면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은 그 입에 거짓말이 없는 자들이라고 합니다(14:5). 주님은 사탄의 회당 곧 거짓 유대인 중 몇 사람을 교회에 보내셔서 교회의 권위에 무릎 꿇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교회가 영혼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능력을 가진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던 영혼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교회의 영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이 일로 인해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10-13)
10절에서 ‘나의 인내의 말씀’하면서 ‘내 말’에 ‘인내’가 더해진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면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씨를 뿌린 농부가 인내로 기다리는 것처럼 말씀의 열매를 보기까지 인내가 요구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의 원리와 반대되며, 우리 자신의 죄성도 거스르기 때문에 인내 없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인내는 고난을 전제합니다. 인내는 계시록에서 성도에게 요구하는 중요한 덕목입니다. 롬 5:3-4에 의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룹니다. 반면에 인내하지 못하는 자들은 세상과 타협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약속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그들을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이를 직역하면 ‘내가 또한 너를 시험의 시간으로부터 지키리니’입니다. 시험의 시간으로부터 지킨다는 표현은 시험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통과하되 이기도록 돕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시험의 시간이란 언제입니까? 이어지는 말씀에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는 설명이 붙습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임할 우주적인 심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빌라델비아 성도들에게 최후의 심판을 면하는 것과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예수님이 속히 오실 것이라는 말씀은 종말론적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내가 갈께 기다려 조금만 참아’주님이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믿음을 굳게 잡아 자기 면류관을 빼앗기지 말라고 격려하십니다. ‘면류관’은 당시 운동경기에서 이긴 자가 받는 ‘화관’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있는 것을 굳게 잡으라’는 말씀을 반복해서 하셨습니다(2:25; 3:11). 빌라델비아 교회가 힘겨운 상황에서도 말씀을 지켰기에 주님도 모든 시험과 고난 중에서 교회를 지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둘째로,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성전의 기둥이란 솔로몬 성전의 두 기둥이었던 야긴과 보아스를 생각나게 합니다. 역사적으로 빌라델비아는 지진 때문에 도시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흩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건물의 기둥이 옮겨지지 않듯이 그들이 옮겨져 성전을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구원의 열쇠를 가진 결정권자인 주님이 그들의 구원을 완전히 보장하리라는 약속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서도 기둥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약속은 회당으로부터 쫓겨나 사회와 경제적으로 고립된 경험이 있는 빌라델비아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들 위에 기록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가리킵니다. 짐승을 따르는 자들이 짐승의 표, 곧 짐승의 이름을 받듯이(13:16-17),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받을 것입니다.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으며(14:1), 새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들의 이마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합니다. 새 예루살렘은 미래에 완성될 교회 공동체를 의미하고 있으므로,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한다는 것은 그들이 앞으로 완성될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될 것이라는 약속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이름도 기록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과 위엄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시는 이러한 약속은 오늘날 말씀에 순종하며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교회들에게 주시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영광스럽고 영원한 그분의 나라를 주신다는 약속은 빌라델비아 교회뿐 아니라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허락된 약속입니다. 끝까지 소망을 잃지 않고 복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의 임재가 온 땅에 충만해 그분의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려질 그날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 우리의 자세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도 세속적 기준을 적용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규모와 교인의 수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은 이 땅의 교회를 바라보실 때 과연 무엇에 관심을 두실까요?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주시는 말씀을 통해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 신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세상이 보는 것과 다릅니다. 세상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세상은 능력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지만, 하나님은 힘이 없고 소외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십니다. 세상이 말하는 능력은 물질적 부요함, 화려한 명예, 강력한 권력이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능력은 세상의 환난을 이기는 영적 능력입니다. 이 영적 능력은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믿음의 여정을 담대히 걸어가는 사람에게서 나타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외적으로 크거나 능력이 있는 교회가 아니었지만 그들은 충성스러운 믿음과 순종을 보여주었습니다. 환난과 박해 속에서도 주님을 사랑했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를 아시고 칭찬하셨습니다. 주님은 ‘얼마나 능력이 있는가’를 보지 않으시고 ‘주어진 능력으로 얼마나 충성되고 신실하게 행하는 가’를 보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께 신실한 사람에게 주님은 그분의 신실하심을 베푸십니다. 온 땅에 닥칠 시험의 때에 그를 지켜 주시고 성전의 기둥 같은 존재로 높여 주십니다.
- 인내해야 합니다
고난은 신실한 사람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당할 시험만을 허락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마련해주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연단을 잘 견디고 인내해야 합니다. 계시록은 여러 번에 걸쳐 이기는 자에게 상급을 약속합니다. 이긴다는 것은 문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계시록의 전반적 메시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시험이나 고난을 겪을 것을 기정사실로 합니다. 계시록 7:14에 나오는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큰 환난을 통과한 자들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예수님이 악의 본체인 세상을 이미 정복했으니 제자들은 환난을 잘 견디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세상에서 미움 받는 제자들을 하나님이 데려가시기를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요 17:15). 주님은 온전한 인내를 이루는 자를 위해 결코 다른 사람이 빼앗아 갈 수 없는 승리를 예비하십니다. 면류관은 오직 믿음의 경주를 인내로 다 마친 자들에게만 주어집니다.
- 믿음의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주님은 작은 능력으로도 주님의 이름과 복음을 지킨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셨습니다. 교회를 향한 주님의 관심은 신자들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주님의 이름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심으로 따르고 있는가입니다. 경건의 모양이 아닌 복음의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며 그 이름을 배반하지 않으려면 입술의 고백으로만 그쳐서는 안 되고 행위의 열매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여 그 모든 일들을 잘 이겨나가면 하나님은 예비하신 상과 칭찬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진실한 신앙을 가지려고 애쓰며 주님 앞에 바른 양심을 가지도록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빌라델비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처럼 책망이 없는 또 하나의 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가 말할 수 없는 주님의 기쁨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처한 환경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지리적으로는 끊임없는 지진으로 인해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영적으로는 수많은 헬라 신전과 수많은 이교 행사가 행해지던 지역에 있었습니다. 척박하고 영적으로 위험한 위치에 있었지만,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이 흔들리지 않는 교회로 하나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환경이 바뀌고, 편안함이 찾아오면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승리하는 신앙의 삶이 반드시 환경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능력으로도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충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든 충성과 순종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면 마지막 날에 주님이 약속하신 상급과 하늘의 기쁨이 부어질 것입니다. 외적 화려함과 강함과 능력을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도 건강한 교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럴 때 빌라델비아 교회가 약속받은 복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순종하는 교회는 하나님께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란 칭찬을 듣게 됩니다. 작은 능력으로도 충성하며 훗날 주님 앞에 칭찬과 상급을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