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바울의 회심 (2) (행 9:10-22)

Author
Myung Myung
Date
2006-10-08 13:36
Views
5954
행 9:10-22  바울의 회심 (2)



살다보면 충격적인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가 갑자기 자기 곁을 떠날 때, 자기 몸에 이상이 발견될 때, 하던 사업이 갑자기 어려워지거나 도산 직전에 있을 때, 부부 사이나 친구 사이나 교우 사이의 관계가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에 휘말릴 때, visa 연장이 잘 되지 않아 졸지에 삶의 터전인 미국을 떠나야할지 모를 때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하지는 않습니다. 일시적으로는 격렬한 감정에 휩싸이지만 그 때뿐으로 끝날 때가 많고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어떤 경험들은 우리의 신앙여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물론 회심하려면 어떤 극적인 일이 꼭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바울처럼 단기간에 회심의 과정이 일어나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과 처지, 성격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부름을 받아 주님께 헌신하게 된 사람들의 공통점은 회심이 단기간에 걸쳐 일어났든 장기간에 걸쳐 일어났든 근본적으로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고, 주님을 개인적으로 영접하였고, 주님께 헌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큰 사건들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는 사울의 회심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과 만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햇빛보다 강렬한 빛이 사울을 비추었을 때 사울은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고 사울은 하늘로부터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경험하였습니다. 길거리에 눈이 먼 채로 쓰러져 있는 사울의 모습을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경험은 사울의 삶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습니다. 자기가 붙잡았던 것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순간이었습니다.  다메섹에 가까이 올 때까지 자기 힘으로 당당하게 가던 사울이 막상 다메섹에 들어갈 때는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리어 걸어갑니다. 그런데 사울은 불과 며칠 동안에 회심을 하였고 위대한 사도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회심 과정을 살펴보면서 각자 현재 주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확실하게 감당하는 계기로 삼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주님은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보내십니다.

사울이 다메섹 성 안에서 삼일 동안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있을 때에 주님께서 아나니아라는 주의 제자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행 22:12에 의하면 아나니아는 매우 경건한 사람으로 다메섹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일어나라, 가라, 찾으라고 하십니다. 과거명령형을 사용하시면서 지금 당장 사울에게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부르실 때 많이 사용하시는 말씀입니다. 어디로 가라고 하십니까? 직가 (Straight Street) 곧은 길, 다메섹 도성 안에 동서로 똑바로 연결된 주요도로로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누구의 집으로 가야합니까? 유다

그 집에 누가 있습니까? 다소 사람 사울이 있습니다. 사울이 지금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도한다는 말이 현재분사로 되어 있어 사울이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다’ 또는 ‘기도에 전념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무슨 내용으로 기도를 드릴까요? 아이구 눈이 안 보입니다. 제발 눈 뜨게 해주세요 하는 기도를 드릴까요?  내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하며 본질을 찾는 기도,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의 과거’를 생각하고 가기를 주저합니다.

예수님은 사울이 기도하는 중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자기에게 와서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환상을 보여주었다고 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사울에게 가서 안수해주라는 뜻입니다. 아나니아는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주님,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해를 많이 끼쳤는지 이미 소문을 통하여 듣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잡아갈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에게 가느냐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교회 핍박에 앞장을 섰던 사울이 변화되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울은 안 돼. 그가 얼마나 지독한 사람인데. 아나니아는 ‘사울의 과거’만을 보았습니다.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권면이나 설득으로는 사울을 변화시키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주님은 ‘사울의 미래’를 보고 계십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의 과거’를 보고 있기에 가기를 망설였고 주님은 ‘사울의 미래’를 보고 있기에 아나니아에게 다시 한 번 가라고 명하십니다. 사울은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가지고 가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하시면서 복음 전파를 위하여 사울을 부르셨다고 당신의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울이 예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전하다가 많은 고난을 받게 될 것을 이미 사울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었다고 하십니다. 전에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무너뜨리는 자였으나  앞으로는 교회를 세우는 자가 된다고 하십니다.  

  

아나니아의 파송은 사울과 교회의 관계회복을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하여 눈이 먼 사울의 눈을 직접 다시 뜨게 하실 수 있고, 환상을 통하여 사울에게 장차 행할 일을 얼마든지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가기를 꺼려하는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굳이 보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울과 교회의 관계는 불편한 관계를 넘어서서 원수 관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관계를 회복시킴으로 사울도 교회의 일원이 되어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감당하기 원하셨습니다. 사울을 향한 주님의 뜻을 알게 된 아나니아는 지체 없이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으로 갑니다. 집안에 들어가니 시력을 잃은 사울이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형제로 부릅니다. 겉모습만 보아서는 사울이 진짜로 회심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를 했다는 것은 사울도 엄연히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일원, 즉 주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주의 복음을 들고 힘을 합하여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주님의 소원이 아나니아와 사울의 만남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안수를 받은 후에 사울이 회복됩니다.

아나니아와 사울의 첫 만남에서 아나니아는 사울은 믿음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발아들일 뿐 아니라 사울에게 이 공동체가 하나님의 능력에 인침을 받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1) 사울에게 손을 얹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사울은 다시 보게 됩니다.  

2) 사울이 육신의 눈만 회복된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 회심하기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이제 보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관점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보게 된 것은 사울이 주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행 22:16을 보니 “이제는 왜 주저하는가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고 권합니다. 사울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이 됩니다.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니 사울이 힘을 얻습니다. 사울이 강건해지는 그 며칠 동안 유다의 집에서 다메섹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과 귀중한 교제를 나눕니다. 그들은 복음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기도하였을 것이다. 이미 사울은 지난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면서 예수는 누구신가 그 동안 알거나 배운 모든 구약의 지식들을 방금 만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결시켜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제 아나니아를 비롯한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이 경험한 그리스도, 그들이 알고 있는 복음, 그 동안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성도들이 행한 놀라운 일들을 들으며 주님과 복음에 대한 영적인 이해가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확실해집니다. 사울이 가진 구약의 방대한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보게 되니 성경이 열립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달아집니다. 예수는 그저 갈릴리 지방에서 일단의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던 이단의 두목이 아니라 하나님이 전부터 선지자들을 통하여 미리 예언하신 약속된 메시아요, 때가 이르매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며칠 동안 형제들과 나눈 교제는 그의 사역에 귀중한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아나니아와 다른 형제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믿음의 공동체와의 교제를 소홀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 예배 참석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주중에 주의 이름으로 소그룹에서 모여 함께 기도하고 배우고 삶을 나누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성도의 궁극적인 관심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기가 며칠 전까지 핍박하던 그리스도, 그러나 그가 누구신지 알고 나니 그를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사실 전도는 오래 믿은 사람들보다는 이제 주님을 새롭게 만난 사람들이 더 잘합니다. 주변에 안 믿는 사람들이 많고 자기가 체험한 구원의 감격이 신선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곧 여러 회당에 들어가 전도하는데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1)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합니다.

2) 구약 성경을 이용하여 예수님이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임을 증명합니다.

회당에서 사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불과 며칠 사이에 사울에게 일어난 갑작스런 변화를 인하여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핍박자 사울이 전도자 사울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을 핍박하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그가 여기 온 것도 그들을 잡아서 대제사장들에게로 끌고 가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제 어찌된 일이지?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기 위하여 혹시 거짓으로 유인 전술을 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사울은 시간이 흐를수록 영육 간에 더욱 힘을 얻으며 예수는 그리스도임을 증명함으로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구주가 되십니다.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사울이 예수는 그리스도라 담대히 증거하였던 것과 같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도의 열매를 맺도록 “주여 내게도 다시 한 번 구원의 감격과 처음 사랑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기도하고 또한 애를 써야 합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눈에서 비늘이 벗겨짐으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사울을 위하여 예비해두신 아나니아를 통하여 사울에게 안수하게 할 때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다고 합니다. 그동안 비늘이 그의 눈에 끼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비늘에 낀 상태에서 제대로 진리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의 뜻과 상관없이 열심을 가지고 한 행동이 도리어 주님을 대적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비늘이 벗겨지기 전 사울이 붙들었던 하나님은 창조주요 인생의 주관자 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사울 개인의 신념이 빚어낸 하나님의 허상에 불과했습니다. 바른 영안을 가지게 되자 자신이 핍박했던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늘이 벗겨진 후에 사울은 비로소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죄악됨, 부족, 한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행 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 하나님을 향하여 비늘이 벗어진 후 사울은 비로소 바울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히브리어로 ‘소망’이란 뜻을 가지는데 바울은 ‘작다’는 뜻을 가집니다. 전에는 자기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소망을 가졌는데 비늘이 벗겨지고 보니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스스로 작은 자로 여기고 교만한 삶을 내려놓았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막 8:34) 는 제자도의 삶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사울의 회심은 3 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1) 통찰력 (insight)을 가지는 단계

회심은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면서 자신을 보는 통찰력으로 시작됩니다. 통찰력은 방향을 제시하고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 그림을 제공합니다.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남으로 하나님을 따르려는 유대인으로서 자신이 누구인지 이해하는데 근본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사울은 자기의 출신이나 배경으로 볼 때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자랑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빌 3:5) 그리고 율법을 충실하게 그리고 엄격하게 지키면서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며 하나님의 일을 충실하게 수행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거짓 메시야로 보았습니다. 기독교인의 생각이나 진리는 이단이요 위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없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의 만남으로 이 모든 생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동안 자신에 대하여 가져왔던 생각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주님의 말씀을 인하여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보니 자신이 교회를 박해한 것이 예수님을 박해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 때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예수가 아니라 자기가 경험하고 느끼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의 방향이 예수님께 향하게 되고 그분께 삶의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주님이 신앙의 중심이 되십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대면하면서 사울이 두 가지를 묻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who are you?) (행 9:5)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what shall I do?) (행 22:10) 주님께 묻습니다.



다메섹 경험을 통하여 사울은 진리를 보았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에 대한 이해 속에서 자신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상태를 보았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기독교를 새로운 빛 아래 보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자기에게 어떤 반응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통찰력은 회개의 전조입니다. 통찰력 없이 옛 것을 버리고 새 것을 따르겠다는 결단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게 됨으로 그에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각자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삶을 살고 있는가?  하나님은 누구신가? 나는 그분을 바로 이해하고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고 있는가? 그분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2) 방향 전환 (turning)의 단계

회심의 두 번째 요소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해하면서 얻어진 통찰력을 근거로 한 방향 전환입니다. 방향전환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무엇으로부터 시작하여 무엇으로 변화되는가? 회심은 단순히 과거의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예수님과 만나고 그분께 돌이키지 않고는 진정한 의미의 회심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울은 주님을 만난 후 놀라운 변화를 경험합니다. 사울은 교회를 박해하다가 교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던 사울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사울이 유대교를 전적으로 포기하고 새로운 신학을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새로운 빛 아래서 유대교를 보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가 바로 나사렛 예수요 그분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주가 되시는 그분께 자신을 복종시킵니다. 이제 신학의 중심이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분명히 알고, 예수님의 박해자였던 사울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3) 변화 (transformation)의 단계  

전환 단계는 그 사람을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합니다. 그러나 방향 전환은 새로운 길을 본격적으로 추구할 때까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 단계는 예수님에 대한 반응에서 나온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발견하고 옛 삶을 버린 사울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삶을 추구합니다. 사울은 주님을 만나고 난 후 즉각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와 연결이 되고, 세례를 받고, 자기의 믿음을 공포함으로써 새로운 공동체와 연결이 되고 새로운 사명을 가지고 새로운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주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작정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쏟았던 열심을 복음을 전하는데 쏟기로 작정합니다. 장기적으로는 사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을 받아들입니다. 더 이상 박해자가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부활의 증인으로 사도의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동떨어진 삶을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이 세상에서 보이는 것만 추구하기 위하여 힘을 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니 함부로 행동합니다. 우리의 경건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므로 시작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로 볼 때에 우리는 영원한 것을 위하여 우리의 생을 사울과 같이 아낌없이 드릴 수 있습니다.



사울의 회심 경험에 나타난 세 가지 요소가 행 26:20에 한 문장으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음으로 온 유대 지방 사람들에게 나아가서는 이방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고 전하였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은 제대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빛이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보니 이전까지 자기가 살아오던 삶은 볼 가치가 없었습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질 때 사울은 비로소 보게 되었습니다. 전에 그렇게 소중하다고 붙들었던 것은 다메섹에서 다 버리고 보다 귀한 것 보다 가치 있는 것, 영원한 것을 위하여 자기 생을 드리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비늘이 있는 한 진리를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나의 눈의 비늘이 벗겨질 때, 나의 영안이 떠질 때 나의 실체를 바로 깨닫게 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비로소 참된 헌신의 삶을 살게 됩니다.

어떤 비늘이 우리의 시야를 가리고 있습니까? 그것을 벗겨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를 하려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확실히 알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행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회개하려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깨닫는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눈에 있는 비늘이 벗겨져야 합니다. 통찰력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주님을 바로 보고 그분께 우리의 삶을 의탁할 때 그 삶이 가치가 있습니다. 열매가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은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함으로써 새롭게 시작한 삶에 변화가 나타나야 합니다. 사울의 회심은 자기에게 일어난 것이 사실임을 받아들이고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사도로서 살면서 완성되었습니다. 사울의 헌신적인 사역은 자기의 회심 경험이 진짜인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다메섹에 이르기까지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복음이 활발하게 전파됩니다. 특히 사울은 이방인 전도를 위한 사명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게 됩니다. 복음 전파의 역사는 지금도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을 통하여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저와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회심의 과정이 사울처럼 단기간에 일어났든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처럼 장기간에 걸쳐 일어났든 그 기간이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과정의 회심의 과정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통하여 주님을 알고 나를 알 뿐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며 각자를 향한 주님의 뜻을 깨달으며 순종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풍성한 열매들을 삶의 현장에서 거두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