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준비하십니까(1): 깨어 있어야 (마 25:1-13)

Author
Myung Myung
Date
2007-02-25 15:51
Views
6311
마 25:1-13 준비하십니까(1): 깨어 있어야



노후 준비는 되어 있으십니까? 젊은 분들은 별로 실감이 안 나는 말이지만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둔 분들에게는 실감나는 질문입니다. 시험 준비는 잘 하셨습니까?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한치 앞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존재들인지라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우리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여 준비해야 합니다. 건강보험, 자동차 보험, 생명 보험 등이 미래를 준비하도록 돕는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 아프지 않아 이렇게 장담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항상 나를 지켜 주시니까 내가 운전하는 자동차는 결코 사고가 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발걸음을 선하게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긴다는 이유로 우리가 할 것도 하나님께 무조건 떠맡기려는  게으름은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우리의 순종이 마주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난 주 수요일인 21일부터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을 맞이하며 어떤 메시지를 전할 까 기도하는 가운데 마태복음 25장부터 28장까지 “준비하십니까” 하는 주제를 가지고 전하기로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을 다루는 설교는 부활절 이후에 계속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기존 성도들에게 아주 낯익습니다. 전에도 여러 차례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하여 접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지라 그 말씀을 대할 때마다 우리에게 새롭게 와 닿고 전에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고 전에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게 합니다. 말씀을 각자의 삶에 묵상하고 적용하면서 뜻 깊은 사순절을 보낼 뿐 아니라 언제 주님 앞에 선다 할지라도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깨어있는 성도, 잘 준비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천국에 대하여 비유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비유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일상생활에서 쉽게 발견하거나 접하는 평범한 소재를 이용하여 교훈하는 방법입니다. 그 비유가 예수님의 의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지 못하면 그 비유는 닫힌 이야기가 되어 그 의미를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연결고리를 풀게 되면 그 비유는 열린 이야기가 되어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더욱 분명히 의미를 파악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열 처녀 비유(1-13절)와 달란트 비유(14-30절)와 양과 염소의 비유(31-46절). 각각의 비유들의 주제는 하나같이 말세를 사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준비하여야 하는가에 관한 교훈을 줍니다.



* 말세가 언제입니까?

말세는 특정한 한 때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하면 예수님이 처음 때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의 기간입니다. 지금 우리가 말세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 말세의 징조들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7-14) 주님이 언제 다시 올지 하나님 아버지 밖에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구원의 문이 닫힙니다. 중요한 것은 재림의 시기를 정확히 알아 그 때에 맞추어 어떻게 주님을 맞이할 것이 아니라 구원의 주님을 얼마나 잘 믿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잘 믿는 사람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천국잔치에 참여할 것이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버림을 당하고 영원한 멸망에 빠질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땅에서의 삶이 천국 생활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 살 때 믿지 않는 사람은 결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 성도가 주를 맞이해야 하는 것을 유대인 결혼식에서 신랑을 맞이하는 것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저희 교회에도 오랜 만에 결혼식이 있습니다. 임인식 집사와 현지 자매가 이번 토요일 주 안에서 귀한 예식을 가집니다. 결혼식은 당사자들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 그들의 친구, 함께 신앙생활 하는 교우들에게 큰 기쁨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이적을 행하신 곳도 결혼식 잔치가 벌어지던 가나라는 동네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소망을 주는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그 당시 유대인들의 혼인 풍습을 살펴보면 신랑이 약혼한 후 혼인식 전날 밤에 신부의 집에 오는데 이때 들러리 처녀들은 신랑을 신부의 집으로 안내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열 처녀들은 바로 신부의 들러리들입니다.



1. 열 처녀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등장인물이 누구입니까? 열 처녀. 그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열 처녀 모두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어떻게 기다렸습니까?

1) 신랑을 맞이할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2) 컴컴한 밤을 밝히고자 등을 들고 기다렸습니다.

3) 신랑이 오는 것이 늦어지자 열 처녀 모두 꾸벅꾸벅 졸다가 아예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2. 두 그룹의 처녀들에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결과부터 본다면 열 처녀가 다 혼인잔치에 참여하지는 못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기에 같은 장소에서 같이 등을 들고 같이 졸면서 기다렸는데 누구는 혼인 잔치에 참여하고 누구는 참여하지 못하였습니까? 신랑이 기다리는 처녀들을 심사하여 잘 생기고 몸매가 잘 빠진 자들에게만 잔치 참가자격을 주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처녀들이 외모가 어떻다든지 출신 배경이 어떻다든지 성격이 어떻다든지 하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마태는 잔치에 참여한 처녀들을 ‘슬기 있는 자들’이라 하고 그렇지 못한 처녀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슬기로운 자들과 어리석은 자들로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먼저 묻겠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전혀 기름도 없이 신랑을 맞으러 갔다. 맞습니까 아니면 틀립니까? 또 다른 질문을 하겠습니다. 지금 처녀들이 등을 들고 신랑을 맞이하러 가면서 불을 켜고 갑니까 아니면 등만 들고 갔다가 신랑이 오면 그제야 등불을 켜려고 합니까? 표준새번역에서는 lamp를 등불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등에 불이 켜진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처녀들이나 슬기로운 처녀들이나 등에 불을 켠 채로 신랑을 맞이하러 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처녀들이 가지고 있는 등 안에 기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3절과 4절을 보니 어리석은 처녀들은 기름이 들어있는 등은 있었지만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이 들어있는 통을 준비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당시에 사용하는 등은 올림픽에서 성화주자가 들고 달리는 토치와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그 등 안에 있는 기름은 두세 시간이면 다 타버립니다. 그러면 기름을 등에 더 부어주어야 계속 불을 밝힐 수 있습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열 처녀 모두 등을 준비하였고 그 등 안에는 기름이 있었습니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하여 열 처녀는 모두 등에 불을 켜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이 더디 올 것을 대비하여 기름통에 여분의 기름을 담아 가지고 갔습니다. ‘미련하다’는 말의 원뜻은 ‘얼이 빠졌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하려면 등불을 가지고 가야하는 것은 알았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는 것까지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신앙을 맞으러 나가는 들러리들이 그렇게 한 것은 얼이 빠져서 정신 나간 행동을 한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들은 나름대로 지혜롭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신랑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겁게 기름통을 들고 가나 신랑이 오면 그때 가서 준비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 눈에는 도리어 기름통을 들고 가는 처녀들을 어리석게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랑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3. 제대로 준비한 자들만이 잔치에 참여합니다.

신랑이 예정보다 늦게 오니 슬기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나 졸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한밤중에 갑자기 외치는 소리가 납니다. ‘신랑이 온다. 나와서 맞이하여라.' 그 때에 열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서, 자기 등불을 점검합니다. 그들이 보니 등 안에 있는 기름이 거의 떨어져 갑니다. 조금 있으면 불이 꺼질 것 같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너희의 기름을 좀 나누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랬더니 슬기로운 처녀들이‘그렇게 하면, 우리나 너희나 다 모자랄 거야 그러니 차라리 기름 장수들에게 가서 기름을 사라' 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지혜로운 처녀들이 그들에 쓸 분량 말고 넉넉하게 가진 것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지 여유가 많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습니다. 준비하고 있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습니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애원해 보지만 신랑은 '내가 진정으로 말하는데 너희를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할 뿐입니다. 결혼 잔치하는 기쁜 시간에 기름을 사다보니 조금 늦었는데 그렇게 문을 걸어 잠그고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잡아떼니 매정하지 않습니까? 자기도 늦게 와 놓고서는 늦게 온 처녀들을 푸대접하니 신랑이 너무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신랑이 맞이한다면서 충분한 기름을 갖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은 신랑을 맞을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신랑을 무시한 행동이기에 그들에게는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마치시면서 제자들에게 어떤 결론을 내리십니까?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은 무엇을 전제로 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깨어 있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신랑 맞을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잔치의 문턱까지 갔다가 들어가지도 못하고 도리어 신랑으로부터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는 소리를 들으며 문전박대를 당하니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이것은 비유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있을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도 예수님은 비슷한 내용으로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마 7:22) 하소연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남들이 보면 주의 종 같습니다. 귀신도 쫓아낸 적이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많은 능력도 행하였습니다. 자기는 당연히 구원 받은 사람이요 천국행 일등석 티켓을 소유한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자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완전히 헛물을 켜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때인지라 더 이상 돌이킬 기회가 없습니다. 그대로 지옥으로 직행해야 합니다.



* 말세를 사는 성도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1)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혼인잔치에 들어간 슬기로운 처녀들이 어리석은 처녀들과 달랐던 것은 그들은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기름은 보통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충분한 기름은 성령으로 충만한 것을 의미합니다. 말세를 사는 성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것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움 받아 성령이 시키는 대로 주님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성령에 충만할 때 환경에 영향을 덜 받습니다. 덜 시험에 듭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고 빌립보 깊은 감옥에 던져졌습니다. 그들이 그곳에 무엇을 했습니까? 온 몸이 쑤시고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 원망하거나 불평을 털어놓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옥문이 열리고 묶인 것이 풀리고 빌립보 간수가 회심하는 이적을 경험하였습니다.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우리의 힘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2)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을 보니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뒤에, 다른 날이 있을 것을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안식하는 것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하면서 구약의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을 정복함으로 약간의 안식을 주었으니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합니다. 영원한 안식, 진정한 샬롬을 주기 위하여 제2의 여호수아가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히 4:11절에 “이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을 씁시다.” make every effort to enter that rest 라고 권면합니다. 무엇에 힘을 써야 합니까? 12절을 보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 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낸다고 합니다.” 엡 4:13절에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바울은 교회를 어떻게 말합니까?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라고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 즉 말씀 위에 서 있어야 건강한 교회, 행복한 교회가 됩니다.  



열왕기상 7장에 보면 솔로몬의 성전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성전에는 커다란 놋 기둥이 둘 있었습니다. 오른편 기둥의 이름은 ‘그가 세운다’는 뜻의 야긴이요 왼편 기둥의 이름은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의 보아스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이며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말세를 사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견고히 지탱하게 합니다.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말세를 사는 우리로 영적으로 깨어 있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오심을 기대하며 어떤 준비를 하고 계십니까? 본문을 중심으로 깨어 있는 삶을 위한 성경적인 원리를 정리합니다.

1)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열 처녀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그런데 단지 신랑을 맞이할 마음을 가지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에 합당한 실제적인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한 것을 볼 때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눕니다.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말입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불을 위한 기름을 제대로 준비하였고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잔 외에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준비할 줄 아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해보았자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에도 세상 재미에 빠져 천국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요 주님을 부인한 것이기에 주님도 저희를 모른다고 하십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항상 준비해야 하는 이유는 신랑이 언제 오실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기름을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께서 경계하시는 것은 신랑의 오심이 늦어짐에 따라 졸다가 갑자기 신랑을 맞이할 때 오는 어려움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오실 주님을 항상 준비하는 삶’을 말합니다. 세상의 죄와 유혹에 빠지지 않고 경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그 믿음을 끝까지 인내로 지킬 것과 주의 임하심을 ‘깨어 준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언제 오실지라도 반가이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혹시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아무런 기대감 없이 졸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당장 오실 것으로 생각하여 준비하는 자세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재림이 지체되더라도 준비하는 삶을 계속해야 합니다. 신랑이 더디 온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도 우리의 생각보다 늦어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지 벌써 2000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더디 오심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벧후 3:8-10,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재림의 준비는 어느 정해진 기간 동안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통하여 계속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날에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려면 지금 땀을 흘려야 합니다. 심는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 오실지 모르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하여 모든 성도들은 영적인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여 주님 앞에 설 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2) 주님이 오기 전에 준비해야 합니다.

두 종류의 처녀들의 차이는 등불에 쓸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등잔에 기름이 있는 동안에는 두 그룹의 차이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등잔에 있던 기름이 다 떨어지면서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 차이가 그들의 운명을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자칫하면 어리석은 처녀들과 같이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재림의 주를 기다린다고 하지만 모두가 주님을 영광스럽게 맞이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정도면 구원받기에 충분하다는 식의 안이한 마음을 품고 죄와 게으름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무감각해집니다. 기도 안 해도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아도 답답한 줄을 모릅니다. 예배드리는 것을 게을리 해도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줄을 모릅니다. 빠질만하니 빠졌지 하며 자신을 정당화 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지금을 은혜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아직도 회개하고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 때에는 이미 늦습니다.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쁨으로 맞도록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이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우리도 어리석고 미련한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하지도 않은 날에, 뜻밖의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 종을 몹시 때리고, 위선자들이 받을 벌을 내릴 것이다. 거기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마 24:50-51) 언제 신랑이 오더라도 등불을 밝힐 만반의 준비를 갖춘 자들만이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듯이 언제 주님이 오시더라도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춘 자만이 종말에 있을 천국잔치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보아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그를 볼 것이요, 그를 찌른 사람들도 볼 것이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이다." (계 1:7) 기회는 있었으나 회개하지 못하였기에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3) 각자가 준비해야 합니다.

열 처녀의 모습은 바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믿는 성도들이면 누구나 재림의 주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주님이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주님을 맞이할 준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주님을 어떻게 맞이하려고 하십니까? 주님을 만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잘 하면서 기다리십니까?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성경에 쓰여 있으니 오기는 오는가본데 나는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아 하며 그저 덤덤한 반응을 보입니까? 세상일로 너무 분주해 주님의 재림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안계십니까? 나는 당일치기에 강하니까 그때 가서 적당히 준비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아니면 전에는 조금 준비하는 척 했는데 지금은 안식년이라 조금 쉬고 계십니까? 아내가 잘 분비하니 나는 아내의 치맛자락만 붙들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각 사람은 자기의 믿음을 가지고 각자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준비를 안 해도 당장은 별 문제 없는 것이 보입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하여 각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준비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영원히 후회할 만한 선택을 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며 적당히 믿는 사람들, 주님을 위하여 아무런 투자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때 가서 자기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땅을 치며 통곡을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 이왕 기다릴 바에야 제대로 준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때로 현재의 부족함을 인하여 마귀가 너는 형편없다고 조롱을 할 수 있습니다. 네가 무슨 신앙생활을 하느냐고 비웃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낙심하고 주저앉으면 안 됩니다. 자기의 부족과 한계를 깨닫고 주님께 나아가 자기 죄를 자백하고 위로 부어주시는 은혜를 사모할 때 주님은 그 사람을 회복시키십니다. 우리 모두는 전직 죄인들입니다. 누가 더 잘났다고 해보았자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됩니다. 누구든지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여 영적으로 깨어 있어 주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갈 때 그 사람은 준비된 사람이 되어 점도 없이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믿음 생활에 충실함으로, 장차 있을 천국의 혼인잔치에 다 참여하여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상급을 받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