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준비하십니까(3): 형제를 섬겨야 (마 25:31-46)

Author
Myung Myung
Date
2007-03-12 10:10
Views
4433
마 25:31-46 준비하십니까(3): 형제를 섬겨야



모든 시험은 결과를 확실히 알기 전까지 우리를 초조하게 만듭니다. 지난 7일 Carlsbad Council Chamber에서 교회당 건축을 위한 공청회가 열렸습니다. 저희 교우들이 17분이나 참석하였습니다. 저녁 6시에 공청회가 시작되었는데 그날 4건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안건으로 Marriot Hotel 허가를 놓고 공청회를 진행하는데 주민들이 세 사람이 나와서 소음과 조망권 문제를 놓고 호텔 건립에 반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호텔 건립안은 통과되었습니다. 잠시 정회를 한 후에 저희 교회 건은 세 번째로 다루어졌습니다. 이미 6일자 North County Times에 교회 부지 인근 주민들 중에 교회가 지어지면 교통 혼잡이 생기고 안전 문제가 생길 것을 염려한다는 기사가 실렸기에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공청회가 있는 날 오전에 강대상에서 그 신문을 펴놓고 히스기야처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이것 보세요. 일부 주민들이 교회건축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공청회에서 허가를 받게 해주시옵소서. 기도를 마친 후 얼마 있다가 project manager가 전화를 하였습니다. 일부 주민의 염려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council member들은 교회 project를 지지하는 분위기라는 것입니다. 안도감이 생겼지만 그래도 공청회가 진행되는 계속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윽고 주민 발언 순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발언에 나선 주민도 교회 건축 자체에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길거리 주차등과 같은 안전문제에 신경을 써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어서 council member들의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건축설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2차에 걸쳐 건물을 지을 때 phase 1과 phase 2 사이에 얼마의 간격을 둘 것인가 만약 그 기간 안에 건물을 완성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주된 화제였습니다. 30분 이상 토론을 한 후에 건물 허가를 판가름하는 투표시간이 왔습니다. 전광판에 있는 council member들의 이름 옆에 찬성을 뜻하는 녹색등 6개가 일제이 켜졌습니다. 방청석에 있던 모든 교우들이 환호의 박수를 쳤습니다. 그동안 기도하고 여로 모로 준비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합격 선물을 주시는 순간이었습니다. council member들이 한 마디씩 덕담을 하는데 한국 교회가 Carlsbad 지역에 들어오게 된 것을 환영한다고 합니다. 건물이 아름답게 설계되었다고 칭찬합니다. 빨리 건물이 완성되는 것을 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본문에 보니 모든 인간들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치러야 할 시험이 나옵니다. 그 시험은 성적이 나쁘다고 다시 치를 기회도 없습니다. 판결문이 낭독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시험생들이 받는 결과는 두 가지뿐입니다. 영생과 영벌. 마태복음 25장에는 말세를 사는 성도들의 자세에 관한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하여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린 슬기로운 처녀들만이 잔치에 들어갔다고 하면서 성도들에게 항상 깨어있을 것을 강조합니다. 두 번째 비유인 달란트의 비유를 통하여 주인이 맡긴 달란트를 최선을 다하여 관리함으로 사용하여 이익을 남긴 종들이 주인에게 칭찬을 받으며 상급을 받았다고 하면서 항상 깨어 있을 뿐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충성할 것을 말해줍니다.



본문은 감람산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신 내용이 나옵니다. 이제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사신 후에 수많은 양과 염소들을 남겨두신 채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 오셔서 섞여 있던 양과 염소들을 정확히 구분하시고 그에 합당한 상급을 주든지 심판을 선언하실 것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성도들은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면서 의인의 반열에 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중에 임하실 때 즉 재림하실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모든 민족을 자기 앞으로 불러 모아 두 그룹으로 나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지막 심판 날에 있을 내용들은 단순히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있을 것들입니다.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로 소개합니다. 이 시간 인자 (son of man)의 의미에 대하여 잠깐 살펴봅니다. 히브리 숙어 son of man = man.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실 때 the son of man (그 인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그 인자’라 함은 성경 어디에서 인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단 7:13 "In my vision at night I looked, and there before me was one like a son of man, coming with the clouds of heaven.  번역하면 밤에 환상 중에 보았는데 하늘 구름과 함께 오는 어떤 인자 같은 이가 내 앞에 있었다. 14절에 보면 “예부터 계신 분, 즉 하나님이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셔서, 민족과 언어가 다른 많은 백성이 그를 경배하게 하셨다.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여서, 옮겨 가지 않을 것이며, 그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31절에서 예수님은 다니엘이 말한 인자가 바로 나다. 바로 그 인자가 영광중에 모든 천사와 함께 오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의 모습은 예수님의 공생애 때와는 전혀 다릅니다. 사 53:2-3, “그는 주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공생애 기간 중에는 고난 받는 메시야의 모습을 주로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때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영광중에 오시며 능력과 위엄을 가지고 오십니다.



그날은 이스라엘 민족만을 심판하는 날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민족이 심판의 대상입니다. 모두다 주님 앞에 서서 자기들이 행한 것을 토대로 주님과 결산해야 합니다. 마지막 심판 때의 재판정의 모습을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리하는 것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국어사전을 보니 염소는 소과의 가축. 양 비슷한데 흔히 뿔이 있고, 수놈은 턱 밑에 긴 수염이 있음. 식성이 좋고 강건함. 고기와 털은 양(羊)만 못 하나 젖은 양분이 많음.

양: 소과의 가축. 대체로 회백색의 섬세한 털로 싸였음. 늘 무리를 지어 지냄. 건조한 곳을 좋아하며 초식성으로 소화력이 강함. 양모는 섬유용, 지방은 비누 제조용임.  



낮 동안에는 양과 염소가 섞여서 풀을 뜯습니다. 그런데 보통 서늘해지는 저녁에는 양과 염소를 분리시킵니다. 염소는 양보다 더 추위를 타기 때문입니다. 저녁에는 각자의 처소로 가는데 양과 염소가 한 번에 한 마리씩 들어갈 만한 크기의 통로로 내몰립니다. 목자는 울타리 위에 앉아 양쪽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양과 염소를 분리시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무리들은 양과 염소를 나눈다고 할 때 왜 그런지 아무런 설명 없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의인과 악인이 함께 있지만 마지막 심판 때는 분명하게 분리가 될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줍니다.



성경에서 양은 순종과 인내를 상징하고 염소는 난폭함과 불순종을 상징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양은 하나님의 백성을 나타내고, 염소는 악한 자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징계하실 때 염소들을 가끔 사용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께 범죄하였을 때 북쪽의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했고, 남쪽의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염소의 역할을 한 나라들은 그들의 악함을 인하여 일회용으로 쓰임 받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양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예수님 오른편에 염소로 분류된 자들은 예수님의 왼편에 두게 됩니다.

1) 오른편에 있는 의인들

왕은 먼저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데 그들을 어떻게 부릅니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 미래형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어는 현재완료형입니다. 전에 이미 복을 받았고 현재도 받은 상태다. 더 나아가서 앞으로도 복을 받을 자들입니다. 엡 1:4-5, “창세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여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하셨다”



우리 말 성경에는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이렇게 시작되지만 원어에는 ‘나아오라’ 하는 명령형이 먼저 나옵니다. 문법적으로 의미를 좀 더 살린다면 지금 당장 내 앞에 나오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명령형은 무엇입니까?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나라를 당장 상속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더불어 바로 심판이 시작되고 심판하면서 의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상속합니다. 모든 일이 순간적으로 벌어집니다. 후회하고 돌이킬 시간이 없습니다. 거기에 예비된 이라는 말도 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전에 의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 준비하셨다가 때가 되어 상속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구원받을 것이 준비되었다는 것은 구원은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지 우리의 행위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믿고 섬기는 자들을 위하여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선물을 준비하셨다고 하니 이것이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왕은 여섯 가지의 사례를 들어 그들이 복을 받게 된 이유를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하여 그들의 선한 행동이 구원을 얻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서 일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은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된 자를 영접하였고, 벗은 자를 입혔고, 병든 자를 돌보았고, 마지막으로 옥에 갇힌 자를 찾아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의인들의 반응이 뜻밖입니다. 그들은 보잘것없는 자들에게 베푼 행동이 주님께 한 행동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님께 먹을 것을 주고, 마시게 하고, 영접하고, 옷 입히고, 가서 뵈었나이까.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그들의 반응을 보면 그들이 부족한 자들에게 한 행위가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여 그 사랑으로 이웃을 섬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선한 일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그들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한 것을 기억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행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은 것을 인하여 행하여였습니다.



그 때에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내가 진실로 말하노니. 예수님 말씀에 진실이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무엇인가 심각하고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 쓰시는 표현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특별히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입니다. 그 말에는 마지막 심판 때에 반드시 시행하리라는 예수님의 단호한 의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입니까?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을 형제로 많이 표현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0:40-42,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사람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형제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믿음과 상관없이 세상에서 소외를 당하고 도움이 많이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만 선을 행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모른 척해도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상적으로 볼 때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보잘것없이 보이는 사람들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천국 사역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한 행동은 결국은 예수님에게 한 행동으로 평가하십니다. 특별히 믿음의 지체들을 보살피는 일은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미래에 실제로 일어날 심판과 궁극적인 구원을 바라보면서 그런 형제들에 대하여 자발적으로 구체적인 사랑과 긍휼을 베풀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해야 합니다.



2) 왼편에 있는 악인들

그리스도의 사랑에 응답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았던 사람들을 칭찬하신 후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합니다. 그들을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 부릅니다. 주님 앞에서 갑자기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서기 전에 그들은 이미 저주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내게서 떠나라’ (Go Away from Me)로 시작됩니다. 그것은 현재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게서 계속해서 떠나있으라. 다시는 주님께로 올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최종 판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떠나 어디로 갑니까? 의인들은 창세전에 준비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반면에, 저주를 받은 자들은 영원한 불로 갑니다. 그곳은 원래 마귀와 그의 하수인들을 위하여 준비된 것인데 저주를 받은 자들이 그곳에 들어가 마귀와 함께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판결문을 읽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다. 무슨 뜻입니까? 악인들은 자기 문제에만 사로잡혀 주변에 있는 이웃에 고통에는 무관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듣고 그들도 의인들처럼 깜짝 놀랍니다. 주여 우리가 언제 주님이 주리실 때에 먹을 것을 드리지 않고 모른 척 했습니까?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말도 안돼요. 우리는 주님이 주리신 것을 보았으면 쏜살같이 음식을 가져다주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목말라 하시는 것을 보았으면 재빨리 물을 드렸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그런 상황에 있는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자기들은 주님을 섬기는 것을 게을리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하소연이 얼마나 절박하겠습니까? 세상의 싸우나는 뜨거우면 나오면 되지만 마귀를 위하여 준비된 불은 꺼지지 않는 불이요 그 속에 영원히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돕지 못한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저주를 받은 것은 세상적으로 볼 때 무슨 심각한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살인을 하지 않고, 간음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본문을 보니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자들에게 무관심하고 아무런 도움을 제공하지 않은 것을 주님께서는 심각하게 여기신다는 말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낮은 자, 비천한 자들이 우리의 제자도를 시험하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결론을 내리십니다. 두 그룹의 영원한 운명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낮고 비천한 자들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은 영벌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믿는 사람들 중에도 영벌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어떻게 영원토록 벌을 받도록 내버려두시는가? 물론 어느 누구도 영원토록 벌을 받아야 하는 말을 듣고 즐거워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더하고 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준엄하게 경고 하십니다. 반면에 의인들에게 영생이 주어집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 벌과 상급이 놓여 있습니다.  



3) 양과 염소의 비유가 주는 교훈: 행함이 있는 믿음

양과 염소의 비유가 주는 교훈은 하나님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함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불쌍한 이들 특히 믿음의 지체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천국의 문이 열립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위대한 명령(Great commandment)라고 불리는 구절이 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서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 그 때 예수께서는 주저하지 않고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마 22:36-40)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둘째가는 계명이라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고 또한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고전 10:33) 하면서 바울의 생활신조도 예수님의 본을 따라 하나님께 영광, 이웃에 유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도 그의 서신에서 행함 있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약 2:14-17,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죄인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의 삶은 행함을 통하여 그 받은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서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야고보가 말하는 경건이란 거룩하게 말하고 성경책을 끼고 다닌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자들을 돌보는 것과 자기를 절제하며 세상의 풍조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주님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보잘것없는 한 사람에게 해준 사소한 일도 주님께 행한 일로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한 주님의 제자라면 어떤 일을 많이 하느냐가 아니라 지극히 작은 한 지체를 어떻게 섬겨야 할지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의인이 되기 위하여 항상 기억하고 적용해야 할 성경적인 원리가 무엇입니까?

1) 심판을 준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천사들과 함께 이 땅에 오시는 날은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으로 들어가는 날이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입니다. 고린도 후서 5:10절을 보면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각 사람은, 선한 일이든지 악한 일이든지, 몸으로 행한 모든 일에 따라, 마땅한 보응을 받아야”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 심판의 결과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믿음에 합당한 삶을 산 자들에게는 영생이 주어지고, 예수님과 상관없이 살면서 인생을 낭비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형벌이 주어집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영생을 누리라는 판결을 받게 될 것을 확신합니까?



2) 주님은 항상 우리의 행위를 지켜보십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이 땅에서 완벽하게 선을 해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며 그 사랑의 표현을 이웃에게 특히 믿음의 지체들에게 하기 원하십니다. 골 3:23에 보면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이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진심으로 하”라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을 주님 대하듯 하며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 하고 있는지 항상 돌아보아야 합니다. 복 받을 자들이나 저주를 받은 자들이나 주님께서 자기들의 행위를 지켜보신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자신들이 무심코 한 행동을 그들은 잊었을지라도 주님은 다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그에 합당한 판정을 내리십니다. 주님은 때로 도움이 필요한 연약한 지체들을 우리 곁에 두시고 우리의 반응을 지켜보십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달아보십니다. 이웃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자연스런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과 “하지 아니한 것”에 따라 영생을 얻느냐 영벌을 얻느냐가 결정됩니다. 주님의 지체들을 섬겨야 합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대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지는 않으십니까? 내 주변에 어려움에 있는 지체가 누구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육신의 어려움을 겪든지, 마음의 상처를 받는 형제나 자매들을 위하여 지금 내가 구체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다가갈 때 주님이 함께 가십니다. 우리가 미처 생각지 않은 풍성한 위로와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입니다.



3) 천국의 삶은 이 땅에서의 삶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지금은 세상에 양과 염소, 의인과 악인이 섞여서 존재합니다. 지금은 누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모든 것이 분명하게 구별이 되어 나뉘게 됩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도 지혜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 달란트 비유에서도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도 복 받을 자들과 저주를 받은 자들로 나뉩니다. 복 받을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고 영생에 들어갑니다. 반면에 저주를 받은 자들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갑니다. 마지막 때에는 중간이 없습니다. 양과 염소의 혼혈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도 받고 저주도 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영생에 들어가든지 영벌에 들어가든지 둘 중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사시면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고상하고 우아한 삶을 사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잊을 때가 많습니다. 누구나 안락하게 살기를 원하고 이왕 섬길 바에야 지위가 있는 사람만 섬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1:5절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은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곤경에 빠진 형제들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내 할 일도 바쁜데 하며 그냥 지나치지는 않으십니까? 잘난 체하더니 고소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지 2000년 후에 저희들이 다시 이 말을 대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책망을 받는 자들의 모습이 자칫하면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몰랐다고 하면서 그때 가서 주님 앞에 후회하시겠습니까?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비유들에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 섰을 때는 이미 때가 늦습니다. 아무리 반성하고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몰랐다는 것이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염소로 칭함을 받은 자들도 자기들의 행위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다고 그들이 받을 벌이 줄거나 그들이 가야할 곳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고 지금 당장 우리 주변을 돌아보아 지체들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함부로 형제나 자매에 대하여 흥미삼아 gossip 거리를 만들거나 약점을 이야기하거나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그들의 곤경이나 필요를 보고 기도해주며 함께 마음을 나누며 할 수 있는 한 도와주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것으로 끝이 납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마태는 일상생활에서 낮고 천한 자, 연약한 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대하는 태도가 아주 중요함을 믿는 자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 심판의 기준은 살아있을 때에 연약한 형제나 자매들에게 얼마만큼 관심을 가지고 선을 베풀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말세에 사는 성도들이 실천해야 할 삶은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베푸는 사랑입니다. 특히 믿음의 지체들에게 믿음에 합당한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주님의 위로와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을 경험하게 된 것을 함께 나누며 지체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은 모든 사람들을 양과 염소로 나누고 영생과 영벌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 땅에서 얻거나 누리는 복과 고통은 장차 임할 영생과 영벌의 맛보기에 불과합니다. 참 복은 천국에서 주님과 더불어 영생을 누리는 것이요 진정 두려워야 할 저주는 지옥의 형벌입니다. 영생 얻은 자로서 합당한 사랑과 순종을 하나님뿐만 아니라 믿음의 지체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서로 돌아보고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항상 깨어 있고 주님의 뜻대로 충성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의 지체들에게 자발적으로 표현하면서 예비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뿐 아니라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함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