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하나님 나라와 비유들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4-18 15:51
Views
491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1:1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사역에 따라 다시 여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6부터 4:34까지 가르치시는 선생으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이 많이 부갑됩니다. 물론 능력 있는 선생님이시니까 가르치실 뿐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죄를 사하십니다. 다음 주부터 다루게 될 텐데 4:35부터 6:29까지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시는 선지자로서의 예수님이 그려집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1:15에서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벌써 ... 그러나 아직 아님’(already .. but not yet)으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도 성장하고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면서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 믿지 않는 자에게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과 같다’라는 형식을 취하시면서 비유들이 하나님 나라의 관련이 되어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성도는 이 땅에 살지만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하나님 통치의 실현이 악인에 대한 심판과 의인에 대한 구원으로 나타날 것이고, 이러한 심판과 구원은 누구나 알 수 있게 공개적으로 일어나는 우주적인 사건일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과 함께 임한 하나님 나라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싹을 내며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의 기대와 다르다 보니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땅 위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놀라운 생명력으로 오늘도 자라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의식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서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알고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의 자세를 깨달아 하나님 나라 일꾼으로 온전히 쓰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등불 비유(21-23절)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집 밖 밭에서 볼 수 있는 농경 사회의 일상생활을 이미지화하고 있다면, ‘등불 비유’는 농경 사회의 집 안 이미지들, 즉 ‘등불, 말, 등경, 평상’등을 보여 줍니다. ‘말’은 곡식을 측정하는 그릇으로 열 되가 들어가게 나무나 쇠붙이를 이용하여 원통 모양으로 만든 것입니다. ‘평상’은 침상을 뜻합니다. 그리고 ‘등경’은 등잔걸이를 말합니다. 그 누구도 등불을 가져다가 말 아래에 두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둘 것입니다. 왜냐하면 등불을 가져온 목적은 빛을 비추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등불’은 ‘말씀’에 대한 은유적 표현입니다. 여기선 예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넓게 보면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를 깨닫지 못하고 거부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나라의 드러남과 감추어짐이 공존합니다. 그러나 ‘숨겨둔 것은 드러나게 되고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드러날 때가 올 것입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이요 종국적으로는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이 같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잘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귀는 영적인 귀를 비유합니다. 들을 귀를 가진 자들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게 되지만 들을 귀가 없는 자들에게는 이 비유가 하나님의 진리를 감추는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들을 ‘귀’가 있고 없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며 믿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언급됩니다. 


 


말씀 듣는 자세(24-25절)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하나님께 헤아림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헤아리다’는 ‘측량하다, 판단하다’라는 뜻입니다. ‘헤아림’으로 번역된 헬라어 ‘메트론’에서 길이의 단위인 ‘미터’가 나왔습니다. 마 7:2에서는 ‘헤아림’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한 스스로를 헤아리며 자랑하는 이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말하는 고후 10:12는 ‘헤아림’이 ‘자기 자랑’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자기 의에 빠져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어리석음을 암시합니다. 그들은 율법과 종교적 계율의 잣대로 예수님을 정죄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했습니다. 반대로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구원하시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으면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을 풍성히 받지만, 그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가진 것마저 사탄에게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례를 우리는 한 달란트를 받은 게으른 종에게 주인이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라고 선포한 말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곡식을 담으려고 할 때 그릇의 크기에 따라 담을 수 있는 곡식의 양이 달라집니다. 큰 그릇을 준비해야 많은 양을 담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내 마음에 어떻게 담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믿음의 큰 그릇을 준비하고 말씀을 받아들이면 잘 이해하게 되고 점점 더 많은 비밀을 알게 되는 반면, 잘 받아들이지 않으면 점점 더 모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결국 말씀을 잘 경청해 듣고 깨달으라는 촉구입니다. ‘더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상이 세상적인 기준을 뛰어넘어 은혜의 원리로 주어질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받는 우리의 태도가 영원한 운명을 결정합니다.   


 


스스로 자라는 씨 비유(26-29절) 


‘스스로 자라는 씨 비유’는 마가복음에만 나타납니다. 농부가 씨를 뿌려 놓고 한 일은 밤낮 자고 깨고 한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농부의 게으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갔다는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농부는 씨를 뿌려 놓고 열매가 맺힐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한 조건인, 적당한 때에 비가 오고 해가 비치는 것은 농부의 소관이 아니라,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이렇듯이 하나님 나라의 진행도 인간의 능력과 지혜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농부라면 심은 것이 잘 자라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씨가 자라고 열매를 맺는 과정에서 씨가 자생력을 가지고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씨 뿌린 사람의 행위를 최소한만 묘사합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씨를 뿌리는 사람을 그저 ‘사람’으로만 부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씨 자체가 성장하는 특성을 가질 수 있도록 기능을 부여한 사람은 농부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28-29절에서 땅이 씨를 받은 후 열매를 맺는 과정을 차례대로 묘사합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이 비유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씨앗의 생명력과 그 활동의 현재성입니다. 이미 약동하고 있는 그 놀라운 생명력은 결실의 때에 이르기까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땅 위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그와 같은 생명력으로 스스로 자랍니다. 처음에는 미미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싹이 나고 이삭이 나올 것이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리고 적절한 시기에 반드시 추수의 때가 올 것인데, 이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겨자씨 비유(30-32절)  


‘겨자씨 비유’는 세상의 모든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인 겨자씨 한 알이 땅에 뿌려진 후 자랐는데, 땅의 모든 풀보다 더 커졌다는 내용입니다. 식물학적 견지에서 보면 겨자는 기껏해야 높이 1-2미터 정도밖에 자랄 수 없는 풀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겨자는 자라서 큰 가지를 내어 공중의 모든 새들이 그 가지의 그늘에 깃들여 쉴 수 있을 만큼 된다고 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씨 자체가 아니라, 씨가 뿌려졌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 과장이 담긴 이 비유에 나오는 표현은 1세기 유대인들의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겨자씨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은 아닙니다. 난초 씨와 같은 것이 겨자씨보다 더 작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실 때 사용하신 소재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이스라엘에서 보기 힘든 난초 씨보다는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겨자씨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로 사역하시던 갈릴리 지역 사람들은 2월이 되면 갈릴리 호수 주변에 잡초처럼 피는 겨자 풀을 너무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겨자 풀은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한 주류 사회에서 밀려나 ‘이방의 갈릴리’라고 멸시받으면서 잡초처럼 눌려 있던 갈릴리 사람들의 상황을 대변해 줍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겨자씨를 자신의 땅에 심어 새들이 깃드는 큰 나무로 자라게 하겠다고 하셨을 때 그들은 큰 위로와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겨자씨는 예수님의 말씀 혹은 넓게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처음엔 미미한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이 무시하는 나사렛 출신이셨습니다(요 1:46). 제자들도 세상적으로 볼 때 그렇게 내세울 것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겨자씨처럼 작은 이들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크게 성장한다는 표현은 구약에서 여러 번 등장합니다(시 104:12; 겔 17:22-24; 31:6; 단 4:2-21). 이 말씀들은 공통적으로 한 왕 혹은 한 제국이 커져서 큰 나라를 이루고, 주변 나라들이 그 아래 속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전개해 가시는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설명합니다. 제국의 수도 로마가 아닌 이스라엘의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은 세상적인 안목으로 보았을 때 눈에 띄지 않는 미미한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로마에까지 퍼져 나갔고, 마침내 온 제국과 그 주변 나라들이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 하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천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온 세계 모든 민족이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 아래 들어오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시작과 끝이 너무나도 다른 겨자씨처럼 하나님 나라는 그 시작과 끝이 서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연한 대조를 이룰 것입니다.


 


비유의 결론(33-34절)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여기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무리입니다. “이러한 많은 비유”라고 표현한 것은 4장에 언급된 비유 외에도 다른 많은 비유를 들려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비유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해의 부족은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신으로 이어집니다. 제자들 역시 처음에는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외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따로 있을 때 설명해 주심으로써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 실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는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실 때 비유의 방식만으로 가르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선포(1:15)나 훈계를 통해서도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형식이 비유이든 그렇지 않든 근본적으로 ‘비유’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은 열린 마음으로 듣는 사람에게는 이해될 수 있고, 또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가 되지 않기에, 그들은 거부하고 배척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도 비유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을 보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고 있음을 깨닫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는 자들도 생기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영적으로 보지 못하고 과학적으로, 경험적으로, 교리적으로 대할 때,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합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나라에서 누리는 복이 무엇인지, 그 나라에 속하지 않은 자는 어떠한 고통 가운데 있게 되는지 그 나라에 속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성경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르게 이해하고 붙들기 위해서는 성경을 계속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 영안이 밝아져야 합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급속하게 외향적 가치 중심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외모나 외적 가치에 지나치게 집착합니다. 그 가운데서 작고 사소한 것은 가려지고 무시당하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이런 함정에 빠지는 사람은 십자가의 주님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하던 작은 것 속에 깃들인 진정한 위대함을 예수님은 드러내셨습니다.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드리고서도 부자들의 큰 헌금에 가려서 그 순결하고 고귀한 믿음이 철저히 무시되고 있던 한 과부 여인을 주목하시고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12:43).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진정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은 외면적 ‘큼’이나 성장 또는 성공의 신화를 과감히 벗어나서 진정한 ‘위대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3장에 의하면 성전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 앞을 수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지나갔습니다. 아무도 그를 거지 이상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오직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주목하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일으켰습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영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작은 씨앗 속에 들어 있는 생명력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하나님나라의 실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9:7)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말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그의 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들을 귀를 가지려면 우리의 심령이 맑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적인 것은 끊임없이 비워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의 기름부음 속에 우리의 영안이 밝아집니다.


- 주님을 믿음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앞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는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 등 씨가 어디에 뿌려졌느냐에 따라 열매를 맺느냐 맺지 못하느냐가 결정됐습니다. 즉, 말씀을 듣고 이에 바르게 반응하는 사람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란 인간의 노력과 행동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짐을 가르쳐 줍니다. 사도행전은 말씀 자체의 생명력으로 인해 비록 교회에 박해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말씀이 오히려 흥왕했음을 전해 줍니다. 헤롯 아그립바가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지만, 하나님은 헤롯 아그립바를 응징하셨습니다. 누가는 이 사건을 보도한 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행 12:24). 말씀의 자생력은 역사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1949년 10월 1일 중국 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중국 내에는 기독교가 더 이상 발붙일 수 없었습니다. 선교사는 다 추방됐습니다. 외부에선 중국 교회가 사라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가정 교회를 포함해 중국 교인 수는 일억 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대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열심히 전도를 해도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습니다. 이런 때에도 조급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 위해서는 노력과 수고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이 일이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에도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는 그분을 믿음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땅에 뿌려진 씨는 농부가 알지 못하는 시간에도 자라고 성장하듯이, 하나님 나라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라고 확장되어 갑니다. 농부가 뿌린 씨앗을 하나님이 자라게 하듯이 하나님 나라도 하나님이 친히 자라게 하시고 확장시켜 가십니다. 복음의 일꾼들이 말씀의 씨를 뿌리고 가꾸지만 결국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하나님이 지금도 그 나라를 성장시키고 확장시키십니다. 교회생활을 오래했는데 왜 빛이신 예수님을 삶에서 잘 보여주지 못합니까? 등불을 가져다가 그릇 아래 두거나 침대 밑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등잔대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위를 비출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예수님을 믿는 성도임을 말과 삶으로 보여주라는 말입니다. 등불이신 예수님을 내 삶의 등잔대 위에, 즉 내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우리가 아무리 보잘것없이 보여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길 원하십니다. 우리를 스스로 제한하지 말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을 꿈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일꾼임을 확신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력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데 열심을 내야 합니다.   


 


나가면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은밀함과 놀라운 결실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처음에는 미약해 보이나 점점 확대되어 결국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됩니다. 점점 성장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종말의 때에 하나님은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최후의 심판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특징을 말씀하셨습니다. ‘등불 비유’의 메시지는 말씀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는 지금 비록 초라해 보이지만 결국 그 영광을 밝히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더욱 풍성히 받아 누리게 됩니다.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는 말씀에 생명력이 있어서 말씀을 들은 자들을 통해 점점 더 풍성한 하나님 나라를 이뤄 간다는 것입니다. ‘겨자씨 비유’는 우리가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그날의 영광을 사모하며 사명에 충실한 삶을 살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온전하고 충분하게 알아 가야 합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어둠 가운데 있는 세상에 진리의 빛을 비추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의 빛을 세상에 전파해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복음이 비추어지는 곳마다 흑암의 권세가 무너질 것입니다. 차별과 억압, 미움과 다툼이 사라질 것입니다. 고통과 눈물 대신 기쁨과 웃음이 가득할 것입니다. 지난 이천년 동안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잃어버린 영혼의 구원을 위해 이름 없이 빛도 없이‘한 평생’을 바친 성도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주님과 동행하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자랑하며 선포하며 복음의 증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