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바울의 회심 (1)

Author
Myung Myung
Date
2006-10-01 13:23
Views
5670
행 9:1-9 사울의 회심 (1)



우리의 생각, 우리의 행동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닙니다. 때로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많은 경우에 본인이 잘못도리 수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 자신은 잘해보겠다고 선의로 시작한 일이 엉뚱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피해를 줄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자기 잘못을 깨달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자기는 여전히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계속 자기의 행동을 고집한다면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집니다. 집에서 가장이 소리나 지르고 식구들을 윽박지르면서도 자신은 가장이 책임을 다한다고 생각하면 문제입니다. 직장에서 상사가 아랫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모욕을 주며 부리려고만 하면서도 자신은 유능한 상관이라 생각한다면 아랫사람들에게는 고통이 됩니다. 교회에서 목회자나 평신도 리더가 자기주장만 내세우고 고집을 피우면서도 자기가 교회를 제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면 교회생활에 기쁨이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는 것을 깨달아 항상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본문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면서도 자신은 하나님께 보시기에 아주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다가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된 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사울입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의 뜻은 “희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진멸하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겠다는 엉뚱한 희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부터 비로소 의미를 가지기 시작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 중 제일 오랜 산 사람은 969세에 죽은 므두셀라 입니다. 그가 죽은 때를 계산해보면 노아의 홍수가 일어났을 때입니다. 홍수가 아니었다면 좀더 살 수 있었을 텐데 홍수와 함께 그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노아와 같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이 아니었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별로 의미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모세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 90:12) 하며 인생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의 행한 모든 것을 가지고 주님이 판단을 하십니다. 그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면 주님을 알고 그분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기전까지 세상적으로 볼 때 내세울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빌 3:5-6,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런데 일단 주님을 만나고 보니 그가 자랑하던 것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7-11) 사울이 예수님을 알기 전의 삶은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었을지 몰라도 주님 보시기에 별로 가치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 회심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제자도는 부르심과 따름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부르실 때 기도하시는 가운데 열둘을 택하시고 그들을 부르시니 그들이 따랐습니다. 사울도 예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부르심은 아주 극적입니다. 사울이 자원하여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열심히 핍박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사울에게 찾아오십니다. 고린도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 서두에 보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한 개인의 삶에 개입하실 때 얼마나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회심 사건을 행 9:1-9, 22:6-16, 26:12-18 세 번에 걸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회심은 단순히 바울 한 사람의 회심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단지 예루살렘의 지방 종교가 아니요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민족 종교가 아니라 만민에게 구원의 도를 전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교회사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사람입니다. 엄청난 핍박자에서 위대한 전도자로 바뀌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신앙생활에 도전을 받을 뿐 아니라 사울과 같은 헌신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본문은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예수를 핍박했던 사울이 바로 그 예수님에 의하여 무릎을 꿇고 마는 극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의 회심과정을 모델로 삼아 나도 바울과 같이 화끈한 경험을 했더라면 신앙생활을 잘 했을 텐데 하면서 아쉬워합니다. 구원파 사람들은 바울과 같이 구원을 받은 날짜를 알지 못하면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불안하게 합니다.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가 회심을 경험하게 되는데 사람에 따라서 그것이 바울이나 어거스틴처럼 갑자기 일어나는 경우도 있고 서서히 일어나기도 합니다. 미국 기독교 단체에서 조사를 했는데 바울이나 어거스틴 같이 극적인 회심의 경험을 한 사람들은 20%를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머지 80%이상은 그런 체험을 한 적이 없거나 언제 중생 했는지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점진적으로 주님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과 같은 극적인 경험을 통하여 주님을 알게 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언제 중생을 체험했는지 디모데가 언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자기가 경험한 것만이 진짜인 것처럼 생각하거나 개인 경험을 누구나 가져야 될 것처럼 일반화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회심 이후의 공통적인 현상은 성화의 삶입니다.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말하는 것이나 행동에 변화가 나타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 사울은 핍박자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그저 이단 중의 하나요, 민심을 소란하게 하고 자기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으로 생각했기에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청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실수를 하였습니다. 사울도 바리새파에 속한 유대인지라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구주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도리어 조상들의 가르침과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붙잡아서 옥에 가두거나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회심하고 난후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보며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하였을 때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 1:13)라고 고백합니다.  



사자가 토끼 몇 마리 잡아먹어서는 양이 안찹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사울의 모습입니다.  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지켜보면서 죽어 마땅한 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내친 김에 교회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에 참여합니다.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1절)  원어를 보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로 호흡을 한다라고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에 대한 적대심이 너무도 크기에 그가 숨 쉴 때마다 증오의 감정이 넘쳐난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많은 교인들을 감옥에 처넣었지만 그것으로만 만족하지 못합니다. 행 26:11에 보면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 가서 핍박하였”다고 자신의 모습을 회고합니다. 아예 이 기회에 박해를 피하여 예루살렘 밖으로 도망간 예수쟁이들까지 다 없애 버려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믿는 자들 속에서도 혈기를 부리고 신경질을 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모습을 간혹 보게 됩니다. 이유야 어떻든 이유가 어떻든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모습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원망하고, 욕하고, 비판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도리어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을 베풉니다.



바울의 행동을 보면 세상의 지식이나 경험이 반드시 우리를 지혜롭게 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울보다 율법에 대하여 많이 알고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을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사울은 그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핍박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을 따르는 충실한 유대인’으로 생각했습니다. 나보다 하나님께 열심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그것이 회심 전의 사울의 태도입니다. 주님의 관점에서 보는 영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울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말이나 행동이 내 개인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인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조명을 받을 때에만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한 것으로는 양이 차지 않고 내친 김에 사방으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붙잡아 들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을 찾아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전달할 공문을 요청합니다. 핍박을 피하여 다메섹으로 피한 예수쟁이들을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묶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의도입니다. 대제사장은 팔레스타인 지역 뿐 아니라 그 경계를 넘어선 인근 지역의 유대인들에게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다마스커스는 수리아 지방의 큰 도시로 특히 데가볼리로 불리는 열 개의 도시 중 하나입니다. 다마스커스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어서 회당도 여럿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써준 공문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다마스커스로 갑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커스까지는 약 240km 쯤, 즉 150마일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Barstow 까지 가기만 한 거리입니다. 그 당시 교통도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던 때에 가는 데만 일주일 가까이 걸리는 먼 거리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머릿속에는 교회를 박멸 하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따진다면 사울을 당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확장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기에 사울이 없애 버릴 수 없었고, 도리어 사울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1)  초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납니다.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먼저 하늘로부터 강렬한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춥니다. 사도행전 22장에 의하면 때는 정오인데 갑자기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사울을 비추니 그는 그 자리에서 땅바닥에 엎드러집니다.  엎드러졌다고 할 때 사용한 핍토우 라는 단어는 ‘떨어지다, 넘어지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쟁이들을 모두 붙들어 오겠다고 의기양양하던 사울이었는데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 시 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요일 1:5,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이 빛으로 나타납니다. 눅 2:35  시므온이 성전에 들어온 아기 예수를 안고 부르는 찬송,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표현됩니다. 두 번째로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환상이나 음성은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금방 압니다. 빛이 비취고 소리가 들리니 사울은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엎드러진 사울에게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리스도를 대적한 사울에게 쏟아붓는 책망과 분노의 음성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가 과거에 무슨 일을 행했든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사랑과 긍휼이 넘친 음성입니다. 사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데 초자연적인 사인을 보여 주신 것은 사울의 부르심이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2)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은 만나기 전에 바울은 예수님과 자신에 대해 잘못 이해하였습니다. 자신은 율법을 충실하고 엄격하게 따랐기에 의로운 사람이요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자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질문 한 마디에 그가 가졌던 생각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그 질문이 무엇입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자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 있고 자기는 하나님의 뜻대로 지금도 가고 있다는 그의 생각이 잘못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는 사울은 새로운 빛 안에서 전혀 새로운 각도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한때 가치 있다고 여기던 것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회심 전에 기독교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그 사상은 이단이요 위협이요 진멸해야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회심 하면서 그가 가졌던 생각들이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예수님을 거짓 메시야로,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충실히 수행하는 자로 생각하였는데 다메섹 도상의 경험을 그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일부 유대인들이 믿고 좇는 이 새로 생긴 도는 이단임에 틀림이 없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확신하면서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자기 딴에는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을 가지고 열심히 한 행동인데 주님의 평가는 어떠합니까? 나를 핍박하는 예수. 하나님이 자기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신다니 사울에게는 엄청난 충격입니다. 가슴이 뛰고 이가 떨리는 상황입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지 않았겠습니까? 지금까지 바울은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울이 그 예수를 핍박하였다는 것은 사울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였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도들은 그리스도가 머리된 몸의 지체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지체가 되는 성도들을 핍박한다는 것은 곧 머리가 되시는 예수를 핍박하는 것이 됩니다.



엎드러진 사울에게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리스도를 대적한 사울에게 쏟아붓는 책망과 분노의 음성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가 과거에 무슨 일을 행했든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사랑과 긍휼이 넘친 음성입니다.

주님이 지금 우리 각자에게 나타나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시겠는가?  나는 네가 속을 썩이는 예수라. 나는 너희 삶에 별로 우선순위가 높지 못한 예수라.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나는 너의 충성됨을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예수라.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아마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과의 만남은  사울에게는 일생 동안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1)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계기가 됩니다.

사울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려고 하였습니다.  빌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그렇게 의지가 강한 사울을 꺾는 것은 주님의 능력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사울은 자기의 의를 자랑하려는 자였으나 강렬한 빛과 함께 들려진 주님의 음성은 사울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예수님은 사울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랑을 가지고 그를 두 번씩이나 부으십니다.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주님의 말씀은 사울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깊게 파고드는 살아 있는 능력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그 음성이 계속하여 사울의 귓전을 울리며 그의 마음을 찔렀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열심을 가지고 지금까지 한 행동이 실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딤전 1:15, “내가 죄인 중의 괴수니라”는 고백을 합니다.



2)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계기가 됩니다.

사울과 함께 한 무리들이 사울에게 비치는 햇빛보다 강렬한 빛을 보기는 하였지만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스런 모습은 보지도 못하고 주님이 사울에게 하신 말씀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빛을 쪼이시고 음성을 들려 준 것은 전적으로 바울 한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빛으로부터 차단되고 음식으로부터 차단 된 상황, 세상과 차단된 상황에서 사울은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빛을 보았습니다. 아내의 치맛자락 붙잡고 구원받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나 자식의 믿음과 기도가 구원에 이르는 것을 도와 줄 수는 있으나 결국 구원은 우리 각자의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예수를 시인할 때만 얻어집니다.



3) 새 사람으로 변화되는 계기가 됩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을 떠날 때는 다메섹에 있는 모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오려고 기세등등하게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막상 다메섹에 들어갈 때는 보지 못하므로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니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강렬한 영광의 빛을 인하여 아무 것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어두움에 가두신 것은 자신에게 나타난 분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했고 동시에 자기의 살아온 여정을 돌아보게 합니다. 사울은 그 후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였습니다. 그가 단순히 식사를 중단하고 농성을 벌이거나 시위를 한 것이 아닙니다. 11절에 보면 “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라고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삼일을 지나는 동안 사울은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돌에 맞으면서도 평안한 얼굴을 하고 하나님께 중보기도 하던 스데반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열심히 핍박하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삼일 동안 그가 알고 있는 구약 성경이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깨달아지고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나사렛 예수임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9:19-20 “며칠 있을 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9:22, “예수는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사울은 회심과 더불어 다메섹 성에 들어가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해서 예루살렘으로 후송하려던 박해자 사울을 주님께서 돌려놓으시니 다마스커스 성에 들어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택하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바울의 회심은 즉흥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준비시키고 훈련시키셨다가 때가 되니 부르셨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이 사울에게는 너무도 분명하였기에 그는 남은 자신의 인생을 주님을 위하여 아낌없이 드릴 수 있었습니다. 전에는 율법에 대한 열심을 자랑하던 교회의 핍박자였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가졌던 인생관이 바뀌고 삶의 목표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주변과 고립된 상황에서 자기가 만난 그리스도와 그 음성을 생각하며 성경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울에게 나타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방인을 향한 선교의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교 시나리오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유대 땅과 사마리아를 거쳐 소아시아와 유럽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예루살렘 복음화에 헌신하였기에 예루살렘에 많은 유대인 결신자를 얻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계기로 흩어진 교인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제 사마리아를 넘어 땅끝까지 이르는 선교가 시작되어야 했는데 예수님의 선교 명령을 이방 땅에서 본격적으로 수행할 적격자로 사울을 택하셨습니다.



* 성령 충만한 사도들이나 성도들이 많은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열심히 핍박하던 사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선택되었습니까?

그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열두제자들도 성령에 충만한 신실한 종들이었지만 이방인의 선교에는 바울보다 더 적합한 인물은 없었습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즉 예루살렘이 아닌 외국 땅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였기에 로마 제국 어디든지 아무런 제한 없이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기의 누나가 있는 예루살렘에 와서 그 당시 석학이라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엄격한 율법 교육을 받고 바리새인이 되었습니다. 즉 바울은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다 잘하는 요즘으로 치자면 이중 언어에 능통한 자요, 헬라 문화를 잘 이해하는 자요, 철저한 교육을 통하여 구약 성경을 잘 아는 자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에 잠시 교회의 핍박자가 되기는 하였지만 하나님이 그의 방향을 돌려놓으니 위대한 이방인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세 번에 걸친 선교 여행을 통하여 그는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여 많은 이방인들을 주님께 인도하였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개척하였고 그가 교회에 쓴 편지들은 바울서신으로 신약 성경의 반이나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배운 학문을 사용하게 하여 이제 생겨난 지 얼마 안 된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그의 서신들을 통하여 정리하게 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이 이방인의 전도를 위하여 준비한 그릇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은 전도자로 목사로 신학자로 준비시켜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도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된 것이 아닙니다.  회심의 과정에서 사울이 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울을 돌이키게 된 근거는 하늘로부터 임한 빛입니다. 이는 회심이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고전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기에 복음 전하는 것을 자랑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아오는 것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영안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영적인 민감함은 어디서 나옵니까?  성령 충만. 성령 충만은 기도와 말씀을 통한 경건의 훈련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을 모르던 사울에게 찾아오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어두워진 눈이 밝히 보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던 눈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눈이 떠지기를 원하십니다. 빛이 되시는 주님, 빛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울이 회심하게 된 것은 그의 결단이나 선택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바울과 같은 열심을 가지며 주님이 기뻐서 사용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에도 말씀을 배우는 것도 봉사에도 전도에도 열심을 내셔서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하게 맺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