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거룩한 공동체 (행 4:32-5:1)

Author
Myung Myung
Date
2006-08-13 17:07
Views
3513
행 4:32-5:11  거룩한 공동체



지난 주일 한번 빠졌는데도 교우들을 상당히 오랜 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영육 간에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고 격려해주신 모든 교우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휴가 첫 주 동안은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과 관광을 함께 다녔습니다. 얼굴에 주름살이 더해지고 외모는 변했지만 모이고 보니 여전히 옛날 분위기가 나타났습니다. 동기 9명 중에 7명이 크리스천이 되었고 그중에 둘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무교동을 많이 거닐던 과거의 소행을 볼 때 그야말로 놀라운 변화가 우리 가운데 나타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위기로 보아 나머지 두 명도 믿는 것은 시간문제 같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크고 놀라운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행을 다녀와서 교회 앞 농구장에서 아버지 팀과 아들 팀이 농구 게임을 했습니다. 아버지들이 아들들보다 덩치는 큰데 자식들과 부딪치면 넘어지는 것은 아버지 쪽입니다. 민첩한 아들 팀에게 엄청난 점수 차로 졌습니다. 그런데도 졌다고 분해 하는 아버지들은 없었습니다. 왜 그런가요? 자식이니까. 그들에게서 밝은 미래를 보기 때문입니다. 건강의 중요성을 새삼 느꼈습니다. 사람이 단순히 몸집만 크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건강한 체질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숫자만 많이 모인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체질적으로 건강해야 합니다. 교우들의 신앙생활에 기쁨과 활기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건강한 교회, 축복하기 원하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가 그런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주께서 기뻐하셔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냥 그 수를 더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기특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사도행전에 나타난 예루살렘 교회의 특징을 정리해볼까요? 예루살렘 교회는 철저한 회개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시작된 교회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된 교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담대하게 증거 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는 전도의 공동체입니다. 주님과 기도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교제를 나누는 기도의 공동체입니다. 또한 받은 은혜를 감사하면서 다른 지체들과 나누기를 기뻐하는 나눔의 공동체입니다. 21세기에 있는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본받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똑같이 기뻐하시고 사역을 풍성하게 하시고 믿는 자들의 수를 더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루살렘 교회가 전혀 문제가 없던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에는 별 종류의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마련입니다. 믿음과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덕을 끼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생활을 자기의 목적을 이루거나 불순한 동기로 섬기려는 사람들도 간혹 있습니다. 누가는 아름답게 성장하고 있는 초대 교회에서 일어난 최초의 불미스런 사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도들을 통하여 왕성하게 전파되자 이를 시기한 사단이 제사장과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등 외부 세력을 동원하여 방해하려 했습니다. 성도들은 외부의 위협이 거세질수록 기도에 전념하며 하나가 되었고,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단은 전략을 바꾸어 교회 내부를 공격합니다. 그 와중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단의 도구가 됩니다. 본문은 진정한 나눔으로 칭찬을 받는 바나바와 위장된 나눔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아나니아 부부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나타납니다. 문제가 심각한 만큼 하나님의 징계 또한 무거웠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21세기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불꽃같은 눈으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아름다운 헌신의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  바나바는 진정한 나눔의 본을 보여줍니다  

교인들 중에 자기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놓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누가는 진정한 나눔의 본을 보인 대표적인 사람으로 바나바를 소개합니다. 그는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으로 본명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잘 돌보는 달란트가 있어서 사도들은 그에게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나바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는 다소에 있던 무명의 전도자 바울을 안디옥에 불러와 같이 사역함으로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사역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줍니다. 일차 전도 여행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중도에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마 부잣집 청년으로 험난한 전도여행을 감당하기 어려웠는지 모릅니다. 원칙주의자인 바울은 이차 전도여행 때 마가를 데려가기를 거부했습니다. 이일로 바나바는 바울과 크게 다투었습니다.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이차전도여행을 떠났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바나바는 실패한 마가에게 다시 한 번 사역의 기회를 제공하였기에 마가는 초대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마가복음도 쓰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쓴 편지를 보면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하면서 디모데에게 부탁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렇듯 바나바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함으로 일꾼으로 만드는 달란트가 있었습니다.



바나바가 자기 소유의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전부 드리면서 나눔의 본을 보였기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습니다. 4:32-35절에 나온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볼 때 한 가지 의문 내지는 불안감이 생길 수가 있겠습니다.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에게 드렸다는데 그렇다면 초대 교인들은 누구나 자기의 가진 집이나 전토들을 다 팔아서 교회에 바쳐야 했고 개인의 재산은 용납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성경적 원리라면 오늘날도 믿는 사람들은 신앙촌이나 어떤 사교집단 사람들처럼 자기 모든 재산을 팔아 교회에 다 드려야하는가? 사도행전은 교회가 막 형성되는 처음 삼십 년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교회사의 다른 어떤 때보다도 독특하게 일어나는 사건들이 많습니다. 사도행전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기록된 내용들이 오늘날도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은 문자적으로 따라야 하지만 어떤 것은 왜 그랬는가 하는 기본 정신을 이해하고 본받으면 됩니다. 사도행전의 내용을 우리의 삶에 반드시 적용해야 하는지 아니면 적용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지 하는 기준 중의 하나가 지속적으로 그 내용이 언급되는가 아니면 한두 번 언급되는 것으로 그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기 위하여 성도들이 기도하는 것 또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물세례와 성령의 세례가 따르는 것들은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됩니다. 한편 행 1장에 가룟 유다 대신 사도를 뽑을 때 그들은 제비뽑기를 하였습니다. 제비뽑기에 대하여 사도행전 1장 이후나 바울 서신들에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제비뽑기를 한 것이 시기적으로 아직 성령의 강림이 있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원들을 선출할 때 제비뽑기를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제비뽑기를 해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공산주의에서 시행하는 것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1)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지만 본문에 보니 각 사람의 소유권을 인정합니다.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이 모든 재물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은 사유재산권을 포기하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유재산권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필요에 따라 교회가 그들의 재산을 처분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신자들은 법적으로 자기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마음과 뜻으로는 언제든지 그들의 재산을 가난한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기꺼이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를 꾸짖을 때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하면서 아나니아에게 소유권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행 12:12에 의하면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교인들이 마가의 어머니 집에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교인들이 다 자신의 소유물을 판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서신들에도 보면 그가 많은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새로 믿게 된 사람들이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쳤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빌립보의 루디아의 집, 디도 유스도의 집 (행 18:7) 눔바의 집 (골 4:15) 들은 오히려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처소, 곧 가정교회가 되었습니다.

2) 공산주의는 있는 자의 것을 강제적으로 거두어서 나누어주지만 초대 교인들의 나눔은 철저하게 자발적입니다.

엡 5:18-22,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복종: voluntary submission.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자발적으로 섬기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성령 충만 받을 것을 권면하고 나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고용주와 고용인들에 대한 섬김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3) 또한 공산주의는 각 사람의 독특한 필요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이 획일적이지만 성경은 각 사람의 형편과 처지가 다름을 인정합니다.

예수님께서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각 재능대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셨다고 합니다. 사도들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2.  아나니아 부부는 탐욕을 인하여 거짓된 헌신을 합니다  

바나바가 교인들에게 아름다운 섬김의 본이 되어 칭찬 받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며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그런 인정을 받고 싶었습니다. 초대 교인들의 전형적인 섬김의 패턴은 무엇입니까? 소유를 팔아 - 다 가져다가 -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그런데 아나니아 부부는 그 패턴을 조금 변질시킵니다. 소유를 팔아 - 얼마를 감추고 - 얼마를 가져다가 -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항상 정도에서 벗어날 때 문제가 됩니다. 자기들의 소유를 팔기는 팔았는데 막상 다 드리자니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꼭 다 드려야 하나? 이중에 얼마를 감춘다 한들 누가 알까 하는 생각으로 아나니아가 판돈의 일부를 자기의 몫으로 감춥니다. 아내도 이 사실을 알지만 제지하지 않습니다. 부부가 공범입니다. 아나니아는 판돈의 일부를 가져다가 사도들에게 놓습니다. 판돈을 사도들에게 바칠 때 아나니아의 표정은 어떠하였겠습니까? 나도 이렇게 바친다는 흐뭇한 표정, 자기 과시의 표정을 지었을 것입니다.  



행 3장에서 베드로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거지를 주목하여 보다가 그를 일으킴으로 많은 결신자들을 얻었습니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베드로는 아나니아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사도행전에는 유달리 채워진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filled with the Holy Spirit,  filled with fear. 주어는 하나님이다. 채우시는 분은 하나님. 그런데 아나니아의 경우에는 탐욕을 인하여 사단이 그의 마음을 채웠습니다. 교인들은 성령으로 가득하였는데 아나니아는 사단으로 가득하였다. 베드로가 책망합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드리고 싶으면 다 드릴 자유도 있고 드리고 싶지 않으면 안 드릴 자유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문제가 된 것은 드렸느냐 안 드렸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나니아가 아무것도 바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그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땅을 판돈의 일부를 드리면서 다 드린 것처럼 거짓말한 데 있습니다. 베드로의 표현을 빌자면 성령을 속인 죄 (3절), 하나님을 속인 죄 (4절), 성령을 시험한 죄 (9절) 입니다.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고 성령을 시험한 죄를 범하였기에 그가 죽었습니다.  



아나니아에게 일어난 것과 비슷한 사건이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여리고를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여리고성의 무릇 살아 있는 것은 다 죽이고 모든 재물은 다 하나님께 바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아간이라는 자가 탐욕으로 인하여 외투 한 벌, 은 2백 세겔, 금 오십 세겔을 훔쳐 자기의 장막에 숨겨 두었습니다. 그는 은밀하게 행하였으나 하나님은 다 아셨습니다. 그가 훔친 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노략한 물건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큰 죄나 작은 죄나 똑같은 죄이기에 다 심각하게 다루셔서 아간과 공범인 그의 아들들은 온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다 돌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재산의 일부만을 훔쳤지만 성령을 속인 죄로 인하여 온 교회 앞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나니아가 죽은 지 세 시간 쯤 지나서 삽비라가 아무 영문도 모르고 사도들이 있는 곳에 나타났습니다. 아마 아나니아가 사도들에게 헌금한 것을 인하여 칭찬 받았을 것을 기대하면서 발걸음도 당당하게 교회에 들어 왔을 것입니다.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베드로가 묻습니다. 삽비라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어집니다.  예 이 뿐이라 자신 있게 답변을 합니다. 너희가 어찌 공모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과연 아나니아를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을 때 삽비라 역시 베드로 앞에 엎드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남편을 장사한  사람들이 삽비라 또한 메어다가 아나니아 곁에 장사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간이 돈에 맞아 죽는 것을 인하여 두려움이 가득했던 것처럼 온 교회와 이 사건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크게 두려워하였습니다.



아나니아의 이름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저버리고 탐욕과 위선으로 행동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삽비라는 ‘아름답다’는 뜻이지만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아름답지 못한 행동을 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바나바는 자원하는 마음과 기쁜 마음으로 물질을 온전히 바침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으나, 아나니아 부부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돈으로 성령을 시험하였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하는 제자도에서 탈선하였기에 그들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아나니아가 한 행동은 야고보 1:15의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 성령 충만하였던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1) 하나됨

성령의 역사는 초대 교인들로 하여금 복음의 증인으로 담대하게 살게 하였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 자체를 더욱 풍성하게 하였습니다. 32절에 보니 예루살렘 교회를 잘 표현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한 마음과 한 뜻” 베드로와 요한의 체포로 인한 박해는 교인들을 더욱 하나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됨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장 귀한 표시입니다. 또한 하나됨은 지체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표현이 됩니다. 많은 교우들이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자신의 것을 다른 지체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공유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초대교회의 사랑과 연합은 인간적인 유대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성령 충만이 그들의 삶에 열매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이란 단지 뜨거운 감동을 받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주님과 다른 지체들을 돌아보게 합니다. 자신의 재물로 다른 지체들의 필요를 채워줍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어느 교인도 부족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2) 자발적인 헌신

성령으로 충만한 예루살렘 교회는 재물을 서로 공유하며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채워 주었는데 이런 생활이 지속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초대 교인들이 자기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놓은 것은 누구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으니 자발적으로 섬기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한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감사함으로 헌금을 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바치는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을 속이고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으려다가 멸망을 당했습니다.



헌신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할 때 신앙생활은 부담이 됩니다. 은혜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가 율법적인 태도로 바뀌어져 무엇을 해야만 신앙생활 제대로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제직이니 봉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하기는 싫고, 십일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다른데 쓸 곳은 많고 등등. 어떤 행위를 해야만 교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신앙생활은 점점 의무로 바뀌어져 버리고 기쁨은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큰 교회 뒷자리로 몰립니다. 1940년대 독일의 신학자인 Bonhoeffer는 이미 독일 교회에서 그런 성향을 발견하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싸구려로 만든다고 지적했습니다. 시간과 정성은 별로 드리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축복은 많이 받고 싶어 하지는 않으십니까? 행위로 자신의 믿음을 보이려 한다면 피곤해지고 그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종려주일에 ‘주께서 쓰시겠다’ 하니 나귀 주인은 자기의 나귀를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내어 놓았습니다. 주안에서 자유 함을 누리며 신앙생활 하기 원하십니다. 주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기 원합니다.  



3) 청지기 의식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충만하게 임하니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요 자기는 그분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의식이 그들을 지배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모든 소유를 주님을 위하여 언제든지 기꺼이 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성도가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청지기로 서로 봉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의 직분을 맡은 성도들을 가리켜 청지기라 함은 그들이 주의 집에서 관리의 책임을 맡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주인의 뜻을 잘 헤아리고 그 주인의 뜻을 기꺼이 따르는 청지기를 착하고 지혜 있는 청지기라고 합니다.  청지기의 자세: 작은 일에도 충성함(마 25:20,21);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함 (고전 4:1,2); 변함없이 끝까지 섬김 (딤후 4:7,8) 초대 교인들의 마음 자세를 본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물질을 가지고 교우들과 한 마음과 한뜻을 가지고 섬겨야 합니다. 시간을 드리고 재물을 드리고 주신 달란트를 주를 위하여 사용하면서 믿는 자의 본이 되고 교회의 본이 되는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욕심은 죄를 낳습니다. 물질에 대한 소유욕에서 자유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 하나님께서 이 시간 저희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5:11에서 사도행전에서는 처음으로 교회라는 의미의 ekklesia 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부름 받은 무리라는 의미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무리의 공동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들은 믿음을 삶으로 표현해야 하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탐욕과 위선에서 비롯된 아나니아 부부의 문제를 하나님은 엄격하게 다루셨습니다. 헌금 얼마를 감춘 것은 물론 잘못 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죽이기까지 하는 것은 좀 지나친 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잘못하면 생명까지 잃게 되다니 하면서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아마 성령을 시험하고 하나님께 거짓말 한 것을 인하여 죽음을 당한다면 오늘날 장의사들은 몹시 바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에 헌금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섭게 징계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공동체의 순결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갈 6:7,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의 욕망을 따라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낼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아간의 사건은 가나안 정복의 초기에 생긴 것으로 우상을 많이 섬기던 가나안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을 경건한 백성으로 구별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기에 탐욕을 인한 불순종에 대하여 가혹한 벌을 내리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교회입니다. 사도들을 통한 기사와 이적이 일어나고 병자가 고침을 받고 은혜가 풍성하고 다른 지체들을 도우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칭송을 받는 교회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요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야 했기에 그같이 무서운 징벌을 내리셨습니다. 만약에 아나니아의 위선이 그냥 묵과되었더라면 사단이 더욱 왕성하게 교회 안에서 활동함으로 큰 혼란에 빠지고 오늘날과 같은 교회는 존재하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불신앙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고 징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일의 결과만을 보시고 판단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동기, 과정, 결과를 다 보시는 분입니다. 얼마나 헌신했는가 그 양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실함으로 순종함으로 하였는가, 얼마나 자발적으로 하였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되 정직함과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정직하지 못한 헌금과 이기적 동기를 가진 헌신은 아무리 많이 드리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이 부담이 되고 그로 인하여 기쁨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헌금을 드리거나 구제하는 것은 믿음의 분량대로 하면 됩니다. 남들이 하니까 혹은 경쟁심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는 주님입니다. 주안에서 참된 위로와 평화를 가지며 신앙생활 하기를 원하십니다. 만유를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녀들이 드리지 못한 것으로 근심하는 분이 아닙니다.



사단이 역사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도 사단의 세력이 침투합니다. 탐욕, 위선, 명예심 때문에 사단에게 역사할 틈을 줍니다. 또한 능력을 행한다고 미혹될 것이 아니라 사단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모든 교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성도의 ‘聖’자는 거룩할 성입니다. 세상과 구별된 되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말이나 행동이나 생각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냄새를 풍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교회의 생명이 ‘하나님 앞에 거룩’에 있음을 명백히 하셨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이 거룩함을 잃어갈 때 그와 함께 능력이 사라집니다. 초대 교회 때는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조롱이나 비난의 대상이 될 때도 있습니다. 지금은 저와 여러분이‘하나님 앞에 거룩’을 회복할 때입니다.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진실한 성도들을 찾으십니다.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귀한 역사를 이루어가기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내주하시는 성령의 임재를 느끼며 말과 행실의 거룩함으로 예수님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나눔을 통하여 자유함과 평안함을 맛보시고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사랑을 나누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