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누가 즐거이 드리겠느냐 (대상 29:1-17)

Author
Myung Myung
Date
2006-12-03 14:00
Views
3699
대상 29:1-17 누가 즐거이 드리겠느냐



누구나 아름다운 교회당에서 예배드리고 활동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누가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하는 이솝의 우화처럼 교회당을 건축하는 데는 많은 수고와 헌신이 필요합니다. 각자의 형편과 처지, 믿음의 분량이 다르기 때문에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고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교회들이 교회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처음부터 건축할 돈이 풍족하여 아무 부담 없이 건축을 시작한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현재의 우리의 형편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는데, 과연 이 상태에서 건축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들이 수없이 던져지는 가운데 헌신된 성도들의 노력과 하나님의 절묘하신 간섭하심 속에 지어진 교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교회들마다 건축에 얽힌 풍성한 간증거리가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2002년에 작정헌금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헌금한 돈으로 현재 교회 부지를 구입하였습니다. 3.4 acre의 땅을 47만5천불에 샀습니다. 칼스배드 지역에 그것도 교통의 요지에 그만한 가격으로 땅을 구입할 수 있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동안 칼스배드 시청으로부터 건축허가를 얻기 위하여 필요한 수속을 해왔는데 별 다른 문제가 없다면 내년 상반기 중에 허가를 받을 것입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건축에 필요한 기금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가장 기도가 필요한 때인지라 교회적으로 성전건축 및 송구영신 특별새벽기도회를 내일부터 4주간에 걸쳐 가집니다.  



성도들이 일생을 지내면서 교회당 건축에 몇 번 참여하겠습니까? 기껏해야 한두 번이요 아예 없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전을 건축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기회입니다. 다윗은 성전 건축에 대한 간절한 소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았습니다. 주의 일이라고 항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가 주어질 때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비결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양치는 소년, 형제들 중에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막내였지만 이스라엘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주변의 대적들을 물리치고 영토를 넓혔습니다. 다윗의 평생 소원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것이었는데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셨습니다.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저는 평강의 사람이라 내가 저로 사면 모든 대적에게서 평강하게 하리라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대상 22:7-9) 전쟁의 사람이 아닌 평강의 사람을 통하여 성전을 짓게 하시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다윗이 얼마나 실망하였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자기가 지을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떼를 쓰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섭섭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성전 건축을 위하여 많은 준비를 하였습니다. 다윗은 모든 방백들을 소집하고 솔로몬을 성전 건축을 주도할 자로 소개하며 백성들과 솔로몬에게 권면합니다. 그리고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과 관련된 설계도를 주면서 성전 건축을 잘 감당하도록 부탁을 합니다. 그 설계도는 다윗 자신이 구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작성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다윗은 본문을 통하여 성전 건축에 백성들의 참여를 호소하고, 그들의 헌신적인 참여에 감격하며 감사의 찬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교회당 건축을 앞둔 저희들이 어떻게 이 귀한 역사에 참여해야 하는지 성경적인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성건 건축에 대한 다윗의 이해

“이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1)

‘이 전’이라고 할 때 사용된 히브리어 ‘비라’는 주로 왕궁을 묘사하는데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참 왕이 여호와임을 의미합니다. 다윗 왕조와 이스라엘의 번영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기억하는데 있기 때문에 성전 건축의 사명은 큰일입니다. 비록 솔로몬이 어리고 약하더라도 하나님의 전을 짓는 일을 그에게 맡기셨으므로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하여 친히 당신의 집을 견고하게 세우실 것을 다윗은 바라보았습니다. 왕상 9:3에서 하나님은 성전을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을 것이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성전은 기도하는 곳이고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며 자기 가문을 빛내기 위함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다윗 자신이 먼저 모범을 보입니다.

1) “힘을 다하여 예비하였나니” (2)

다윗은 온 힘을 기울여,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준비를 하였습니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와 은 일백만 달란트와 놋과 철을 그 중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이 예비하였고 또 재목과 돌을 예비하였”다고 합니다. (22:17) 각종 기구들을 만들 금, 은, 동, 철, 목재와, 여러 보석과 대리석을 많이 준비하였습니다.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성전을 지을 재료를 준비한 모든 것 외에 개인 재산도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데에 바쳤습니다. 개인재산으로 번역된 히브리말 ‘세굴라’는 당시 고대 왕들이 재난을 당하거나 정치적으로 어려울 경우를 대비하여 마련해두는 재산을 말합니다. 다윗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많은 양의 예물을 하나님께 드린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정련된 은 칠천 달란트를 바쳤다고 하는데 한 달란트는 34kg입니다. 3000달란트면 102톤입니다. 은이 7000달란트라 하였으니 무려 238톤이나 됩니다. 지금 따져보아도 엄청난 양입니다.



2)  “내 마음에 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므로” (3)

다윗이 노래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시 27:4)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 107:9)

비록 하나님의 뜻은 자기가 아니라 솔로몬을 통하여 성전을 짓는 것이었으나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다윗의 마음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 그 일에 대한 지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전 3:11)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십니까?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기 원하십니까? 사모하는 만큼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심는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성전 건축에 동참을 호소합니다.

“오늘날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5)

본문은 성전 건축을 준비하는데 동참한 사람들의 심령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손에 채워” 하는 말은 제사장 직분을 얻을 때 사용하는 말로서 거룩하게 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누가 자원하여 거룩하게 하나님께 드리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제사장의 나라이고 거룩한 백성인 이스라엘이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림을 의미합니다. 아낌없이 자신의 소유를 내어 놓은 다윗의 헌신을 본받아 신하들이 기쁨으로 동참합니다. 모든 족장과 모든 지파의 어른들, 천부장, 백부장, 왕의 사무 감독이 다 즐거이 드렸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 건축에 쓰도록, 금 오천 달란트와, 금 만 다릭과, 은 만 달란트와, 동 만 팔천 달란트와, 쇠 십만 달란트를 바쳤습니다. 다릭은 페르시야의 금화를 가리킵니다. 만 다릭이면 84kg입니다. 쇠 십만 달란트면 3400톤입니다. 또 보석이 있는 사람은 저마다, 게르손 사람 여히엘이 관리하는 주의 성전 곳간에 가져다 바쳤습니다. 백성들은 지도자들이 기꺼이 주께 예물을 드리는 것을 보고 기뻐하고, 다윗 왕도 크게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다는 것이 큰 역사였고 솔로몬은 어렸지만 다윗과 그의 백성이 함께 동참하고 즐거이 드림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는 기쁨의 공동체로 발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체들의 연합이 필요합니다. 성전을 짓도록 솔로몬이 선택을 받았지만 이것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공동체 속에서 이것은 ‘나만의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키거나 이것은 ‘내 일이 아니라’는 생각 속에 방관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해야 합니다.



* 헌신의 자세

1) 즐거이 (freely)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짓기 위하여 예물을 풍성하게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출 25:2)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성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 여호와께 드렸으니” (출 35:21)



마찬가지로 성전 건축을 위하여 이스라엘 온 회중이 자원해서 즐거이 헌신합니다.

“모든 족장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 어른과 천부장과 백부장과 왕의 사무감독이 다 즐거이 드리되” (6절)

“백성이 자기의 즐거이 드림으로 기뻐하였으니”  

“저희가 성심으로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며 다윗 왕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니라” (9절)

“주의 백성이 주께 즐거이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즐거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 기꺼이, 자유롭게, 아낌없이 하는 뜻입니다. 진정한 헌신의 특징은 자발성입니다. 누구의 강요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헌신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 왕이 강요하여 각자에게 할당된 부분을 드렸다면 드린 자들의 기쁨이 충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회중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는 다윗의 비전을 이해하고 그 비전이 이루어지는 데 동참하였기에 함께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자발적으로 즐거이 참여한 헌신의 결과는 기쁨입니다. 자발적으로 기꺼이 드릴 때 참여한 사람들이 함께 즐거워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기쁨을 맛보아야 합니다.

  

2) 성심으로 (wholeheartedly)

(삼상 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왕상 14:8)  내 종 다윗이 나의 명령을 지켜 전심으로 나를 좇으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만 행하였다.

(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시 9:1) (다윗의 시)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렘 29: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성심으로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며” (9)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누구의 시선을 의식해서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하여 정성껏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고후 8장에 보니 바울은 마게도니야 교회를 칭찬합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힘이 드네요 어렵지만 해 보겠습니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십자가는 희생이요 죽음입니다. 약간의 수고를 할 때 십자가를 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주머니와 상의하기 전에 하나님과 상의해야 합니다. 교회의 필요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3) 정직한 마음으로 (with integrity)

악인의 특징은 거짓말을 잘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숨기고 감추려다 보니 또 다른 죄를 짓습니다. 반면에 의인들 즉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 보시기에 진실합니다. 밧세바와의 간음을 감추려고 다윗은 추한 짓을 많이 했습니다. 과연 이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던 다윗이 맞는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간음을 감추려다보니 자기의 충성스런 부하까지 죽음으로 몰았습니다. 그러나 나단을 통하여 죄를 지적받은 다윗은 하나님 앞에 애통한 심정으로 기도합니다. (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상한 감정이 단번에 쉽게 치료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하여 마음 밭에 심겨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우리의 상한 감정이 치유가 되고 마음이 열리며 기쁨으로 주님께 헌신하게 됩니다. (시 32:1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 부부는 자기들의 소유를 팔기는 팔았는데 하나님께 막상 다 드리자니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이중에 얼마를 감춘다 한들 누가 알까 하는 생각으로 아나니아가 판돈의 일부를 자기의 몫으로 감추며 남을 것을 드리며 생색을 냅니다. 그때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가 책망합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교회에 헌금이 부족하기 때문에 아나니아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드린 액수가 아니라 땅을 판돈의 일부를 드리면서 다 드린 것처럼 거짓말한 데 있습니다. 아나니아 부부는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고 성령을 시험한 죄를 범하였기에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참된 헌신은 누구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기억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을 인한 감격, 오늘까지 우리를 인도하시고 주관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우리의 정성을 드려야 합니다. 헌신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할 때 신앙생활은 부담이 됩니다. 봉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하기는 싫고, 헌금은 해야 할 것 같은데 더 급하게 쓸 곳은 많게 보이고. 그러다 보면 신앙생활의 기쁨이 사라져 버립니다. 갈 6:7,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얼마나 헌신했는지 양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실함으로 순종함으로 하였는가, 얼마나 자발적으로 하였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성전에 있는 연보궤 앞에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난한 과부가 드린 동전 두잎을 제일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되 정직함과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헌금과 이기적 동기를 가진 헌신은 아무리 많이 드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만유를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녀들이 드리지 못한 것으로 근심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는 주님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드린 작은 헌신을 기뻐하십니다.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합니다.

다윗이 자기 소유의 금은을 바치자 백성의 리더들이 다윗을 따라 즐거이, 전심으로, 자원하여, 정직하게  드립니다. 그들의 뒤를 이어 백성이 또한 성심으로 즐거이 예물을 드립니다. 온 나라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즐거이 드리는 모습을 지켜본 다윗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감격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이 진정 헌신자의 모습이요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제대로 사용한 자만이 누리는 기쁨과 감격의 모습입니다.

  

다윗이 찬양하는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1) 신실하신 하나님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더불어 맺으신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2) 온 천하를 소유하신 하나님

위대하심, 능력, 영광, 이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 속하였고 우리가 가진 것이 다 주께서 나온 것을 고백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야 진정한 복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14)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분의 것을 다시 돌려드리는 것뿐이지 우리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겸손하게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하게 인정합니다. 그들은 바른 물질관을 가졌습니다.  



3)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12)

다윗은 부귀가 주로부터 온다고 말합니다. 돈을 벌게 하는 권세와 능력도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시는 것도 주님 손에 달려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경영학을 전공한다고 돈을 버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아침부터 밤까지 뛴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노력하고 열정적으로 달려든다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잘 되지 않고 잠시 되는 것 같아도 지속적이지 못합니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15)



우리의 소유를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바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예물로 바칠 수 있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부어주시는 은혜는 나를 통하여 어딘가에 쓰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려는 태도로 내가 가진 것을 드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실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하여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 부요하신 하나님의 청지기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도의 본분

1) 베푸신 은혜를 인하여 찬양해야 합니다.

2)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주의 것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겸손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3)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입니다. 정함이 없는 세상 것에 연연하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드리는 것은 헌금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롬 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하며 사도 바울은 우리의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우리의 삶 가운데 인정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시간과 물질의 사용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수고하여 얻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면 구체적으로 나의 삶에서 그것을 표현해야 합니다. 진정한 헌신의 key word (핵심단어)는 ‘자발성’과 ‘기쁨’입니다. 자발적인 헌신을 통하여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맛보아야 합니다. 반면에 피해야 할 단어는 ‘인색함’이나 ‘억지로’입니다.



인생은 이 세상에서 안개와 같이 잠깐 있다가 사라질 존재입니다. 인생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삶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당 건축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복을 받을 기회를 부담으로만 생각하고 피하지 말기 바랍니다. 이번 기회를 통하여 각자 하나님의 자기의 삶을 통하여 역사하신 것을 간증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라는 욥의 고백을 기억하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귀한 것을 투자하는 복된 백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주의 것임을 깨달으며 베푸신 은혜를 인하여 기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