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6-13 14:10
Views
563

악기나 운동을 어려서부터 배우게 하고 자주 연습시키는 이유는 습득한 기술을 거의 본능적으로 나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평소에는 별로 찾지 않다가 위급한 상황에서 서원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더니 응답을 받았다는 말을 가끔 듣습니다. 그렇게라도 하나님을 찾은 것이 다행이기는 하지만, 이왕이면 평소부터 믿음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떤 상황에서도 자연스럽게 주님 앞에 엎드리게 되고 주님의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가복음은 그 예수님이 누구신지 보여주는 책이요 제자들이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공생애 기간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그분의 인격, 삶, 사역에 관한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들의 믿음의 진도를 보면 상당히 더딥니다.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사역을 보았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행동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더구나 제자들은 불과 몇 시간 전에 오병이어의 엄청난 이적을 경험하였으면서도 풍랑 속에서 소리 지르고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제자들의 모습이 한심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곰곰이 살펴보면 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들의 믿음을 보신다면 어떤 평가를 내리시겠습니까? 믿음의 시험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치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그곳이 가정이든, 직장이든 어디서든지 갑자기 문제가 주어집니다. 주님은 그 문제를 믿음으로 풀기 원하십니다. 본문에서 주는 교훈을 깨닫고 실천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의지하여 담대히 나아가면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며 게네사렛 사람들 같이 주님의 손길을 풍성하게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러 산으로 가신 예수님(45-46절)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은 ‘즉시’제자들을 재촉하셔서 배를 타고 벳새다로 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무리를 해산시키십니다. ‘즉시’라는 단어는 마가가 예수님의 행적을 설명할 때 즐겨 사용하는 것으로 무려 41번이나 나옵니다. ‘재촉하다’라는 단어는 단지 ‘재촉하다’라는 의미를 넘어 ‘강요하다, 억지로 보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 자리를 떠나기 원하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무슨 이유로 제자들을 급하게 벳새다로 보내십니까?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사역 후에 기도하기 위한 시간을 갖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일상적으로 기도하셨을 뿐 아니라 중요한 때마다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그분의 뜻에 자신을 드리는 복종의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주목을 끌 만한 이적을 베푸신 후에도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셨다가 나중에 다시 나타나셔서 그분의 정체성과 권능을 보여 주시는 패턴이 마가복음의 특징입니다. 둘째,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역에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무리에게 영향 받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마가복음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경험한 무리의 반응에 대해 기록하지 않지만, 요한복음 6:14-15에 따르면 무리는 예수님을 모세가 말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하면서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자칫하면 제자들도 그런 분위기에 휩싸일 수 있었기에 제자들을 서둘러 보내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셋째, 사역에 지친 제자들을 쉬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 가서 쉬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열성적으로 따라온 무리 때문에 제대로 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 종일 무리를 가르치신 후에 오병이어로 먹이실 때 제자들은 남자 어른만 오천 명이 넘는 무리를 섬겨야 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보내심은 피곤한 제자들을 쉬게 하기 위한 주님의 배려로 볼 수 있습니다. 문맥으로 볼 때 세 번째 이유가 제일 타당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보내고 무리를 해산시키신 후에 홀로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여기서 ‘산’은 평지에서 다소 우뚝 솟은 곳, 평지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장소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산에 가신 경우는 본문 외에도 두 차례 더 있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을 세우실 때 예수님이 산에 오르셨습니다(3:13-14). 또한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곳에서 변화된 모습으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셨습니다(9:2-4). 예수님은 이적을 보이신 후 사람들의 환호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시고, 오히려 십자가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하는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시려고 기도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일을 앞두고 기도하는 것만큼이나 일을 마치고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려 주십니다.


 


신적인 능력을 드러내신 예수님(47-52절)


예수님은 모든 상황을 제자훈련의 기회로 삼으시고 제자들의 믿음을 test 하십니다. 주님이 그 밤에 내신 문제가 무엇입니까? ‘날은 저물고, 배는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 있고, 예수님은 그들 곁에 계시지 않고, 바람은 거슬려 불어서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다시 되돌아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제자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풀고 있습니까? 칠흑같이 어두워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밤에 자기들의 힘으로 거기서 빠져나가려고 열심히 노를 저어봅니다. 그러나 바람이 거슬려 불므로 아무리 노를 저어도 배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노를 젓는데 온 신경을 쓰느라 예수님을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치고 두려움이 생깁니다. 제자들이 나름대로 문제를 풀어보려고 애를 쓰는 동안 주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힘겹게 노를 젓는 제자들을 육지에서 줄곧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한계에 부딪칠 때가 주님이 일하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십니까?


-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밤 사경 즈음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로마의 시간 계산법에 의하면 저녁 6시에서 오전 6시까지를 3시간씩 4등분 합니다. 그러므로 4경은 새벽 3~6시를 가리킵니다. 제자들이 해가 지고 난 후 배를 탔고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오신 때가 이른 새벽이므로 제자들은 적어도 7~8시간을 바다에서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4:38) 불평하던 제자들이 이번에도 불평하지 않았을까요? ‘그냥 거기 있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예수님은 왜 우리를 보내셨지? 예수님은 도대체 지금 어디에 계신 거야? 우리가 이렇게 힘들어 하는 것을 알기나 하실까?’4장에서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널 때 상황과 아주 비슷합니다. 그때도 저녁에 배를 탔습니다. 그때도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다만 그때는 예수님께서 배에서 주무시고 계셨고, 이번에는 예수님이 아예 배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을 찾아오시는 모습은 구약 성경에서 자연을 다스리시며 자신의 백성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지나가시려고 하시매”지금 예수님이 곤경에 빠진 제자들을 건지려고 오시는데 그냥 지나치신다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이 구약에 두 번 나오는데 한번은 모세 곁을 지나가셨고, 또 한 번은 엘리야 곁을 지나가셨습니다. 두 사람 다 절망 중에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지나가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하며 그에서 뛰놀았습니다. 모세는 그 장면을 보며 기가 막혀서 하나님이 직접 쓰신 두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렸습니다. 낙심한 모세가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하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19-23).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에서 이겼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주변을 태우는 모습을 목격한 백성들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외쳤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야 하나님만을 섬길 것이라고 생각하며 내친 김에 비를 맞으며 아합 왕이 있는 궁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아합 왕의 부인인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그 길로 광야로 도망쳐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낙심한 엘리야를 먹이시고 재우시고 기력을 회복시키신 후에 호렙산으로 부르셨습니다.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왕상 19:11)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엘리야 앞을 지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성, 즉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시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4장부터 6장까지 power story를 통하여 예수님은 신적 능력을 보이시며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제자들은 말씀으로 풍랑을 잠잠케 하신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분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고 말씀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사람을 통하여, 환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 말씀으로 위로하십니다


아직 이른 새벽이니 컴컴하여 제대로 보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편에서 무엇인가 희끄무레한 것이 점점 자기들에게 다가옵니다. 예수님 같이 보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눈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물 위를 걸을 수 있지? 제자들은 바다 위를 걸어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으로 착각해서 놀라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위로와 사랑이 넘치는 말씀을 하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안심하라’와 ‘두려워하지 말라’는 현재 명령형입니다. 계속해서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현재 명령형에 'not'을 첨가하면 멈추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니”는 단순히 정체를 밝히는 표현이 아니라 구약에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실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 너는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3:14). 예수님도 자기 계시를 하기 위해 그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 6:48).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4).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이런 신적 계시는 4:41에서 제자들이 던진 정체성에 관한 질문, 즉 ‘그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변을 제공합니다. 요한복음 8:24,28에서는 ‘내가 그인 줄’로 번역되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메시아이심을 밝힙니다. 예수님은 큰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에게 물 위를 걸으심으로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보이시면서 ‘나는 유령이 아니다. 나는 메시아이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 바람을 잠잠케 하십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스토리에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걷는 것도 기록되어 있으나 마가복음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안심시키신 후에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칩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곧바로 잠잠해진 바다 때문에 다시 한 번 놀랍니다. 마가는 제자들이 놀란 이유를 언급하는데, 그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마음이 둔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둔하여졌다’는 완료형으로 지속적인 상태를 강조합니다. 즉 오병이어 사건 때부터 예수님이 바람을 잠잠하게 하신 때까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친히 드러내셨는데도 그 사실을 계속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바로 전날 오병이어 이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무리를 먹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을 통해 배불리 먹일 수 있었습니다. 놀라면서도 감동했고, 그만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눈앞에 위협적인 풍랑이 전개되자 그들은 다시 두려움과 공포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자 또 놀랐습니다. 이처럼 되풀이되는 그들의 모습은 ‘깨닫지 못함’과 ‘둔함’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기적을 봐야 이런 되풀이에서 벗어나게 됩니까? 관건은 말씀에 기초한 의지적인 순종입니다. 감각적 체험에 기초한 감정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게네사렛 사람들의 반응(53-56절) 


원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벳새다’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벳새다는 오늘날 갈릴리 바다 동쪽 연안에 인접한 골란 고원을 말합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과 제자들이 도착한 곳은 게네사렛 땅입니다. 아마 바람 때문에 그곳으로 갔을 것입니다. 게네사렛 땅은 어떤 특정 마을이 아니라, 갈릴리 바다 서안을 따라 가버나움과 디베랴 사이 5km 정도의 평야 지대를 가리킵니다. 예수님 일행이 도착하자 그곳 사람들이 예수님을 즉시 알아보고 열광적으로 맞이합니다. 그들은 동네방네 다니면서 예수님이 오신 소식을 전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도움을 받기를 사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병자들을 침상 채로 메고 나아옵니다. 병자에게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길 겨를 없이 신속하게 데리고 나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병자들을 시장에도 둡니다. 병자들을 치료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여 구할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손을 대게 하기를 간구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일일이 손을 내밀어 만져주실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댄 사람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옷 가’는 옷의 끝자락이 아니고 ‘옷의 술’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민수기에 의하면 유대인 남자들은 네 개의 ‘옷 술’을 달아서 항상 율법에 대한 순종을 기억해야만 했습니다(민 15:38-39). “성함을 얻으니라”로 번역된 단어는 ‘구원을 얻다’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이 단순한 치유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와 구원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병든 자를 침상 째로 메고 나오고, 옷 가에라도 손을 대기를 간구해 나음을 얻는 모습은 가버나움에서 사역하실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제는 이런 사건들이 아무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이나 가릴 것 없이, 회당도 아닌 시장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놀랍게 확산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정체성


예수님은 밤에 멀리 산에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실 수 있는 신적인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바다 위를 걸으신 모습은 바다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어오셨을 뿐 아니라 바람까지도 그치게 하셨습니다. 이런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신적 능력을 가지신 분임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사 지나가려 하셨는데, ‘지나가심’이란 표현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 영광을 보이실 때에 그를 ‘지나가셨던’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자들은 제자들이 아니라 절박한 문제 때문에 가난해진 마음,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가지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온 게네사렛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으로 비춰진 예수님의 모습과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행동,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시는 모습은 창세기 1:2에서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역사하셔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자세 


-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때로 예수님은 이른 아침에 기도하셨고, 분주한 사역 현장에서 벗어나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은 힘들고 분주한 사역을 능력 있게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산에서 기도하시는 동안 바다에는 어둠이 깃들고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가운데서 풍랑을 만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캄캄한 밤 내내 바람에 시달리는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이 땅에 남겨진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물위를 걸어서 그들을 찾아와 구원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유령이라고 소리 지르며 호들갑을 떤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둔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둔해지는 증상은 오히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주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마음을 지키라고 말씀하시지만(잠 4:23), 마음을 온전히 지키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침마다 새로워져야 하는데, 말씀 대신 세상의 소식이 성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게다가 필요한 정보를 먼저 습득하지 않으면 남보다 뒤처질 것이라는 헛된 생각이 더욱 세상의 정보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그러다 보면 가짜 정보에 미혹되기도 합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에 두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영적인 분별력을 갖게 됩니다. 


 


- 믿음으로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병든 자를 침상 채 메고 데리고 온 것은 앞서 네 명의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침상에 눕혀 데리고 온 것과 유사합니다. 또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어 치유를 받은 것은 혈루증 걸린 여인을 생각나게 합니다. 네 명의 친구와 중풍병자, 그리고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그 믿음에 대해 칭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게네사렛 사람들과 병자들 역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능력은 부족하나마 작은 믿음을 가지고 그분께 나아와 그분을 만진 모든 자에게  베풀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근심과 걱정 때문에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마음에는 예수님이 안계시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보았기 때문에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절망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나아간 자들이 기적을 체험하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한 발짝도 더 내디딜 수 없을 만큼 막막한 바다 가운데 있더라도, 주님이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또 찾아 오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왕이신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왕이신 주님이 행하신 일을 믿어야 합니다.  


 


- 주님이 가신 길을 가야 합니다


인간으로서 최고의 복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의지하는 더 믿음이 커지고 그 믿음만큼 더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의 목표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 물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언제나 형통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고난이 삶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문제들을 믿음으로 풀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줄 알고 그분만을 의지하며 주님이 베푸신 은혜를 경험했다면 우리도 게네사렛 사람들처럼 열정적으로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고난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셨듯이 이웃의 고난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찾아오시듯이 이웃에게 찾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말씀으로 위로하듯이 말씀으로 이웃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람을 잔잔케 하시듯이 이웃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우리의 인생 항로에도 예상치 않은 위험이나 문제들이 다양하게 다가옵니다. 믿는 자들에게 있어 삶의 위기는 우리의 한계를 깨닫고 주님께 나아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됩니다. 위기가 도리어 은혜의 기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주님은 하나님 보좌 옆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십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을 고난 속에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오늘날도 우리를 건지시려고 찾아오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이 땅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그분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안심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신앙의 귀가 열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이 있을 때 두려움이 그칩니다. 문제가 있을지라도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에게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내어놓고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아들이라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내어주신 그 하나님이 우리를 돌아보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도 게네사렛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인하여 마음이 뜨거워져서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구원을 맛보며 능력이 나타나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주님이 주신 문제들을 믿음으로 잘 풀며 하나님께 풍성한 위로와 은혜를 경험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