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다비다야 일어나라 (행 9:32-43)

Author
Myung Myung
Date
2006-10-22 13:35
Views
5130
행 9:32-43 다비다야 일어나라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아들이 하는 행동이 아버지의 것을 빼닮았을 때 하는 말입니다.

그 선생에 그 제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자가 자기의 선생으로부터 잘 배워 자기 몫을 잘 감당할 때 하는 말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가 그런 훌륭한 제자입니다. 마가복음 3장에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부르시니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아오다”라는 원어는 ‘떠나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과거의 삶과 결별하여 새로운 환경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삶의 목표가 달라져야 합니다. 전에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며 자기의 유익에만 관심을 가진 제자들이었으나 주님을 따르면서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으로 (마 6:33)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에 열둘이 나아 왔다는 것은 제자들의 결단보다는 부르심에 대한 순종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그들을 부르신 목적이 두 가지: 1) 자기와 함께 있게 하려고;  2) 보내기 위하여.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 예수님의 모든 것을 잘 배우고 나서 때가 되면 보냄을 받고 예수님이 하시던 사역을 잘 수행하여야 합니다. 베드로는 갈릴리에서 물고기 잡는 것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으나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사명을 받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급한 성격과 경솔한 행동을 인하여 때로 실수한 적도 있었지만 삼년 동안 갈릴리 제자훈련학교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잘 훈련을 받고 훌륭한 제자로 만들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후 오순절에 성령 충만함 받고 초대 교회의 지도자가 귀한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본문을 보니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놀라운 이적을 행하고 그것을 인하여 풍성한 전도의 열매를 거둡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사역하였기에 그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는지 함께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의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제자들이 되어 주님을 섬기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며 베드로와 같이 영혼구원의 열매를 많이 거두어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스데반이 순교하고 교인들은 예루살렘을 넘어 흩어지고 사울은 예루살렘을 떠나 자기 고향 다소로 피신하였지만  교회는 성장을 거듭합니다. 9장 31절은 하나의 정리요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9:31) 교회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영적으로 충만하고 숫적으로 성장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이 팔레스타인 전역에 걸쳐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동안 사도행전의 또 다른 주인공인 베드로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요 예루살렘 교회 대표 사도라고 선교본부 사무실에서 가만히 앉아 선교현황을 살피며 보고만 받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도들이나 전도자들처럼 베드로도 팔레스타인 여러 지방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이제 막 세워진 교회들을 돌아보며 교회를 굳게 세우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과부들의 구제문제로 교회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 사도들은 회중을 모아 놓고 자기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본문을 보니 베드로는 과연 그가 한 말대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의 사역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다하셨던 사역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중풍병자를 고치셨고 죽은 사람들을 세 번이나 살리셨습니다. 삼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훈련을 잘 받은 베드로이기에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많은 사역의 열매를 거두고 있습니다.  





* 베드로는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립니다.

1) 룻다의 애니아

베드로가 순회 사역 중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25마일쯤 떨어진 룻다(Lydda)에 들렀습니다. 이미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는 소문이 퍼져있던 터라 베드로가 룻다를 방문했다는 소식에 많은 병자들이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 팔 년 동안이나 중풍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는 애니아(Aeneas)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남자이름입니까? 여자이름입니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팔년을 몸이 마비된 상태에서 고생하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더구나 긴병에 효자 없다고 팔년이나 앓았으니 곁에서 돌보는 사람들도 그가 나을 것이라는 소망을 별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병자를 볼 때 예수님이 가지셨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베드로가 ‘애니아’ 하며 그의 이름을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 베드로는 내가 너를 낫게 해주겠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그분께 영광 돌리는 겸손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바라보다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하며 기적을 행했던 베드로가 이번에도 예수님의 능력에 힘입어 애니아를 낫게합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지금 당장 일어나고 지금 당장 누워있던 자리를 정리하라는 뜻입니다. 그가 완전하게 낫겠다는 의미입니다. 과연 베드로의 말대로 애니아가 곧 일어났습니다. 팔년이나 중풍으로 고생하던 애니아가 나았다는 소식이 룻다뿐 아니라 가이사랴를 중심으로 욥바에서 갈멜까지 펼쳐 있는 샤론 평야 전역으로 널리 퍼집니다. 베드로라는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외치니 중풍병자 애니아가 병이 나았대. 대단한데 나도 그 예수님을 믿을래. 베드로가 치유 사역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러내니까 그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2) 욥바의 도르가

욥바에 도르가라 하는 여제자가 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 여제자들이 많았겠으나 특정인을 지칭해서 여제자라고 하기는 신약성경에서 도르가가 유일합니다.그는 예수님을 아주 잘 믿고 섬겼던 여자 성도였습니다. 다비다는 암사슴 혹은 영양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아람 말이고 도르가는 헬라식 이름입니다. 도르가는 착한 일과 구제 사업을 많이 하였다고 합니다. 과부와 같이 소외된 사람들을 섬김으로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었습니다. 도르가는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통하여 욥바 성도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선행과 구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삶의 방식입니다. 행 2:45,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가졌다.” 행 4:34-35,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초대교회 본을 따라 도르가도 열심히 선행과 구제를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르가가 병이 들어서 죽었습니다. 얼마나 그들이 도르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겠습니까? 보통 죽고 나면 몸에 기름을 발라 장사 치를 준비를 하는데 도르가의 경우에는 시신을 씻어서 그냥 다락방에 두었습니다. 베드로를 부를 계획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룻다는 욥바에서 10 마일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니 욥바 사람들도 베드로가 애니아를 고친 기적을 잘 들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마침 베드로가 룻다에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을 베드로에게로 보내서 지체하지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왜 그들이 간청합니까? 그들이 베드로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도르가에게 기적을 행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고치는 것과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차원이 틀립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베드로 자신이 그 기적을 실제로 해 본적이 없습니다. 하여튼 부름을 받고 욥바로 갔습니다. 베드로도 자신이 죽은 도르가를 살릴 것을 확신하고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큰 시련의 때에, 혹은 결정을 놓고 성도들이 목회자를 초청해 말씀과 기도 안에서 위로를 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함을 구하는 것은 성경적이요 아름다운 일입니다. 쉬쉬 하고 알리지 않고 자기 혼자 일을 처리하거나 결정해 놓고 나중에 가서 그저 통보만 하거나 그나마 알리지 않고 지나가는 교우들도 더러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우신 영적 리더들을 통하여 역사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그 곳에 이르니, 사람들이 베드로를 도르가의 시신이 있는 다락방으로 데리고 올라갑니다.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같이 지낼 때에 만들어 둔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여 줍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속옷과 겉옷은 도르가가 그들에게 준 사랑의 선물이었습니다. 아마 그 과부들은 도르가가 살아있을 때에도 그에 대한 칭찬을 입이 마르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베드로에게 도르가를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이들의 호소는 베드로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을 것이요 하나님께 상달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욥바 성도들이 도르가의 죽음을 아주 슬퍼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봅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 앞에서 슬퍼하는 무리를 보고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요 11:32 죽은 나사로를 인하여 그의 동생 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이미 네 오라비는 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금방 달려오시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과 조금이라도 유족들을 위로해보겠다고 예수님 앞에까지 와서 의미도 없는 곡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모습에 예수님은 너무나 답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앙을 비난하시지 않고 깊이 동정하십니다. 눈으로 무엇인가 보지 않으면 믿으려하지 않는 무지와 불신앙에 대하여 예수님은 통한의 눈물을 흘리십니다. 베드로도 주님과 같은 심정을 가졌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방안에 있던 사람들을 다 내 보냅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도르가의 시신을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 지금 당장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과연 즉시로 도르가가 눈을 뜹니다. 베드로 안에서 역사하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죽은 도르가가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여러 날 동안 욥바에서 시몬이라는 가죽 다루는 사람의 집에서 머물면서 계속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가죽을 다루는 일은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것인데 베드로는 개의치 않습니다. 과거에 가진 선입견이나 세상적인 기준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베드로가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욥바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이제 욥바로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작정하시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선교의 첫걸음을 내딛는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하나님은 욥바에서 베드로를 고넬료에게 보내십니다. 다음 주에 살펴 봅니다.



* 베드로의 사역이 놀라운 열매를 거두는 이유는?

1) 주님으로부터 배운 대로 사역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배운 제자가 배운 대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역을 잘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가 좋고 배경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먼저 잘 배웠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주님의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요즘 같이 모든 것이 대량생산되는 상황에서 배운다는 것이 교회에서조차 지식의 전달에 그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삶 전체를 배우게 하기 원하셨습니다.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오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예수님입니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서로를 섬기며 배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립니다. 베드로의 사역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서 다하셨던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중풍병자를 고치셨고 죽은 사람들을 세 번이나 살리셨습니다. 삼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훈련을 잘 받은 베드로이기에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많은 사역의 열매를 거두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중풍병자인 애니아를 고치는 것을 어디서 배웠습니까? 마가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한 집 안에서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집 밖에서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침상에 뉘어가지고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려고 온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도저히 예수님이 계신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 친구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생각해낸 것이 지붕을 벗기고 그 구멍으로 중풍병자를 달아 내리는 것입니다. 네 사람은 침상을 들고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한창 가르치시는데 갑자기 지붕에서 무슨 소리가 납니다. 먼지가 떨어집니다. 갑자기 지붕 한쪽이 벗겨지고 어둡던 방안이 밝아집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뜯겨진 지붕을 향합니다. 지붕 위에 있던 네 사람이 힘을 합쳐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조심스럽게 예수님 앞으로 내리고 있습니다. 그때에 주님이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의 치유보다 더 시급한 것은 그의 죄가 용서함 받는 것이라 생각하셨기에 중풍병자의 죄를 먼저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시비를 걸 것을 찾아 몰래 무리들 사이에 끼어있던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평범한 사람으로 보았기에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생각을 하며 비난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묻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죄 사함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눈에 보이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으라는 말을 하는 것이 죄 사함을 선언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중풍병자는 즉시 일어나 자기의 침상을 들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걸어 나갔습니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고 감탄을 합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을 잘 기억하고 있는 베드로도 애니아를 바라보고 외칩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과연 베드로의 말대로 애니아가 곧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죽은 도르가를 살리는 것을 어디서 배웠습니까? 예수님이 죽은 자를 세 번이나 살리셨는데 그때마다 베드로는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마가복음 5장의 장면이 오늘의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 지역에 오셨을 때 회당장 가운데 한 사람인 야이로가 다가와 예수님 발아래에 엎드리며 간청합니다.  "저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시고, 살려 주십시오."  예수님은 기꺼이 승낙하셔서 야이로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신다. 야이로가 얼마나 신이 났을까요? 한참 가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은 장애물이 생깁니다.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여인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다가 치유를 경험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갑자기 가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무리를 돌아보며 물으십니다. 그러자 행색이 초라한 어떤 여인이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 여인은 그 동안 자기에게 일어났던 모든 사실을 고백합니다. 여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야이로는 빨리 가야하는데 라고 생각하며 조바심이 났을 것입니다. 그때에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그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때 주님은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격려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야이로의 집 안에 들어서니 아이가 죽었다고 울며 통곡하며 떠드는 소리로 시끄럽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집에 들어서시면서  "어찌하여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아이가 이미 죽은 것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다 내어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우습게 알거나 호기심으로 주변을 서성이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아무런 능력도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들을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미 숨이 넘어간 아이는 반듯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달리다 쿰!" 하고 말씀하셨다. (번역하면 "소녀야  일어나라")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죽었던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어 다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에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도르가의 시신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다비다 쿰. 다비다야 일어나라. 그랬더니 도르가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을 때 그 어머니에게 그 아들을 돌려주신 것처럼 베드로는 도르가는 그 과부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베드로가 행한 이적이 예수님이 행하신 것들과 아주 비슷합니다.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요 14:12,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베드로의 사역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이와 같은 능력이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고 있습니까?



2) 간절히 기도하며 주님의 능력을 사모하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중풍병자인 애니아를 보고 죽은 도르가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주님처럼 그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주님의 살아계심을 보여달라고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특히 도르가의 시신 앞에서 베드로는 방안에 있던 사람들을 다 내 보냈습니다. 주님과 둘만의 교제를 나누기 원하였습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주여 이 도르가를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를 인하여 수많은 성도들이 지금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하고 있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세요. 제가 이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주님만이 도우실 수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성령의 감동을 받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확신한 베드로는 도르가를 향하여 일어서리고 외쳤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죽은 도르가를 살리셨습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의지와 감정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애니아와 도르가를 일으켰을 때 베드로가 이후에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주여 감사합니다. 부족한 종의 기도를 들어주시니 감사합니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려드립니다. 하지 않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절망과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어떤 문제에 눌리고 있습니까? 죽음보다 큰 문제는 없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으며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면서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전능자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주님께 초점을 맞춘 기도, 주님의 뜻에 자기를 복종시키는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3) 겸손하게 사역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팔레스타인 전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성령의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에 베드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였더니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고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나타내기 쉽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기 쉽습니다. 더구나 베드로와 같이 엄청난 일을 할 때 더욱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겸손만이 하나님의 일을 지속적으로 감당하게 합니다.



* 사역의 열매를 보여주니 전도의 열매를 거둡니다.

베드로가 애니아에게 일어나 자리를 정돈하라 하니 그가 곧 일어났습니다. 룻다와 샤론에 사는 모든 사람이 애니아가 건강하게 치유된 모습을 보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베드로가 다비다야 일어서라 하니 도르가가 눈을 뜹니다. 손을 내밀어서 도르가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서 그 여자가 살아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도르가가 다시 산 것을 본 목격자들의 입소문을 듣는 욥바의 많은 사람들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을 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일어선 애니아를 보여주었습니다. 살아난 도르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사역의 열매를 본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성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복음의 진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삶에 이와 같은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다고 베드로처럼 병자를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려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야 세상이 교회를 주목하게 됩니다.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보고 주님께 돌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무엇을 보여주기 원하십니까?

1) 육체의 질병으로 고생하는 지체를 위하여 기도하고 돌보았더니 그가 회복되었습니다.

2)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남편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였더니 그가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3) 아직도 알지 못하는 이웃에게 계속해서 관심을 보였더니 드디어 그가 주님을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4) 전에는 교회주변만 서성댔는데 이제는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열심을 내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보여줄 것이 많습니까?



다비다야 일어서라

주님께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잠자는 심령, 미적지근한 심령들이 깨어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문제들이 해결 받고 우리의 육신이 치유함을 받고 우리를 누르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함 받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주님의 능력으로 무장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사명을 감당하기 원하십니다. 열정을 가지고 삶의 현장에 뛰어들기 원하십니다. 베드로와 같이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기쁨과 위로를 주기 원하십니다. 주님의 능력을 구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자들이 되기 원하십니다.



베드로는 성령에 충만하여 전도자로 목자로 치유자로 사역에 열심입니다. 성도님들은 어떤 사역을 감당하기 원하십니까?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와 같이 주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를 보여주며 풍성한 전도의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지체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