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병거로 나아가라 (행 8:26-40)

Author
Myung Myung
Date
2006-09-24 14:28
Views
3833
행 8:26-40 병거로 가라



지난 8월에 제 딸이 타고 다니던 Corolla tire에 못이 박혀 바람이 빠져서 그것을 고치려고 토요일 오후 집 앞에 있는 Costco를 갔습니다. 거기서 이웃 교회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분과 몇 마디를 나누고 있는데 그 뒤에서 어떤 노부부가 다가옵니다. 낯이 익은 얼굴 같아서 그 목사님에게 저분들이 누구냐고 물으니 Baltimore에 계신 조영훈 목사님 부부인데 이제는 은퇴하셨고 휴가차 잠시 자기 집에 들렀다고 합니다. 제가 1987년도부터 일 년 동안 Johns Hopkins University에 일을 할 때 학교 앞에 있는 볼티모어 연합감리교회를 다녔는데 그 때 담임목사님이었습니다. 이웃교회 목사님이 차를 고치는데 조목사님 부부가 심심해서 그저 따라왔는데 나를 만났다고 합니다. 거의 20년 만에 그것도 Costco tire shop에서 조목사님을 만나다니 우연치고는 너무 신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나 반가워서 집으로 모시고 그때의 추억을 나누었고 다음날 주일설교까지 조목사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 교회를 다닐 때 저희 부부는 주로 대학원 유학생들로 구성된 한 소그룹에 참여하였는데 조목사님이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스타일이 나중에 신학교에 와서 보니 귀납법적 성경공부였습니다. 조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교우들에게도 귀납법적 성경공부를 체계적으로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난 8월 셋째 주부터 시작을 하였습니다. 지난 주 노회원 수양회를 갔을 때도 이 방법을 소개하니 특히 선교사님들이 깊은 관심을 보이며 자기들의 선교지에도 와서 현지인 지도자들을 위한 세미나를 인도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 목사님과의 만남은 귀납법적 성경공부에 대한 저의 관심을 다시 한 번 불러일으키며 교우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깊고도 진지하게 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우연처럼 여겨지는 일들이 종종 벌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행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뜻에 대한 분별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순종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받음에 따라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진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합니다. 그 대표적인 전도자가 헬라파 유대인인 빌립입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빌립이 풍성한 전도의 열매를 거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면서 우리 각자의 전도의 삶이 한 차원 upgrade 되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1)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였습니다.

사도들을 통하여 이루어진 일을 기록하였다 하여 사도행전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이 사도들의 배후에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성령 충만하게 하시고 능력을 주실 뿐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이들의 사역을 인도하시고 간섭하십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진 일을 기록하였다는 의미로서 성령행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본문에 보니 빌립은 완전히 성령에 이끌리어 사역을 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역의 모델을 이미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사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메시야로 올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이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예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한 사건은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야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항상 성령 충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을 뿐 아니라, (눅 1:20)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셨습니다. 눅 4: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행 10:38,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께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사도들을 비롯한 성도들이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 충만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입니까?  행 2:4절에 의하면 “성령이 시키는 대로”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사도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를 피하여 흩어진 성도들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복음이 전파됩니다. 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는 말씀처럼 복음의 불길이 어느 방향으로 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대로 퍼져갑니다.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도 전도전략을 세우고 그 전략에 따라 전도자들을 보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흩어진 성도들을 통하여 어느 지역에 복음이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으면 사도들을 보내어 마무리를 지으며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의 하나됨의 보여줍니다. 오직 성령만이 전도 사역을 주관하십니다. 성도들은 그저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움직이고 가는 곳마다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빌립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아주 민감하였습니다. 빌립의 놀라운 사역과 그 기동성은 성령의 능력에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의 이름이 “비둘기가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palomar로 된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교우들은 palomar라는 이름에 걸맞게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아야 하고, 성령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사역을 감당해야 하고, 성령의 열매를 삶 속에서 맺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리더십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사용하실 때 보통 세 가지를 시험하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내가 지금 너를 시험한다고 말씀하지 않고 불쑥 시험이 옵니다. 첫 번째가 진실성 시험 (integrity check)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 얼마나 삶이 진실한지 시험하십니다. 예를 들면 야곱이 아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였지만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고 왕궁에서 주는 식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환관장에게 식물만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순종 시험 (obedience check)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시는지 시험하십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고 모리아 산으로 이삭을 데리고 감으로 하나님의 칭찬을 받습니다. 세 번째로 말씀 시험 (word check).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삶에 적용하려는 지를 시험하십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가 세 번에 걸쳐 구약에 나오는 부정한 음식을 먹으라는 환상을 봅니다. 그 후에 고넬료에게 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사마리아에서 놀라운 전도의 열매를 거두고 있던 빌립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말합니다. 지금 당장 일어나서 남쪽으로 나아가서 예루살렘으로부터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계속해서 가거라. 그 길은 광야 길이다. 가사는 블레셋의 다섯 성읍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성읍으로 예루살렘에서 약 50 mile 쯤 떨어져 있습니다. (수 13:3, 삼상 6:17, 렘 25:20). 가사는 애굽과 메소보다미아 간의 교통과 통상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광야를 나타나고 시나이를 지나 애굽으로 가든지 남 아라비아에 이르는 길이 지나갑니다.



그때 빌립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사마리아에서 열심히 전도했더니 수많은 남녀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몰라요. 사마리아 성에서 전도의 열매가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에서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조금 더 머물면 안 될까요? 제가 꼭 가야합니까? 가사는 사마리아보다는 예루살렘에서 더 가깝고 그 성에는 사도들도 있는데요. 또한 여기서부터 가사까지는 거리도 멀고 그곳으로 가는 길은 험한 광야길인데요. 빌립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따지지 않았습니다. 빌립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지시하시니 빌립은 주저하지 않고 팔레스타인 끝에 위치한 가사로 내려갔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은 하나님께 yes man들입니다. 자기의 형편이나 처지를 인하여 핑계를 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아멘으로 받고 즉시로 순종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철저하게 자기를 낮추시고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때때로 지금 내가 생각하고 계획하고 있는 것과 달라 순종하기 어렵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여 더 큰 계획을 가지고 자신의 뜻을 펴시는 분입니다. 사 55:8-9,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지시였지만 빌립은 그대로 순종해서 가사로 내려갔다가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한 사람을 통하여 유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리에 있는 에디오피아까지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셨습니다.

  

빌립이 내시에게 세례를 베푼 후에는 금새 사라졌습니다. 성령에 이끌리는 빌립이 이번에는 아소도에 나타났습니다. 빌립은 그야말로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아소도는 구약에서 아스돗으로 불립니다. 아스돗도 블레셋 사람의 다섯 성읍 중 하나입니다. 원래 아낙 사람의 성읍이었으나 (수 11:21) 블레셋 사람이 점령하였습니다. 이스라엘로부터 빼앗은 법궤를 이 성읍의 다곤의 당에 안치하였다가 혼이 난 경험이 있습니다 (삼상 5:1-8). 아스돗은 가사와 욥바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빌립은 유대 서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내 갈릴리에 위치한 가이사랴에 정착합니다. 가이사랴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로 헤롯이 로마 황제인 가이사아구스도를 기념하여 `가이사랴'라고 성읍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극장, 원형연기장(圓形演技場), 경기장, 수로, 황제 예배의 대신전 등을 갖춘 전형적인 헬레니즘 도시였습니다. 로마 총독과 그의 군대가 이곳에 주둔하였습니다. 헬레니즘도시이므로 헬라파 유대인인 빌립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빌립이 가이사랴에 머물게 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가이사랴에 있는 빌립의 집을 방문합니다. 행 21:8-9, “이튿날 우리는 그 곳을 떠나서 가이사랴에 이르렀다. 일곱 사람 가운데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예언을 하는 처녀 딸이 넷 있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내시를 전도하고 다시 성령에 이끌리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는 빌립. 누가는 왜 빌립의 분주한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까? 롬 13:11,“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습니다.” 한 심령이라도 멸망치 않고 다 구원에 이르기를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빌립의 분주한 발걸음에 담겨져 있습니다. 로마서 10장에 보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한 것과 같습니다...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 하나님은 한 동네뿐 아니라 한 개인의 구원에도 동일하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는 사마리아에서 수많은 남녀를 회심시키는 것이 가사에서 한 사람 붙들고 복음 전하는 것보다 효율 면이나 열매 면에서 더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실까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든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든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중요합니다. 설령 우리가 한 일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만 알아주시면 된다는 자세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달란트 비유를 통하여 주신 교훈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열매를 인하여 칭찬하실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빌립이 가사를 향하여 열심히 가는데 마침 이디오피아 사람 하나를 만납니다. 그는 이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고관으로 그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내시였습니다. 내시는 예배를 드리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마차에 앉아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때 눈으로만 조용히 읽지 않습니다. 보통은 옆에 있는 사람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 소리로 읽습니다.

빌립은 광야 길을 가면서 왜 하나님이 이런 광야로 인도하실까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귀에 익은 성경구절을 읽는 소리가 들립니다.



넓은 광야에서 빌립과 내시가 만난 것이나, 그 내시가 읽고 있던 성경이 하필이면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 담긴 이사야 53장 인 것은 어찌 보면 우연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그 내시를 구원하기 위하여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이 오기 전에 하나님은 빌립과 내시가 만날 시간과 장소를 미리 정하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까지 하나님의 절묘한 계획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만난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때가 되매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가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빌립의 전도는 내시 한 사람에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평범한 시민이 아닙니다. 이디오피아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그 가족 뿐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하여 예수님을 알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전도자들이 아프리카에 위치한 이디오피아까지 굳이 가지 않더라도 그 내시 때문에 이디오피아에 이미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성령이 빌립에게 "마차에 바싹 다가서거라" 말씀하십니다. 주저하지 말고 지금 당장 마차에 가까이 가라고 하십니다. 빌립이 그 사람에게 어떻게 갔습니까? 달려갔습니다.  "지금 읽으시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빌립이 물으니  "나를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올라와서 자기 곁에 앉기를 빌립에게 청합니다. 빌립은 하나님께서 왜 자기를 이곳까지 보내셨는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자기 앞에는 진리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는 구도자가 있습니다. 내시는 빌립의 등장을 크게 기뻐하며 자신과 빌립의 사회적 신분의 차이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자기 병거에 태워 곁에 앉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내시가 마음을 열어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를 시켜 놓으셨습니다. 빌립 또한 예수님을 설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벧전 3:15-16,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렇듯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와 택함을 받은 사람들의 순종을 마주쳐서 일어납니다.



내시가 읽는 구절이 어디에 나옵니까? 이사야 53:7-8.  내시가 빌립에게 묻습니다. "예언자가 여기에서 말한 것은 누구를 두고 한 말입니까? 자기를 두고 한 말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까?"  빌립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어 이사야 53장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을 알리는 기쁜 소식을 열심히 전합니다. 유대교에서는 이사야 53장을 하나님의 고난 받는 종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야가 고난을 당한 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승리의 메시야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영광은 신약 뿐 아니라 구약의 핵심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정치적으로 이해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의 낮고 겸손한 삶과 십자가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은 모세오경과 역사서, 시가서, 선지서에 이르기까지 장차 오실 메시야의 수난과 속죄의 영광을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빌립은 이 복음을 이해하였고 확신과 열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진리를 증거하였습니다.



빌립의 말을 들으면서 내시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들이 길을 가는데 물이 있는 곳을 지나갑니다.  “야 여기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 받고 싶습니다.” 내시가 간청합니다. 빌립은 마차를 세우게 하고, 내시와 함께 물로 내려가서 그에게 세례를 줍니다. 이디오피아에서 온 흑인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쓰십니다. 답답해하는 사람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영적인 갈증을 채워줄 수 있는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시가 빌립을 통해 세례를 받고 기쁨이 넘쳐서 자기 길을 간 것처럼 하나님은 준비된 우리를 통하여 목마른 자를 기쁨이 충만한 자로 바꾸기 원하십니다.



4) 선입관이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복음 전파는 민족적, 문화적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빌립이 왜 사마리아에 가서 전도하였을까요? 히브리파 유대인들처럼 사마리아 사람들을 꺼려하는 마음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라는 말씀에 충실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열린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이적을 동반한 말씀 선포를 통하여 풍성한 전도의 열매를 거둡니다. 빌립의 전도를 통하여 수많은 결신자가 생깁니다.



내시는 당시 유대교 정결법상 가장 부정하다고 여겨진 이방인이요, 신체적 결함이 있는 자였지만 하나님은 이방인 내시를 사랑하셔서 복음을 듣게 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빌립이 가사로 내려가다가 만난 내시는 이디오피아에서 왔으니 흑인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에게 다가가라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을 때 빌립은 그에게 주저하지 않고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내시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디오피아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기에 결과적으로 그의 회심은 그 나라에 복음의 문이 여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혹시 우리가 가진 선입관이나 편견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습니까?



* 전도의 열매는 기쁨입니다.

빌립의 전도를 인하여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이 넘쳤습니다. 빌립의 전도를 받은  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체험하고 구원의 감격 속에 기쁨으로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빌립의 전도로 내시는 거듭났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진실한 전도가 있고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 회심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두 사람이 물에서 올라올 때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초자연적으로 빌립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셨습니다. 내시 흔연히 길을 갔다고 하는데 ‘흔연히’라는 말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으로’라는 뜻입니다. 내시는 구원의 감격을 인하여 기쁨으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성령에 이끌리는 사역은 활력이 있습니다. 열매가 풍성합니다. 반면에 성령에 이끌리지 않으면 탈진이 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힘들고 지칩니다.



자기가 전도한 사람이 예수 믿고 세례를 받게 된 경험이 있습니까?

성도의 사명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전도의 열매를 맺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구원은 먼저 얻은 사람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달됩니다. 우리가 잠잠히 있다면 구원의 역사가 멈추어 집니다. 우리가 잠잠함으로 우리의 이웃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축복의 전달자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을 준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얼마나 잘 살고 얼마나 높은 권세를 가졌는지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안에 예수가 있느냐 없느냐가 우리의 영원한 미래를 좌우합니다. 한 심령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는 거지나 왕 곁에서 섬기는 귀족이나 다 복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성경, 설교, 기도, 사건

그분의 음성을 듣고 분별하며 순종할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언제 어디나 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모든 성도들은 성경을 잘 알고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민족적, 문화적 편견을 버리고 불신자들에 다가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갈급해하는 한 영혼에게 인도하실지 모릅니다.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십시오. 내가 다가가야 할 병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령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으며 다가가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풍성한 전도의 열매를 거두고 주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