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다른 이름은 없나니 (행 4:1-12)

Author
Myung Myung
Date
2006-07-16 17:38
Views
6785
행 4:1-12  다른 이름은 없나니 (No Other Name)



17일 월요일에는 저희 교회 부지가 소속된 Rancho Carrillo homeowner's association에서 board meeting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팔로마한인교회 교회당 건축 문제를 다룹니다. 저희 교회를 위하여 공청회 모든 서류를 준비하는 Hofman Planning 회사에서 이번 board meeting에 승인허가를 요청할 예정입니다. 그들의 승인만 받으면 Carlsbad 시청에서 별 문제없이 공사허가를 얻게 될 것입니다. 온 교우들의 기도를 부탁드리고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함께 참여하기를 부탁드립니다.



본문에 보니 또 다른 공청회가 열립니다.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고소한 후 공회에서 그들을 심문합니다. 사도행전 4장은 3장의 연속입니다.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베드로를 통하여 고침을 받아 걷고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꿈에 그리던 성전에 들어갑니다. 그를 본 사람들은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던 거지 인줄 알고 깜짝 놀랍니다. 앉은뱅이 거지가 깨끗이 나았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놀라면서 솔로몬 행각에 모여듭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로 작정한 베드로인지라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하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재림을 언급합니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메시야가 고난을 당하신 것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이요 그 예언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모든 것이 회복되는 날이 임할 것이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중에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순절 때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이 열리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몇 달 전만해도 종교지도자들에게 붙잡힐까봐 두려워하고 사람들을 피하던 겁쟁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기도에 힘쓰다가 성령 충만을 받았을 때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보냄을 받은 자’들이라는 의미의 ‘사도’라고 불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모습을 보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활하신 주님을 담대하게 증거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체포가 됩니다. 이제 사도행전 4장부터 시작하여 매장마다 교회 안과 밖에서 계속해서 문제들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성령 충만한 사도들의 지혜와 용기가 어우러져 예루살렘 교회는 그 믿는 자의 수가 계속 늘어납니다. 복음이 증인들의 사역을 통하여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전파되어지는지 살펴보면서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들이 성령 충만을 받고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줌으로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크게 쓰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도 사단의 방해가 있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별로 좋지 않은 속담이 있는데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때 가장 배 아파하는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사단 즉 마귀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려고 오셨을 때 마귀는 예수를 따라 다니며 그의 사역을 방해했습니다. 최후의 방법으로 사용한 것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죽임으로 마귀는 자기가 승리한 줄 알았으나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마귀는 처절하게 패배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런데 성령 세례를 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는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기사와 이적이 일어나며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가니 사단은 다시 배가 아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자기 사람들을 만들어 교회를 핍박합니다. 소위 종교지도자들인 제사장들, 성전 맡은 자들, 사두개인들. 누가 마귀의 하수인이 됩니까? 어떤 특정한 부류의 사람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말씀을 하시자 주여 그리 마옵소서 하며 만류했다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물론 베드로 자신이 마귀가 아닙니다. 자기 딴에는 예수님을 위한다고 한 행동이 결과적으로는 마귀가 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언제라도 마귀에게 휘둘릴 가능성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통과 자신의 경험에만 집착할 때 성령의 역사를 보지 못합니다.

자 한 가지 묻겠습니다.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오늘 솔로몬 행각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복음을 전함으로 몇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까? 본문에 보니 오천 명이었다가 아니라 오천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NIV: The number of men grew to about five thousand. 오천 명으로 불어났다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이날 설교하기 전까지 사도행전을 보면 몇 명의 결신자가 있었습니까? 120 + 3000 + 날마다 그 수가 더함. 베드로의 세 번째 설교를 듣고 그날에 2000 명 가까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모인 무리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행한 기적을 보고 말씀 선포를 들으면서 회개하여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보통 백성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열려 예수를 영접하는데,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것을 보고 같은 말씀을 듣고도 종교 지도자들은 왜 백성들처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지 못합니까? 사실 종교지도자들의 반응은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와 다름이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이적을 보고도 여전히 믿지 않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기적의 의미를 애써 부인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이적이 반드시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지는 않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두개인들은 전통과 교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역사가 시작하게 되면 자기들이 그동안 기득권을 잃게 될까 두려워했습니다. 영적인 교만으로 가득 찼기에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그 당시 이스라엘에 존재했던 몇 개 파벌 중의 하나. 그들은 구약 성경 중에서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였고 바리새인들과 달리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현세주의자들로서 로마제국 관리들과 결탁하여 많은 부와 권력을 누렸습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에서 가장 재벌 그룹은 대제사장 가문이었습니다. 성전에서만 사용되는 돈을 바꾸어 주는 과정에서 그들은 막대한 돈을 긁어모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제사 제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한 치부 수단일 뿐입니다. 그들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이요 영적인 귀머거리들입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방법을 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여 우리로 보게 하옵소서. 눈을 열어서 전에 보지 못하던 것 보게 하시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 보게 하옵소서. 성령의 역사에 민감한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이 시대의 흐름을 바로 보아 알 수 있는 안목을 주시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두개인들은 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은 갈릴리 어부 출신들이 큰 무리 앞에서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니 시기와 질투가 생겼습니다. 부활 같은 없다고 주장해왔는데 로마의 정치범으로 처형당한 예수를 하나님이 부활시켰다고 하니 아주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지키는 자들로 하여금 베드로와 요한을 그 저녁에 붙잡아 아침까지 가두게 하였습니다. 요즈음으로 친다면 아마 ‘허위 사실 유포’ 혹은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이란 명목으로 그들을 잡았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갇힌 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첫 번째 박해 행위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들의 행동에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1) 성령은 담대하게 합니다.

어린 계집종의 말을 듣고도 겁이 나서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던 베드로였으나 성령의 부음 받은 후에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사도들은 밤사이 감옥에 있던 베드로와 요한이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재수 없게 잡혔다고 불평과 원망을 털어놓을까요? 주님의 일을 하다가 이게 웬일이냐고 신세타령할까요? 그들은 아마 주님을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을 기쁘게 여겼을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혀서도 실라와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처럼 베드로와 요한은 비록 감옥에 갇혀있었지만 낙심하기는커녕 자기들의 전도를 통하여 예수를 믿는 자들이 늘어나는 것을 인하여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감옥에 갇힌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사도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사람들의 마음이 열려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이튿날 공회에 끌고 갑니다. 공회에 누가 있습니까? 관원, 서기관, 장로, 이스라엘의 유력한 지도자, 권력자들이 다 모였습니다. 대제사장들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안나스,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 가야바만 안나스의 사위이고 나머지는 다 안나스의 아들들로서 이들은 대물림을 하면서 대제사장 직을 독점하였습니다. 모인 사람들의 위세에 눌릴 만합니다. 이들이 바로 몇 달 전에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빌라도에 넘겨 죽게 한 장본인들입니다. 공회원들이 사도들을 가운데 세워놓고 심문합니다. “너희가 뉘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 능력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묻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역이용하십니다. 공회원들이 던지는 질문은 베드로로 하여금 다시 한번 복음을 전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베드로는 공회원들의 위압적인 분위기에 전혀 눌리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구원에 대하여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심문하기 위하여 모여든 그들이 도리어 피고석에 있는 죄인들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경우를 위해 능력과 담대함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눅 21:12-19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려가려니와 이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과연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도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우리가 오늘 심문을 받는 것이,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과 또 그가 누구의 힘으로 낫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라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너희 앞에 서게 된 것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이라.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33번 사용합니다. 기적을 일으킨 능력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예수님은 유대 당국자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지만,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셔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신 분이라. 그러면서 결론을 말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no other name: 베드로는 확신에 차서 주님이 메시야이시며 유일하신 구원자임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가진 어떤 조건 때문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자랑할 것이 많은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고전 1:27,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 것 없는 갈릴리 촌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베드로가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 충만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를 낮추어야 합니다. 나를 비울 때 하나님의 능력이 그 가운데 채워집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상황을 이기게 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2) 성령은 사역에 헌신하게 합니다.

성령 충만한 초대 교인들의 특징: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도들은 전도에 힘을 썼습니다. 사도들은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 것인가 하는 생각만 하였습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알라.” 베드로의 관심에 솔로몬 행각에 모인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다 구원 받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양으로 목자를 잃어버린 양같이 취급하며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구원받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놓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성령의 부음을 받은 증거입니다. 성령을 받은 또다른 증거가 기쁨입니다. 표정이 밝아집니다. 공회에 끌려온 스데반의 얼굴을 주목하여 보니 천사의 얼굴 같다고 행 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 받은 또다른 증거가 긍정적이 됩니다. 웃음이 많아집니다. 다른 사람의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이 자꾸 보입니다.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하고 다른 사람을 자꾸 판단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어딘가 영적으로 고장 난 사람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결국은 자기가 판단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왜 예수의 증인이 되는데 이렇게 핍박을 받는가 하는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도의 기회를 삼습니다. 전도자의 마음은 급합니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데 지금 예수님이 오시면 어떻게 됩니까? 더 이상 전도의 기회는 없어집니다. 내 어머니 내 아버지 내 사랑하는 자식이 내 사랑하는 친구가 예수를 영접하지 않음으로 지옥에 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타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는 것 이것이 전도자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충만히 받고 구원에 대한 기쁨과 감격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심령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는 그것을 너무도 절실하게 느꼈기에 종교지도자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을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3) 성령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이상하게 여길 것 없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낫게 한 것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예수님께로 돌립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즉 그의 능력으로 앉은뱅이가 온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 세례를 받은 직후나 앉은뱅이를 고친 직후나 지금 공회에 끌려와서도 그의 말씀은 일관성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과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시키심을 반복하여 강조하면서 그들의 죄악을 부각시키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베드로는 시 118:22를 인용, 건축자가 쓸모없다고 생각하여 버린 돌이 가장 귀한 머릿돌이 된 것처럼 십자가에 죽게 한 예수를 하나님은 그의 능력 가운데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의 사역에 기초를 놓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늘 아래 어느 누구에게도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이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믿음의 본질은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신지라 모든 만물과 모든 인간을 원래 질서대로 회복하실 것이라며 만인구원설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3:12절에 의하면 누구나 저절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이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는 편협하다고 공격을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예수를 통한 구원은 양보할 수 없고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전파하는 메시지의 핵심: 부활하신 그리스도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은 그를 살리셨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죄악을 회개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다.

사도들은 계속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전합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사도들은 자기들에게 없는 것을 인하여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았기에 주신 것을 사역의 현장에 사용하였습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영안이 있었습니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는 지혜와 능력이 있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의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많은 결신자들을 얻었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저희 모두는 사도들과 같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사역을 통하여 능력이 나타났고 열매가 풍성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1) 지속적인 기도생활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기도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120명의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함으로 시작된 교회입니다. 행 2:42절에 보면 교인들을 보여서 기도하기에 힘을 썼습니다. 3:1을 보니 사도들은 평소부터 정해진 시간에 기도에 전념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통하여 죄를 자백하며,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증인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게 해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영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였고, 주님을 향한 믿음을 견고히 하였습니다.



2) 충실한 말씀생활입니다.

예수살렘 교회는 말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 동안 같이 지내면서 권세 있는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충만을 받으면서 그들의 스승인 나사렛 예수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임을 확신하고 예수님의 고난, 죽음, 부활, 승천, 재림에 대하여 담대하게 전하였습니다. 행 2:42에 보니 사도들은 가르침에 힘을 썼다고 합니다.



3) 열정적인 전도생활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하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이라는 소명 의식을 가지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데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4장까지 베드로의 설교가 세 번 나옵니다. 첫 번째는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였을 때 120명의 무리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방언을 하니 그 모습을 보고 신기하여 모여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앉은뱅이 거지를 낫게 한 사건을 인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지금은 체포되어 심문을 당하는 상황인데도 자기를 심문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베드로는 어떤 상황에 있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기회로 삼습니다. 그도 전에는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던 겁쟁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를 본받아 우리의 삶의 현장을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현장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주의 일을 해도 방해는 있게 마련입니다. 전통과 자신의 경험에만 집착할 때 성령의 역사를 보지 못합니다. 사도들은 성령에 충만하여지니 담대해지고 지혜로워져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언제 어디에서나 논리정연하게 전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해야 합니다. 때가 되면 신앙생활 잘할 수 있겠지 하는 막연한 마음으로 성령의 역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사모할 때 응답이 임합니다. 간절히 부르짖을 때 응답이 임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이 전파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필요할 때마다 용기를 주십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담대하게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각자의 삶이 변화되고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예수님의 이름과 능력으로 귀한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