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Author
Myung Myung
Date
2006-07-03 09:40
Views
4045
행 3:1-1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새로운 제품이 소비자의 '마음의 벽'을 무너뜨리고 시장에 성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미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분야에서도 신제품이 성공하기란 매우 어려운데, 특히 그것이 완전히 새로운 컨셉으로 만들어진 제품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식품가공업의 개척자 헨리 하인즈(Henry Heinz). 우리가 식료품 매장에서 케첩이나 피클을 사면서 많이 접하는 하인즈 브랜드를 만든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신선한 농산품을 쉽게 구매해 먹던 19세기 후반에 식품가공 비즈니스라는 새로운 영역을 시작하였습니다. "신선한 농산품을 주위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데 왜 굳이 깡통에 담긴 농산물을 사먹어야 하나?"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새로운 사업의 고객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하인즈는 우선 투명하고 깨끗한 병에 고추냉이 같은 농산물을 담았습니다. 제품의 질을 눈으로 확인해볼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지역의 호텔들을 접촉하였습니다. 일류 호텔 식당의 테이블에 하인즈 브랜드가 새겨진 가공식품 병이 놓일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호텔을 찾는 부유층들이 하인즈 가공식품에서 '품위', '고급'이라는 이미지를 느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리시간을 줄여야하는 바쁜 도시의 주부들을 집중 공략했습니다. 19세기 중반에만 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산업'이었던 가공식품업. 그것이 하인즈의 노력으로 '품위'있어 보이는 이미지와 함께 성장산업이 되었습니다. 소비자에게 신뢰를 주고, 신제품에 대해 거부반응이 가장 적은 계층을 공략하고, '영향력'이 큰 사람들을 통해 입소문을 만들어 내는 것은 19세기나 21세기나 마케팅을 위한 기본자세입니다.



하인즈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줄 아는 안목, 남들이 하지 못하는 할 줄 아는 능력이 있었기에 사업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안목과 능력은 사업하는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들에게 더욱 필요합니다. 사도행전 2:43절에 보면 초대 교회 사도들을 통하여 기이한 일과 표적이 많이 일어났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그 사도들을 통하여 일어난 표적 중의 하나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니 베드로와 요한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였습니다. 이를 인하여 몰려든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복음을 전합니다.  



사도들의 사역을 살펴보면서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성도들도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능력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며 복음의 진보를 이루는 능력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거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제 구시 지금으로 따져서 오후 세 시 기도를 하는 시간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그들 중에 섞여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그 시간에 맞추어 어떤 사람들이 앉은뱅이를 데려다가 ‘아름다운 문’이라고 불리는 문 앞에다 내려놓습니다. 자선은 유대인들에게 미덕이었기에 하나님께 기도하러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구하면 그들의 마음이 더 움직일 것으로 생각하고 일부러 구걸하기 좋은 자리를 찾았을 것입니다. 누가는 그를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소개합니다. 걷기는커녕 한번도 서 본적도 없는 사람, 누군가 옮겨주지 않으면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사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가는 사람, 구걸하는 것 외에 생계를 위한 별다른 수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적을 행할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1)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전을 향하여 날마다 몰려가면서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 거지를 지나칩니다. 그들 중에는 제사장들도 있었고 백성의 장로들도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있었고, 부자도 있었고, 세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앉은뱅이 거지의 아픔을 이해하거나 나누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전 안에서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지만 예배의 감격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지 못하였습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쌓는 선한 행위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으나 성전 문 앞에 있던 거지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어쩌다가 그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이 동전 한 닢을 던져주었을 뿐입니다. 그 거지도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지라 언젠가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하여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성전에서 섬기는 자들이나 거지 앞을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이나 거지 자신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다는 것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고 영적으로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도 이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왜 사는지 인생의 목적을 잘 모르고 헛된 것을 찾느라고 방황하고 인생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경험 많은 상인들은 가게에 사람이 들어오면 그의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이 물건을 살 사람인지 그저 보러 왔는지 아니면 다른 목적으로 왔는지를 분별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거지도 아무에게나 구걸하지 않습니다. 거지 나름대로의 감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무엇인가 줄 것 같은 사람을 찾아 구걸합니다. 그 거지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구걸을 합니다. 아마 그들에게 무엇인가 얻게 될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거지를 주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베드로는 그 동안 거지 앞을 지나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눈앞에서 손을 벌리는 거지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도들이 전도하였을 때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역동적인 사역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날마다 그 수를 더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수에만 관심을 가지신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잃어버린 양에게도 관심을 가지시고 주님께로 이끌기를 원하십니다. 거지는 돈을 요구했으나 베드로는 그 거지를 바라보는 순간 그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동전 한 닢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를 바라보다가 “우리를 보라” 외칩니다. 문법적으로 지금 당장 우리를 보라는 명령입니다.

그 거지는 이미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가 지금 당장 자기들을 보라고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거지는 그곳에 오랜 동안 구걸을 해 왔습니다. 한 푼 달라고 하면서도 그 거지는 계속 주위를 살피면서 정말로 자기에게 돈을 줄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와 요한에게 한 푼 달라고 하면서도 그들에게만 시선을 집중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2)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였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하는 베드로의 말을 들었을 때 그 거지는 실망하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은과 금은 사도들에게 없었습니다. 대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사실 그 거지에게 동전 한 닢을 준다 한들 그 날 써 버리면 그만이요 그 다음날도 또 나와서 구걸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거지에게 잠시 있다 사라질 돈보다 더 귀한 선물, 보다 가치 있는 선물을 주기 원하셨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일어나라, 걸으라는 말은 계속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현재 명령형입니다. 더 이상 남들의 도움을 의지하여 앉아 있지 말고 일어서라 그리고 계속해서 걸어 다녀라. 그에게 온전한 치유가 일어날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구원하시고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을 의지하여 거지의 오른 손을 화악 잡아 일으킵니다. 과연 놀라운 변화가 앉은뱅이에게 나타납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발과 발목에 즉시로 힘이 생기는 것이 느낍니다. 난생 처음 일어섰습니다. 한번도 서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면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 텐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조심스럽게 발을 떼어봅니다. 몇 발자국을 더 떼어 봅니다. 걷습니다. 내친 김에 뛰어 봅니다.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소망이 없고 기뻐하려야 기뻐할 이유가 없었던 그였는데 난생 처음으로 일어나고 걷고 뛰게 되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치료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마 그는 연방 외쳤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던져 주는 동전 몇 닢으로 채워지지 않던 근본적인 필요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택한 종들을 통하여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사도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말처럼 그 앉은뱅이도 성전에 들어가 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뛰어 걸으며 하나님을 찬미하며 성전으로 들어가는 놀라운 회복은 금과 은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에 의한 것입니다.



오 기쁨 (1,5)



3) 사역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보여주었습니다.

누가는 앉은뱅이가 뛰어 서서 걸으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는 말을 반복함으로 그의 치유를 확실히 일어났음을 증명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앉은뱅이 개인의 문제만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앉은뱅이가 걷고 뛴다는 것은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다는 강력한 증거의 하나입니다. 사 35:6,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예수님은 그 말을 토대로 눅 7:22,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시면서 메시야 시대에 있을 현상을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이은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누가는 이 사건을 상세히 기록함으로 앉은뱅이를 고치신 바로 그분이 진정한 메시야이심을 외치고 있습니다. 앉은뱅이에게 어떤 믿음이 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은혜를 입었을 뿐이고 그 은혜를 주신 분은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도들을 통하여 다시 한번 나타난 하나님의 크신 영광은 그 자리에 모인 수많은 유대인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성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가 걸으며 뛰며 기쁨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을 봅니다. 조금 전까지도 성전 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였던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였더니 소망 없던 자가 소망이 생기고 기뻐할 이유가 없는 자가 기쁨이 충만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저주 때문에 앉은뱅이가 되어 고생을 한다고 여겨지던 그가 도리어 하나님의 역사를 선전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방언을 할 때 모인 무리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삼천 명을 회개시켰던 베드로는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이 신기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여든 무리들에게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영혼 구원은 교회의 기본 사명입니다. 앉은뱅이 거지에게 일어난 이적은 단지 한 사람의 치유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이 더욱 증거 되기 위한 디딤돌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 안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것은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복음 전도의 문을 활짝 열어 줍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복음의 메시지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듣는 자들의 마음에 죄에 대한 깊은 각성과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으로 인한 큰 기쁨을 갖게 됩니다. 오직 십자가와 성령의 능력으로만 치유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때 영적 앉은뱅이 상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사도들을 인하여 기사와 이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하여 그와 같은 dynamic한 역사를 계속해서 일으킬 수 있었습니까?

1) 영적으로 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민감하지 않으면 문제가 있을 때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으니 은과 금으로 문제를 풀려고 합니다. 초대교회가 놀라운 부흥을 경험한 것은 교회조직이나 프로그램 때문이 아니라 사도와 교인들이 성령에 충만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힘입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동안 기도를 통하여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뒤를 이은 사도들이 기도를 통하여 능력을 나타냅니다. 기도로 시작한 예루살렘 교회이기에 기도는 그들의 삶의 일부입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차례 즉 아침, 오후, 해질 무렵에 성전에서 기도하였습니다. 오순절 이후에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성령의 체험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율법에 규정된 내용이나 유대교의 전통들을 무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신실한 유대인들이었기에 당시의 관습을 따라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였습니다.‘올라가다’라는 단어는 문법적으로 과거의 습관적인 동작을 나타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어쩌다 한번 성전에 올라가다가 역사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마다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음을 의미합니다. 함께 모여 기도에 힘씀으로 시작된 예루살렘 초대 교회였기에 기도는 곧 그들의 삶의 일부였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주님과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되니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영안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 사도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민감해야 주님이 주시는 감동을 느낄 수 있고 그 감동에 순종할 때 귀한 열매가 맺어집니다.  



2) 주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구원과 치유는 둘 다 믿음에서 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은 본인의 믿음으로 낫습니다. 막 5:34,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야이로의 딸은 아버지의 믿음 때문에 죽음에서 살아납니다. 본인의 믿음이든 다른 사람의 믿음이든 믿음으로 주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누가는 앉은뱅이가 믿음이 있었는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의 발목에 힘이 들어갈 때 그에게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분들 중에는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혹시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와 같이 그저 소망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분은 안 계십니까? 매사에 부정적이고, 쉽게 화가 나고 조급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영적 고갈을 경험하지는 않습니까?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문제나 우리를 둘러싼 상황을 인하여 낙심하거나 좌절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모든 문제의 해결자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눈을 여셔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상황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요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예수님을 의지하고 구하면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사도들이 오로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였더니 성령의 능력이 그들에게 임하여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3)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하였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 유대인들의 생각입니다. 요 9:2,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앉은뱅이 거지를 보면서 사람들은 불쌍히 여기는 것보다는 저 사람은 죄인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무관심했으나 하나님은 그 거지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이 목회하시면서 보여주셨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 거지를 바라보았습니다. 고통 받는 내 주변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나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라는 시선을 바라보지는 않습니까? 나와 코드가 맞지 않는다고 무시하지는 않습니까?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합니까?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변화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자를 하나님은 긍휼히 여깁니다.



4) 겸손하였기 때문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붙잡고 감사하는 것처럼 앉은뱅이는 자신을 고쳐준 베드로와 요한에 달려가 그들을 꼭 붙잡았습니다.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아 걷고 뛴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솔로몬의 행각으로 모여듭니다. 기적을 보고 기이히 여기며 두 사도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다가온 유혹을 겸손으로 피합니다. 자신들을 통하여 일어나는 기적의 역사와 자신을 겸손하게 구분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을 앉은뱅이도 자신도 아닌 오직 예수님께 돌립니다. 베드로는 두 가지 반문으로 자신의 설교를 시작합니다. 왜 기이히 여기느냐,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는 반문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이 나은 것은 자기들의 권능이나 경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면서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그 예수님이 앉은뱅이를 고치셨음을 확실히 증거합니다.



열심을 내어 주님의 일을 하다보면 그 열매로 인하여 칭찬과 신뢰를 집중적으로 받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우쭐해집니까? 사람들의 시선은 자기에게 모으고 싶습니까? 주님만이 높임을 받으셔야 합니다. 다가오는 유혹을 분별하고 모든 시선을 주님께로 돌리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사람들로부터 주목받지 못하여 애를 쓰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하나님과 자신을 바로 알지 못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능력 그 은혜를 아는 자마다 그 앞에서 자신의 부정함과 무력함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은사가 나를 통하여 나타날 때 사람들의 시선을 주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이것이 지속적으로 쓰임 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의 자세입니다.

  

치유 받기 전과 치유 받은 후의 앉은뱅이가 전혀 다릅니다. 그전까지 그 거지는 소망 없이 그저 구걸이나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놀라운 치유를 경험하고 나니 벅찬 감격이 그를 주장합니다.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동전 몇 닢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던 마음의 기쁨과 평강이 그를 주장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거지는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앉은뱅이 거지가 경험한 기적은 그가 기대한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 동전 몇 닢을 기대했던 앉은뱅이는 인생자체가 회복되는 기적을 경험하며 그 치유의 감격 속에 하나님을 찬미하며 하나님이 새 백성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어 드렸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놓습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앉은뱅이 같은 인생이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도움으로 치유되고 회복되고 소망을 갖게 되고 그를 위하여 평생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치유받는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들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이 또한 치유를 받고 주님께 인도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를 보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는 베드로의 담대한 선언은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혹시 우리는 베드로와는 반대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능력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은금을 네게 주노라 하면서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베드로의 외침은 바로 우리들의 외침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보여줍니까? 주안에서 전혀 달라진 우리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신앙이나 사역의 모습이 앉은뱅이에서 걷는 자로 걷는 자에서 뛰는 자로 변화된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삶 속에서 경험한 감격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양드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능력을 행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베드로와 요한과 같이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경건의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어떠한 형편과 처지에서도 주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민감하게 볼 수 있는 영안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기쁨을 주고 위로를 주는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중에 행하셨던 치유의 기적들이 사도들을 통하여 계속되었고 지금도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사역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치유의 역사가 여전히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의 전달자로 저와 여러분들을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해도 별 효과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날 때 세상은 우리를 주목하고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주변에 고난을 당하는 자들, 연약한 자들을 찾아 일으켜 주고 예수님을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기쁨을 주고 위로를 주는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교인들이 모인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날마다 그 수를 더하게 하시는 교회입니다.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성령에 힘입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고 그것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능력 있는 종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본문이 주는 세 가지 기도제목:

1)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 보게 하옵소서

2)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 하게 하옵소서

3)  저의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