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속되다 하지 말라 (행 10:1-23)

Author
Myung Myung
Date
2006-10-29 17:23
Views
10461
행 10:1-23  속되다 하지 말라

  

풀러 신학교 다닐 때 제 지도교수의 전공이 소그룹입니다. 그가 소그룹 컨퍼런스를 할 때마다 개설하는 과목이 있는데 그 제목이 ‘담임목사를 위한 소그룹’입니다. 왜 하필이면 담임목사를 위한 소그룹입니까? 그는 담임 목사들을 모아놓고 소그룹 목회의 가장 방해요소가 담임목사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어찌 보면 역설적인 말 같습니다. 소그룹 목회에 가장 도움이 되어야 할 사람이 담임목사여야 하는데 왜 걸림돌이 됩니까? 소그룹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입니다. 담임목사들 중에 소그룹을 그저 교회성장을 위한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인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소그룹 목회를 부목사나 교육목사에게 맡기고 자기들은 별로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성장이 되지 않으면 소그룹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소그룹 목회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즈음 셀, G12 그룹, 가정교회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본질은 소그룹입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를 포함한 그룹이나 초대 교회에서 가정교회 형태가 그 기원입니다. 소그룹을 통하여 삶을 나누고 말씀을 적용하고 전도의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참여자들의 영적 성숙을 도와야 합니다.



신문 지상에 대형 교회들의 분규가 가끔 보도 됩니다. 그런 경우에 보통 누가 문제를 많이 일으킵니까? 초심자가 아닙니다. 목사나 장로 혹은 평신도 리더들입니다. 덕을 세워야 할 사람들이 도리어 교회를 어지럽히니 역설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사역에 가장 신앙생활에 본이 되어야 할 텐데 왜 걸림돌이 됩니까? 섬김에 대한 바른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오신 예수님을 본받는다면 자기 존재나 영향력을 과시하려다가 문제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섬기는데 앞장을 서며 다른 지체들을 도와야 합니다.



제가 두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디딤돌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이해 부족으로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니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이루어지지만 구원을 이루는 과정에 하나님은 택하신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기는 하지만 천사들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교 목표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복음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팔레스타인을 넘어 이제부터 소아시아, 유럽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이방인의 선교에 본격적으로 사용하시려고 부르셨고, 베드로를 통하여 이방인 선교의 첫걸음을 떼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베드로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구약의 그림자에 덮여 있어서 오순절로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본격적인 전도가 이루어지려면 대표적인 사도인 베드로의 사고방식이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베드로가 도리어 이방인 선교에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디딤돌이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까? 디딤돌이 되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앞으로 두주 동안 하나님이 베드로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데 디딤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룻다에 가서 중풍병자 애니아를 고치고, 욥바에 가서 죽은 다비다를 살린 소문이 퍼지자 샤론 평야 일대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베드로는 욥바에 있는 가죽공 시몬의 집에서 계속 머물면서 그야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시몬은 가죽을 다루는 사람입니다. 레 11:39-40에 의하면 짐승의 사체를 만지거나 먹는 자나 주검을 옮기는 자는 부정합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가죽을 다루는 자들은 부정한 자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데도 베드로가 그곳에 머물면서 대접을 받는 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이방인의 전도에 사용하시기 위하여 서서히 그의 마음을 열면서 준비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시몬의 집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또 다른 사역을 준비하셨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시려는 주님의 원대한 계획 속에서 이제는 팔레스타인이라는 경계를 넘어 본격적으로 복음의 씨를 뿌리려고 하시는 데 이를 위하여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이 베드로와 고넬료입니다. 사울의 회심에 아나니아를 붙여주시고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빌립을 붙여주신 것처럼 이방인을 상징하는 고넬료에게 유대인을 상징하는 베드로를 붙여주십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고넬료가 있는 가이사랴 쪽으로 점점 몰아가셨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어디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욥바에 있는 시몬의 집입니다. 욥바는 역사적으로 어떤 곳입니까?  요나가 이스라엘 동쪽에 있는 니느웨에게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정반대인 서쪽 다시스로 가려고 배를 타러 온 곳이 바로 항구도시 욥바입니다.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 싫어 도망 온 곳이 욥바인데 바로 그 장소에서 하나님은 베드로를 불러서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합니다. 요나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폭풍우를 불게 하여 요나와 함께 배를 타고 있던 이방인들을 불안하게 했으나 이제 베드로를 통하여 성령의 바람을 이방인들에게 불게 함으로 구원의 복음, 화평의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입니다. (10:1-2, 22)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있던 이달리아 대의 백부장입니다. 가이사랴는 그 당시 로마인들이 세운 팔레스타인 지방의 행정 수도로 욥바에서 북쪽으로 한 30마일 쯤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로마 출신의 장교로 이달리아대 즉 팔레스타인 본토인들로 구성된 군인들이 아니라 멀리 로마에서 직접 파송된 이탈리아 출신의 정예군인 백 명을 지휘하는 오늘날의 중대장과 비슷한 직위를 가진 장교입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성경에 나오는 백부장들은 기독교에 호의적인 사람들로 그려집니다. 마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은 예수의 말씀만으로 자기의 하인의 병이 날 것을 말하였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칭찬을 듣습니다. (8:10)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사형 집행을 담당했던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는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행 27장에도 보면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는 도중 폭풍으로 파선할 때 군병들은 죄수들을 죽이고자 하나 호송을 담당한 백부장은 바울을 살려 줍니다. 본문에 나타난 고넬료도 2절에 보면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고넬료의 하인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요 온 유대족속이 칭찬하는 자입니다. (22) 그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입니다. (33)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자들이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한 무리는 유대교에 개종한 무리로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고 유대인들과 같이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다른 무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불리며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나님과 유대인들의 윤리적인 태도에 이끌린 사람들이지만 할례를 받지 않았기에 성전에 들어가 제사에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이방인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복음을 제일 잘 받아들이고 복음이 전파되는데 크게 기여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넬료도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웬만한 유대인들 못지않은 열심을 가지고 가족들에게도 하나님을 알게 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기도에 힘썼습니다. 환상을 보게 되는 이날도 다른 경건한 유대인들처럼 제 9시 즉 오후 3시에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고넬료의 환상은 베드로에게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10:3-8)

환상을 본 것은 오후 3시 기도 시간입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니 오후 3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다가 미문에 앉아있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고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환상 중에 하나님의 사자가 고넬료에게 찾아옵니다. 천사는 고넬료에게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고넬료의 가정, 종교심, 성품 등은 나무랄 데 없습니다. 그렇다고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것이 종교심과 선행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고넬료의 구원은 그의 경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깨끗케 하심 때문입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고넬료가 이방인이요 그가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것을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고넬료가 환상 중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지만 그 자체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사울에게 아나니아가 필요하였듯이 고넬료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하여 가르쳐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베드로를 붙이셨습니다. 오늘날에도 고넬료와 같이 준비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믿는 사람들이 고넬료와 같은 준비된 사람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는데 있습니다. 복음이 필요한 사람을 민감하게 느끼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천사는 베드로를 초청하라고 하며 베드로가 체류하고 있는 곳까지 정확하게 알려줍니다. 그가 지금 피장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는데 그 집은 해변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고넬료는 천사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집안 하인 둘과 부하 중에 경건한 한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불러 오게 합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부하들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라는 대목입니다. 고넬료는 자기 혼자 혹은 식구들이 경건한 것으로 만족하고 그의 부하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부하들 중에서도 경건한 사람이 나왔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데리고 오기 위하여 종과 부관들을 보낸 것을 통해 복음에 대한 그의 열린 마음과 열정을 알 수 있습니다. 고넬료의 경건 생활과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은 본받을

만합니다.

  

베드로의 환상은 그의 고정관념을 바꾸기 위함입니다. (10:9-17)

열심은 좋으나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주의 일에 임하지 않으면 도리어 경직된 열심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거나 지체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사울이 그랬습니다. 비록 베드로가 예수님을 삼년동안 따라 다녔던 제자요 12명 중에도 야고보와 요한과 더불어 특별히 예수님의 은총을 받은 자요,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요, 누구보다도 많은 사역의 열매들을 맺은 자였지만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이해가 아직 하나님이 원하는 수준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다가오십니다.



이튿날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가 있는 욥바 성에 가까이 왔을 때, 베드로는 기도하려고 지붕으로 올라가는데 시간은 정오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배가 고파서 무엇을 좀 먹고 싶은 생각이 들던 그 시간에 환상이 임합니다. 사람들이 음식을 장만하는 동안에 베드로는 꿈인지 생시인지를 구별 못할 상태가 됩니다. 베드로가 본 환상의 내용도 하필이면 먹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퉁이에 끈이 달려서 땅으로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그 속에는 네 발 달린 온갖 짐승들과 땅에 기어 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골고루 들어 있습니다. 누가는 그 안에 정확히 무엇이 있었는지 말하고 있지 않지만 레위기 11장에 보면 부정한 식물의 리스트가 나옵니다. 네발 달린 짐승들 중에는 낙타, 토끼, 돼지 등이 있고, 땅에 기어 다니는 것들 중에는 족제비, 쥐, 도마뱀, 악어 등이 있고 날아다니는 것들 중에는 독수리, 까마귀, 올빼미, 박쥐 등이 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속되고 부정한 것은 한 번도 먹은 일이 없”다고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전에도 안 먹었으니 지금도 안 먹겠다는 뜻입니다. 지금 점심때가 되어 한창 시장기를 느끼고 있던 때에도 베드로가 결코 먹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베드로의 단호한 태도를 강조합니다. 두 번째로 음성이 들려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못 먹겠다고 버티는 베드로의 답변과 먹으라는 하나님의 요구가 세 번이나 반복되더니 그 그릇이 갑자기 하늘로 들려 올라갑니다.



베드로는 그 환상의 의미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보자기 같은 그릇에 담겨 내려온 짐승들은 유대교의 전통과 관념에 비추어 “속되고 깨끗지 못한 것들”입니다. 그동안 이방인은 구약 의식 율법에서 생각한 부정한 동물이나 곤충과 같이 유대인들에게 취급받았습니다. 베드로도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제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가진 이방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기 원하셨습니다.



디모데 전서 4장에 보면 구약성경의 식물금지 규례를 지키는 거짓 교사들이 특정한 식물을 먹는 것은 잘못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에 바울은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딤전 4:3-5)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은 선하기 때문에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구별을 두었지만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서 아무것도 부정하거나 깨끗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감사로 받을 때 모든 음식이 거룩해집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십니다. 베드로야 내가 먹으라면 먹어. 깨끗한 것을 결정하는 네가 아니라 나야.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뭔데 못 먹겠다고 그래.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게 만드시고 속된 것을 깨끗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깨끗하다 하시면 깨끗한 것이고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사람이 더럽게 할 수 없습니다.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한 고정관념과 관습과 전통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자유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바른 경건은 ‘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하셨다는 것은 이제 이방인도 구원하신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여 그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여 할 것을 의미하십니다. 롬 3:29-30, “하나님은 유대 사람만의 하나님이십니까?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할례를 받은 사람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시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십니다.” 그동안 가져왔던 고정 관념이나 경험이나 편견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더 민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아래 우리의 뜻을 두는 것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바른 자세입니다.





이방인의 초청을 받은 베드로 (17-22)

베드로가 환상의 의미를 의아해하고 있을 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문밖에 도착하여 베드로를 찾습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19-20) 베드로가 나가서 그들을 만나 사연을 듣고 그들을 안으로 들여 함께 유숙합니다.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지금 진행하고 있는 일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확실한 인도를 따라 고넬료의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처럼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바른 선택을 할 것이고 실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연결시켜 본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얼마나 민감한가 하는 것입니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고넬료를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믿게 하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넬료에게 주신 복이 무엇입니까? 돈도, 명예도, 승진도 아닙니다. 그것은 베드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고 믿음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말씀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생명의 길이 있고 주님의 백성으로 잘 사는 비결이 있습니다. 세상의 것은 우리에게 일시적인 만족을 주지만 말씀은 우리에게 영생을 복을 줍니다. 베드로와의 만남을 통하여 고넬료와 그의 가족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고넬료의 구원은 이방인의 구원이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2) 베드로의 편견을 깨뜨리기 위함입니다.

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세 번씩이나 동일한 환상을 통하여 베드로와 승강이를 벌이셨습니다. 이방인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베드로는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강권적으로 베드로에게 역사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인격적으로 깨닫고 결단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입으로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하는 것은 위법” (10:28) 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환상에 나타난 각종 더러운 짐승들은 알게 모르게 베드로가 이방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나타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의 체험을 하였지만 이방인의 구원의 이해 면에서는 아직도 초보단계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가진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영적인 안목을 가지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식물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더럽게 하는 근원임을 말씀하시면서 “모든 식물은 깨끗하다” (막 7:19) 선언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음식을 먹어야 하느냐 안 먹어야 하느냐 문제에 얽매이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아무리 율법에 규정된 정결한 음식을 먹었어도 형제를 미워하고 비판이나 한다면 그 사람의 행동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됩니다. 그동안 음식을 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나눔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구분하는 기준을 삼았는데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시점에서 더 이상 그러한 구분은 의미가 없는 것을 베드로에게 가르칩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의 율법이 더 이상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가 가진 이방인에 대한 편견의 비늘이 벗겨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이방인들을 가까이 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하고 믿음의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기 원하십니다.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인종적, 종교적인, 사회적인, 성적인 구별이 있을 수 없음을 뜻합니다.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 되게 하는 것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구속을 통하여 이방인을 유대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지만 그 과정에 택하신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사용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항상 분별하려고 해야 합니다. 9장이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의 회심을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10장은 어떤 면에서 베드로의 회심을 다룬 것이라 하겠다. 새로운 믿음을 가진다는 면에서 회심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진다는 면에서의 회심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연출하시고 고넬료가 등장하면서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가졌던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태도에 일대 변화가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말씀을 전할 때 고넬료와 그의 집에 모인 이방인들에게 성령 부어주심을 보았습니다. 비로소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있었다고 공격하는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담대하게 말합니다. 행 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그 결과 그들의 공통된 고백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행 11:18)



복음 전파의 장애물은 불신자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와 같이 신실한 성도와 사역자들 안에서도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의 일에 디딤돌 역할을 하다가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타성에 젖어하는 미적지근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기도와 말씀을 통한 주님과의 지속적이고 활발한 교제를 통하여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종교개혁주일입니다. 1517년 Martin Luther가 비텐베르고 대학 교회 문에 95개조의 항의문을 붙이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은 교회 내의 부패, 교리적 탈선으로 대표되는 중세교회의 세속화에 대응하여 형식화된 교회를 다시 깨우려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들의 구호가 무엇이었습니까? Sola Fide (오직 믿음) -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 최고의 권위는 교회구조가 아니라 성경, Sola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Sola Gratia (오직 은혜) - 행위가 아닌 은혜로 구원. 489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오늘날의 교회에도 개혁되어야 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영적인 개혁이 일어날 때 가정이나 사업이나 학업 등 모든 삶의 영역에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오직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들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 보게 되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웃을 대하며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각자를 향한 인생의 목적을 알고 그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면서 가정과 사업과 교회를 통하여 풍성한 열매들을 맺으시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하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