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행 8:1-13)

Author
Myung Myung
Date
2006-09-17 21:29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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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8:1-13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지금부터 30년 전 저희 아버지가 암에 걸렸을 때 왜 우리 가정에 이런 사련이 오는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그것을 계기로 저희 가족과 친척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훗날 돌아보니 고난이 내게 유익이 되었다는 시편 저자의 고백이 바로 저의 고백이 되었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분들도 내용은 틀리지만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을 한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고난의 와중에는 앞뒤가 막힌 것 같고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 있을수록 조급해 하지 말고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믿음을 가지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끝까지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전화위복의 은총을 경험하게 됩니다. 지금 어떤 고난의 터널을 지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전히 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7장을 보니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전한 스데반이 받은 것은 돌 세례였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계기로 예루살렘에서 큰 핍박이 일어나 많은 교인들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잘 성장하고 있는 교회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꼭 이런 방법으로 통하여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셔야 했는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제한된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역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예정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선교의 영역이 예루살렘을 벗어나 이방인들에게로 확대가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단은 또다시 교회를 흔들어댑니다. 그러나 사단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이루어집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복음의 진보를 막지 못합니다.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진 성도들을 중심으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로 퍼지면서 주님의 선교 명령이 조금씩 이루어집니다. 그 과정에 세 사람이 각각 다른 역할을 담당합니다. 사울, 빌립, 시몬. 세 사람의 모습을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사울은 악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더불어 대표적인 인물이 바울입니다. 사도행전의 전반부는 주로 베드로를 다루고 후반부는 주로 바울을 다룹니다. 사도행전 9장부터 사울의 회심과 그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나오는데 7장 58절부터 8장 3절까지 누가는 회심하기 전의 바울의 모습을 잠깐 보여줍니다. 사울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바울의 이름입니다. 이제 막 생겨난 그리스도의 도가 율법과 성전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니 사울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죽이는데 찬성하였고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하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의 재가를 받아 교회를 본격적으로 탄압합니다. 사나운 짐승이 먹이를 보고 달려들 듯이 사울은 집집마다 찾아 들어가서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끌어내서 감옥에 넘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사울은 자신이 조상 적부터 내려오는 열심을 가지고 이런 일을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때를 회상하며 바울은 빌 3:6에서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고 고백합니다.



* 바울은 열심을 가진 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종교적 열심을 가진 자들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향하여 점점 가까이 오자 모압왕 발락은 선지자 발람을 매수하여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발람의 입을 주장하니 저주 대신에 오히려 축복의 말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이익을 보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발람은 꾀를 내어 미인계를 썼습니다. 모압 여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하여 바알 신에게 음란한 예배를 드리게 합니다.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하였는데도 시므리라는 청년이 정신을 못 차리고 미디안 여인 고스비를 데리고 자기의 장막으로 들어가니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따라 들어가서 가지고 있던 창으로 단번에 두 남녀를 찔러 죽였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을 강타하던 전염병이 그쳤다고 민수기 2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멜산에서 불을 내려서 온 백성에게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이고 난 후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을 모조리 잡아 기손 시내에서 다 쳐 죽였습니다. (왕상 18장) 이렇듯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의 대적들을 진멸한 것을 구약에 능통한 사울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사울 자신도 구약에 나오는 그 조상들의 열심을 가지고 교회를 박해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그저 이단 중의 하나요, 민심을 소란하게 하고 자기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했기에 신성모독 죄로 예수를 고소하고 빌라도에게 죽이기를 요청하였습니다. 사울도 바리새파에 속한 유대인인지라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조상들의 가르침과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붙잡아서 옥에 가두거나 죽이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위한 길이요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열심은 좋지만 그 열심히 무엇을 위한 열심이요 누구를 위한 열심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물론 열심을 내는 자를 좋아하십니다. 계 3:15-16,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 예수 믿어야지요, 나도 왕년에 은혜 받은 적 있었지요 하면서도 교회 출석은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교회 다닌 지는 오래 되었다는데 전혀 믿음의 진보가 없고 삶의 변화가 없고 봉사할 줄 모릅니다. 미적지근한 사람 그저 타성에 젖어 왔다 갔다 하는 사람. 주님이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안에서의 열심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는 열심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열심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그 열심은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고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경건한 사람들, 즉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그를 생각하여 몹시 통곡하였습니다.



* 주로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당합니다.

구약시대에는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 유대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지금은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아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교인들 중에서 특히 헬라파 유대인들이 주로 공격의 표적이 되었을 것입니다. 스데반이 헬라파 유대인이었고 그들 중에 대표 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계기로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을 비롯하여 히브리파 유대인들만 남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유대에서 온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야한다고 주장하자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안디옥 교회에서는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으로 보냅니다. 그래서 종교회의가 열리는데 그때 예루살렘 교회에 사도들, 장로들, 회중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의 핍박을 계기로 열두 사도 외에 모든 교인들이 다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진 것이 아니라 주로 헬라파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났고 이들이 떠난 후로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주요구성원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박해와 흐트러짐을 계기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 사울의 박해는 복음 전파의 기회가 됩니다.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설고 물 설은 곳으로 흩어져야 하는 그들의 심정이 어떨까요?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진 교인들은 비록 자원하여 가고 싶어서 간 것은 아니었지만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만약 스데반의 순교가 없었더라면 어떠하였을까요? 예루살렘 교회는 좀 더 성장하였을지는 몰라도 기독교는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들만의 지방종교로 국한되었을지 모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주님의 계획이 더디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개인적으로 볼 때 불행이요 예루살렘 교회에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의 순교를 도리어 복음 확산의 계기로 만드십니다. 복음의 지경이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퍼지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사울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복음을 확산시킨 장본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악한 의도로 행동하면서도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무리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려고 앗수르를 사용하였습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벌주기 위한 일회용 막대기였습니다. 그 목적이 이루어진 다음에 교만한 앗수르는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유다를 징계하시려고 바벨론을 사용하였습니다. 바벨론은 유다를 벌주기 위한 일회용 막대기였습니다. 그 목적이 이루어진 다음에 교만한 바벨론은 페르샤에 의하여 멸망을 당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해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저렇게 해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이왕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2) 빌립은 선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복음을 전할 때는 아무래도 자기와 말이 통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마련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대를 벗어난 지역에서는 히브리말을 주로 하는 히브리파 그리스도인들보다는 헬라말을 주로 하는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이 더 활발하게 복음을 전하였을 것입니다. 행 11:19-20에 보면 스데반에게 가해진 박해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이 베니게와 키프로스와 안디옥까지 가서, 유대 사람에게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키프로스 사람과 구레네 사람 몇이 있었는데, 그들은 안디옥에 이르러서 헬라 사람에게도 말을 붙여서 주 예수를 전하였다고 합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앞장 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인하여 사방으로 흩어지는데 그들은 사도들이 아닌 일반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복음의 전파됩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빌립입니다. 그는 스데반과 함께 뽑힌 일곱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스데반처럼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그는 악의 세력에 사로잡힌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



* 사마리아는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받던 곳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 북쪽에 갈릴리가 있고 남쪽에 유대가 있으며 중간에 사마리아가 위치합니다. 열왕기하 17장에 보면 사마리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보여줍니다. 앗수르 왕이 북쪽의 이스라엘을 주전 722년에 멸망시키고 그 주민들을 포로로 끌고 간 다음에 다른 지역에 있던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지역에 맹수가 많아지게 되니 그 지방 신을 노엽게 한 것이라 생각하고 앗수르 왕은 포로중 제사장 하나를 보내어 그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가르치게 했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에게 여호와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는 지방 신에 불과하였습니다. 여러 민족들이 섞여 살게 되면서 혼합 인종이 되었고 그들은 여러 종교가 섞여진 혼합 종교를 믿게 되니 순수한 혈통을 이어 받고 유대교만을 신봉하던 남쪽 유대인들에게는 경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은 유대 땅에서 갈릴리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가로지르면 빠르지만 그들을 피하기 위하여 일부러 서쪽인 지중해 해변으로 둘러 가든지 요단강을 따라 동쪽으로 둘러 갔습니다. 요 4:9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기 위해 사마리아를 가로지르다가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인과 상종치 아니하더라” (요 4:9) “여자여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 4:21)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구별 없이 하나님을 섬길 때가 올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 유대인들은 배타적 선민사상을 가졌습니다.  

그 동안 예루살렘 교회의 전도 대상은 유대 땅에 있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의 있어 영원한 도성. 구약을 보면 예루살렘이라는 구심점을 행하여 이스라엘은 자꾸만 안으로 안으로 가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들에게 이방인의 구원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요나.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요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것이 싫어서 니느웨와 정반대인 서쪽 다시스로 도망갔다가 제비 뽑혀 바다에 던져지는 수모를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세상을 향하여 나갈 것을 촉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마 28:19) 하셨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열심히 전도하여 수천 명의 유대인 결신자를 얻었지만 하나님은 스데반의 순교를 시발로 온 믿는 자들을 사방으로 흩으십니다. 박해로 인하여 흩어진 예루살렘 교인들을 통하여 복음이 자연히 사마리아에 전파됨으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예수님의 예언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 하나님은 준비된 자들을 계속하여 사용하십니다.

계주를 하면서 먼저 달린 선수가 앞으로 달릴 선수에게 바통을 넘겨주듯이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을 통하여 계속하여 이루어져 갑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뽑힌 일곱 중에 가장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던 스데반이 순교하였다고 하나님의 일이 중단되거나 지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또 다른 사람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시고 그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며 대화를 나누던 모세가 죽음으로 인하여 가나안을 행한 행군이 그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여호수아는 담대하게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합니다. 능력의 종 엘리야를 하나님이 데려 가신다고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사역이 중단된 것이 아니라 엘리사는 갑절의 능력으로 맡겨 준 사명을 감당합니다. 하나님이 때로 의외의 인물을 사용하시지만 그렇다고 전혀 준비도 되지 않은 사람을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있자 교인들은 어떻게 합니까?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8:1) “두루 다니며” (8:4) 어찌 보면 처량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처량하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공포 가운데 숨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제야 자기들의 사명을 깨닫습니다. 짧은 동안이지만 자기들이 듣고 보고 배우고 느끼던 복음. 자기들의 삶을 변화시켰던 그 복음의 위력을 실감하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사명을 깨닫습니다.  사마리아 선교의 주역은 빌립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빌립이 있지만 여기서는 스데반과 더불어 뽑힌 일곱 중의 한 사람인 빌립입니다. 배타적인 선민사상을 가진 골수 유대인들보다는 그래도 헬라어도 잘하고 그들보다 이방인들에게 대하여 관대한 자세를 가진 헬라파 유대인인 빌립이 선택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그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마리아로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그곳 사람들에게 전파하였습니다. 빌립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교인들에게도 인정을 받은 자로 하나님이 바로 이 목적에 사용하시려고 예비한 일꾼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쓰임받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언제라도 주님이 쓰시고자 할 때 쓰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약하지만 주님은 강하십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주님은 모든 것을 가진 분입니다. 에스겔 골짜기에 마른 뼈들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큰 군대를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에게 역사할 때 우리도 주님을 위하여 사용될 수 있습니다. 준비가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말씀하옵소서 내가 듣겠나이다 (삼상 3:10) - 사무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8) - 이사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바울의 겸손한 자세를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교만한 자세가 아니라 부족하지만 주님이 부르시면 응하겠나이다 하는 겸손하면서도 긍정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복음 전파를 통하여 빌립은 큰 기쁨과 놀라움을 줍니다

*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큰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 밤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는데 주의 천사가 나타납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눅 2:10)

예수님은 그의 사역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를 통하여 수많은 병자들이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귀신들린 자들이 놓임을 받았습니다. 전하시는 말씀을 듣고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도들을 통하여 초대 교회에 기사와 이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백성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빌립을 통하여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스데반이 열정적인 설교가라면 빌립은 열정적인 전도자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빌립에게 능력을 주셔서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역하던 것 같은 열매를 거두게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가 하는 기적을 보기도 하는 가운데, 한 마음으로 빌립이 하는 말을 좇습니다. 그 이유는 빌립을 인하여 귀신들린 많은 사람에게서, 악한 귀신들이 큰소리를 지르면서 나갔고, 많은 중풍병 환자와 지체장애인들이 고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리는 복음을 전하니, 남자나 여자나 다 빌립의 말을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 사람들이 주의 복음을 영접하고 자신들의 육신의 문제들이 해결됨을 인하여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누가는 기록. 참된 평강은 우리의 영육이 강건해짐으로 얻어집니다. 요삼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라.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고 사람들에게 상처나 부담을 준다면 참된 성도의 모습은 아니다. 저 사람만 있으면 왠지 든든하고 기분이 좋아진다는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곳에 기쁨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곳이 가정이든, 목장이든, 교회든 큰 기쁨이 있습니다. 빌립과 같이 가는 곳마다 머무는 곳마다 일하는 곳마다 언행을 통하여 구원의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3) 시몬은 탐욕 때문에 책망을 받습니다.

은혜가 넘치는 곳에 방해꾼은 있게 마련입니다. 사마리아 성의 시몬은 예루살렘 교회에 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인물. 아나니아 부부는 교회에서 개인의 욕심 때문에 즉 땅 판 돈 일부를 감추고 전부를 드리는 것처럼 위장하면서 사람들에게도 크게 존경을 받기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성령을 속인 죄로 죽고 말았습니다. 시몬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마술을 이용하여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놀라게 하고 자칭 큰 자라 하니 사마리아 사람들이 미혹되어 시몬을 하나님의 능력이라 불렀습니다. 빌립이 전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의 이름을 듣고 많은 사람이 믿고 세례를 받을 때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 빌립을 따라 다니게 되었습니다. 과연 시몬은 변화된 성도가 되었는가? 그가 놀란 것은 복음의 내용이 아니라 표적과 큰 능력입니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진정으로 그 마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구원의 감격 가운데 속사람이 변화를 체험하는 가운데 헌신된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듣고서,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로 보냅니다. 그 이유는 빌립을 통하여 복음을 받은 무리들을 더욱 영적으로 무장시켜서 그들 또한 복음 전파의 일꾼들로 삼기 위함입니다. 두 사람은 내려가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하려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그들 가운데서는 아무에게도 아직 성령이 내리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그들이 성령을 받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시몬이 깜짝 놀랐습니다. 사도들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시몬이 복음을 직접 들었고 사람들이 성령 받는 것도 보았지만 그 자신이 말씀과 성령으로 변화되기를 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을 개인적인 이익을 구하는 계기로 삼으려고 합니다. 시몬은 베드로의 사역을 신기한 종교 행위요 큰 권능을 가진 마술 정도로 이해합니다. 전에는 마술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돈과 명예의 수단으로 삼았으나 빌립이나 사도들이 보여준 성령을 내리는 권능을 소유하게 된다면 자기도 사도들처럼 존경도 받고 더 큰 영광을 누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약삭빠른 계산을 하며 사도들과 거래하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전에 하던 대로 돈을 이용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돈벌이만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시몬입니다. 돈을 드리고..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그는 성령에 대한 이해가 없습니다. 사도들이 보여주는 능력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은사를 상품처럼 취급합니다. 전에 아나니아가 거짓말했을 때도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베드로에게 시몬의 얄팍한 술책이 통할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무섭게 꾸짖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아나니아의 경우는 회개의 기회도 가져 보지 못한 채 죽고 말았지만 시몬에게는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베드로의 말을 듣고 시몬이 벌컥 겁이 납니다. 당신들이 한 말이 조금도 내게 미치지 않도록 나를 위해서 주께 기도해 주십시오. 이렇게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뒤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마리아 사람의 여러 마을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박해를 피하여 사마리아에게 온 빌립을 통하여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유대인들은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빌립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경험하자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이 있습니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마술사인 시몬의 능력을 압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성령 충만한 성도들을 통하여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으로부터 쓰임 받도록 잘 준비해야 합니다. 안 믿는 자들에게 복음을 제시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하며 열정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빌립과 같이 하나님이 기뻐 사용하시는 일꾼들이 되시고 또한 그 사역을 통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으시고 하나님의 역사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