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준비하십니까(2): 사명에 충실해야 (마 25:14-30)

Author
Myung Myung
Date
2007-03-04 14:37
Views
3613
마 25:14-30 준비하십니까(2): 사명에 충실해야



같은 직장에 같이 신입사원으로 들어와 같이 일을 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맡겨진 일을 잘 처리함으로 상사의 신임을 얻고 진급을 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맡겨진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상사의 눈 밖에 나거나 심지어 그 직장에서 쫓겨나기도 합니다. 어디에서 일했느냐, 어떤 일을 했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일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집니다. 같은 교회에서 새가족반을 거쳐 같이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어떤 교우들은 믿음이 잘 자라고 성실하게 섬기며 교회에 기쁨을 주는 교우들이 있는 반면에 도무지 믿음이 깊어지지 않고, 자기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신앙생활의 기복이 큰 교우들도 더러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 생활을 평가하고 판단하시는 분이 목사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라는데 있습니다.



이번 사순절은 ‘준비하십니까’ 하는 주제로 마태복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25장의 비유들은 미래에 확실히 일어날 것을 바라보며 현재를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는 천국의 상황을 혼인잔치를 앞두고 들러리들이 신랑을 기다리는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 기름을 충분히 준비한 지혜로운 처녀들은 잔치에 참석하였고 뒤늦게 기름을 준비하느라 호들갑을 떤 어리석은 처녀들은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는 언제나 깨어 준비해야 함을 강조하지만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달란트 비유에는 재림을 준비하여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할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줍니다. 세 사람이 등장하는데 결과부터 본다면 이번에도 두 그룹으로 나뉩니다.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같은 사명을 받았는데 주인으로부터 착하고 충성스럽다고 칭찬을 듣는 종들이 있고 악하고 게으르다고 꾸중을 들으며 쫓겨나는 종이 있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게 되었는지 살펴보면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 되어 주님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라 칭찬을 받을 뿐 아니라 큰 상급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서 자기의 재산을 맡겼습니다. 상당히 오랫동안 떨어져 있으면서 그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겼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을 신임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자기의 재산을 똑같이 삼등분하여 나누어주지 않았습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즉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르게 주었습니다. 제일 능력이 많은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그 다음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셋 중에서 가장 적은 능력을 가진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종들은 주인이 나중에 돌아왔을 때 맡긴 재산에 대하여 보고해야 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만한 것을 맡기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맡기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복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일을 맡는 우리는 주님의 의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당장 힘들다고 불평합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되는데 못하겠다는 핑계부터 대려고 애를 쓸 때가 많습니다. 고난조차도 감당할 만하니까 허락하십니다. 고전 10:13절에 보니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신실한분이시라 당신의 백성을 끝까지 붙드시고, 감당할 고만만을 허락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라 시련을 주실 뿐 아니라 벗어날 길도 주심으로 그 시련을 잘 견디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바울과 같이 만족하면서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1. 착하고 충성된 종의 모습 (14-23절)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이나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주인으로부터 받자마자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하여 투자한 만큼 이익을 남겼습니다. 두 사람 모두 주인이 없는 동안 주인을 위하여 열심히 일했습니다. 나중에 주인이 돌아왔을 때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이 먼저 결과를 보고합니다. '주인님께서 다섯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이에 주인이 칭찬합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했다!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다가와서 ‘주인님께서 두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보고하니 주인이 칭찬하는데 먼저 다섯 달란트 받은 종에게 했던 것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이 칭찬합니다.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나중에 주인이 한 달란트 받은 종의 한 달란트를 다섯 달란트 받은 종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2. 악하고 게으른 종의 모습 (24-30절)

한 달란트 받은 종에 대하여 주인은‘악하고 게으른 종,’ ‘쓸모없는 종’이라는 평가를 내립니다.

왜 그럴까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왜 장사하지 않았습니까? 한 달란트가 장사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작은 액수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일 년에 300일을 일한다고 가정할 때 노동자 한 사람이 20년을 전혀 쓰지 않고 모아야 되는 엄청난 돈입니다. 그러니 거의 한사람이 평생 일해야 벌까 말까한 돈입니다. 일 년에 3만 불을 번다고 가정하면 20년을 일한다면 60만 불이 됩니다. 그러니 한 달란트면 그 당시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아주 큰돈이기에 한 달란트가 적다고 장사를 포기한 것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종이 주인 앞에 나와 해명합니다. 주인이 맡긴 바로 그 한 달란트를 내 보이며 자기는 아무런 투자를 하지 않은 곳에서 이익을 기대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주인의 엄함이 무섭고, 공연히 장사 잘못 했다가 손해를 당하여 원금이라도 까먹으면 주인이 노발대발할 것이 두려워서 그 달란트를 주인에게 그대로 되돌려주기 위해 땅에 묻었다고 합니다. 그의 행동은 주인에게 아무런 의미나 이익을 주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처음의 두 종은 주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충성으로 행동했지만 세 번째 종은 주인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서움에서 행동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은 모든 성도들이 거룩하게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두려움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에서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고 무조건 분노하신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사를 보더라도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 마음에 안 들면 쓸어버리는 하나님으로 오해하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자기 수준을 낮추어 함부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인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느냐? 그렇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어. 그랬더라면, 내가 왔을 때, 내 원금에다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 아니냐?’그가 주인을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고 자기에게 맡긴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였기에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당할 뿐 아니라 쫓겨납니다. 주인은 곁에 있던 사람에게 명령합니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고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열 처녀의 비유에 나오는 열 처녀들이나 달란트에 비유에 나오는 세 사람들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누구나 천국잔치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누구나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지는 못합니다. 얼마나 영적으로 깨어 있는지, 얼마나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였는지 여부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나뉩니다. 중간이 없습니다. 은혜의 시대가 끝나면 다시 돌이킬 기회가 없습니다.



이 비유에 나타난 ‘어떤 주인’은 ‘예수님’을 가리키며 ‘오랜 후에’라는 것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주님은 자신의 소유를 우리 손에 맡기셨습니다. 각자의 재능에 따라 종들에게 맡긴 달란트가 다르다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잘 아신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받는 사람은 없으며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적게 받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부분들은 주님께 귀한 것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주어진 달란트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낭비하거나 사장되는 것을 마음 아파하십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한 일에 대하여 결산을 하실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우선순위에 따라 자신의 삶을 순종과 지혜로 꾸준히 투자한 사람은 왕에게 드리는 결실을 볼 것이다. 이 땅의 삶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 즉 시간, 부, 기회, 인간관계, 선천적인 재능, 영적 은사, 마음과 양심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영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 등이 될 것이다. 충성스러운 종에게는 주인의 기쁨과에 참여하는 것 외에 더 많은 특권과 책임이 주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일을 맡기십니다. 일의 열매를 보고 판단을 하십니다.



*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기 위하여 기억해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1) 순종해야 합니다.

각자에게 맡겨진 일을 미루면 안 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은 주인의 것을 받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바로 가서 장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도 하나님이 시키시면 즉시로 순종하였습니다. 창세기 22장은 “그일 후에”로 시작됩니다.  그 일 후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을 받으며 무엇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삶을 살고 있던 후에. 이삭도 잘 자라서 청년의 모습을 갖추어갈 때,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에 대한 사랑이 점차로 깊어져 갈 때, 인간적으로 볼 때 깨가 쏟아지는 순간에, 이 행복한 날이 마냥 지속되기를 바라는 날에. 창 22:2,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라  그리고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니 이삭 앞에 잔뜩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네 아들, 하나밖에 없는 아들, 네가 사랑하는 아들. 점층적인 표현을 통하여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소중한 자식인지 부각시키십니다. 그 아들을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어느 땅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번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칼로 죽여서 그 몸을 쪼개어 놓고 불로 태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사랑하는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여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온전한 정신을 가진 아버지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셨습니다. 이유를 말씀해주시지 않고, 무조건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을 내리신 것은 정말로 이삭을 제물로 받으시려 했던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독자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를 시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믿음의 시련에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이유를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하여 주저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도리어 아브라함은 일찍 길을 떠납니다. 아브라함은 그 문제를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사라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칫하면 순종하는데 방해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순종을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고 그 후손들을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케 하시고 또한 대적의 문을 얻게 될 것이라는 언약을 주셨습니다.  

    

2) 신실해야 합니다.  

19절에 ‘오랜 후에’라는 말은 주인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주인이 맡긴 것을 가지고 장사를 계속하였습니다. 주인의 뜻을 이루려면 한번의 순종이 아니라 지속적인 순종이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가장 작은 달란트를 받은 자는 불충성한 종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를 받은 자들 중에도 불충성한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한 달란트 가진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장사하다가 손해를 보았으면 주인은 어떻게 반응하였을까요? 그럴지라도 주인은 그 종을 격려해주었을 것입니다. 다 같이 사명을 받았는데 두 사람은 칭찬을 받았으나 한 사람은 책망을 받고 쫓겨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능력의 차이나 맡긴 일에 차이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맡겨진 일에 임하는 자세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게으른 종은 주인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로 이익을 거두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문제를 주십니다. 문제에 임하는 자세를 보시며 우리의 믿음을 달아보십니다. 우리의 신실성을 시험하십니다. 사명을 주실 때마다 맡기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감사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자기의 처지나 형편을 인하여 불평하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능력 있는 사람 보다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을 더 기뻐하십니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겸손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 (눅 17:10)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가 있습니다. 달란트는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내가 없는 것을 남이 가졌다고 부러워할 것도 없고 나만 가졌다고 우쭐댈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의 능력에 따라 주셨기에 주어진 형편에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의 일에 참여하고 신실한 청지기로 인정받으려면 먼저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발견하고 개발하고 사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맡겨진 사명은 개개인이 받은 은사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모두에게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직분을 맡았든 어떤 일을 감당하든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실하게 여기셔서 맡겨주셨다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베푸신 은혜에 감격하며 맡겨진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끝까지 사명에 충실한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들도 맡겨진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 (고전 4:2)이라고 권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때 주의 일을 한다고 하다가 시들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 욕심으로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바른 목표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충성스럽게 달려가셨더니 하나님이 그를 높여 보좌 우편에 안제 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아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딤후 4:7) 고백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들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충성스럽게 그분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3) 때로 모험이 필요합니다.

지난 주 중국의 주식시장에서 폭락사태가 일어나자 전 세계로 영향을 미쳐 미국에서도 주가가 400이상이나 폭락하여 6000억불이란 가치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주식에 관하여 나름대로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도 투자액의 상당수를 손해 보았습니다. 아무리 경제학 박사라 하더라도 주식시장의 미래를 정확히 파악하여 항상 수익을 거둘 사람은 없습니다. 이 사업을 하면 100% 원금을 보장하고 매년 상당 부분의 수익이 생긴다는 광고를 보면 왜 자기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투자하는 일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합니다.



세 번째 종의 게으름은 능력이나 기회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나름대로 계산해보니 자칫하면 원금도 까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경기가 좋지 않아 섣불리 장사하다가 손해를 볼 수 있겠고 그렇게 되면 주인에게 책망 받을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처음 두 종들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어디에 투자할까 혹시 잘못 투자했다 돈을 날리면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뜻을 알고 주어진 형편에서 최선을 다하니 사업이 잘되어 투자한 것만큼 더 얻었습니다. 세 번째 종이 불경기라고 진단한 상황에서도 두 종들은 주인의 말에 순종하여 나아갔더니 풍성한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왜 같은 시기에 같이 장사를 하는데 종들이 전혀 다르게 접근합니까? 신앙생활에 때로 적지 않은 위험부담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면 사실 왜 기도가 필요합니까?



위험에 빠진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왕 앞에 나서도록 요청을 받았지만 왕이 자기를 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서기를 꺼려하는 에스더에게 모르드개가 도전합니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에 4:12-13) 그 말을 듣고 에스더는 금식을 요청하며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면서 왕 앞에 나아갑니다. 에스더는 목숨을 걸고 민족을 살리기 위하여 모험을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나아갔더니 자기 민족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 칼스배드 City Council에서 공청회를 하는데 통과되면 건축허가를 받습니다. 이제 융자를 받아야 하고, 세부설계를 하고 건축업자를 선정하고 건물을 지어야 합니다. 교회당 건축이 막연히 미래의 일로 생각했는데 이제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교인 중에 사업 하는 분들이 많지 않은데 어디서 이 금액을 충당합니까? 혹시 나보고 하라지는 않겠지 하면서 고개를 수그리는 분은 안계십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건물 다 짓고 오는 건데 하며 후회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넉넉한 재정을 가지고 사업을 벌이는 데는 큰 믿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빠듯한 재정에서 새 일을 행하려면 부담이 됩니다. 모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믿음이 필요하고 이 project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져야 합니다. 교회당 건축을 하겠다고 오래 전부터 광고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그동안 어떤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까? 그것을 이루려는 기도나 진지한 노력 없이 그저 현재의 상황만 이유로 대며 방관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험으로 보일지라도 믿음으로 주님을 붙들며 여전히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주님의 뜻이면 이루어집니다.



4) 주님 앞에 결산합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들을 칭찬하신 이유는 그들이 얼마를 남겼기 때문이라기보다 주인을 위하여 보여준 사랑과 수고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주신 것에 충실하지 않고 자기만을 위해 살면서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허비합니다.  

어리석은 부자: 영원을 위한 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한 참 후에 다시 돌아와 종들과 회계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섭니다. 주님은 결산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히 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이 문장은 일세기 로마의 재판정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죄가 많은 피고는 재판장의 얼굴을 마주 보기 부끄러워합니다. 그럴 때 재판장 옆에 있는 군인이 그에게 다가가 자기의 단검을 피고의 목에 들이댑니다. 피고가 더 고개를 숙였다가는 칼에 찔리니 할 수 없이 재판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드러낸다' (tetrachelismenos)는 말은 칼을 목에 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숨기는 것이 다 내어 놓아야 합니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눈을 돌려 보지 않을 수 잇으나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내어 놓을 것이 별로 없어 그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 보시기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5) 충성한 자에게 주시는 상급이 풍성합니다.

일을 성실하게 잘한 종들에게 주인은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리라고 합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였는데 많은 것으로 맡긴다고 하였으니 종의 노력에 비하여 주인의 보상은 훨씬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충성된 자들은 주님을 즐겁게 하였으므로 주인과 함께 즐거워하는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너스의 하나님이십니다. 맡겨진 일을 제대로 감당할 때 우리가 수고한 이상의 상급을 받습니다. 또한 달란트 비유를 마치면서 예수님께서 결론을 내리십니다.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없는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있는 자는 자기에게 맡겨진 것에 충성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사람은 충성한 대가로 자기가 가진 것보다 더 큰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됩니다. 그래서 풍족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없는 자는 자기중심에 빠져 자기에게 맡겨진 것에 충성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사람은 자기에게 맡겨진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됩니다. 이 종은 왕의 상급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그는 자기 인생에 주어진 기회를 낭비해버렸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주님 앞에 섰을 때 상급을 바라보며 충성스럽게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8)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은사와 직분은 다르지만 한 성령으로 봉사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갑니다. 모든 일이 귀합니다.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기 원하십니까? 우리가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신실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주님을 위하여 모험도 불사하는 믿음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누가복음 12:42에 보니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지금도 주님은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를 찾고 계십니다. 한번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청지기가 되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달란트는 주님께서 주님의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 될 수 있고 사명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는 충성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시대는 변해도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신실한 주님의 제자들을 기뻐하십니다. 주님을 위하여 모험을 각오하는 성도들과 함께 나아가기를 기뻐하십니다. 각자를 향한 인생의 목적을 알고 그 목적이 이끄는 살며 결산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질그릇과 같은 보잘 것 없는 우리에게 복음의 보배를 담아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성령이 주시는 능력에 힘입어 감사함으로 감당하는 선한 청지기,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