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양보의 공동체 (행 6:1-7)

Author
Myung Myung
Date
2006-08-27 13:04
Views
3731
행 6:1-7  관용의 공동체



2000년 9월에 북한으로부터 아들과 함께 넘어왔던 이순옥 집사가 저희 교회에 와서 간증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남한에 왔을 때 자기를 취조하던 정보부 사람의 소개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세례를 받을 때가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기 전에 담임 목사님은 예수를 믿으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이 이집사에게 상당히 부담이 되었다고 합니다. 내 집안을 망치고 내 남편을 죽인 원수들에 대하여 언젠가는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그 마음을 버리라고 하니 너무 힘들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자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원수 같은 그들을 용서하는 마음을 갖기까지 많은 눈물과 고통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살다보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혹은 재정적으로 손해를 끼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게 손해를 끼친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사실 손해 본 것으로 따진다면 예수님 같은 분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오셨는데 도리어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했습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셨고,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상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예수님은 완전히 밑지는 장사를 하신 것 같은데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33년이란 길지 않은 생애를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불꽃 같이 자신을 태우시면서 자기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빌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관용을 베풀라고 권면합니다. 용납하기 싫어도 자신을 위하여 용납하라는 말입니다. 한번 용납하지 못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마음이 좁아져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어집니다. 사소한 감정 때문에 미워하고 섭섭해 하면서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요 놀랍게 성장하는 교회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그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 두 사람이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교회 전체가 둘로 나뉘어져 자칫하면 분열로 치달을 수 있을 정도의 문제입니다. 한쪽이 다른 쪽에 대하여 불평을 쏟아 놓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지혜롭게 극복했던 예루살렘 교회가 오늘은 어떤 방식으로 그 문제를 풀고 있습니까?  



누가는 사도행전 3장부터 교회 안팎으로 계속해서 일어나는 문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문제가 계속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문제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강하게 하고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한 문제를 풀면 또 다른 문제가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왜 당신의 백성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신 8:2, 16)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키우고 성숙한 신앙인으로 만들어 복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없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기보다 고난이 올지라도 감당할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예루살렘 교회는 그런 문제들을 풀만 하니까 계속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를 푸는 동안 교회는 점점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된 은혜의 공동체가 되어갑니다. 문제를 풀 때마다 예외 없이 문제를 얻기 전보다 더 큰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례를 통하여 저희 교회가 더욱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한 성경적 원리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들이 영육 간에 건강하여 하나님의 사명을 기쁨으로, 자원함으로 감당하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1) 제자들

사도들이 감옥에 갇혔다가 매를 맞고 풀려났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예수 이름을 위하여 모욕 받는 일을 도리어 기뻐합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습니다. 자연히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증가하였는데 누가는 제자가 더 많아졌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이 삼년 동안 생애 사역에서 데리고 다니며 훈련시키던 열두 명을 말하지 않습니다. 제자라는 말속에는 ‘가르침을 받는다’ 혹은 ‘훈련을 받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게 된 무리들은 행 2:42을 보니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습니다. 2:46-47을 보니,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한 마음을 가지고 섬기다보니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칭찬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더욱 성장하였습니다. 교인의 숫자가 날마다 늘어가는 것이 어느 교회에게나 부러운 현상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단지 출석교인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일예배 한 번 참석하여 설교 한번 듣는 것으로 교인된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것은 다하면서 영적 훈련 받기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제자라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신앙의 연륜만을 이유로 교회지도자들이 된다면 그 교회는 문제가 있습니다. 평소에 훈련을 많이 받은 군사가 싸움에서 이길 수 있듯이 영적인 훈련을 받은 제자들이 많아야 그 공동체는 마귀와의 영적인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훈련을 받고 삶에 변화가 나타나고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의 삶을 헌신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제자입니다. 후안 까를로스 목사가 ‘제자입니까’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제자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아도 얼굴 빨개지지 않고 담대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계속해서 더 많아지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요 하나님의 축복이 지속적으로 임하는 교회입니다.



2) 과부들

다중문화권에 있는 미국의 이민교회들은 단일문화권에 있는 한국교회들과 달리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합니다. 제가 youth group에게 한국어로 설교하면 미국에서 자라난 많은 학생들이 제대로 알지 듣지 못합니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 미국에 이민을 와서 자란 1.5세나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난 2세들은 영어가 더 편합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도 1부와 2부 예배는 한국어로 드리고, 3부 예배는 영어로 드립니다. 본문을 보니 이미 일세기에도 교회 안에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크게 히브리파와 헬라파로 나뉩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태어나서 자라왔으며, 일상어로는 아람어를 사용하고 히브리 성경을 읽습니다. 반면에 헬라파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유럽, 소아시아 또는 북아프리카 등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다가 팔레스타인 지방으로 이주해 온 유대인들로 그들은 히브리어보다 헬라어를 더 유창하게 하며 성경도 구약의 헬라어 번역본(Septuagint; 70인역)을 사용했습니다. 마치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노년에 한국으로 영주 귀국한, 영어를 주로 사용하던 동포들과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언어가 다르면 문화도 다르고 문화가 다르면 생각하는 것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갈등의 소지가 있습니다.



로마제국이 지배하던 1세기에도 전쟁이 많았기에 과부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오래 살다보니 자연 과부들이 많았습니다. 구약에 보면 나그네나 고아나 과부를 돌보라는 구절이 많습니다. (신 14:29, 출 23:10-11). 사회보장 제도가 되지 않는 당시에 과부가 된다는 것은 당장 자기의 생계를 책임질 사람이 없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더구나 외국에서 온 경우에는 가까운 친지나 친척들이 없기에 끼니 걱정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사도들이 앞장을 서서 과부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며 생계를 도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자부하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외국에서 온 헬라파 유대인들을 은근히 차별하였는데 그런 현상이 교회에서도 나타났습니다. 구제에 참여한 대부분이 히브리파 교인들보니 헬라파 과부들에 대하여 소홀히 대하였습니다. 그러자 헬라파 유대인들이 소외감을 느끼고 히브리파 교인들을 향하여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빠지므로”라는 단어가 과거 습관적인 동작을 나타냅니다. 어쩌다 한번 빠진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많이 빠졌습니다. 아무리 은혜를 받았을지라도 차별대우를 계속 받으면 좋아할 사람이 없습니다. “원망한대” 라는 동사는 문법적으로 일회적인 행동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몇 사람이 불평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헬라파 전체가 어느 날 한 목소리로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요즈음 흑인민권 운동가요 UN 주재 대사로 있던 Andrew Young이 Wal Mart에서 일하는 동안 유대인과 한인들과 아랍계 사람들은 흑인들을 상대로 질 나쁜 물건을 팔면서 바가지를 씌운 뒤 돈을 벌면 다른 지역으로 떠난다고 발언한 것이 계기가 되어 커더란 파문이 일어나자 Young은 즉각 Wal Mart를 사임하고 자기의 인터뷰 내용이 잘못 알려졌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물론 한인들 중에도 그런 지탄을 받을 만한 행동을 한 사람들도 있지만 어쨌든 전체로 싸잡아서 말을 한 것은 경솔한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이 헬라파 과부들에 대하여 고의적으로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헬라파 교인들이 집단적으로 불만을 나타냈습니다. 이 문제가 제대로 수습되지 않으면 교회 전체가 시험에 들어 유대파와 헬라파로 분열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때 더 큰 문제가 됩니다. 성령 충만한 예루살렘 교회의 문제 해결법을 살펴봅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 (2절)

1)  문제를 함께 해결합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털어놓는 불평이 사도들의 귀에도 들어갔습니다. 이제 개척된 지 얼마 안 된 교회에서 자칫하면 그룹 간의 심각한 갈등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 이 문제는 사도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문제 해결을 위하여 자기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특정한 그룹의 사람들만 모은 것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을 모았습니다. 요즈음으로 따진다면 제직회나 공동의회를 소집했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 무조건 덮으려하고 적당히 넘어가려 하거나, 자신은 그 교인이 아닌 것처럼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판하거나 문제점을 지적만 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지혜를 모으는 교회가 바람직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2절)

2) 우선 순위를 압니다.

6:1 구제로 번역된 헬라어는 diakonia로서 그 원래의 뜻은 service at table. 식탁에서 시중을 듦.

여기서 하인, 사환이라는 뜻을 가진 diakonos가 파생되었습니다. 이 헬라 단어에서 deacon이라는 영어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집사의 원 뜻은 waiter, 식탁에서 시중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친교실에 가면 먼저 식탁에 앉아서 음식을 갖다 주기를 원하는 집사들이 있습니다. 또한 집사에는 남녀 구분이 없습니다. 따라서 남자 집사들도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것이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집사 안 시켜준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집사라는 직분은 교회 출석 오래하면 그냥 달아주는 계급장이 아닙니다. 집사는 섬겨야할 의무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일하지 않는 집사’ 이것은 마치 ‘안꼬 없는 찐빵’과 같이 모순이 되는 말입니다. 바울은 diakonia라는 단어를 좀 더 넓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목회자들을 세우신 목적이 무엇인가? 엡 4:12에 의하면 성도들을 잘 가르치고 훈련시킴으로써 성도들을 봉사의 일, 즉 사역(ministry)에 참여시키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러 핑계를 대며 훈련을 받지도 일 하지도 않으려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사의 모습이 아닙니다.



6:2 공궤를 일삼는 것 (표준새번역: 음식을 베푸는 것; NIV: wait on tables)

공궤에 해당되는 단어가 table 즉 상입니다.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실 때 돈 바꾸는 사람들을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으신다는 말이 나옵니다. ‘일삼는다’로 번역된 diakoneo는  diakonia에서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공궤를 일삼는다는 말은 상에서 섬긴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이 단지 상에 서서 음식을 나누어주었다기보다 과부들을 돌보기 위하여 기금을 모으고 필요한 음식을 구입하고 나누어주는 모든 일을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공궤를 일삼는 것이 옳지 않다는 말을 사도들이 구제사역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들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이 부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과부를 돌보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제 사역에 힘을 쓰다 보니 우선순위가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구제는 열심히 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원래의 사명은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인하여 사도들이 다시 본연의 자세로 돌아오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무슨 사역을 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맡겨진 사역을 얼마나 충실하게 감당하느냐 여부입니다. 그래서 고전 4:2에서 바울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예배, 교육, 선교, 구제, 전도 각 분야에서 내가 일할 수 있는 분야가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각자 하나님이 주신 우선순위가 다릅니다. 막 1:38,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면서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기도 하지만 천국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우선순위인 것을 밝힙니다. 목사가 심방을 하고 다른 활동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며 성령을 통하여 주신 말씀들을 깨달아 성도들에게 때를 따라 증거 하는 것이 목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사명입니다. 교인들은 한 주일 동안 삶의 현장에서 바쁘게 뛰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왔는데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설교를 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뿐 아니라 교인들을 섬기는 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목사는 말씀을 충실히 준비하여 전해야겠고 교인들은 목사가 말씀을 잘 전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목사는 교인들이 만들고 교인들은 목사가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땅치 아니하니” (2절)

3) 지도자들이 잘못을 시인합니다.  

잘못을 저질렀어도 결코 자기 입으로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모습은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더 큰 상처를 줍니다. 본문을 보니 사도들은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불평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다른 교인들에게 책임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부족함을 인하여 문제가 발생한 것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지도자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부족한 인간인지라 실수를 안 할 수는 없지만 그 실수를 겸손히 받아들이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이 참된 용기 있는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책임을 질 줄 알고 잘못을 인정할 줄 아닌 지도자가 있는 공동체가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3절)

4) 역할을 분담합니다.  

역할 분담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교회에 혼란이 왔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회중을 모아 놓고 그들에게 일꾼을 뽑으라고 합니다.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본래의 사역에 전념하겠다고 밝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교우들이 교회의 모든 사역에 참여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각기 가진 은사를 십분 발휘하며 사역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건강하게 성숙하게 균형 있게 자라게 됩니다. 그럴 때 믿는 자들은 성숙한 사람들이 되고 비로소 제자라고 불릴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기도, 말씀 전함, 성도의 훈련 이 세 가지가 목회자의 주된 임무입니다. 이 중요한 임무 외에 평신도들이 해야 할 일까지 목사가 나서서 다하려고 한다면 목사 자신은 열심히 일을 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그리스도의 몸이 균형 있게 발전하는 것을 도리어 방해합니다. 저는 팔로마 한인교회의 모든 교인들이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로 되기를 원합니다. 성도님들은 훈련받는 대로 서로를 섬기며 사역에 참여해야 합니다. 훈련받은 목자들이 목장을 인도하며 섬겨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각자의 직분대로 역할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담당하고 뽑힌 일꾼들은 과부들을 돌보는 일을 담당하도록 역할을 분담하였습니다. 기업은 구조조정을 통하여 가능하면 적은 인원으로 많은 이익을 남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가능하면 많이 참여하여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3절)

5) 일꾼을 세웁니다.  

이제 분담된 역할을 수행하는 일꾼이 필요합니다. 성장하는 교회는 조직이 없이 뜨겁기만 한 교회가 아니라 그 조직을 구성하는 일꾼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되어 일하는 교회입니다. ‘택하라’는 과거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장 하라는 말입니다. 과부를 돌보는 문제로 시작된 갈등이 교회에 더 피해를 주지 않도록 빨리 해결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지금 당장 일곱을 뽑으라고 합니다. 일꾼 선정의 기준은 성령이 충만하고, 맡겨진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지혜가 충만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그 조건을 보면 업무 추진능력이나 세상적인 경력을 따지지 않고, 영적인 자질과 대인 관계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일곱을 선택하는 기준은 오늘날 교회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교인들이 그들을 뽑으니 사도들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안수함으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일꾼이 된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합니다. 그런데 뽑힌 일곱이 구제 사역만 감당한 것은 아닙니다. 스데반이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더불어 변론할 때 저희가 능치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스데반은 말씀을 전하다가 초대 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일곱 중의 하나인 빌립도 훌륭한 전도자로 사마리아 지방을 전도하며 이디오피아에서 온 재정을 담당한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과부를 돌보는 일로 선출되었지만 말씀 사역도 감당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제직들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제직이라 하여 교회의 행정이나 재정, 봉사에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생활도 충실히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구원의 도를 증거하며 그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스데반과 ... 니골라를 택하여” (5절)

6) 관용을 베풉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일행이 애굽에서 돌아와 머무르던 곳은 지역이 협소하여 모든 사람들을 다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 사이에 갈등이 벌어집니다. 누군가는 그곳을 떠나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떠날 것인가? 각자의 이익이 걸려 있는 민감한 사안이기에 선뜻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라함은 롯에게 선택권을 주며 양보하는 아량을 보입니다. 믿음이 없을 때는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손해 보는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양보를 했습니다. 그런데 롯은 아브라함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눈을 들어 요단을 바라본 후 소돔과 고모라 땅으로 가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을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양보를 했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양보할 줄 몰랐던 롯은 부끄러운 모압과 암몬 자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구제 사역을 감당할 일꾼을 뽑으라는 사도들의 제안을 교인들이 전적으로 동의하며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일곱을 뽑습니다. 이들의 직분이 무엇입니까? 성경 어디에도 스데반이 집사라는 말은 없습니다. 이때는 아직 디모데 전서 3장에 나오는 것과 같은 직분제도가 분명하지 않은 때입니다.  교회에도 조직이 필요하나 지나치게 경직될 때 교회의 활력을 제한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조직 편제에 따른 것이 아니라 사역 상 필요에 따라서 일곱을 세웠습니다.그런데 선출된 일곱의 이름들은 보면 주로 헬라식입니다. 즉 무리가 뽑은 일곱의 공통점은 헬라파 유대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소수인 헬라파 교인들이 불공평한 구제사역에 불만을 가지니 다수인 히브리파 교인들이 아량을 베풀어 그들로 하여금 구제 사역을 감당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은 양보할 줄 아는 자들입니다. 교인들이 일곱을 뽑아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합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가졌던 불만은 사라지고 교회에 다시 화평이 찾아옵니다.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7절)

믿음으로 문제를 풀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문제가 있을지라도 주님의 인도함을 구하면서 공동체가 함께 그 문제를 풀려는 긍정적인 자세를 가질 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임합니다. 왕성하다, 많아진다, 복종한다 세 동사가 문법적으로 계속을 나타내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퍼집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계속해서 많아집니다. 그들 중에 허다한 제사장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사장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 같은  교인들이 되어 같은 주님을 섬깁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요?  



예루살렘 교회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제자들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생명의 복음을 전하며 영적으로 관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육신의 필요까지 채워줄 줄 아는 균형 잡힌 교회였습니다. 불공평한 구제를 인하여 문제가 일어났으나 지도자들은 잘못을 시인하며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역할을 분담하는 교회요, 사역을 감당할 일꾼을 세우는 교회요, 소수를 돌아볼 줄 아는 아량을 가진 교회였기에 제자의 수가 심히 많아지고 심지어 많은 제사장의 무리까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했던 예루살렘 교회에도 문제가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들이 섬기는 교회에는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겠습니까? 문제가 있을까봐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이 모든 것을 감당하면서 함께 그리고 끝까지 사명에 충실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팔로마 한인교회를 예루살렘 교회처럼 배움의 공동체, 전도의 공동체, 나눔의 공동체, 기도의 공동체, 관용의 공동체가 되도록 힘쓰면서 하나님이 기뻐 쓰시는 사람들이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과 같이 이 땅에서 풍성한 복도 받고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