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주님의 편지 (계시록 2장과 3장)

Author
Myung Myung
Date
2006-07-09 22:11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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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2장과 3장 주님의 편지



오늘은 팔로마한인교회 생일입니다. 에스콘디도에 있는 Calvary Chapel에서 개척을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1년이 흘렀습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지난 십년 동안 노스카운티 지역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집들이 많이 들어서고 한인들의 인구도 많이 증가하였습니다. 출퇴근 시간에 차들의 정체가 이전보다 훨씬 심해졌습니다. 개척할 때나 거의 창립 초기부터 10년 이상 교회를 섬긴 분들이 여전히 이 자리에 계심으로 감회가 새롭습니다. 지난 십여 년을 돌이켜 보면 함께 신앙생활 하다가 주님 품에 안긴 분도 적지 않습니다. 이사를 간 분들도 많습니다. 더 좋은 교회를 찾아 떠난 분들도 꽤 있습니다. 그래도 변함없이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충성한 분들이 많았기에 오늘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오늘 오후에 주님이 세우신 다섯 분이 임직식을 갖게 되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70년대에 번영의 복음 (prosperity gospel)을 외치던 부흥사들은 예수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한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있기만 하면, 기도를 제대로 하기만 하면 항상 원하는 응답을 받고 행복한 삶을 산다고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크리스찬은 삶의 현장에서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까? 항상 건강하고 항상 좋은 직장을 얻고, 하는 일마다 잘 풀립니까? 물론 예수를 믿는 것이 복이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시지만 그렇다고 인생의 한 단면 단면을 볼 때 항상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어떠하십니까? 요즈음 어떤 문제가 있으십니까? 건강 문제, 직장 문제, 비자 문제 등등으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게다가 가정까지 화목하지 못하면 더욱 어렵습니다. 그런데 1세기의 성도들은 지금 우리들과는 다른 차원의 고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훨씬 더 힘들고 지속적인 고난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키려다가 박해를 당하고 심지어 죽기까지 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박해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궁극적으로 교회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이 모든 것이 불안하였습니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교회가 붙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계시록이 씌어졌습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제목을 요한계시록으로 하지만 1:1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하면서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요한을 통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계시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계시된 말씀을 읽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과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 말씀을 붙들고 살 때 능력이 나타나고 소망을 가지게 되고 그 말씀으로 다른 성도들을 위로하게 됩니다. 특히 계시록은 로마제국으로 박해를 받는 상황에서 씌어졌기 때문에 상징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666, 십사만 사천, 짐승, 아마겟돈 등등. 그래서 그 비유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엉뚱한 해석, 무리한 해석을 하게 됩니다.



지난주에 창립 11주년 기념 특별새벽기도회 동안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하는 주제로 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살펴보았습니다.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일곱 개의 편지는 1세기의 특정한 기독교 공동체에 보낸 것이지만 그 내용을 보면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귀담아 들어야 할 주님의 관심사가 담겨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칭찬과 책망, 경고와 약속을 통하여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과연 주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시는 교회는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지 일곱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편지를 중심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자리에 참여한 성도 한분 한분이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면서 이기는 자들이 되어 주님의 칭찬을 받고 이 땅에서도 풍성한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 교회에게 보내신 편지의 내용을 보면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1) 주님은 모든 교회의 사정을 잘 아십니다. (I know)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은 나를 안다.” (요 10:14) 우리가 숨어서 한 것, 남들에게 감추고 싶은 부분 등도 주님은 다 아십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각 교회의 형편과 처지를 너무도 속속들이 잘 아시기에 각 편지마다 ‘안다’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항상 우리를 지켜보신다는 의식을 가지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 주님이 교회에 따라 좋은 것, 나쁜 것, 추한 것들을 열거하시면서 칭찬도 하시고 책망도 하십니다.

에베소 교회: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버가모 교회의 사자: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특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라는 표현을 네 번이나 사용합니다.

특히 엄청난 박해를 당하는 서머나 교회에게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하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교인들이 얼마나 위로를 받겠습니까?



2) 주님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features of Jesus)

계시록 1장에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시는 주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각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은 각 교회의 상황에 따라 1장에 그려진 주님의 모습의 일부를 담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

일곱 별과 금 촛대에 대한 설명이 1:20에 나옵니다. 1:20,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왜 그 교회에 촛대가 언급됩니까?  에베소 교회의 사정이 너무 안 좋아 지금 그 촛불이 꺼지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님이 경고하십니다.



환난과 궁핍을 당하는 서머나 교회에게는 주님이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그려지며 소망을 줍니다. 이 묘사는 1장 17절과 18절에 나오는 표현과 비슷합니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음행과 우상숭배로 물든 버가모 교회나 두아디라 교회에게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 등으로 표현하며 주님이 심판주로 그려집니다.

영적으로 죽어버린 사데 교회에는 주님을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로 표현하며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만 교회가 영적으로 활기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하여 주님은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로 그려지면서 교회를 격려합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 속에서 자기만족에 빠져 충실하게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님은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로 증인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미적지근하게 있는 교인들을 책망하십니다.



3) 칭찬을 먼저 하신 후에 책망을 하십니다. (praise first, then rebuke)

처음부터 잘못한 것을 책망하겠다고 몰아세우면 아무리 잘못한 사람들도 마음을 닫기 마련입니다.

주님은 책망을 하시기 전에 먼저 작은 부분이라도 좋은 것이 있으면 찾으셔서 먼저 칭찬하십니다. 그럴 때 마음의 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칭찬하신 후에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책망을 하십니다.



버가모 교회: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칭찬하십니다. 외부적인 박해는 잘 막아냈으나 내부에 은밀하게 들어온 사단의 공격을 막지 못하여 음행에 빠진 버가모 교회의 문제점을 책망하십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책망을 하십니다.



단 라오디게아 교회의 경우에는 칭찬할 것이 없으니 책망만 하십니다. 그 교회가 얼마나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는지 주님께서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3:16) 말까지 하십니다.



4) 문제 있는 교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a call to repent)

이렇듯 교회들을 책망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멸망할 자들에게는 소돔과 고모라같이 경고 없이 심판이 임합니다.

문제점을 지적하신 주님은 이제 그들의 죄에서 돌이키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해오던 것을 그만두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판단을 피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에베소 교회: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그들도 한때는 말씀에 든든히 선 좋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복음의 열정과 감격과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회개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버가모 교회: 회개하라

사데 교회: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라오디게아 교회: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일곱 교회 중에 다섯 교회가 회개를 요청받았습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날도 그 비율이 크게 낮아질 것 같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그리고 더 늦기 전에 우리를 돌아보며 믿음을 점검하며 주님 보시기에 안 좋은 것들,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들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았을 때 징계를 선포하십니다.

에베소 교회: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버가모 교회: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두아디라 교회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5) 주님은 약속을 주십니다. (a promise)

편지마다 꼭 들어 있는 말이 있는데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하는 권면입니다.  계시록의 가르침은 성령으로부터 교회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령의 말씀입니다.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귀 있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이 귀는 영적인 귀요 믿음의 귀. 따라서 귀 있는 자는 교회에서 그 메시지를 읽을 때 그것을 듣고 지키는 교인들이다. 믿음이 모든 사람들의 것이 아니듯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들만 유익을 얻습니다. 듣지 못해 말씀을 알지 못하는 사람보다 듣고도 완고한 불신앙으로 반응하는 자들에게 더 큰 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기는 자들에게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이긴다는 것은 직역을 하면 정복한다는 뜻인데 그것은 성도들의 믿음의 선한 싸움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즉 이긴다는 것은 성령께서 권면하시는 것을 귀담아 듣고 그리스도와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열정을 회복하여 신실하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와 같은 이김은 요한일서에 잘 나와 있다. 요 5:4-5,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모든 교회들이 복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편지의 마지막은 문제가 있는 교회든 없는 교회든 예외 없이 약속을 주십니다.



에베소 교회: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서머나 교회: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버가모 교회: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두아디라 교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사데 교회: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빌라델비아 교회: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라오디게아 교회: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표현은 다르지만 다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는 다는 말입니다.

  

일곱 교회에 보낸 주님의 편지를 종합해 보면 주님의 칭찬을 받고 약속이 이루어지고 이기는 교회가 되려면 다음의 몇 가지를 만족시켜야 합니다.

1)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 (zeal but no love) 교인들의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칭찬하십니다.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사회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교인들은 거짓된 가르침과 죄악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디모데가 사역한 교회이기에 바른 교리, 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있었기에 교회의 순수성을 잘 지켰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거짓과 진리에 대한 탁월한 이해와 분별력, 거룩함과 열심은 대단하였기에 주님이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순결을 지키려고 오랫동안 싸우다 동안에 그만 처음 사랑을 잃어 버리면서 자기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신앙의 경주에서 이탈하고 말았습니다. 처음 사랑은 주님을 사랑함으로 나오는 복음의 열정과 성도에 대한 사랑을 다 포함합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는 더 이상 존재한 가치가 없기에 소멸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을 구하려는 열정, 주님의 사람들을 포용하는 사랑을 잃어 버렸습니다. 열정과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거룩은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둘 다 필요합니다. 말씀을 중시한다고 영혼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거나 영혼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진리를 잊고 적당히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권면: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영적 싸움을 싸우지만 믿음의 인내도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마귀에게 굴복하는 자들은 망할 것이지만 이기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신실한 자들, 그 메시지를 지키는 모든 신실한 성도들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약속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겠다고 합니다.



2) 진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 (love but no zeal)는 에베소 교회와는 대조적입니다.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으로 칭찬을 받았지만 세상과 타협하여 책망을 받은 교회.

버가모 교회는 발람의 교훈을 좇고,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이라는 거짓 선지자를 교회에 받아들였다가 우상의 제물을 먹고 또 음행하는 죄에 빠졌습니다. 물론 교인들 전체가 그런 죄악에 빠진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은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그런 자들을 용납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지. 누가 옳고 그른 것을 함부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얼핏 보면 넓은 마음을 가진 것 같습니다. 물론 사랑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이나 용납하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두 교회는 진리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용납하다 보니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는 혼란에 빠지고 부도덕한 삶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떻습니까?  요즈음의 시대풍조를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합니다. 전통적인 가치관이 허물어집니다. 동성 결혼도 점차로 허용하는 추세입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everything is okay. 절대 진리는 없어. 구원으로 가는 길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를 통해서도 구원에 이른다. 기독교는 자기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한다. 너무 편협해. 사랑 없는 열정, 열정 없는 사랑 다 문제가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와 더불어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3)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 (self satisfaction) 의 문제점은 자기만족입니다. 두 교회는 외형적으로 볼 때는 문제가 없습니다. 아주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안으로는 곪았습니다. 그 교회는 도무지 말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회개, 십자가, 헌신? 부담 있는 신앙생활은 싫어합니다. 세상을 살랑하여 주님 없이 그저 자기들끼리 재미있게 우아하게 지내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도무지 그들의 삶에 변화가 없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3:17)  주님 보시기에는 그 교회가 가장 불쌍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사랑할 때 믿음만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립니다. 주님과의 풍성한 교제가 능력을 경험하고 풍성함을 경험하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초청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사람들의 평판이 문제가 아닙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4) 끝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교회 (well done) 주님의 칭찬만 있지 책망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두 교회가 세상적으로 볼 때 대단한 사람들만 모인 교회가 아닙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으로 힘든 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진 교회 입니다. 그러나 두 교회는 자기들에게 없는 인하여 누구를 탓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자기들에게 있었던 믿음과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그 모든 고난을 극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 보시기에 서머나 교회는 부유한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두 교회 다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이기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였습니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게 권면합니다.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하시면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2:10). 이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고난을 당하면서도 궁핍을 당하면서도 박해를 받으면서도 심지어 죽음에 이를지라도 끝까지 예수님께 충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의 경주를 달리되 우리는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그럴 때 상급이 있습니다.



1968년에 멕시코시티에서 제19회 하계올림픽이 열렸습니다.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가 마라톤 경기에서 나왔습니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그 선수가 세계 기록을 세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는 마라톤 경기에서 꼴찌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프리카에 있는 가난한 나라 탄자니아에서 온 John Stephen Akhwari는 기억합니다.



메인스타디움에는 74명의 마라토너들이 출발선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출발신호가 울리자 선수들은 힘차게 뛰쳐나갔습니다. 중간쯤 달리는데 Akhwari 선수가 그만 옆 사람과 부딪치면서 스텝이 꼬여 길 위에 나뒹굴고 말았습니다. 이내 대기 중이던 의사들이 달려왔고 이 상태로는 뛰기 힘들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삐쩍 마른 몸에 휑하니 들어간 그 커다란 눈에는 금세 절망과 슬픔의 눈물이 글썽였습니다. 앞서 나간 선수들을 망연자실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발 뛰고 넘어지고 두발 뛰고 고꾸라지고 세발 뛰고 나동그라지면서도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몸으로 달리지 않고 정신으로 달렸습니다. 그가 그렇게 메인 스타디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불들이 다 꺼져 있었습니다. 언제 올지, 혹은 안 올지도 모르는 가난한 나라의 부상당한 흑인 마라토너를 기다리는 심판들의 지루하고 무의미한 몸짓만이 결승점의 희미한 전조등 속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그를 단념할 무렵 그가 메인 스타디움에 나타났습니다. 피투성이가 되고 붕대를 감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한발 한발을 고통 속에 떼면서 운동장을 돌았습니다. 그때는 다른 마라톤 선수들이 경주를 끝낸 지 한 시간도 더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마침내 아콰리 선수가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에는 몇몇 구경꾼들만 관람석에 남아 있었습니다. 마침내 Akhwari 선수는 마라톤 코스를 완주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대로 쓰러졌습니다. 스타디움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그를 격려했습니다. 사람들이 달려와 담요를 덮어주고 그를 안아 일으켰을 때 그의 눈에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미소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 날 한 기자가 Akhwari 선수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이길 가망도 없었는데 왜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Akhwari 선수는 이상하다는 듯 기자를 바라보더니 대답하였습니다.  "나의 조국은 경기를 시작만 하라고 멕시코시티로 나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뛰라고 나를 보냈습니다."  (My country did not send me to Mexico City to start the race. They sent me to finish.)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실 때 신앙의 마라톤에 시작만 하라고 보낸 것이 아닙니다. 완주하라고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마라톤은 한때 빨리 달렸다고 그 다음부터 천천히 걸어가도 되는 그런 경주가 아닙니다. 어떤 정해진 분량이 있어 몰아서 달린 후에 그 다음은 달리기를 멈추어도 면류관을 받는 그런 경주가 아닙니다. 과거에 어떻게 달렸든 믿음의 현재에서 여전히 최선을 다해서, 그리고 꾸준히 달려야 합니다. 신앙의 경주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결승점에 다다를 때까지 고통이 있고 눈물이 있고 갈등이 있게 마련입니다. 아콰아리가 올림픽 후에 영웅이 되어 사람들에 받은 환호는 우리가 장차 받을 것이 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약속을 주십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이기는 자는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한 자들입니다. 경주를 하되 규칙대로 달린 자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도 이 믿음의 경주를 끝마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경주를 주님이 지켜보십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달리고 있는지 점검하십니다. 부족한 것은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의 경주를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지켜봅니다. 환호합니다. 운동경기에서 우승자는 하나지만 신앙의 경주에서는 끝까지 달린 자들이 다 우승자들입니다. 운동경기에서는 서로 경쟁자이지만 신앙의 경주에서는 서로가 돕는 자들입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신뢰하고 달릴 때 우리에게 커다란 상급이 기다립니다. 올림픽에서 Akhwari 선수가 받았던 환호와는 차원이 다른 환호가 성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계 3:21, “이기는 사람은 마치 내가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나와 함께 내 보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성도들은 이기는 자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이긴다는 것은 어려울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주님의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팔로마한인교회에 무슨 말을 하실까요?

미적지근하다고 하실까요? 모든 세상 풍조를 다 용납한다고 하실까요? 음행에 빠져있다고 하실까요?

아니면 어렵지만 여전히 진리를 붙들고 처음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하실까요?

우리는 계속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마라톤은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결코 중단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분명한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과거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달려갔듯이 성도들은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은 때로 힘들고 어렵지만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은 길이지만 분명 우리의 모든 생애를 다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길입니다. 주님의 주시는 능력에 힘입어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며 위로부터 임하는 하늘의 신령한 복과 이 땅의 기름진 복으로 가정, 사업, 사역에 풍성히 채워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