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행 11:19-30)

Author
Myung Myung
Date
2006-11-12 14:24
Views
5527
행 11:19-30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어느 사회 집단이든지 변화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발 빠르게 나아가려는 소수의 무리가 있고, 변화에 저항하며 현 상태에서 움직이기 싫어하는 세력이 있고, 안정을 바라면서 천천히 변화를 모색하는 무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속도에 따라 자유니, 진보니, 보수니 하는 이름을 붙입니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인지라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교회사를 볼 때 교회를 개혁하려는 무리와 현 상태를 고수하려는 무리들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성령에는 바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움직임이 없으면 더 이상 바람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교회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고 변화되어져야 합니다. 세상은 급변하는데 교회가 정체되어 있으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에서 무시를 당하거나 도태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세우신 교회를 통하여 끊임없이 새 일을 하기 원하십니다. 복음의 본질은 같으나 그것을 담는 그릇이나 전하는 방법은 끊임없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각 교회에 주시는 비전을 알아야 하고 그 비전을 이루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의 역사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흔히 이상적인 교회의 모델로 꼽는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성령 충만, 말씀 충만, 기도 충만, 교제 충만, 전도 충만을 통하여 놀라운 성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았을지라도 ‘구원은 유대인에게만 있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마 28:18-20)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과연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그들이 능력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엄청난 부흥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장에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선교하시는 하나님은 복음이 팔레스타인을 넘어 땅 끝까지 전파되기 원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지상 명령을 사도들이나 일반 성도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계기로 일어난 박해가 없었더라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유대 지방에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박해를 일어나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유대 지경을 넘어 사마리아로 사마리아를 넘어 팔레스타인 지방 밖으로 흩어집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8장에는 빌립을 중심으로 사마리아 지방에 복음이 전파됩니다. 9장에는 바울의 회심이 있고, 베드로를 통하여 룻다와 샤론, 욥바에 복음이 전파됩니다. 그런데 이방 선교가 본격으로 이루어지려면 사도들을 비롯한 유대인 신자들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이방 선교에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들 중에 대표격인 베드로에게 환상을 통하여 찾아오시고 고넬료와의 만남을 주선하시면서 베드로의 편견을 깨뜨리셨습니다. 이방 선교의 분위기가 점차로 조성됩니다.  



* 베드로가 유대인 신자들을 설득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가이사랴에서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았다는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에 알려졌습니다. 이 사건을 인하여 제일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예루살렘 교인들이 도리어 분개합니다. 그들은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베드로가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을 어기고 이방인들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었다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마침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왔을 때에, 유대인 성도들이 베드로를 책망합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거요?  고넬료를 만나기 전까지 사실은 베드로도 유대인 신자들과 같은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베드로는 피장 시몬의 집에서 부정한 짐승을 잡아먹으라는 환상을 본 것으로 시작하여 고넬료를 만나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에 그들이 성령을 받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베드로는 하나님이 이방인도 구원하시기 시작하신 것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그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이방인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공동체의 연합을 위하여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함입니다.



때로 좋은 의도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나와 다른 관점에서 보기에 의견을 달리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무조건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점검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내가 행동하는 동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온유한 자세로 그들과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지만, 거친 말은 화를 돋운다.” (잠 15:1)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설명을 마치고 그들에게 그가 경험하고 확신하는 바를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베드로의 말을 들은 무리들은 잠잠합니다. 베드로를 중심으로 일어난 일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신 일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일제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이제,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도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인정합니다. 이방 선교에 걸림돌이 되었던 유대인 신자들이 디딤돌로 바뀜으로 이방인을 향한 선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방 선교의 전진기지”로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안디옥 교회가 어떤 교회였기에 그런 놀라운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는지 본문을 중심으로 안디옥 교회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특히 안디옥 교인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렸습니다. 저희도 안디옥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본받아 하나님이 함께 일하기 원하시고 복주기 원하시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1.  “몇 사람이...헬라인에게도 말하여” (20절)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 비전을 이해하는 성도들이 세운 교회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사도들이 세우지 않은 교회들이 나옵니다. 로마교회, 골로새교회가 대표적이요 오늘 안디옥 교회도 그러합니다. 사도행전 8장부터 10장까지는 스데반의 순교로 시작된 박해 때문에 팔레스타인 전역에 흩어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습니다. 사울의 회심과 베드로의 변화를 계기로 복음이 더욱 확산되는 것을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박해를 피해 간 성도들이 팔레스타인을 훨씬 넘어서서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에게까지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누가는 세 장소를 언급합니다. 베니게는 갈멜 산에서 북쪽으로 중부 시리아 해안을 따라 80마일에 걸친 지역입니다. 시돈과 두로가 베니게에 속합니다. 구브로는 오늘날 터키 남단에 위치한 키프로스 섬으로 시리아 해안에서 약 100마일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안디옥이라는 지명이 신약성경에 두 군데에 걸쳐 나오는데 사울이 일차 전도여행 때 들르게 되는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소아시아의 비시디아와 브루기아의 경계에 있던 중요 도시입니다. 또 하나는 본문에 나오는 도시로서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예루살렘에서 300마일쯤 떨어져 있습니다. 현재는 터기 동남부에 위치하며 로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로마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흩어진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기는 하는데 유대인들에게만 전했습니다. 사도들 중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베드로조차 전통과 편견에 사로잡혀 이방인들은 부정하고 유대인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니 일반 성도들이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흩어진 성도들 중에 헬라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전도자들은 스데반의 순교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던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을 것입니다. 누가는 그들을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 사람들이라고 소개합니다. 구브로는 어디입니까? 북 아프리카에 위치한 리비아입니다. 히브리파 신자들에 비하여 헬라파 신자들은 소수였으나 선교의 지경을 넓히시려는 하나님의 비전을 이해한 자들이었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들은 박해를 피하여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안디옥으로 갔습니다. 안디옥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예루살렘 교회와는 달리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분 없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안디옥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의 선교 비전을 이해한 신자들이 인종적 편견 없이 복음을 전함으로 세운 교회이기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안디옥 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납니다. 21절에 보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님께 돌아왔다고 누가는 보고합니다. 주님의 뜻을 알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의 뜻대로 순종할 때 주의 손이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2.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24절)

믿음과 행실을 통하여 본을 보이는 지도자들이 있는 교회입니다.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했던 것처럼 안디옥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헬라파 유대인이며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선교의 중심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어떤 사람입니까? 행 4:36에 의하면 그는 구브로 출신 레위인으로 본명은 요셉입니다. 자기 밭을 팔아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으로 바쳤습니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그의 이름처럼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그들이 가진 달란트를 잘 찾아 개발하여 사용하게 하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한다면 인재를 발견하여 적재적소에서 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 와보니 교회가 놀랍게 성장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에 은혜 베푸심을 보고 바나바는 기뻐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온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을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누가는 바나바가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착하다는 말의 의미는 단지 마음이 착하다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많이 베푼다는 것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능력과 감동이 그의 사역 가운데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믿음의 본을 보이니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그를 보면서 감명을 받습니다. 바나바 때문에 이미 믿는 사람들은 신앙이 더욱 견고하게 되었고, 또 새로운 신자들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로 인하여 안디옥 교회는 아름답게 성장합니다.

  

3.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26절)

안디옥 교회는 동역하는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크게 성장하니 바나바는 자기 혼자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바나바는 팀사역을 선택하였습니다. 큰 교회가 좋으냐 작은 교회가 좋으냐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큰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사역이 있고 작은 교회가 독특하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작은 교회라 할지라도 관리가 허술하고 헌신과 교제가 없으면 열매가 없고 신앙생활의 아기자기한 면이 없습니다. 큰 교회가 되어 시설이 좋고 각종 프로그램이 많이 제공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무력한 공룡에 불과합니다. 교회의 원동력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선포되고 교회에 비전이 있고 성도들이 헌신적으로 사역에 힘쓰면 그 교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다른 사도들도 있는데 바나바가 왜 사울을 안디옥 교회에 불러 왔습니까? 열두 사도들도 성령에 충만한 신실한 종들이었지만 이방인의 선교에는 바울보다 더 적합한 인물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헬라어뿐만 아니라 헬라 문화를 잘 알았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였기에 로마 제국 어디든지 아무런 제한 없이 다닐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경험은 사울이 회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구약의 메시야가 바로 나사렛 예수요 그분이 부활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회심과 더불어 사울은 곧 복음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9:19-20 “며칠 있을 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9:22, “예수는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전에는 율법에 대한 열심을 자랑하던 교회의 핍박자였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울은 회심한 후로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 당국자들과 충돌하였습니다. 바울은 아마 자기 고향인 다소에 돌아가서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사역을 잘 한다는 소문이 바나바의 귀에도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안디옥 교회에서 말씀으로 사역할 일군이 필요하게 되자 이방인 사역에는 바울이 적격이라 생각하여 바나바는 그를 데리러 다소에 갔습니다. 사울에게는 바나바가 잊을 수 없는 은인입니다. 사울이 회심한 후 삼년 만에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교인들과 교제를 나누려고 시도했지만 교인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냉담하였습니다. 교회를 핍박했던 사울의 모습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더불어 교제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사울의 과거를 들추어내기보다 믿음의 형제로 받아들이는 포용력이 있었습니다. 사울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상황에서 바나바는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소개하며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과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행 9:27)



바나바가 사울을 안디옥에 데리고 왔습니다.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사울이 마음껏 사역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고 이제 막 믿기 시작한 성도들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사울은 이미 다소에서 십년 가까이 복음전파를 통하여 쌓은 경험을 토대로 안디옥 교회에 밀려들어온 많은 이방인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지 누구보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일 년 동안 줄곧 거기에 머물면서 가르쳤을 때 풍성한 열매가 얻어졌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직책을 맡거나 큰일을 담당하게 되면 자칫 독불장군처럼 자기주장을 고집하기 쉬운데 다른 사람의 장점과 능력을 인정하며 함께 일하는 바나바의 리더십은 참으로 귀합니다. 목회자와 목회자 사이에, 목회자와 교인 사이에 아름다운 동역이 필요합니다. 고전 12: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함이라”  은사, 직책, 교회 활동들은 신자에 따라 다를 수가 있으나 일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아름다운 협력을 유지하며 서로를 세우고 유익하게 할 때 교회는 주안에서 아름답게 자랍니다.  



4.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26절)

안디옥 교회는 예수님을 닮은 교인들이 있는 교회입니다.

전도는 전도폭발 같은 프로그램이나 총동원 주일과 같은 행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변화된 삶을 통하여 능력 있게 나타납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일 년 동안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들은 체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말씀을 보는 눈이 열렸고,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사도들의 경건한 삶을 통한 감화를 받아 안디옥 교인들의 삶이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26절에 보면 안디옥 교인들이 두 가지로 불립니다.

1) 제자

성경에서는 어떤 사람들을 제자로 부릅니까?

눅 14:26, “ 무릇 내게 오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 주님께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

눅 14:33,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주님을 위하여 희생을 각오하는 사람

요 8:31-32,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 인줄 알리라” - 주 안에서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사람

요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 영적인 열매를 많이 맺는 사람



요약하면 그리스도의 제자는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고, 지체들을 사랑하고, 주님께 우선순위를 두고, 주님을 위하여 희생을 각오하며,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주 안에서 많은 열매를 거두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들이 안디옥 교인들에게 나타났기에 누가는 그들을 제자라고 부릅니다.



2) 그리스도인  

2:43절에 보면 예루살렘 교인들에 대한 주변 사람의 반응이 나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고 (2:43)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2:46). 비슷한 반응이 안디옥에서 나타납니다. 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그저 나사렛파 사람들, 성도, 형제, 제자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방 땅인 안디옥에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를 가집니까? 안디옥 교인들이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와 말씀에 충실하고 삶의 변화가 나타나고 복음을 전하는 데 열심을 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를 보여주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안디옥 교인들을 자기들과 구별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안디옥에 있는 믿지 않던 자들은 안디옥 교인들을 비방하는 투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그리스도인이라 불렀다. 요즈음 말로 한다면 ‘예수쟁이’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원래는 조롱하느라 사용된 말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러한 지칭이 도리어 안디옥 교인들을 자랑스럽게 하였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조차 인정한 안디옥 교회 교인들의 변화된 모습과 열심이 저희들에게 도전이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닮은 성도들, 세상과는 구별된 무엇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5.  “각각 그 힘대로...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29절)

안디옥 교회는 은혜를 갚을 줄 아는 교회입니다.  

안디옥이라는 도시가 크니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습니다. 더구나 안디옥 교회가 커지니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지도자들이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들 중에 아가보라는 한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왔을 때 성령에 감동되어 심각한 흉년이 온 로마제국을 휩쓸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과연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흉년이 들었고 특히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 지방에 그 피해가 심하였습니다. 이제 생겨난 지 얼마 안 된 교회요 주로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교회였지만 그리고 자기들도 흉년의 피해를 겪고 있지만 자기들에게 선교사를 파송하여 영적성장에 도움을 준 예루살렘 교회를 잊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복음 때문에 진 빚을 안디옥 교회는 재정적으로 도와줌으로써 은혜를 갚았습니다. 롬 15:27,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면서 바울은  신령한 것을 나누어준 사람에게 육신의 것으로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원리를 말해줍니다. 갈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성도들의 신앙생활 가운데 좋은 것을 영적인 지도자들과 함께 나누어 쓰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비록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아직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대하여 불편한 사람들도 더러 있었으나 안디옥 교회는 그들의 구제 행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한 형제요 자매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유대에 살고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부조, 즉 헌금을 보내기로 하면서 안디옥 교인들이 어떻게 참여하고 있습니까?

1) 각각

구제를 위하여 안디옥 교회 모든 회중이 참여하였습니다.

2) 그 힘대로

안디옥 교인들 모두가 정성껏 참여하였습니다. 많이 준 자에게 많이 찾으시는 공평하신 하나님. 모든 교인이 선교헌금으로 20불씩 내자 이런 식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형편에 따라 많이 낼 수 있는 사람은 많이 내고 형편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은 적게 냅니다. 헌금은 각자의 형편대로, 마음에 감동을 주시는 대로 드려야 합니다.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예수님은 구제를 천국에의 투자로 가르치셨습니다. 바울은 헌금이 결실을 기대하며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은 투자라고 하였습니다. 잠 19:17,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주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주께서 그 선행을 넉넉하게 갚아 주신다.”  하나님은 후하게 드리는 자들에게 풍성한 공급을 약속하십니다. 모든 나눔의 근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깊이 체험하는 가에 달려 있습니다.

3) 실행하고

나름대로 얼마를 구제하겠다고 작정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그대로 지킵니다.  

이렇게 거둔 구제 헌금을 안디옥 교회에서는 바나바와 사울 편에 예루살렘 교회에 보냅니다.

곤궁한 사람들을 찾고 그들을 돕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Tecate의 Sarah Lee 선교사와 도미니카의 전영구 선교사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들을 요청한 것들 중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보내고자 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방 땅에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선교 비전을 이해한 헬라파 성도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안디옥 교회는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놀랍게 성장합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심과 그들의 변화된 삶 자체가 살아있는 전도가 되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아름답게 동역 하는 모습은 귀한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기들에게 영적으로 도움을 준 그 교회에 사랑의 빚을 갚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됩니까?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전도와 배우기에 힘쓰고, 아름다운 동역이 참여하고, 선교와 구제를 통하여 나누어 주기를 힘쓰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기를 애쓰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선교사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교하는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섬기기 원하는 평신도들을 사용하십니다. 주님만 알아주시면 된다는 자세로 자원하는 성도들을 통하여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부름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며,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누고 다른 지체들을 격려하고, 자원하여 주님의 일에 동참함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풍성한 위로와 기쁨과 평강과 열매를 거두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