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예루살렘을 넘어 (행 6:8-15, 7:54-60)

Author
Myung Myung
Date
2006-09-03 18:08
Views
3599
어떤 소경들이 코끼리를 만졌습니다. 꼬리를 만진 소경은 코끼리가 가늘고 길쭉하다고 합니다. 상아를 만진 소경은 코끼리가 단단하고 끝부분이 뾰족하다고 합니다. 귀를 만진 소경은 코끼리가 넓적하다고 합니다. 다리를 만진 소경은 코끼리가 기둥과 같다고 합니다. 소경들은 각자 자기가 만진 부분에 대하여 나름대로 충실하게 표현했으나 코끼리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성경을 볼 때 이런 실수를 하기 쉽습니다. 한 부분 한 부분을 충실하게 알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와 더불어 성경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며 본문이 그 흐름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해석이 나올 수 있고 그러면 엉뚱한 적용이 생깁니다. 본문을 관찰: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해석: 왜 죽었을까요? 9절에 보니 스데반이 회당에 있던 사람들과 논쟁을 벌였대. 베드로처럼 말씀을 선포해야지 논쟁을 벌이면 되는가? 논쟁을 벌이면 이긴 편이 있고 진편이 생기기 마련인데. 진편에서 약이 오르니까 흥분해서 스데반을 죽였어. 적용: 무슨 일이 있어도 논쟁을 벌이면 안돼. 또 한편으로는 성령 충만해도 별 수 없네. 이런 적용을 한다면 스데반의 사역은 실패한 것이 됩니다. 맞습니까? “우리도 자칫하면 이단이 될 수 있어.” 어떤 선배 목사님이 하신 말이 기억납니다. 몫도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얼마든지 허튼 말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바로 전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지요? 그래서 사도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념하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목장 식구들끼리 누가 좋대더라 하는 교재를 택하여 목사와 의논하지 않고 자기끼리 공부하다가 곁으로 빠지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영적 전쟁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본문은 스데반의 순교한 사건을 다루지만 그렇다고 단지 한 전도자의 죽음이나 초대교회에 있었던 하나의 불상사를 다루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 뒤에는 보다 원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 전 세계를 향한 선교의 비전이 담겨져 있는 것을 사도행전 전체의 흐름을 통하여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구원 역사 속에서 부족하지만 우리를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의식하며 그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자세가 저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팎으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성령의 인도 아래 온 교회가 하나 되어 문제를 풀었기에 교회는 왕성하게 자랍니다. 교회 성장 측면에서 본다면 예루살렘 교회는 흠잡을 데 없이 거의 완벽합니다. 교인들 중에 헌신된 제자들이 많고 가르침, 기도, 구제, 전도, 봉사, 친교 등을 통하여 교회가 영적인 필요 뿐 아니라 육신의 필요를 채워주는 균형 있는 사역을 합니다. ‘2%가 부족할 때’ 라는 광고 카피처럼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중요한데 교회가 제대로 깨닫지 못하니까 오늘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이 문제의 뿌리는 구약시대까지 올라갑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목적은 그들을 통하여 만민을 복 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열방을 위한 제사장 나라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 민족만 사랑하신 다는 착각에 빠지며 이방인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랬을 때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습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략을 인하여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은 불타버리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각 나라에 흩어졌습니다. 여기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시려고 그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선교사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더니 하나님이 다시 그를 살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누리는 길이 열려졌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 구원의 도를 온 세상에 퍼뜨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예루살렘에서 기도하던 120명에게 성령 세례를 베푸시자 그들에게 능력이 임하였습니다. 사도들을 중심으로 기사와 이적이 일어나면서 예루살렘 교회는 놀랍게 성장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으면서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얼마 안 있어 이천 명이 추가로 믿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전도, 가르침, 구제, 교제 등에 힘을 쓰면서 안 믿는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믿음의 공동체가 됩니다. 이를 시기하여 마귀는 교회를 계속 흔들어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장의 역사는 박해의 역사라 할 정도로 박해가 늘 따라다녔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박해의 정도가 더욱 심해졌습니다. 처음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되었다가 훈방조치를 받았습니다. 두 번째로는 사도들이 전부 붙잡혀가서 심문을 당하고 나올 때는 채찍질을 당합니다. 그러다가 본문에 보니 마침내 순교자가 생깁니다. 6장과 7장을 통하여 스데반은 어떤 사람이고 그의 순교의 의미를 무엇인지 살펴보면서 선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을 알고 그 소원을 풀어드리는 영적인 효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스데반은 어떤 사람입니까?  

1)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팔레스타인 밖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전형적인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성경에는 그의 가족이나 배경에 대하여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과부들이 교회의 구제 사업에서 자꾸 소외되자 불평을 털어놓았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사도들은 교인들로 하여금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선출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여 일곱을 뽑혔는데 스데반의 이름이 일곱 중에 제일 먼저 나옵니다. 무엇인가 스데반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될 것을 예고합니다. 본문은 스데반을 ‘충만한 사람’ 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릇에 물을 계속 부으면 넘칩니다. 그 차고 넘치는 모습이 바로 충만입니다. 3절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 5절에 믿음과 성령이 충만, 8절에 은혜와 능력이 충만. 종합하면 스데반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령, 지혜, 믿음, 은혜, 능력으로 충만한 사람. 성경 어디를 찾아보아도 스데반처럼 이렇게 많이 충만하다고 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5장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지역으로는 예루살렘, 사람으로는 베드로를 비롯한 히브리파 사도들을 중심으로 전도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 하반부에서 시작해서 7,8장은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지역적으로는 아직도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지만, 전도의 중심이 히브리 문화권에서 헬라 문화권으로 옮겨갑니다. 지금은 온 세계의 만국공용어가 영어입니다. 영어만 하면 어느 나라에 가든지 웬만큼 말이 통하지 않습니까? 그 당시 지중해 연안 국가에서 통하는 언어는 헬라어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했지만 문화적으로는 헬라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헬라 문화권에 있는 유대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본문을 보니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앞장을 선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이 찾아간 곳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주로 모인 회당입니다. 개역성경에서 9절을 번역한 것은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표준새번역의 번역이 더 매끄럽습니다. “구레네 사람과 알렉산드리아 사람과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으로 구성된, 이른바 리버디노 회당에 소속된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들고 일어나서, 스데반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회당의 이름 : 리버디노 회당(the synagogue of the Libertines)

the Libertines =  the Freedmen  

리버디노의 뜻은 자유함을 받은 자. 전에 노예였는데 지금으로 자유민으로 풀려난 사람들인데 그들이 팔레스타인 지방에 돌아와 살게 되면서 회당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회당의 구성원들은 구레네,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와 아시아와 같이 지중해 연안 지방 출신들인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알렉산드라는 로마제국에서 로마 다음으로 큰 도시

길리기아: 소아시아 남동쪽에 위한 지방. 바울의 고향인 다소가 길리기아에 있습니다. 사울이 다소에서 왔기 때문에 바울이 혹시 이 회당을 출석했을지도 모릅니다.

소아시아의 서쪽 지방: 아시아

에베소가 수도로서 바울이 거기서 몇 년 동안 사역.



2)  지혜가 충만합니다

사도들의 사역을 보고 시기하여 종교지도자들을 충동질 하였던 마귀가 스데반의 사역을 보고 헬라파 유대인들을 자극합니다. 회당에서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을 하는데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도 스데반 한 사람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없었다는 단어는 문법적으로 습관적인 동작을 나타냅니다. 여러 차례 논쟁을 벌였지만 한 번도 스데반을 당해 낼 수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17-19에 보면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스데반 자신의 생각이나 배운 것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자기 목적을 이루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회당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한 스데반을 당할 수 없으니 비열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1) 사람들을 시켜서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다."라고 말하게 하였습니다. ‘가르쳐 말 시키되’로 번역된 Hypoball라는 단어는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의도한 대로 행하도록 사주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고소하는 내용의 핵심: 모독. 모세와 하나님에 대한 모독.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더 이상 성전에 국한되지 않는다 (7:48-49). 그의 대적들은 이 말을 왜곡하여 스데반이 성전과 율법과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공격한다고 주장합니다.

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부추겨 스데반을 붙잡아 공회로 끌어 오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이 세 번째로 체포가 되고 공회에 세 번째로 서게 됩니다.

3)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이 사람은 쉴 새 없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한다고  말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증오와 시기심으로 인하여 사실을 크게 왜곡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을 변명하게 되는데 모함을 하는 자들에게 분노하기보다 차근차근히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 조상들의 역사를 설명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요약을 짧은 시간에 알기 원하는 분들은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를 읽으시면 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출애굽 사건, 사십 년간의 광야 생활,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의 성전 건축까지 언급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변론합니다. 모세와 율법을 모독하였다는 고소에 대하여 오히려 이스라엘의 역사가 모세와 그의 율법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였으며 자기를 공격하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조상과 전혀 다를 바 없음을 지적합니다. 성전을 모독하였다는 고소에 대하여 하나님은 사람이 지어 놓은 건물에 제한 받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이 말은 스데반이 처음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솔로몬이 성전 낙성식 때  한 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참 지혜가 되시는 예수님을 본받아, 스데반은 구약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무리들의 공격에 대하여 지혜롭게 대응함으로 지혜가 충만한 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3)  성령이 충만합니다

스데반의 모습을 보면서 결국 우리가 주님께 구할 것은 성령 충만입니다. 표현상으로는 스데반이 성령, 지혜, 믿음, 은혜, 능력 충만이지만 실제로는 성령 충만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 충만 없이 지혜가 충만할 수 없습니다. 믿음 충만, 은혜 충만, 능력 충만은 다 성령 충만과 연결됩니다.  성령 충만하여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활용하여 맡겨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함으로 아름다운 주님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니 대적들의 모함과 협박과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스데반은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떨지 않습니다. 성령에 충만하니 하나님을 대적하고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도 담대하게 도전을 하였습니다. “목이 곧고 할례 받지 못한 사람들아” 하면서 그들이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율법을 무시했던 조상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음을 지적하면서 그들이야말로 예수를 죽인 자요 모세의 율법을 어긴 자라고 직선적이고 격렬한 공격을 합니다.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 스데반은 어떠한 태도를 보입니까?  “무릎을 꿇고”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누구의 말을 연상하게 합니까?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고통 가운데 하신 기도의 내용과 아주 비슷합니다. 눅 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23: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돌로 치는 무리들을 향한 중보 기도를 드립니다. 무리들을 위하여 원망 대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그 위대한 사랑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인도하시는 성령님. 성령이 충만하여 그가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와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까지 스데반이 승리할 수 있도록 그를 위하여 아버지께 간구하고 중보기도를 드리셨을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스데반을 붙드셨습니다. 순교는 지원자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능력 주실 때 가능합니다. 공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습니다. 샬롬 즉 하나님의 평강이 스데반에게 충만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 은혜와 능력이 충만합니다.

‘은혜’를 뜻하는 헬라어는 ‘카리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을 뜻합니다. 우리가 노력한다고 구원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구원을 받는 길은 예수님이 이미 만들어 놓으셨고 우리는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grace'인데 부드러움을 뜻하는 우아, 세련, 매력, 친절의 의미를 가집니다.  ‘권능’은 뜻하는 헬라어는 ‘뒤나미스.’ 영어로는 ‘power'인데 능력을 말합니다.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사람은 한편으로는 사랑스럽고 부드러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강하고 담대합니다. 이 모습을 누구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예수님. 마 11:28-2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온유함과 겸손함 속에 엄청난 능력이 가지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그 은혜와 능력으로 많은 사역의 열매를 거두셨습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잘 닮았습니다.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다고 하였는데 (2:43, 5:12) 스데반은 백성 가운데서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사도들만이 기사와 이적을 일으켰습니다. (2:43, 3:4-8, 5:12) 그러나 사도들이 새롭게 선출된 일곱에게 안수한 이후로 사도들 외에도 스데반이나 빌립을 통하여 표적이 나타납니다. (8:6) ‘행한다’라는 단어가 문법적으로 습관적인 동작을 나타냅니다. 스데반이 어떤 크고 놀라운 일을 했는지 누가는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행한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을 위하여 자기가 가진 아무 능력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미국에서는 믿음 때문에 순교를 당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순교자의 자세는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명 감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맡겨진 사명에 충실하며,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와 맞서는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5) 죽도록 충성하였습니다.

스데반은 교회 안에서는 과부들을 위한 구제에 힘을 쓰고, 교회 밖에서는 전도에 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자신의 경건함을 과시하거나 교회에서 선택받은 것을 인하여 자신을 과시하는 교만함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도리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예수님을 본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섬김과 충성의 본을 보였던 것같이 죽는 그 순간까지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서머나교회에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보면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네게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는데 바로 스데반의 이름의 뜻이 면류관입니다. 이름처럼 그는 죽기까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충성하다가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되었습니다.  



* 스데반의 설교를 무리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스데반의 권면과 도전을 들은 후 마음이 찔리기는 했으나 하나님께 대한 회개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이 굳은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은 이를 갈고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스데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더 이상 스데반의 말은 듣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를 성밖으로 끌고 나가 일제히 돌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무리들의 행동은 종교적인 열심에서 비롯된 것 같으나 결국 개인 감정으로 인하여 성령을 거스르는 행동을 합니다.  



* 스데반의 순교는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1) 선교의 영역이 확대되는 계기가 됩니다

스데반의 설교와 그에 따른 무리들의 반응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경우와 비교가 됩니다.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구약을 토대로 설교했을 때 듣는 자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통회 자복하며 하루에 삼천 명이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 후로도 베드로는 많은 유대인들을 회심시키며 예루살렘 교회를 크게 성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스데반도 성령 충만하여 구약을 토대로 설교하니 듣는 무리가 마음에 찔리기는 것까지는 같았으나 스데반은 오히려 성난 무리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예루살렘 교회의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왜 똑같이 성령 충만한 주님의 제자들이 같은 사역을 하였는데 베드로는 많은 열매가 거두었고, 스데반은 얼마 사역해 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했습니까? 하나님이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이니 특별히 그에게만 호의를 베푸시며 사람을 차별하셨습니까? 예수 믿으면 누구나 성령에 충만하기를 원하는데 본문을 보니 스데반은 성령에 충만했다가 도리어 돌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성령 세례 원했는데 돌 세례까지 받으면 누가 예수를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스데반은 예수 믿고 손해 본 사람입니까? 스데반의 사역은 실패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유대인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을 사랑하시지만 이방인도 떡같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그런데 지금까지 예루살렘 교회는 주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은 이방인들도 사랑하시고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 원하신다는 것을 예루살렘 교인들은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행 8:2에 어떤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들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스데반의 박해가 일어날 때쯤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이 몇 사람쯤 되었겠습니까?  삼천 명이 회개하고 추가로 이천 명이 더 회개하고 그 후로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으니 거의 만명 가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인하여 예루살렘에 있을 수 없으니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그저 한 초대 교인의 죽음이 아닙니다. 일부 유대인들의 증오로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선교사에 전환점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교회에 핍박이 심해져서 교인들이 흩어진다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차질을 빚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통하여서도 자신의 선한 계획을 이루십니다. 마귀는 스데반을 죽이고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하면 이제 막 일어난 복음 전도의 불길이 꺼질 줄 알았는데 예루살렘에 있던 성도들이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되니 복음이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마귀는 또 한 번 패배의 쓴잔을 마십니다. 박해를 피하여 정든 고향을 떠나고 흩어지는 것은 고통이요 예수 믿고 손해 보는 것처럼 여겨질 지 모르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그들의 흩어짐을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는데 사용하셨습니다. 사도행전 7장까지 전도의 무대는 예루살렘이었는데, 8장부터 사마리아로 무대가 옮겨집니다. 9장에서는 사울의 등장으로 복음이 본격적으로 이방인들에게 전하여지게 됩니다.



2) 바울이 출현하는 계기가 됩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는 자리에 누가 있었습니까? 7:58,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사도행전에 사울이 처음 등장합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의 이름입니다. 바울은 누구인가?  이방인의 사도를 사용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종입니다. 신약 성경 27권중 13권을 쓴 위대한 사도입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바울은 율법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데 앞장을 섰습니다. 자기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가면서도 저주하거나 반항하지 않는 스데반의 모습은 아마 바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는 180도로 바뀐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박해자였는데 그 자신이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고, 감옥에 수없이 갇히고, 매를 맞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를 부르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충성하다가 스데반의 뒤를 이어 로마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교회는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졌다고 터툴리안은 말했습니다.  



본문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이 됩니까? 스데반의 순교는 복음 전파가 금지된 공산국가나 회교권 국가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들에게만 적용됩니까? 우리가 사는 미국에서는 복음을 전하거나 자기의 믿음을 지킨다고 생명의 위협을 받거나 불이익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적인 신앙은 집에서 애를 키우는 가정주부나 사업을 하는 비즈니스맨들이나 교인들에게 다 적용이 됩니다. 즉 피뿌림만 순교가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자기의 맡겨진 직분을 감당하려고 시간과 정성을 다하며 희생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스데반의 발자취를 따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막 8:34,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시면서 제자들은 삶의 중심이 자기가 아니라 주님이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섬기려면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자꾸 제한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님은 새 방법으로, 새 사람들을 사용하여 당신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이 새롭게 쓰시는 역사의 한부분이 되기를 기도하고 기쁨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실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데반과 같이 성령과 은혜로 충만하며 주님을 본받아 살면서 주님이 기억하시는 아름다운 삶과 사역의 열매를 거두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