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바울을 돕는 자들(행 9:23-31)

Author
Myung Myung
Date
2006-10-15 16:43
Views
3896
행 9:23-31  바울을 돕는 자들



영화나 연극에는 주인공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만 있다고 작품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공을 보조하는 조연이 있고 작품을 총괄하는 감독이 있고 조명, 의상, 연기지도, 소품 준비 등등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들이 각자 맡겨진 일을 제대로 감당할 때 좋은 작품이 만들어집니다. 하나님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두 주인공을 꼽으라고 한다면 예수님 말고는 당연히 베드로와 바울입니다. 두 사람이 자라 온 환경이나 배경은 틀리지만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순종하여 자기들의 삶을 주님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드립니다. 그들의 섬김을 통하여 교회가 든든히 세워집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10장까지는 베드로가 주로 언급이 되고 11장 이후로는 바울이 주로 언급됩니다. 9장에서는 바울과 베드로가 각각 다른 무대에서 등장합니다. 바울이나 베드로가 다 위대한 사도들이지만 그들의 신앙여정 가운데는 위대한 조연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인공만 주목하지만 하나님은 그 과정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을 귀하게 보십니다. 무대의 전면에 나서든 뒤에서 보조하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체들의 연합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강단에 꽃을 꽂든, 찬양대로 수고하든,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든, 주차장에서 정리를 하든, 기도회에 참석하든 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십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어떻게 주님의 일에 참여하고 계십니까? 역할이 문제가 아닙니다.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결실의 계절에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다른 지체들과 합력하여 아름다운 열매들을 풍성하게 거두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릇입니다.

예수님의 원수였던 사울이 어떻게 예수님의 종이요, 사도가 되어 모진 고난을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율법에 의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선언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요, 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까?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주님의 음성이 사울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삼일 동안 금식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동안 사울은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님을 알고 자신을 알고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지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회개하고 죄사함을 경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다메섹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며 예수님을 좀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특징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면 행동으로 옮기는 결단력입니다. 다메섹의 여러 회당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임을 선포하였습니다. 갑작스런 그의 변화에 놀라는 무리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힘을 얻어 주님을 전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단번에 복음에 대한 모든 것을 완전하게 이해하였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유대교의 종말의 구원자들에 대한 지식, 율법에 관한 지식이 있었고,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가르침들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단편적으로 나열된 지식이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계시를 받고 보니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주제로 성경이 열리는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역을 하면서 그가 가진 구약에 대한 방대한 지식, 선교지에서 경험, 적대자들과의 논쟁들을 통하여 복음에 대한 이해가 점점 더 깊고 예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계속 교회를 핍박하며 예전의 삶을 살았다면 유대인사회에서 아주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그분께 삶의 초점을 맞추고 나니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미움을 받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교회의 핍박자가 아니라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치려고 할 정도로 헌신자가 되었습니다. 사울이 변화된 모습을 보고 유대 총독인 베스도가 말합니다. 행 26:24,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  왜 잘 나가던 유대인 청년, 촉망받는 바리새인이 그렇게 달라질 수 있습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경험이 그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알고 보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잠시 있다 사라져 버릴 세상의 영광보다 영원한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가치 있는 인생인지 회심을 통하여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결단을 하였습니다. 행 20:23-24, “어느 성읍에서든지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만 내가 내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에게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하기만 한다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 사울이 택하신 사람들을 통하여 바울로 준비됩니다.

저희들은 지난 2주 동안 9장 전반부를 통하여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떠한 회심의 과정을 거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핍박자 사울이 위대한 사도 바울로 되어가는 중에 바울을 돕는 자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사람들입니다.



1) 아나니아

다메섹의 아나니아는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피하여 다메섹에 온 유대인이 아니라 원래부터 다메섹에 살던 유대인이요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바울은 그를 가리켜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 (행 22:12) 라고 소개합니다. 주님께서 환상 중에서 나타나셔서 유다의 집에서 기도하고 있는 사울에게 가라고 하셨을 때 아나니아는 사실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한 못된 행동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가지고 가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아나니아는 지체 없이 사울에게 갑니다. 사울을 형제로 부르며 교제의 악수를 나눕니다. 사울에게 안수하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사울은 다시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사울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아나니아는 또한 사울에게 주저하지 말고 주를 믿고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권합니다. 아나니아와의 만남을 계기로 사울은 시력이 회복되고 영안이 열리고 성도 간의 교제가 회복됩니다. 주님은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보내신 이유는 다른 성도들과 교제회복을 위함입니다. 주님은 아나니아와 사울의 만남을 통하여 교회의 하나됨을 보여주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믿음의 공동체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2) 다메섹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

사울이 기력을 회복하는 그 며칠 동안 사울은 유다의 집에서 다메섹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과 교제를 나눕니다. 사울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에 대하여 사과하는 기회를 가졌을 것입니다. 형제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함께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아나니아를 비롯한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이 경험한 그리스도, 그들이 알고 있는 복음, 그 동안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성도들이 행한 놀라운 일들을 들으며 주님과 복음에 대한 영적인 이해가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확실해지는 경험을 하였을 것입니다. 다메섹 교우들과 교제를 나눈 후에 사울은 여러 회당에 들어가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임을 담대하게 전합니다.



3) 사울의 제자들

23절에 보면 여러 날이 지났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얼마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갈라디아 1:17절로부터 어렴풋하게나마 추측합니다. 자신은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되돌아갔”다고 증언합니다. 사울이 아라비아로 가서 무엇을 하였을까요? 다메섹에서 가졌던 엄청난 경험들을 고요한 사막에서 정리하면서 자신의 체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성경의 예언과 여러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였고 주님과 더 깊은 교제의 시간을 나누며 본격적인 선교 사역을 준비했을 것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낭만적 추측일 뿐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본문과 관련된 내용이 고후 11:32-33절에도 나옵니다. 자기가 다메섹에 있을 때에 아레다 왕의 총독이 그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성도들이 자기를 바구니에 담아 성벽의 창문으로 내려 주어서 그 손에서 벗어났다고 증언합니다. 아레다는 수리아 동쪽에서 남쪽으로 뻗어 있던 나밧 아랍족 왕조의 이름이고 그곳의 수도는 페트라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사울이 사막에서 조용히 묵상을 하면서 사역을 준비했다면 왜 아레다 왕의 총독이 유대인들과 합작하여 사울을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키고 있었겠습니까? 무엇인가 그가 보기에 사울이 괘씸한 행동을 하였기에 사울을 잡으려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아마 다메섹에 있던 때처럼 나밧 왕국에서도 복음을 전하였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울이 그의 전도사역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레다 왕의 총독이 유대인들의 음모에 동조하여 함께 밤낮으로 모든 성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죽이려던 원수들의 계획은 하나님이 개입하시니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본문을 보니 짧은 기간이지만 사울에게 벌써 제자가 생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의 제자들의 도움으로 사울은 성벽에 있는 창문을 통하여 광주리를 타고 내려 와 다메섹 성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위임한 권세를 가지고 위풍당당하게 다메섹으로 왔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 회심을 하고 나니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몰래 내려와야 하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이런 것을 인하여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4) 바나바

사울이 회심한 후 삼년 만에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인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6절에 보니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사귀고자 하나’ 할 때 “하나”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시도한다,’ ‘노력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문법적으로 반복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을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예루살렘 교인들과 사귀려고 계속 시도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사울이 자기가 과거에 예루살렘 교회에 대하여 저지른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고 그들의 용서를 빌며 그들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기 원하였습니다. 이제는 옛날의 내가 아닙니다. 나는 더 이상 교회를 핍박하지 않습니다. 나도 이제는 예수 믿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말해보았자 믿어주지 않습니다. 사울이 예수를 믿어? 말도 안 돼. 무엇인가 함정이 있을지 몰라. 교회를 핍박했던 사울의 과거의 모습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는 교인들은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이 된 것을 믿지 못합니다. 물론 사울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교인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래도 사울의 입장에서 볼 때 믿음의 공동체에서 왕따를 당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주님께서는 곤경에 빠진 사울에게 바나바를 붙여주십니다. 이미 잘 아시는 대로 바나바는 행 4:36절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 사람이요, 사도들로부터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명을 가진 요셉.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아 교인들 중에 가난한 자들의 구제에 힘을 쓰며 교인들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잘 돌보는 달란트가 있던 바나바가 중재자로 나서서 사울을 예루살렘 성도들과 연결시켜 줍니다. 사울이 아마 바나바를 먼저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것, 주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그리고 회심의 과정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고 예수님을 믿으며 지금이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을 말해주었을 것입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바나바는 사울의 회심이 진짜인 것을 확신하고 그와 더불어 교제의 악수를 나눕니다. 그리고 나서 바나바는 아무도 만나기 꺼려하던 바울을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소개하며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과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변호하였습니다. 바나바를 인하여 사울은 예루살렘 교우들과 교제를 갖게 됩니다.  

  

한번 어떤 사람을 나쁘게 보면 좀처럼 그 입장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울을 추천한 바나바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위로의 아들’이라는 그의 이름에 걸맞게 그는 사울의 후원자 역할을 하며 그를 받아들였습니다.

- 사울이 정말로 회심을 하였는지 판단하는 영적인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 사울의 과거를 들추어내기보다 믿음의 형제로 받아들이려는 포용력이 있었습니다.  

- 사울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상황에서 사울을 교우들에게 담대하게 추천하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과거의 행적이나 성격이 모가 나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형제나 자매들이 혹 있을 수 있습니다.

바나바와 같은 분별력, 포용력, 담대함을 가지며 평화의 사도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9) 우리 모두는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 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칭찬에 인색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활력을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5) 예루살렘 교인들

사울은 바나바가 다리를 놓아 알게 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과 자유롭게 교제를 나눕니다. 그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복음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 상당수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십자가와 부활, 승천의 산 증인들입니다. 사울은 그들로부터 예수님에 관한 귀중한 증언을 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 대부분은 다이나믹한 초대 교회 사역의 참여자들이요, 스데반의 순교와 사울이 주도가 된 교회의 박해를 잘 알고 있었고 또한 경험하였습니다. 그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교회의 모습을 전해들었을 것이요 박해에 앞장을 섰던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뉘우쳤을 것입니다. 그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사울은 신뢰를 얻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너무나 깊게 체험한 사울은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전할 것인가 하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였던 자기를 복음의 전도자로 불러주신 주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에서처럼 예루살렘에서도 주 예수를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그곳에서 헬라파 유대인들과 변론하게 되었고 사울을 당해낼 수 없었던 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담대하게 예수를 전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변론하고 그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는 모습이 스데반의 경우와 아주 흡사합니다. 사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데반이 간 길을 가고 있습니다. 사울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자 예루살렘 교우들은 사울을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갔다가 사울의 고향인 다소로 보냈습니다.

헬라 도시인 안디옥에 복음이 전파되어 교회가 놀랍게 성장하자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파송합니다. 안디옥 교회를 섬기는데 자기 혼자로서는 부족함을 느끼고 다소에 있던 사울을 부를 때까지 사울은 사도행전 무대에서 잠시 사라집니다. 사울은 늘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긴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지만 그를 부르신 주님은 위기 때마다 사울을 구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세상의 유혹과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넘어지지 않도록 피할 길을 마련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됨의 열매는 교회의 아름다운 성장입니다.

사울은 회심을 한 후 전에 원수 관계에 있었던 성도들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사울과 다메섹 성도들의 교제, 사울과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교제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임한 핍박을 인하여 흩어진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갈릴리 등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믿는 자들이 생깁니다. 어려움은 있었으나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교회는 평안한 가운데 든든히 서갑니다. 교회를 건강하고 강하게 하는 것은 단순한 숫자의 증가가 아니라 구성원들의 영적인 변화입니다.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 졌다고 (31절) 누가는 보고합니다. 갈릴리에도 교회가 세워진 것을 말해줍니다. 특히 누가는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들이라고 복수형을 사용하지 않고 ‘교회’하면서 단수형을 사용합니다. 온 땅에 흩어진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임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각 지역 교회가 하나의 영적인 공동체임을 보여줍니다. 본문에 나타난 성장하는 초대 교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세 개의 key word가 있습니다. 평안, 주를 경외함, 성령의 위로가 넘칩니다. 그 결과 교회가 든든히 서 가고 교인의 수가 더 많아집니다.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평안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성령의 위로와 격려를 경험하였습니다. 외로울 때 힘들고 지칠 때 성도들의 교제가 필요한 때입니다. 목자들은 목장 식구들의 상황에 민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똑같이 귀하게 보십니다.

1855년 4월 21일 Edward Kimball이라는 주일학교 선생님이 주일학교에서 몇 명의 아이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였는데 그 아이들 중에 Dwight L. Moody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 미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Edward Kimball이라는 이름을 오늘날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무디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사람들은 무디만 입에 오르내리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Edward Kimball도 똑같이 귀합니다. 바울은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다 잘하고 헬라 문화를 잘 이해하고 구약에 능통하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바울만큼 이방인의 전도에 잘 준비된 인물이 없었기에 주님은 이방인의 사도로 사용하셨습니다. 그가 없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기독교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로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아 지중해 연안을 다니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많은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그가 쓴 편지는 신약 성경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에 비할 때 아나니아, 바나바,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메섹 성도들, 사울의 제자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바울만한 업적을 남기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울의 사역을 충실하게 도움으로 주님이 기억하시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당신의 선한 목적에 사용하십니다. 부족하지만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히고 능력을 체험할 때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소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값 주고 사신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는 똑같이 귀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공동체의 사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감독 아래 사울이 아나니아, 바나바,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던 믿음의 형제들과 한 팀이 되어 사역을 준비하였습니다. 무대에 나타난 주연은 사울이지만   연출자와 다른 스태프들이 잘 호흡을 맞추니 사울의 사역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사역이 풍성한 열매를 거두려면 목사나 몇 사람의 리더들만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교인들이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지체의식을 가지고 하나가 되어 주님의 사역에 참여해야 합니다. 노인들도 필요하고 학생들도 필요합니다. 남자들과 여자들이 다 필요합니다. 초신자들도 필요합니다. 일세도 필요하고 일점오세도 이세도 필요합니다. 평안함과 주님을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를 체험하며 아름다운 팀사역을 통하여 주님을 감격시키는 풍성한 열매를 우리 함께 거두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