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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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1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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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계 3:14-22


오늘 아침 통계를 보니 COVID-19으로 인한 확진자가 전세계적으로 6억 6천만 명이고 미국은 1억 명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공식적으로 집계된 숫자이니 실제로 통계에 들어가지 아니한 확진자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입니다. 코비드 팬데믹의 정도나 기간을 볼 때 우리 생애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엄청난 사건이기에 이 시대를 팬데믹 이전과 팬데믹 이후로 나눌 정도입니다.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교회 사역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YouTube 를 통한 예배, zoom을 통한 모임이나 성경공부가 사역에 추가 되었습니다. 물론 역기능도 생겼습니다. 팬데믹을 핑계로 신앙생활이 나태해진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2023년 새해를 맞이하였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분별하고 신앙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해야겠다는 취지에서 요한계시록을 다루려고 합니다. 28년째 팔로마한인교회를 섬기고 있는데 계시록 1장부터 22장까지 차례로 다루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금년 5월에는 부족한 제가 총회장으로 책임을 맡게 되어 있어서 분주한 일정을 소화하면서 심오한 요한계시록을 설교하는 것이 큰 도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께서 이 과정에 어떻게 역사하실 지에 대한 기대감이 있습니다. 교우들의 많은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는 소아시아, 오늘날 터키에 흩어져 있는 일곱 교회에 대한 주님의 진단과 처방과 약속이 언급됩니다. 화요일부터 시작되는 특별새벽기도회에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빌라델비아 교회를 제외한 다섯 교회를 살펴볼 예정입니다. 예수님은 각 교회의 사정을 잘 아시기에 각 교회를 진단하시고 그에 따라 칭찬을 하시거나 책망을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되도록 각 교회마다 처방을 주시고 놀라운 약속까지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2000년 전에 주신 것이지만 살아있는 말씀인지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귀한 교훈과 도전이 됩니다. 성경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과 더불어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의 본성은 별로 달라지지 않음을 또한 느끼게 됩니다. 에베소,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교회는 칭찬과 꾸중이 함께 있고, 서머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만 있고 본문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꾸중만 있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라오디게아 교회는 도대체 어떤 교회였기에 자비하시고 격려하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한 마디도 듣지 못하였을까요? 주님의 진단과 그에 따른 처방은 어떠한지 살펴보고 적용하면서 신년도에는 우리 교회가 열정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어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주님의 칭찬과 약속하신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 브루기아 지방에 위치한 도시로 에베소에서 수리아에 이르는 대로변에 위치하여 교통 및 통상의 요충지였으며, 목화 재배와 금융업, 의학이 발달하였고, 목축이 잘 되어 질 좋은 양모를 생산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도시가 아주 부유하였고 시민들은 이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또한 그곳에서는 안질을 치료하는 훌륭한 안약이 생산되었습니다. 골로새서 4:13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바울의 동역자인 에바브라가 목회했던 곳입니다.

주님의 소개(14절)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하여 주님은 자신을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아멘’이라는 히브리어의 뜻은 ‘확실하고 참되다’입니다. 이 표현을 이해하려면 이사야 65:16을 참조해야 합니다.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 앞에 숨겨졌음이라”‘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아멘의 하나님으로 복을 빌며’입니다.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를 직역하면 ‘아멘 하나님으로 맹세할 것이라’입니다. 즉 복을 구하는 자들은 ‘아멘 하나님’께 복을 구하고, 맹세를 하는 자들도 ‘아멘 하나님’께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번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절을 보면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사 65:17-18)고 합니다. ‘아멘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을 ‘아멘’으로 묘사를 한 것은 새 하늘과 새 땅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창조의 근본이신 이”에서 ‘근본’으로 번역된 단어는 모든 일의 ‘기초’를 가리킵니다. 상징적으로는 ‘최종적인 권위’, ‘궁극적 권세’를 뜻합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 그가 없이는 창조된 것이 없다는 요한복음 1장의 증거와 맥을 같이 합니다(요 1:1-3). 요한은 예수님만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진리와 옳음의 잣대로 평가하실 수 있는 분임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주님의 진단(15-17절)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행위를 잘 아시고 그들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십니다. 첫 번째 진단은 그들이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않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라오디게아는 히에라볼리와 골로새라는 두 도시와 이웃하고 있었습니다. 히에라볼리는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주는 뜨거운 물이 골로새에는 차고 시원한 물이 있었습니다. 더운 물은 더운물의 기능이 있고 찬물은 찬물의 기능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의 물은 수질도 좋지 않고 미지근해서 참으로 역겨웠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가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이 말씀은 양자택일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로 있는 그들의 소극적인 자세를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를 직역하면 ‘내가 내입으로부터 너를 토해 버리기 직전이다’가 됩니다. 미지근함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의 삶이 주변 불신자들의 삶과 구별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두 번째 진단은 그들이 거짓된 자기만족에 빠졌다는 점입니다. 거짓된 자기만족은 올바르지 못한 자기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부자라 부요하여’라는 표현은 완료시제입니다. ‘나는 부자인데 나를 부요하게 만든 것은 나다’라는 뜻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부자가 되어 스스로 만족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와 관련된 구절이 호세아 12:8입니다.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이스라엘은 불의한 이익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수고로 얻은 재물이라고 당당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호세아서의 문맥에서 이스라엘이 큰 부자가 된 것은 우상숭배를 용납한 결과입니다. 1세기에 로마 제국에서도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면서 부자가 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황제 숭배나 우상 숭배를 하지 않고 장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박해가 없는 안전과 종교적인 허울 속에서 라오디게아교인들은 영적으로 해이해졌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잘 몰랐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풍성하니까 영적으로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실 때에 그들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 아니면 안 된다는 가난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죄를 지었다는 애통함도 없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말세에 배교하는 교회의 표상이 됩니다.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둘 중의 하나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마 6:24).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타협하는 미지근한 신앙생활은 사실상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로 자랑하려고 하고, 영적인 안일함과 타성에 젖어 편안하게 신앙생활 하려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나는 오래 믿었다고, 직분을 가지고 있다고, 왕년에 일을 많이 했다고, 성경지식이 많다고 하면서 자기의 존재를 과시할 뿐 지금은 열심 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열심 내는 것조차 싫어합니다. 신앙의 진보가 없이 미지근하게 신앙생활 하는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주님을 열 받게 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뜨거운 열정으로 섬기기를 기뻐하십니다.

주님의 처방(18-20절)
자비하신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회복의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주님이 먼저 “내게서 사라”고 말씀하십니다. 헛된 곳에서 헛된 것을 사지 말고 ‘주님에게서’사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렇다고 주님께 돈을 지불하고 사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55:1을 보면,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구하면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제대로 믿을 때 얻을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주님께 무엇을 구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권면이 명령형으로 주어집니다. 먼저 그들에게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십니다. 왜 금을 사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성경에서 ‘연단한 금’은 죄를 회개하고 자신의 삶을 정결하게 하는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욥이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 고백을 하였습니다. 말라기 3:3에 의하면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주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하셔서 불로 금이나 은 같이 연단하시는 이유는 그들을 깨끗케 하여 그들로 하여금 의로운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전서 1:7에 의하면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고난을 이기는 연단된 믿음, 순전한 믿음을 소유하라고 하십니다.

둘째로 ‘흰 옷을 사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더러운 옷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벌거벗은 것입니다.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려면 옷이 필요합니다. 라오디게아에서 생산되는 고급 의류로도 그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릴 수 없다고 하십니다. 구약성경에서 ‘벌거벗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고발하며 심판을 선언하시는 문맥에서 종종 나타납니다. 주님은 교회를 향해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상실했던 하나님 백성의 참된 모습을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으로 구원받은 것을 확신하고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야 합니다. 셋째로, ‘안약을 사라’고 명령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것은 라오디게아에서 생산되는 안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습니다. ‘눈에 발라 보게 하라’는 것은 영적인 눈을 밝히 떠서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직시하고 바르게 신앙생활하기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빛이신 주님 앞에 설 때 영적 분별력이 생기고 자신이 얼마나 헐벗고 가난하고 비참한지 보게 됩니다.

칭찬은 없고 책망만 받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예수님께서 미워하실까요? 아닙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만약 그들을 버리기로 작정하셨다면 굳이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자를 책망하고 징계하십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나 다름없다고 합니다(히 12:8). 회개란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랑하지 못한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고 애통하는 가운데 주님만을 바라며 사랑하겠다는 마음의 결단을 가리킵니다. ‘열심을 내라’는 말은 세상의 것으로 채우기 위한 열심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려는 열심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회복할 수 있는 길은 헛된 자기만족을 거절하고 정확한 자기 진단을 통하여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충격적인 사실은 그들이 거짓된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동안에 주님이 교회 문밖으로 밀려나 있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는 모습을 그린 윌리엄 헌트의 그림 ‘The Light of the World’(세상의 빛)는 이 구절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 그림에는 문의 바깥쪽에 문고리가 없습니다. 초청을 받은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주님은 문을 여는 자들과 함께 먹겠다고 하십니다. ‘먹다’는 ‘풍성한 잔치를 즐기다’라는 뜻으로 주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강조합니다. 현재 성도가 누리는 주님과의 친교는 장차 임할 영원한 천국의 즐거움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이 구절은 불신자를 전도하거나 초대하기 위한 말씀이라기보다 주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회복하자고 초청하는 메시지입니다.

주님의 약속(21-22절)
주의 말씀을 듣고 믿고 마음으로 주를 영접하는 자의 심령에 성령이 거하시며 그는 주님과 동행할 것이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주와 함께 영원히 함께 거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 승리하심으로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으신 것같이 승리한 성도를 그 영광의 보좌에 앉혀 주시겠다는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할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20:4-6). 죄인인 우리를 영광의 보좌에 함께 앉히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 약속은 라오디게아교인들이 이 땅에서 추구했던 부요함과는 차원이 다른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확실한 것은 주님이 이미 승리하셨고 지금도 온 세상을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귀 있는 자는 누구나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영적인 침체를 염려합니다. 지금은 신앙의 열정이 사라진 시대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도 문을 열라고 함께 교제하자고 초청하십니다. 아직도 기회가 있습니다. 그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의 자세
일곱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권면은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교회를 향한 주님의 기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7). 주님은 자신이 피로 사신 교회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수준까지 자라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필요하면 매를 들어 성도를 징계하시더라도 주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열정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주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주님에게 교회는 피로 값을 지불하고 살 정도의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교회를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고 교회에 메시지를 보내셔서 주님이 갖고 계신 교회를 향한 깊은 사랑과 기대를 보여 주십니다. 주님은 예리한 눈으로 각 교회를 보시고 진단하시고 처방하시고 약속을 주십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거짓된 자기만족에 빠져 영적으로 가난한 상태에 있었음을 알지 못했기에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 즉 진리의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때로 칭찬하고 때로는 책망하고, 때로는 격려하고 때로는 진노하며, 때로는 쓰다듬으면서 교회를 온전히 세우시려는 주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주님은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교회를 책망하고 징계하십니다. 열심을 잃은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인내로 기다려 주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문밖에 서서 미지근한 성도의 심령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다시 열정을 가지고 신앙생활하기를 기대하십니다.
-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외부적으로 편안한 환경이 라오디게아 교회로 하여금 거짓된 만족감을 갖게 했습니다. 외적인 상황이 긍정적이고 순조롭다고 해서 영적으로 더 성숙해지거나 온전해지지는 않습니다. 역경 앞에서는 곧잘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성찰하지만, 모든 상황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때 스스로를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파악하는 영적 감지 능력은 무뎌지기 시작합니다. 급기야는 하나님이 편한 환경을 주신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는 증표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날마다 주님과의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회개야말로 잃어버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결정적인 방법입니다. 우리 모두는 회복된 사랑의 교제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시선을 의식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굳게 붙잡으면서 천국의 비밀을 가진 성도로서 항상 주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각자를 돌아보아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며 신앙생활하려는 유혹 등이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실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도록 애써야 합니다.
- 우리의 사명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엄청난 기대 가운데 있지만, 여전히 문제투성이의 모습으로 세상에 서 있습니다.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에 의해 영향을 받아 세상을 닮아 가고 있습니다. 교회를 향한 주님의 관심은 외적인 규모나 화려함이 아닌 복음의 능력입니다. 교회를 향한 주님의 관심은 신자들이 주님의 이름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심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곱 교회에 주신 약속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의 직분을 기대하며 맡기신 일에 충성하기 원합니다. 죄인인 우리를 용납하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이웃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보다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새로워질 것입니다.

나가면서
주님은 자신이 피로 사신 교회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수준까지 성장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그분은 쉬지 않으실 것입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분은 지상의 불완전한 교회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필요하면 매를 들어서라도 이 위대한 프로젝트를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를 살펴보면서 교회를 향해 주님이 가지고 계시는 이러한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물질적 풍요와 안일한 삶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영적 장애물입니다. 세속적 부요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둔해지고 미지근해지지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교회를 보신다면 어떤 평가를 내리실까요? 칭찬을 받을까요? 책망을 받을까요? 주님의 진단, 주님의 처방, 주님의 약속에 비추어 우리의 영적인 실상을 파악해야 합니다. 세상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과 은혜 때문에 만족하고 벅찬 가슴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생명의 복음으로 인해 심장이 뛰고,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회복하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승리하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을 우리의 삶의 원천으로 인정할 때만 지속적인 열정과 능력을 공급받게 됩니다. 말씀에 대한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새해에 말씀을 통한 주님과의 교제를 돕고자 그룹 성경공부로 일대일 양육으로 혹은 말씀을 배우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섬김에 대한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나눔에 대한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문제가 있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금년 한해 영원한 복음을 붙들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 사랑이 넘쳐 이웃을 품고 사랑하며 주님의 복음을 전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거두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