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믿음에 죽고 살고 (행 12장)

Author
Myung Myung
Date
2006-11-26 14:25
Views
4342


행 12장  믿음에 죽고 살고



어떤 사람은 예수를 잘 믿었더니 총알이 빗발처럼 쏟아지던 상황에서 자기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간증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믿음을 지키다가 박해자들에게 의하여 죽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잘 믿었더니 건강이 회복되었다고 간증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믿음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을 때도 있습니다. 제가 알던 어떤 목사님은 교회를 잘 성장시키시고 건물도 다 지어 놓았는데 갑자기 암에 걸려서 돌아가시니까 어떻게 하나님은 그러실 수 있는가 하여 자녀들이 믿음에서 떠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잘 믿었더니 사업에 많은 축복을 받고 그 벌은 돈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많이 사용한다고 간증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를 더 잘 섬기고 싶어 하던 일을 정리하고 선교사로 헌신하여 방글라데시로 갔다가 집 근처를 흐르던 강물이 갑자기 불어나 그 물에 휩쓸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 믿으면 사업에 반드시 성공합니까? 예수 믿으면 오래 살고 병에 걸리지 않습니까?  왜 어떤 사람은 예수 믿고 잘 되는데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어려움에서 헤어 나지 못합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12장은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만 세 번째로 옥에 갇히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방 선교의 문이 열리면서 한동안 잘 나가던 교회의 사역이 야고보가 죽고 베드로는 옥에 갇히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위기를 맞습니다. 베드로가 갇히고 풀려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 하시는지 살펴보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귀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 사건의 초점이 이방 선교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안디옥 교회에서 다시 예루살렘 교회로 바뀝니다.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체포로 예루살렘 교회는 다시 한 번 위협을 당합니다.

박해를 피해 안디옥으로 간 복음전파자들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을 받은 바나바는 사울과 더불어 동역함으로 안디옥 교회는 이방 선교의 전초기지로 세워져갑니다. 이렇듯 이방 선교의 불이 본격적으로 붙여지고 있을 때에 예루살렘 교회가 다시 고난을 받습니다. 전에 사도들이 사두개인들을 중심으로 한 종교권력에 의하여 핍박을 받았는데, 이제는 헤롯왕이 주도하는 정치권력에 의하여 핍박을 받습니다.



12: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12:19,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숫군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12: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2, 19, 23절의 공통적으로 나오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죽다.

같은 예수님의 제자인데 야고보는 죽임을 당하고 베드로는 살았습니다.

같은 감옥에 있었는데 베드로를 지키던 파수꾼들은 죽임을 당하고 그들에게 지킴을 받던 베드로는 살았습니다. 베드로를 죽이려던 헤롯은 죽고 헤롯에 의하여 죽음의 위협을 받던 베드로는 살았습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상황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살고 어떤 사람은 죽습니다.

    

1. 야고보는 죽었고 베드로는 살았습니다.

예수님과 삼년을 같이 다닌 제자들 중에 제일 먼저 죽은 사람은 가룟 유다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주님을 은전 삼십 냥에 팔았다가 양심에 가책을 받고 자살한 것이기에 그의 죽음을 순교라 할 수 없습니다. 순교란 주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다가 죽었을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열두 제자 중의 첫 순교자는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입니다. 본문을 보니 그의 죽음에 대하여는 자세한 설명이 없이 그저 헤롯왕의 명령에 따라 잡혔다가 칼에 죽임을 당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사실 야고보의 죽음은 예견된 것입니다. 야고보 형제는 예수님에게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막 10:37) 부탁을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막 10:38-39) 물으셨습니다. 잔과 세례는 고난, 더 나아가서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야고보 형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장차 임할 세상의 영광만을 생각하며 ‘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결과 같은 형제인데 야고보는 제자들 중에 제일 먼저 순교하였고 요한은 다른 제자들보다 아주 오래 살면서 온갖 고난을 다 겪었습니다.



베드로는 옥에 갇혀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주의 천사가 나타나서 극적으로 그를 구출합니다. 왜 같은 제자인데 야고보는 죽어야 했고 베드로는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까? 하나님이 베드로를 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까? 히 11:34, “믿음으로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죽을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는데 하나님이 극적으로 구원하셨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히 11:37, “믿음으로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예수를 안 믿었더라면 안 죽었을 텐데 믿음 때문에 오히려 칼에 죽었다고 합니다. 야고보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욥은 하루 사이에 그가 가진 육축, 종, 열 자녀들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욥은 어떻게 행동하였습니까? 욥은 슬퍼만 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었습니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이해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 사단의 고소처럼 하나님이 자기에게 물질이나 자녀의 복을 주셨기 때문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원망하기보다 도리어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고백합니다. 지금은 고난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을 믿었기에 남들은 불평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욥은 결코 이 일로 인하여 범죄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복을 주신 하나님을 평소에 찬양했지만 복을 거두어 가신 하나님도 찬양하고 있습니다. 욥은 바랄 수 없는 중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랐고 참을 수 없는 중에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참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따라 자기의 종을 감옥에 가둬놓기도 하시고 기적적으로 풀려나오게도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뜻은 항상 선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순종할 뿐입니다.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낙심할 것도 없고 무엇인가 하나님의 일을 좀 했다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인생의 한 단면 즉 재산의 많든지 적든지, 건강이 좋든지 나쁘든지, 일이 잘 풀리든지 꼬이든지 만을 보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거나 저주를 받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암에 걸리신 것은 집안에 큰 불행이었지만 그로 인하여 저희 많은 일가친척들이 예수 믿고 구원을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이 깨우쳐 주시고자 하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이기에 우리가 알 수도 없고 간섭할 수도 없습니다. 시 90: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더하게 하옵소서.” 모세는 덧없이 빨리 흘러가는 인생인데 남은 때를 영원하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택함을 받는 사실 하나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소원을 관철시키려 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오래 쓰임 받든지 짧게 쓰임 받든지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면 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고후 5:9) 하는 바울의 말씀을 기억하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며 끝까지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12장이 어떻게 끝납니까? 24절에 보니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표준새번역을 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널리 퍼지고 믿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사단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려는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집니다. 그 과정에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순교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약할 때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강함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2.  파수꾼들은 죽었고 베드로는 살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여러 번 들었을 법한 예화를 하나 소개 합니다. 어느 교회의 옆에 술집이 있었습니다. 교인들은 교회 옆에 술집이 있다는 사실이 몹시 마음에 걸렸습니다. 왜냐하면 허구한 날 술집에서 고성방가가 나고 사람들이 취하여 움직이는 모습이 보기 안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술집이 없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집에서 불이 났습니다. 술집 주인은 옆 교회에서 자기 가게가 없어지기 위하여 오랫동안 기도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고소하며 손해배상을 청구하였습니다. 교회가 기도했기 때문에 자기 가게에 불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 장로님이 재판장에 섰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옆에 있는 술집이 없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네 그렇게 기도한 것은 맞지만 에이 기도한다고 그대로 되나요?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술집 주인은 교인들이 기도했기에 그 응답으로 불이 났다고 주장하였고, 그 장로님은 기도한다고 그런 응답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술집 주인과 장로님 중에서 누가 더 기도의 능력을 믿었습니까? 물론 지어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우리가 자칫하면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문제가 있으니 기도는 당연히 해야 할 것 같은데 기도하면서도 기도가 응답을 받으리라는 확신을 갖지 못한 채 타성으로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체포되었을 때에는 무교절 기간입니다. 이 기간은 축제 기간이라 재판이나 처형 같은 것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그 기간이 끝나기까지 베드로의 처형은 연기되고 대신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중범죄를 지킬 때 4명의 군인이 한 조가 되어 4교대로 지켰습니다. 더구나 베드로의 좌우에 한사람씩 자기의 팔목과 베드로의 팔목을 사슬로 연결하고 두 명은 감옥 문을 지켰습니다.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탈출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날이 새면 베드로는 야고보와 같은 운명에 처할 텐데 태연히 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의 표적은 평안과 기쁨입니다. 선한 양심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 때문에 베드로는 양팔목이 쇠사슬에 매이고도 편히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그 밤에 홀연히 주의 사자가 자고 있던 베드로의 곁에 섰습니다. 홀연히 라는 말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라는 뜻입니다.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치며 급히 일어나라고 합니다. 그가 일어날 때 양쪽에서 군인들과 연결된 사슬이 풀립니다. 감방 안이 밝아지며 천사가 그 곁에 서서 허리띠를 띠고 신발 끈을 매라,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고 합니다. 지금 천사가 말하는 내용이 구약의 어떤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까?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출 12:11) 출애굽 전날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유월절 사건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 사건입니다. 이제 사슬에 매였던 베드로가 탈옥을 하여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 베드로 개인의 유월절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반쯤 깨어 있던 베드로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첫째 초소와 둘째 초소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립니다. 거리 하나를 지나니 베드로는 자기가 갑자기 혼자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는 말은 마음 한 편에서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도 실제 일어난 현상이 너무도 극적이라 제대로 믿지 못하는 경우에 하는 말입니다. 비몽사몽간에 자기를 구해 주는 어떤 사람을 따라 왔는데 길거리에 나와서야 정신이 들어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자기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감옥 안에 있던 자들이나 감옥 문을 지키고 있던 자들은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전혀 듣지 못합니다. 더구나 그들은 베드로의 도망과 관련되어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도 하나님은 그들의 방법과 한계를 넘어서 역사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도망쳤기에 애꿎은 파수꾼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베드로가 헤롯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교인들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그들을 헤롯의 만행을 규탄하는 집회를 가지거나 가두행진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기도로 시작된 교회입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1:14)  그 후로도 기도하는 모습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2:42)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4:24) 그들은 베드로가 잡혀간 날부터 합심하여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이미 죽었고, 베드로도 곧 죽게 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그들의 마음이 급했겠습니까? 교인들은 온 힘을 다하여 필사적으로 기도하였습니다. 12절에 보니 베드로가 풀려난 그 늦은 밤 시간에도 마가의 어머니 집에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자지 않고 베드로의 석방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힘주시고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그가 풀려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베드로를 풀어주셨습니다. 이제 베드로가 할 일은 자기가 도망했다는 것을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알리는 것이요, 다음으로는 헤롯 사람들에게 다시 붙잡히지 않도록 숨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디에 가면 교인들이 모여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요한이라는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습니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던 베드로의 음성을 듣고 로데라는 여자아이는 너무 반가워 문을 열어주는 것도 잊고 방안으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베드로가 살아 돌아왔다는 빨리 전하고자 하는 순진한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로데가 베드로가 문밖에 왔다는 것을 말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의 첫 반응은 어떠합니까? “네가 미쳤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해 놓고도 막상 응답이 이루어지니 믿지 못합니다. 로데가 사실이라고 우기니 그러면 베드로의 천사일 것이라고 조금 후퇴합니다. 자기들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 받은 것은 생각지 않고 그저 자기들의 상식에 비추어 로데의 말을 믿지 못합니다. 그 동안에 베드로는 밖에 서서 계속 문을 두드립니다. 그러나 요란하지 않게 두드렸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집안에 들어왔을 때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소리도 질렀을지 모르겠습니다. 도망 중인 베드로는 손을 흔들어서 그들을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감옥에서 인도하여 내신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와 그의 형제들에게 자기가 풀려난 소식을 전하라 하고 급히 떠났습니다. 전에는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었으나 베드로가 바나바와 더불어 이방인들의 전도에 힘쓰는 동안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베드로에 이어 교회의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그 자리에 없었기에 베드로가 어디로 피했는지는 전해 듣지 못했으나 베드로가 문을 조용히 두드린다든지 흥분한 교인들을 손짓으로 조용히 한다든지 하는 행동들은 증인을 통하여 생생하게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기도를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한다고 하면서 그저 기도제목을 아뢰는 정도로 그칠 때도 있습니다. 간절히 구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 기도의 제목은 좀 거창한데 하나님이 과연 들어주실까 의구심을 가지기도 합니다. 어릴 때부터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가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무엇을 할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막 9:22)  다시 말하면 당신은 병을 잘 고친다는데 한 번 낫게 해보시오 그 말에는 예수님이 반드시 아이를 낫게 하신다는 확신이 없이 그저 용하다는 사람들 앞에 나아가 하던 대로 습관적인 부탁을 하였습니다. 막 9: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제야 그 아버지가 충격을 받고 예수님 앞에 고꾸라지며 소리를 지릅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막 9:24)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사도 요한이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확신은 이것이니, 곧 무엇이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하나님께 구한 것을 우리가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요일 5:14-15) 세상의 권세에 대응할 교회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기도입니다. 응답의 성패는 하나님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자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문제를 놓고 기도하되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찬 479장 1,2절 내가 깊은 곳에서)



3. 헤롯은 죽었고 베드로는 살았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헤롯이라는 이름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러나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마 2:1에 나오는 헤롯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때 유대 지방을 다스리던 왕으로 보통 헤롯 대왕이라고 불립니다. 동생의 아내와 결혼을 했다고 책망을 한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롯은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다스렸던 분봉왕 헤롯 안디바를 가리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헤롯은 헤롯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일세입니다. 그의 여동생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헤로디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헤롯과 그의 가문을 미워했으므로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정치적인 계산 때문에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이 교회의 사도들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에 이어 발생한 박해에서 별로 괴로움을 겪지 않았던 사도들에 대한 예루살렘 사람들의 태도의 변화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 희생자가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입니다.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백성들의 반응을 살피니 요즘으로 따진다면 여론조사를 해보니 유대인들이 기뻐합니다. 헤롯은 사도 중에 대표 격인 베드로를 죽이면 아마 사람들로부터 더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헤롯에게 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지지를 얻어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확고하게 하려는 음흉한 마음만이 그의 행동을 주관합니다.  



19절에는 헤롯이 가이사랴로 내려간 사건을 기록합니다. 18절에 이어 나오지만 실제로는 약 일 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방해하는 헤롯에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헤롯이 지중해 연안 항구도시인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미워하여 그들에게 해주던 식량 공급을 중단하였습니다. 그러자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왕의 침소 맡은 블라스도를 통하여 헤롯과 다시 화친하려고 합니다. 마침 로마의 글라우디오 황제를 기념하는 날 모여든 많은 무리들 앞에서 헤롯이 왕복을 입고 연설을 하였습니다. 이때 무리들은 헤롯은 말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고 아첨하며 외칩니다. 무리의 외침에 헤롯은 그만 도취되어 자신이 마치 신이 된 것처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광을 도적질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 죄를 범하니 주의 사자가 독벌레를 이용하여 헤롯을 쳤습니다. 요세푸스라는 역사가는 헤롯이 닷새 동안 앓다가 54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전합니다. 교회를 박해하고 스스로 신이 된 듯이 자만에 빠진 헤롯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습니다. 상황을 마음대로 지배할 것 같았던 헤롯도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체포했던 베드로는 오히려 왕성하게 활동하며 복음을 전합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헤롯과 같은 힘을 가지거나 힘을 가진 사람들을 통하여 덕을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그런 것을 더 의지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힘이나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슥 4:6) 어떤 일이 있을 때 사람을 먼저 의지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 권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세상 권력도 하나님의 지배를 받습니다. 자기를 높이려던 헤롯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오만하면 낮아질 것이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을 것이다.” (잠 29:23)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는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고난 중에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왜 같은 사도인데 야고보는 죽고 베드로는 풀려났습니까? 하나님이 야고보를 무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의 계획이 있으셨기에 이 땅에서의 사역을 멈추게 하시고 데려가셨습니다. 베드로는 기적을 통하여 구출하시고 좀더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당신의 시간에, 당신의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살다보면 우리의 제한된 지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야고보는 죽었으나 믿는 자의 부활이 있기에 그를 영광중에서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같은 죽음을 당했으나 헤롯은 주님 앞에 면목 없는 생을 살았기에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져져 지금도 신음하고 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집에 모였던 무리들은 박해 중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모여서 간절히 기도함으로 그들이 생각했던 이상으로 놀라운 응답을 체험하였습니다. “우리가 일할 때는 우리가 일하고 우리가 기도할 때는 하나님이 일하신다”(when we work, we work. When we pray, God works)는 말이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역사 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크고 작은 문제들이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믿음을 동반한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역사 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분들은 먼저 믿어지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생명이 주께 달렸으니 우리의 호흡이 있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어느 때를 지나고 계십니까? 어떠한 상황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택한 자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기 원하십니다.

* 세상은 불의와 고통으로 차 있기에 예수를 믿어도 고난은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1) 모든 문제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행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만이 이루어짐을 믿어야 합니다.

2) 합심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중보하는 자에게 예상치 않은 기쁨과 복을 주십니다.

3) 겸손이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경험하게 함을 믿어야 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온 날이 베드로 개인의 유월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크신 구원을 원한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며 간절히 드리는 기도,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를 통하여 초대 교회 성도들과 같이 주님의 능력을 구체적으로 경험하시고 베드로가 가졌던 주님의 평안을 지속적으로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