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소망의 공동체 (행 5:12-42)

Author
Myung Myung
Date
2006-08-20 20:38
Views
3017
행 5:12-42  소망의 공동체



일간 신문을 보니 어느 특정한 교회를 둘러싸고 지지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전면광고를 통하여 서로의 입장을 밝힙니다. 양측 다 자기들이 피해자요 상대방은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이요 자기들이 현재 하는 행동은 정당하다고 주장합니다.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이 한쪽 편을 들면서 지지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또 싸움이구나, 이 교회도 별 수 없어, 언제까지 저런 진흙탕 속의 싸움을 계속할 것인가 하는 비난을 하지 않겠습니까? 마귀의 작전이 그 교회에서 통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사무엘하를 보면 다윗의 집과 사울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습니다. 누가 적인지 아군이지 구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들끼리 서로 싸우며 피를 흘립니다. 가나안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막상 싸워야 할 적과 싸우지 않고 형제끼리 치고받고 싸웁니다. 그 전쟁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거룩한 명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행동을 하라고 가나안에 이스라엘을 옮겨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삶이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하나 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교회가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됩니다. 복음에 대하여 여전히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는 21세기와 우리 각자는 성도로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며 세상에 소망을 주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세상에 기쁨을 주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까? 끊임없이 점검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헌금 일부를 감추고 다 드린 것처럼 거짓말했다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을 인하여 온 교회와 이 사건에 대하여 들은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죽이기까지 하시다니 하나님께서 좀 지나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호하게 이 문제를 해결하신 이유는 이제 막 생겨난 성령의 공동체가 성령을 속이고 서로를 속이는 것이 보편화되면 교회는 세상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모임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18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안 믿는 자들에게 어리석게 보이는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죄인의 모습으로 죽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장작을 태우는 불과 같습니다. 장작을 자꾸 때리면 때릴수록 작은 불꽃들이 튀며 사방으로 퍼집니다. 복음에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꺼지지 아니하고 자라나고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복음을 대적하는 세력들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성도들을 통하여 복음은 전파되어 가고 교회는 성장해 갑니다. 하나의 위기가 지나가면 또 다른 위기가 닥쳐오지만 그런 가운데 교회는 여전히 세상에 소망을 주며 믿는 사람이 수가 더해집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복음의 위대한 능력이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남으로 인하여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 되고 박해와 위협 속에서 담대하게 사명을 감당하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본문에 나타난 성경의 원리들을 삶에 적용하면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이 세상에 소망을 주고 빛이 되는 귀한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복음의 능력에 세상이 주목합니다.

사도행전의 패턴을 보면 한 가지 위기를 잘 넘길 때 그 다음에는 교회에 하나님의 풍성한 위로가 임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사도들의 손을 거쳐서 많은 기적과 놀라운 일들이 백성 가운데서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한 마음이 되어서, 솔로몬 행각에 모이곤 하였다.” (표준, 행 5:12) “일어났다”라는 단어와 “모이곤 하였다”는 단어는 과거습관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한 사도들을 통하여 기적과 놀라운 일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을 통하여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니 세상이 주목합니다. 사도들을 인하여 믿게 된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확신과 성령의 감동 안에서 한 마음이 되어 솔로몬 행각에 계속해서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교회의 아름다운 교제와 치유의 역사를 통하여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습니다. 그 교회 사람들 대단하다던데. 수많은 병자들이 교회에 가면 다 낫고 더러운 귀신들도 다 쫓겨 나간데. 기적이 많이 일어난 데더라.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관심을 가지거나 실제로 치유의 역사가 사도들을 통하여 일어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 중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아졌는데 남녀의 큰 무리였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병든 사람들을 거리로 메고 나가서, 침상이나 깔 자리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 그림자라도 그들 가운데 누구에게 덮이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요즈음 귀납법적 성경공부를 배우고 있으니 한번 묻겠습니다. 베드로의 그림자가 덮이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사도들의 병 고침에 열광하여 모여 들다보니 그림자가 지나가도 낫는다는 생각을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이지 성경 어디에도 그림자만 지나가도 병이 낫는다는 구절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표적이 사도들의 사역을 통하여 재현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는 하나님의 은혜시대가 메시야를 통하여 임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사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시고 난 후의 이사야가 예언한 사역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죄 때문에 마귀에게 종노릇하며 인생을 허비하던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상한 마음을 치료하시며 기쁨과 평강을 전하셨고, 죄로 인하여 소외되었던 인생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수많은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막 6:56)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마 11: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그런데 예수님을 통하여 일어났던 표적과 기사가 사도들에게 그대로 나타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성령의 능력을 동반한 사역들을 통하여 전도의 열매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자들의 눈에는 기독교나 불교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저 수많은 종교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성도들의 삶이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눈총을 받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 몇 사람들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도를 막습니다. 길거리나 마켓 앞에서 아무리 많은 전도지를 뿌린다할지라도 전도의 효과는 미미합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은 세상에 소금과 빛으로 나타났습니다. 세상에서 볼 수 없었던 일들이 사도들을 통하여 일어나니 불신자들이 소망을 가지고 교회로 계속 몰려들었습니다.

  

복음의 지경이 예루살렘을 넘어섭니다.

그동안 전도사역은 예루살렘 성을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니 예루살렘 근방에 있는 많은 동네에서 왔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땅끝까지 퍼져가야 할 복음이 이제 예루살렘 성을 막 넘어 전파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도 방해가 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자 사단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교회를 방해합니다. 처음 사도들을 체포하였을 때에는 그들을 고소할 마땅한 죄목을 찾지 못하고 “앞으로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4:17) 위협만 하고 놓아주었습니다. 사단이 교회에 침투하여 아나니아 부부를 충동질하여 잠시 흔들었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릴 뻔 했던 위기를 잘 넘긴 예루살렘 교회는 더욱 성장합니다.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을 거둡하고, 내적으로 결속이 되니 사단은 또 도전을 해 옵니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였다고 합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교회를 향하며 믿는 자들의 숫자가 급속도로 성장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의 사역이 계속 확대될 경우 종교지도자로서의 자기들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자신들이 그동안 독점적으로 누려오던 기득권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적개심을 가지고 사도들을 재차 체포하여 투옥시킵니다. 눅 21:12,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하면서 예수님이 예언이 이루어집니다. 그들은 수많은 병자가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 가는 것을 인하여 기뻐하고 격려하기보다 자기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한 사도들을 시기하며 미워합니다. 예수 믿고 새 언약의 공동체가 된 교회의 지도자들은 생명을 살리는 일에 전념하는 반면에, 옛 언약의 공동체인 종교지도자들은 마귀의 하수인이 되어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사도들을 도리어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에 방해꾼들이 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하나님을 제일 잘 알고 제일 잘 섬기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시기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대적합니다. 욥 5:2,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즉 미련한 사람은 자기의 분노 때문에 죽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의 질투 때문에 죽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시기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에게 기득권 주장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 대한 권리 주장은 오직 주님만이 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청지기요 종일뿐입니다. 항상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의 자세를 주의 형제자매들을 섬겨야 합니다. 시기심을 인하여 형제나 자매를 미워하거나 비방하면서 어려움에 빠뜨린 적은 없습니까? 남들이 열심 내는 것 꼴을 못 보고 공연히 뒤에서 헐뜯거나 깎아내리지는 않습니까? 시기로 인한 추한 행동들은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우리부터 한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매이지 않습니다.

마귀의 방해가 처음에는 통하는 것 같으나 한계가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밤에 주의 사자들, 곧 천사들을 보내어 사도들을 건져주십니다. 이튿날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도들을 잡아 오라고 경비병들을 옥으로 보냈습니다. 옥문은 잠겼고 간수들이 지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이 없어진 사건은 공회 앞에서 종교지도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기적을 믿지 않던 그들로서는 어떻게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전에 베드로가 붙잡혔을 때 교우들이 합심하여 기도할 때 이제 그들의 위협을 내려다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참으로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는데 그 기도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이 보고합니다.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다고 알려줍니다. 그래서 성전 경비대장이 경비들과 같이 가서 사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을 잡아오기는 하지만 무리 앞에서 때리거나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믿는 사람들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감동을 받은 무리들이 많아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로마 정부는 정복지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그들의 관습이나 종교에 대한 자유를 보장하면서 가능하면 정복지의 사람들을 회유하려 하였으나 단지 소요가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종교 지도자들이기에 만약 사도들을 함부로 다루었다가 백성들이 소요를 일으킨다면 로마 당국의 추궁을 당하는 것이기에 백성들의 분노를 살까 두려워하며 조심스럽게 사도들을 다시 끌고 산헤드린 앞으로 데려옵니다. 우리를 위협하는 세상이 강해 보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주 안에서 담대해야 합니다.  



끌고 온 사도들을 공회원들 앞에 두고 대제사장이 전에 예수님에게 하던 것처럼 심문을 시작합니다.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는데 (행 4:18)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혐오감이 대단하여 예수라는 이름조차 입에 담기를 꺼립니다. 이 이름, 너희 교, 이 사람의 피 등의 단어를 사용합니다. 전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 “이 사람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하였는데 그때에 백성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마 27:25) 그 말을 기억하는 대제사장인지라 마음에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몇 주 전에 열린 공회에서는 당당하게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을 모독한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죽게 하였는데 이제는 이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된 것으로 인하여 두려워하며 사도들을 심문하면서 자기의 입장이 상당히 난처하게 되었음을 은연중에 나타냅니다.



* 역경 속에 있는 사도들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1) 사명을 깨닫습니다.

이미 오순절 이후에 자기들의 사명은 땅 끝까지 이르러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함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새롭게 깨닫도록 합니다.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주의 천사가 사도들에게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고 합니다. 천사는 사도들에게‘말하라’할 때 현재 명령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해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는 뜻입니다. 전도를 통하여 사람들을 계속해서 생명으로 이끄는 것이 사도들을 부르신 주님의 뜻입니다. “생명의 말씀”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가르침은 듣고 믿는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사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영원히 죽을 죄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파하여 그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들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래서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계속 감당하도록 천사를 통하여 밤에 그들을 끌어내셨습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 고전 15:3-4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는 구원을 받아 영생을 가집니다.



2) 사명에 충실합니다.

사도들은 주의 사자를 통하여 자신들의 사명을 새롭게 깨달으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 새벽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가 생명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합니다. 복음 증거가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고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합니다. 그들의 자세는 사람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안전할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까? 사도들은 그러한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면 실천하는 것이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그들의 모습입니다. 석방된 사도들은 다시 체포되면 어떻게 하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 새벽에 성전으로 직행하여 모인 무리들에게 복음을 가르칩니다. 믿는 무리들이 이미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사도들의 석방을 위하여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을 새워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이들이 사명감에 불타니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 (롬 14:8)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바라는 바울의 심정이 오늘 사도들의 태도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또한 공회 앞에 선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태도는 어떠한가? 피고의 입장에서 주눅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공회원들의 죄를 지적합니다. 복음 전하는 것을 금지시키려는 공회원들 앞에서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권위자 중의 권위자이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당연함을 강조합니다. 재판을 받으면서 답변하는 것을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습니다.



사도들에게 있어서 관심은 부활하신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증거는 간결하였으나 핵심 요소는 다 들어가 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하나님은 그분을 어떻게 하셨는가, 죄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내용의 메시지가 전처럼 선포됩니다.

1)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그 예수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습니다

2) 하나님은 자기 오른 손으로 그를 높이셔서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주님이요 구세주가 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 용서를 받게 하려고. 오른 손은 하나님의 영광, 능력, 권세를 상징합니다. 임금으로 번역된 단어가 의미는 pioneer. 선구자,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롬 6:4,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공회원들이 새롭게 시작하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깨달을 리가 없습니다. 그저  자기들의 기득권만 챙기면 그만입니다. 다른 성경에는 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주 (행 3:15), 구원의 주 (히 2:10), 믿음의 주 (히 12:2). 예수 그리스도 만이 죄와 사망과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져 주시는 살아 계신 구세주입니다. 사도들이 이 일에 증인이요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도 또한 예수의 고난과 부활과 영광 받으심의 증인입니다. 즉 성령은 사도들로 하여금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하고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짧은 증거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자기들의 죄를 지적하고 또한 그 나사렛 예수를 살리셔서 그 이름을 의지하여 회개하고 죄사함 받으라고 공회원들에게 선포하니 공회원들은 흥분하여 사도들을 죽여 버리자고 결정하려 합니다. 불과 몇 달 전에 예수님의 발언을 듣고 대제사장이 옷을 찢으며 죽이고자 했던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백성들의 소요를 두려워하여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체포하는데도 신중을 기했던 그들이었으나 노가 발동하니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들의 예수를 향한 시기심은 이성을 잃게 합니다. 나사렛 예수도 죽였는데 그를 따르는 자들 쯤이야 하며 그들을 처치하자는 의견이 갑자기 공회의 지배적인 의견이 되었습니다.    

        

* 하나님은 뜻밖의 조력자를 예비하십니다.

꼼짝없이 사도들이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역사 하십니다.  고전 10:13,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대적하는 무리들도 하나님의 선한 목적에 사용하십니다.



사도들에게 뜻하지 않은 동반자가 생깁니다. 험악한 분위기에서 갑자기 가말리엘이 일어납니다. 그는 율법의 선생이요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던 자였기에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권위가 있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가말리엘 밑에서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다고 하였다 (행 22:3). 그는 비록 예수를 믿지는 않았으나 율법에 대한 지식과 양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신중함이 있었고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을 잠시 밖에 내보내고 자신의 견해를 공회원들 앞에서 말하면서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도록 지혜로운 충고를 합니다.  이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하면서 사람에게서 나온 역사적인 예를 듭니다.

1) 드다: 그가 반란을 일으켜 한때는 사백이나 따르다가 그가 죽으니 그 무리가 다 흩어짐

2) 갈릴리 유다: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가 죽으니 좇던 무리가 다 흩어짐.  두 사람 다 자칭 메시아라고 민중들을 선동하다가 죽으니 그를 따르던 무리들도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까 하노라. 가말리엘의 의견은 공회원들에게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도 드다와 유다처럼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흩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가말리엘의 말을 듣고 사도들을 놓아주기는 하되 단순히 훈방만 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하여 사도들에게 채찍질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도록 위협을 하고 놓아주었습니다.



3) 여전히 사명을 감당합니다.

공회에서 다시 풀려 나온 사도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공회원들의 위협이 전혀 먹혀들지 않습니다.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고 온몸이 쑤시지만 예수님도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예수의 이름을 인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사도의 특권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 5:11-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사실 이때 매를 맞았던 베드로도 나중에 베드로 서신을 통하여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 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벧전 4:16).



사도들이 이렇게 풀려나니 교회는 더욱 든든히 서가고 사도들은 더욱 뜨겁게 전도합니다. 위협에 상관없이 날이면 날마다 성전에서나 각 가정에서나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는 것과 전도하는 것을 쉬지 않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점점 왕성해집니다.  



롬 1:16,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복음에는 생명력이 있어서 어느 누구라도 아무리 세상 적으로 볼 때 나쁜 사람이라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을 믿었기에 사도들은 온갖 박해와 위협 속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교회사를 돌이켜 볼 때 박해를 통하여 복음 전파가 일시적으로 위축했던 것처럼 보인 적은 있으나 결국은 열매를 맺고 그 영향력은 더 크게 퍼졌습니다. 드다를 쫓고 갈릴리 유다를 좇던 무리들은 흩어졌지만 그리고 사람으로서 난 무수한 것들은 무너뜨릴 수 있지만 하나님으로서 난 그리스도의 복음은 흩을 수도 무너뜨릴 수도 없습니다. 그 증거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20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여전히 그 수를 더해 가고 있고 아직도 많은 선교사와 전도자들의 주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이는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복음의 보배를 질그릇과 같이 연약하고 부족한 저희들에게 주셨는데 이것은 우리 보고 품고 있으라고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복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이것이 넘쳐흘러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대적하는 세력들은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시기하고 분노하고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방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복음에 사로잡힌 사도들은 사명을 분명히 깨닫습니다. 사명을 실천하려고 담대함을 가지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는 중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합니다.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은 영혼 구원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교회는 생명의 말씀을 부지런히 전해야 합니다. 나 한 사람이 구원받은 것을 만족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의 삶을 통해 나와 함께 살아가는 자들에게도 주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인도하시고 그들을 방해하는 모든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십니다. 성도들은 모든 이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좀더 충실히 해보려면 여러 가지로 방해받거나 부딪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와 같은 저항은 누구나가 겪는 당연한 현상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면서 믿음의 선진들과 같이 결단력 있게 신앙생활하며 복음을 인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도우실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본받아 구원의 방주일 뿐 아니라 세상에 소망을 주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한 마음이 되어 함께 전진하시며 많은 영혼들을 주님께 인도하는데 기쁨으로 참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