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참으로 깨달았도다 (행 10:23-48)

Author
Myung Myung
Date
2006-11-05 16:29
Views
3718
행 10:23-48  참으로 깨달았도다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라 하겠습니다. 배우자와의 만남, 학교 친구들과의 만남. 그 만남 중에는 인상적인 만남, 유익했던 만남이 있는 반면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만남, 차라리 안 만났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만남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 가장 귀한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그 만남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자로 남아 있을 것이요, 좋은 날씨에 이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계기로 우리는 주안에서 다른 지체들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보니 두 사람이 만납니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은 로마 장교와 유대인 사도와의 개인적인 만남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복음 장애의 가장 걸림돌이 될 수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의 고정 관념을 바꾸는 계기가 된 만남이요, 이방인들에게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된 만남입니다. 오늘 설교를 통하여 본문을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하나는 두 사람의 만남 자체에 초점을 맞춥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만날 당시에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상태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만남이 목회자와 교인간의 만남의 정확한 모델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오늘날 목회자와 일반 성도, 성도와 성도의 교제에 귀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또 하나는 사도행전 전체의 흐름 속에서 선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초점을 맞춥니다. 즉 나무도 보고 숲 전체도 보면서 본문에 접근하겠습니다. 그것이 성경을 보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통하여 그들의 인격이 나타납니다.

1. 고넬료는 어떤 사람입니까?

1)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4절): 은혜를 함께 나누는 사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과 가죽공 시몬의 집에서 하루를 머문 베드로는 욥바 사람 두어 사람과 함께 30마일 쯤 떨어진 가이사랴로 갔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가 올 것을 확신하였기에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아는 사람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 모두가 베드로의 말씀을 들었을 뿐 아니라 성령 충만하게 되어 방언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특히 고대 계층 사회에서 리더의 영향력이 절대적입니다. 행 16:15 빌립보 교회 루디아는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16:34, 빌립보 간수도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리더십의 위치에 있는 분들은 그 영향력을 십분 발휘하여 영혼구원에 관심을 가진다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많은 전도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생과 사의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이웃의 구원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2)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5절): 영적인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

베드로가 온다는 소리를 듣고 고넬료는 마중 나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려서 절을 하였습니다.  ‘절하다’로 번역된 이 단어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고 실제로 많은 영어 성경에 보면 worship 하다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즉 고넬료는 베드로를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생각하여 경외감을 가지고 그 앞에 완전히 엎드렸습니다. 점령군 장교로서 위세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깍듯한 예의를 갖추기 마련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영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베드로를 하나님이 보낸 종으로 존중하는 표시로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도 인간적으로 볼 때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교회를 섬기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세우셨기에 그를 귀하게 여기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자세로 섬길 때 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한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가 됩니다.



3)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33절): 감사하는 사람

고넬료는 베드로가 온 것을 진심으로 고마워합니다.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믿음의 공동체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롬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 남이 잘한 것보다 허물이 먼저 보이고 격려하기보다 문제점만 지적하려 한다면 아무리 바른 소리를 해도 관계가 불편해집니다. 나 좀 봅시다. 당신 이렇게 하면 안 돼. 다짜고짜로 문제점부터 지적하려고 한다면 아무리 자기가 잘못한 것을 알고 있다할지라도 거부반응을 보이든지 방어 자세를 취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똑똑할지라도 덕을 세우지 못하면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바른 소리만 하려고 하지 말고 덕을 세우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대인관계에서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3) 하시면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의 허물만 들추어내기에 앞서 먼저 자신들을 돌아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1월은 감사의 달입니다. 항상 감사해야 하지만 특별히 감사의 달을 맞이하면서 감사할 것들을 찾아봅시다. 내 자녀를 가르쳐준 전도사님들이나 선생님들에게 감사의 표현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감사의 말이 담긴 카드를 주든지, 수고했다는 격려의 말 한 마디도 좋습니다. 내게 수고를 베풀었던 사람들을 돌아보며 감사를 해야 합니다. 남편들은 아내에게 일년치 모았다가 한번 거창한 선물을 주며 생색을 내려하지 말고 작은 사랑의 표현을 자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내들도 남편을 자기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는다고 몰아세우지 말고 스트레스 많은 직장에서 수고한 남편들을 격려하는 말을 자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소한 배려가 상대방을 감격시킵니다.  감사는 아무리 해도 결코 지나침이 없습니다. 물론 부모와 자식들에게 자주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4)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33절):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

지금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지시하신 모든 말씀을 들으려고 다 같이 하나님 앞에 모여 있습니다. 고넬료와 그의 친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고넬료가 베드로의 인생 경험이나 지식,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일어나는 시사성 있는 이야기를 듣기 위하여 친구들을 모은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모습을 보실 때 얼마나 기특하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신앙생활에 있어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마 4:4)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요 6:68)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고백하였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바울이 말했습니다. 성도들이 설교를 듣는 이유는 성경의 원리들을 깨달아 각자의 삶에 적용하기 위함이요 말씀 속에 담겨진 약속을 붙들기 위함입니다. 말씀 생활이 충실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임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도 충실히 준비하여야 하나 받는 자도 기도로 준비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5)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33절):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는 사람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와 더불어 간음하고 나서 그 일을 감추려고 여러 가지 계략을 꾸몄습니다. 한 죄를 감추려고 또 다른 죄를 저질렀습니다. 나중에는 자기의 충성스런 부하인 우리야까지 죽게 만들었습니다. 얼핏 볼 때 완전범죄 같았으나 하나님은 다윗의 모든 행위를 다 아시고 나단 선지자를 그에게 보내 책망하셨습니다. coram deo (in the presence of God)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의 앞에 있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계신다고 생각할 때 함부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장차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때 평안하게 주님을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베드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1)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26절): 겸손한 사람

환상 중에 천사를 통하여 만나 보라고 하던 베드로, 말로만 듣던 그 베드로가 자기의 집안에 들어오자 고넬료는 감격하여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어떻게 행동합니까? 얼른 고넬료를 일으켜 세웁니다. 자기 앞에 엎드린 고넬료를 보면서 자기는 당연히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거들먹거리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초대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그가 성령에 충만하여 설교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공회에 잡혀 와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심지어 그 그림자만 덮여도 좋겠다고 사람들이 생각할 정도로 능력 많은 사도입니다. 중풍 병자 애니아를 낫게 하고, 죽은 도르가를 살렸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가 한 많은 일들이나 예루살렘 교회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가야 할 영광을 자기가 가로채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한 권위적인 자세로 고넬료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하신 예수님의 수제자답게 은혜를 충만히 체험한 후 베드로는 겸손해졌습니다. 영적인 권위는 인위적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나를 알아달라고 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지배하는 자가 높임을 받고 섬기는 것은 낮은 자의 할 일이지만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위한 섬김이 더 가치 있는 행동임을 말하고 스스로 본을 보이셨습니다. 벧전 5: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Servant leadership 이라 하여 맡겨진 무리들을 섬기면서 인도하는 것이 참된 지도자 상인 것을 말해 줍니다. 모든 양무리의 목자장은 예수 그리스도이지만 주님은 목자들을 세우셔서 그들로 하여금 양들을 키우게 합니다. 목자는 설교만 할 뿐 아니라 자기가 설교한 내용대로 삶으로 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럴 때 목자와 양무리 간에 상호 신뢰감이 조성되고 “더불어” 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서로를 아끼며 더불어 말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도 사람이라” 지도자면 누구나 가슴에 새겨두어야 할 말입니다. 실수도 있고 부족한 것도 많지만 하나님이 불러 주셨으니 주의 이름을 감당한다는 겸손한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는 자세가 겸손하게 섬기는 종들의 모습입니다.  

  

2)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29절): 순종하는 사람

베드로가 환상에 나타난 부정한 음식을 못 먹겠다고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깨끗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환상을 보고나서 왜 그런 환상이 자기에게 나타났는지 의아해 하며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환상을 보는 즉시 그 의미를 깨닫고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문이 열린 것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하면 이방인과 사귀거나 가까이 하는 일이 불법이요 그것은 고넬료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을 시작합니다. 사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온 행동은 유대인들에게 비난 받을 것을 각오한 것입니다. 비록 자기가 이해가 되지 않거나 선뜻 행동하기 껄끄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면 그대로 따르겠다는 순종의 자세가 나타납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만남을 사모해야겠고 두 사람이 보여준 자세로 지체들을 대해야 합니다.



* 하나님은 베드로의 편견을 깨뜨리십니다.

1) 환상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34-35절)

하나님이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주선하신 것은 고넬료의 구원과 더불어 베드로가 이방인에 대한 가진 편견을 깨뜨리기 위함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로 나를 오라고 했소?” 고넬료는 나흘 전에 보았던 환상에 대하여 말해줍니다. 이미 누가는 고넬료에게 일어났던 일을 10장 앞부분에서 기술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고넬료의 입을 다시 한 번 그 내용을 반복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울의 회심 과정을 세 번이나 반복한 누가는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도 같은 비중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이 만남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고넬료에게 임했던 환상을 듣고 또 자기가 시몬의 집에서 보았던 환상을 연결시키면서 그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않는 분이시고, 그분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느 민족에 속해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전까지는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을 불법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 앞에 불법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해를 확실하게 돕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또 다른 사건을 보여주십니다.

  

2) 베드로가 확신에 찬 복음을 전합니다. (36-43절)

베드로는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요 “화평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복음은 단지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열려져 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시작된 예수님의 사역은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기에 그 능력에 힘입어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언급하며 예수를 믿음으로 죄 사함 받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심판장으로 세우셨다고 증거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모든 것을 보고 들은 목격자들로서 주님을 증거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3) 이방인의 성령 강림은 베드로의 확신을 돕습니다. (44-48절)

베드로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에, 그 말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리십니다. 갑자기 고넬료와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이 방언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깜짝 놀랍니다. 아니 이방인들도 성령을 받나? 그때 베드로가 이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 그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풉니다. 그들은 은혜 받은 감격 속에 베드로에게 자기들과 더 있어 줄 것을 요청합니다.



* 본문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떻게 적용이 됩니까?

성경을 우리의 삶에 적용할 때 구약을 중심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약도 성경의 일부이니 당연히 참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말세를 사는 지금의 성도들은 신약의 관점에서 구약을 보아야 합니다. 구약은 장차 오실 메시야라는 관점에서 써졌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이미 오신 메시야의 관점에서 써졌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이 구약보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더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고 어떻게 행동하셨는지 이미 오신 예수님의 관점에서 구약을 보아야 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하는 것은 위법” (10:28) 이라는 고정관념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붙들고 있는 시각에서 볼 때는 보자기 같은 그릇에 담겨 내려온 짐승들은 분명히“속되고 깨끗지 못한 것들” 이었습니다. 그것들을 잡아먹으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베드로가 단호하게 거부한 것은 조금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을 받았지만 이방인에 대한 시각이 완전히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을 죄인을 의롭게 만드시고 속된 것을 깨끗케 하시는 분으로 베드로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방인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깨끗하게 하셨다는 실물 증거를 베드로에게 보이기 위하여 고넬료와의 만남을 주선하셨습니다. 그 만남을 통하여 베드로는 새로운 관점에서 이방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미 구약에도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임할 것이라는 구절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며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창 12:2-3) 과연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예를 보여주었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통하여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될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성전 봉헌식에서 솔로몬이 두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합니다. 여러 가지 기도를 드리는데 특별히 이방인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성전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유대인에게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왕상 8:41-42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며 드린 기도 중에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이라도 ...와서 이전을 행하여 기도하거든...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주의 이름을 알고...주를 경외하게 하옵시며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별로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둘러보실 때 모든 매매 행위가 “이방인의 뜰 (The Court of Gentiles)”에서 이루어진 사실을 보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이 나아와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특별히 정해 놓은 장소에서 장사를 하고 있으니 이방인들은 성전에 있으려야 있을 곳이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아예 막아 버렸으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종교 지도자들은 본래의 목적을 망각하고 자기들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면서 성전을 더럽히고 습관적인 종교 행위만을 지속함으로써 이 성전을 기도하는 집에서 강도의 소굴로 전락시켜 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팔거나 제사에 쓰려고 그것들을 사려고 하는 자들이나 다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영의 눈이 가려지다 보니 구약에서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구절을 제대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도리어 이방인들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그들과 교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눈의 비늘을 벗기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신 하나님은 이제 베드로의 눈에 있는 구약의 그림자, 전통의 비늘을 벗기기 원하십니다. 베드로가 가진 편견이 무엇이었습니까? 구원은 유대인에게만 있다. 이방인은 속되고 부정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베드로를 변화시키셨습니다.



23절에 보면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집안으로 불러들여 하룻밤을 지내게 합니다. 그 집 주인은 가죽을 다루는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부정한 사람입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은 이방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속된 다시 말하면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유대인의 사도가 그들과 함께 한 집에 있습니다. 더구나 48절에 보면 은혜를 받은 고넬료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요청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과 더불어 교제를 나눕니다. 정통 유대인들이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베드로를 중심으로 연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연출하신 한편의 드라마를 통하여 베드로가 얼마나 변화되는 가를 누가는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물론 이 때 있던 일을 인하여 동료 유대인들에게 비난을 받지만 베드로는 전혀 위축되지 않고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겠느냐? (행 11:17) 대답합니다.



우리들은 혹시 편견이 없습니까? 혹시 그런 편견을 가지고 이웃을 대하고 다른 사람에게 그런 것을 강요하지 않습니까? 그런 편견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잣대로 사용되지 않습니까? 신앙의 본질적인 것이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와 좀 다른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인 것으로 알고 거기에 목숨 걸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 중에 귀걸이를 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물론 어른들이 볼 때 눈에 거슬립니다. 저도 귀걸이를 한 청년들에게 잘했다고 칭찬하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유행이 지났지만 몇 년 전만해도 머리에 염색을 드린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저런 머리를 하고 교회를 오는가 분개하는 어른들이 있었습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도무지 어른들에게 인사할 줄 몰라. 이런 이야기를 흔히 듣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교회에 집회 갔었는데 그 교회 학생이 인사를 하더랍니다. 어른들 집회에 왔는데 학생이 인사하다니 아주 기특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장로님이 갑자기 그 학생을 보고 갑자기 야단을 치더랍니다. 인사하려면 똑바로 해야지 비딱하게 서서 그게 무엇이냐? 그 학생 옆에 다른 친구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인사 안한 학생들은 야단맞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사 한 번 했다가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야단을 맞았으니 그 학생이나 그것을 지켜보던 다른 학생들이 다음부터 어른들에게 제대로 인사하겠습니까? 도리어 피해 다닐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는 젊은이들이 질식하여 교회를 떠나버리고 말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대가 흐르면서 문화가 달라지고 사고방식이 달라진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자기가 붙들고 있는 기준만이 옳은 것으로 생각하고 거기서 벗어나는 사람들을 제대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못마땅하다고 탓하기 전에 나와 다르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한번 안아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절대적인 가치가 점점 모호해지는 이 포스트 모던시대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그저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는 이웃들에게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말로만 아니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삶을 통하여 사랑으로 용납하며 믿음의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새 일을 행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선교의 지경을 넓히기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에 대하여 가졌던 편견을 깨뜨리기 위하여 베드로를 고넬료와 만나게 하십니다. 영혼 구원을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우리가 품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와 더불어 베드로와 고넬료가 만나는 모습은 오늘날 주님의 지체들이 본받아야 할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 다 기도에 힘썼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겸손함과 온유함과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고넬료는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려 하고,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권위에 순복하고, 감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항상 의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뜻에 민감해야 합니다. 주님의 증인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품으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의 지체들과 아름다운 교제를 통하여 풍성한 삶을 누리고 선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아름다운 전도의 열매를 거두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