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바울의 2차 선교여행(2) (행 16:11-40)

Author
Myung Myung
Date
2007-02-19 08:16
Views
4337
행 16:11-40  바울의 2차 선교여행(2)



제가 아는 목사님의 설교를 방송을 통하여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아버지가 아직도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기에 그동안 계속 기도만 하였는데 하루는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더랍니다. 너의 게으름을 왜 나에게 전가하느냐? 왜 구체적으로 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하지는 않고 기도만 하느냐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아버지에게 컴퓨터를 사드리고 인터넷 사용법을 가르쳐 드렸습니다. 인터넷을 통하여 신문을 읽는 법, 여러 가지 재미있는 정보를 얻는 법도 가르쳐 드렸습니다. 자기 교회 web site에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도록 그것을 바탕화면에 깔아 놓고 제가 섬기는 교회 web site에 들어가셔서 아들이 하는 설교도 들어보시라고 권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혹시 우리 가족 가운데 아직 믿지 않는 부모나 형제나 자식이 있습니까?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어떤 노력을 기울이십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할 뿐 아니라 그들이 구원을 받도록 구체적인 방법을 제공해야 합니다.



제2차 선교여행 중 바울은 아시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비두니아를 가려했으나 이 역시 길이 열리지 않아 드로아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드로아에서 바울은 마게도니아인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마게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바울 일행은 지체하지 않고 마게도니아로 떠납니다.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에게해 상에 위치한 사모드라게 섬에서 하루를 지내고 이튿날 네압볼리로 도착했고, 거기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빌립보에 이르렀습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니아 지방에서 첫째가는 도시요, 로마 식민지였습니다. 빌립보에서 여러 날 머물렀습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함을 구하였을 것이요 빌립보가 어떤 곳인지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루디아는 마게도니아 지방에서 얻은 첫 열매입니다.

바울이 어떤 도시에 가면 으레 유대인 회당에 먼저 갔는데 빌립보에서 유대인 회당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장사를 잘하는지라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교통의 요지나 상업도시에 많이 몰렸는데 빌립보는 군사도시인지라 회당을 유지할 만큼 큰 유대인 공동체가 없었든지 혹은 유대인들의 활동이 아주 미약한 것이 분명합니다. 회당이 없는 도시에서 유대인들이 주로 강가에 모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되자 바울 일행은 성문 밖에 2km쯤 떨어진 강가로 나갔는데 마침 그곳에 유대인 여자 몇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 여자들 몇이 기도하기 위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마 안식일마다 그곳에 모여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그들 중에 루디아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두아디라 출신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두아디라는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의 하나가 위치한 곳입니다. 자주 장사는 자주색으로 물들인 양털이나 천을 공급하는 딜러입니다. 루디아는 아주 부유하였을 것이요 영향력 있는 여인이었기에 바울에게 좋은 전도 대상이었습니다. 루디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하였는데 God-fearer로 알려진 이 그룹은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던 자들이요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그들 중에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아마 루디아는 두아디라에서 유대인 회당에 다니다가 빌립보로 이주하여 사업을 하면서 경건한 유대인들과 계속하여 교제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여셨기에 바울의 전도를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 결과 루디아는 마게도니아에서 첫 번째 전도의 열매가 되었습니다. 루디아의 집안 식구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루디아는 바울에게 자기를 믿는 사람으로 여긴다면 자기의 환대를 받아달라고 하며 바울 일행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였습니다. 루디아의 집에서 자연스럽게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루디아의 관대함에 영향을 받은 빌립보 교회인지라 그들은 바울의 사역을 많이 도왔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파하던 초기에,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에, 주고 받은 일로 나에게 협력한 교회는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내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여러분은, 내가 쓸 것을 몇 번 보내 주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보낸 것을 에바브로디도에게서 받았으므로 풍족합니다 하면서 빌립보서 4장에 그들의 후원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싸움은 계속됩니다.

바보 성에서 박수인 바예수와 대면했던 바울이 빌립보에서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납니다. 하루는 바울 일행이 기도하는 곳으로 가다가, 점을 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났는데, 그는 점을 쳐서, 주인들에게 큰 돈벌이를 해주는 여자였습니다. 그 여종은 날마다 바울의 선교팀을 따라오면서 "이 사람들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인데,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선포하고 있다" 고 외쳤습니다. 여종은 귀신의 힘을 입어 사실 바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종이 날마다 바울 일행을 쫓아다니며 소리를 질러대니 그 장면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구경거리를 제공하였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쓸데없는 곳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 여종을 사로잡고 있는 귀신을 쫓아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니, 이 여자에게서 나오라" 하고 명령하니, 바로 그 순간에 귀신이 나왔습니다. 귀신에 시달리던 사람이 온전하게 되면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번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마가복음 5장에서 군대귀신 청년을 예수님께서 치유하셨을 때 동네사람들이 보여준 반응과 비슷합니다. 청년 안에 있는 귀신이 자신들을 legion으로 소개하는 이유는 사단의 막강한 power로 무장되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한 예수님에 귀신들은 무력합니다. 그 청년은 귀신에 사로잡혀 자신의 이름마저 댈 수 없었고, 귀신들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였습니다. 가정과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야수처럼 소리를 지르며 자기 몸을 찌르며 피투성이가 된 채 살고 있었습니다. 그를 채웠던 쇠고랑과 쇠사슬을 끊고 부술 수는 있었지만 그런 힘을 제공하는 마귀의 올무를 스스로 풀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에 사로잡혀 소망 없이 살아가는 그 청년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 찾아 오셨습니다. 귀신들이 근처에 있던 돼지 떼에 들어가자 돼지들이 발작을 일으키며 갈릴리 호수로 달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귀신들렸던 청년은 깨끗이 나았는데 동네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의 회복된 영혼보다 돼지 떼의 손실을 아까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재물의 노예가 된 자들이었기에 예수로 인하여 보다 많은 재산의 손실을 우려하여 예수님에게 떠나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사단은 사람들을 죽이고 멸망시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요 10:10)



그 여종의 주인들은 여종이 온전하게 나은 것을 인하여 기뻐하기보다 여종을 통하여 돈을 벌 수 있었던 기회가 사라진 것을 인하여 분노하여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서, 광장으로 관원들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하면서 말을 시작합니다. 그 당시에도 있던 반유대정서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만 붙잡힌 것은 디모데와 누가가 헬라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화가 나서 고소를 하면서도 그 말은 살짝 빼어 놓고 바울 일행이 성을 소란하게 하고, 로마 시민인 자기들로서는 받아들일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는 부당한 관습을 선전한다면서 엉뚱한 말로 고소합니다. 빌립보에 있는 일부 무리가 바울 일행을 공격하는 데 가세하였습니다. 그러자 관원들은 바울과 실라에게 변호할 기회도 주지 않고 다짜고짜로 그들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에게 매질을 많이 한 뒤에,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그들을 단단히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간수는 그들을 깊은 감방에 가두고서, 그들의 발에 차꼬를 단단히 채웠습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을 드립니다.

바울의 온몸은 매를 맞은 상처를 인하여 쑤시고 그 고통으로 인하여 잠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귀신들린 여자를 고쳐주었다고 칭찬을 듣기는커녕 도리어 부당한 이유로 붙잡혀 고난을 당하다니 인간적으로 볼 때 원망이 나올 법 합니다. 나무 차꼬에 채워져 꼼짝할 수 없는 상태에서 바울은 한밤중에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하면서 그 동안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조상들이 가졌던 열심을 가지고 착각하며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넣는 일에 앞장서던 자신에게 어느 날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것을 생각하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찬미로 이어졌습니다. 롬 5:3,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11,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모든 일이 잘 풀릴 때 즐거워하고 감사하기는 쉬워도 일이 꼬이고 막히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을 때도 여전히 감사하고 기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옥중에 있던 죄수들은 매를 맞고도 노래하는 바울과 실라를 보고 아마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욥 35:10,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 진실로 경건한 자는 즉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들은 환난 중에도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바울이 옥에 갇힘으로 빌립보 간수를 만나게 됩니다.

삭막한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부르는 찬송은 퍼져나가 옆방에 있던 죄수들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죄인들은 찬송을 듣고 있는데 죄수를 든든히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간수는 그 시간에 자고 있습니다. 죄수들에게는 그들의 찬송이 위로가 되었겠으나 간수에게는 도리어 소음같이 들려졌을지도 모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서 풀려난 후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였을 때 그들이 기도하던 장소가 진동하였던 것같이(4:31) 바울과 실라가 찬양하는 감옥에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을 매고 있던 줄이 다 풀어졌습니다. 감옥만 흔든 것이 아니라 옥 안에 있던 다른 죄수들의 마음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렇기에 나중에 옥문이 열리고 차꼬도 풀려도 그들은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잠이 깬 간수는 급히 달려왔으나 바깥쪽에서 캄캄한 감옥 안을 들여다보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간수가 죄수를 놓치게 되면 그 간수는 죄수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았습니다. 죄수들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잔 것도 근무태만인데 탈옥했다면 상관에게 문책을 받을 것은 뻔합니다. 옥문이 열렸으니 죄수들이 다 도망을 친 것으로 생각하고 죄수들이 받을 벌을 대신 받느니 자살이 낫겠다고 생각하며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전 삼십 냥에 판 뒤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살한 것처럼 간수는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지진은 교량이 끊어지고 도로가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사람이 죽지만 빌립보 옥중에 일어난 지진은 묶인 것이 풀리고 닫힌 것이 열려지고 사람을 살리는 특별한 지진이었습니다. 자결을 하려는 간수를 향하여 어두운 감옥 안에서 바울이 소리를 지릅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등불을 가지고 옥안에 뛰어 들어가니 바울과 실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죄수들이 한 사람도 도망가지 아니하고 다 옥안에 있었습니다. 간수는 자기 눈앞에 벌어진 이 놀라운 일을 인하여 무서워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습니다.



간수는 감옥 밖으로 그들을 데리고 나가서 묻습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간수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옵니다. 간수의 질문은 무엇을 전제로 합니까? 간수 자신이 죄인이요 구원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며 마음 문이 열리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바울에게 구원 받는 방법을 물어본 것은 이미 그의 마음 문이 열린 빌립보 간수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기로 작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사람들을 부르시는 모습은 그 사람이 처한 환경이나 성격 등에 따라 다양합니다. 빌립보 간수는 로마군인입니다. 엄격한 규율에 따라 훈련된 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변화를 받아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수단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는 것과 같은 극적인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빌립보 간수를 만나게 하시려고 바울을 감옥에 갇히게 하셨습니다.



구원에 대한 질문에 항상 답변을 준비한 바울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간수에게 답변해주었습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바울은 간수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하며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게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을 것입니다.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갇힌 자된 바울이 도리어 자기를 지키던 간수의 생명을 구해줍니다. 그와 그 가족들에게 영생의 길을 제시합니다. 빌립보 간수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런 놀라운 일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하신 것입니다. 또한 간수가 바울 앞에 무릎을 꿇고 대화하는 장면을 누가 지켜봅니까? 감옥 안에 있던 죄수들. 그들 중에도 감동을 받고 믿게 된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풀려납니다.

날이 밝자 빌립보 관리들은 바울과 실라를 놓아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들이 로마시민임을 밝히며 부당하게 취급당했음을 항의합니다. 로마 시민인 우리를 유죄 판결도 내리지 않은 채 사람들 앞에서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다가, 이제 와서, 슬그머니 우리를 내놓겠다는 겁니까? 안 됩니다. 그들이 직접 와서, 우리를 석방해야 합니다." 관리들은 바울과 실라가 로마 시민이라는 말을 듣고서 두려워하였습니다. 바울이 채찍에 맞으며 감옥에 갇힐 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이제 풀려나려하니 자신의 로마 시민됨을 밝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울은 로마시민으로서의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효율적인 복음 전파를 위하여 그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감옥에 갇힘으로 빌립보 간수와 그의 온 집에 구원을 얻게 되었음을 볼 때 바울과 실라의 행동은 하나님의 섭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히지 않았더라면 그 간수와 그의 가족이 구원을 얻을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두 상관은 직접 감옥으로 달려와 그들을 호위하면서 빌립보를 떠나 주기를 간청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로 인하여 빌립보 성이 시끄러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옥에서 나가 루디아 집에서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빌립보를 떠났습니다. 이미 루디아의 집이 교회가 되어 믿는 사람들이 모이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장의 주어가 일인칭 복수에서 다시 3인칭으로 바뀝니다. 누가가 바울 일행과 동행하지 않고 빌립보에 남게 된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어떤 성경적인 원리들을 발견합니까?

1) 사단의 방해는 계속 있습니다.

바울의 전도 사역을 마귀는 계속 방해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았더니 도리어  감옥에 갇히는 수모를 당하였습니다. 사단의 방해는 계속되지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그런 환경에서도 여전히 복음의 진보를 이룹니다. 빌립보 간수와 그의 가족이 구원을 얻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미국에서는 예수를 증거하다가 옥에 갇히며 육체적인 수모를 당하지는 않으나 마귀는 더 교묘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며 믿는 자들을 이간질하고 근심과 불안을 줍니다. 신앙생활을 한번 해보려고 하면 자꾸 다른 일이 생깁니다. 오늘만 날이냐 나중에 나중에 하자고 유혹을 합니다. 열심히 주를 위하여 봉사하려는데 주변에서 은근히 핀잔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에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여지없이 달려와 물고 늘어집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면 언제 어디서 무슨 공격을 당할지 모릅니다. 혹시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낙심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맙시다. 여전히 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2) 기도는 삶의 기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만나고,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나고, 빌립보 간수를 만날 때 반복하여 등장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기도. 기도하러 강가에 갔다가 루디아를 만났습니다. 기도하러 가다가 여종을 만났습니다. 감옥에서 기도하며 찬양을 드리다가 빌립보 간수를 변화시킵니다. 기도를 드리려고 작정을 하든 이미 기도하든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기도가 우리의 삶의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드릴 수 있는 거룩한 감정의 표현입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우리의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므로 악기를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곡조가 있든 곡조가 없든 상관없습니다. 찬양을 드릴 때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불러야 합니다. 주 예수를 온전히 믿은 바울과 실라는 자기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요 앞으로의 여정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송을 드렸습니다. 야고보 5:19,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 지니라” 기도와 찬송이 기독교인의 삶 속에 어떠한 형편에서도 빠져서는 안 될 요소인 것을 말합니다. 히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지금 광야를 지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여전히 믿는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 길이 아무리 힘들고 험할지라도 인도하시는 주님이 여전히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을 때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에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찬송을 부르던 여호사밧 왕이나, 감옥에 갇혀서도 찬송을 부르던 바울과 실라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찬송을 드립시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계기가 됩니다.  



4) 관계를 통한 전도가 효율적입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초청하고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들 모두가 성령 충만하게 되어 방언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리더십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영혼구원에 관심을 가진다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전도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루디아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16:5) 빌립보 간수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16:34) 한 집안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보여줍니다. 믿음은 관계를 통하여 전파됩니다. 아는 사람들을 은혜의 자리로 초대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제시하는 방법을 ‘관계를 통한 전도’라고 합니다. 이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효율적입니다. 목장에 아직 믿지 않는 친구들을 초청하며 그들에게 믿는 자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5) 하나님이 보내실 때에는 만날 사람들을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연이 없습니다. 바울을 빌립보에 보내실 때 아무 대책이 없이 그냥 보내신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기도하러 강가에 나갔다가 루디아를 만났습니다. 루디아는 바울의 전도를 들을 때 마음이 열어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루디아로 인하여 그의 집안 식구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하였습니다. 기쁨이 충만하여 바울의 선교팀을 집으로 초대하여 머물게 하면서 루디아의 집이 빌립보 교회가 모이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도 지나고 보면 빌립보 간수와 그 가족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요, 감옥에 있던 모든 이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요, 더 나아가서 빌립보 교회에 필요한 일꾼을 부르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6) 진정한 회개는 마음의 변화뿐만 아니라 행동의 변화를 동반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과 더불어 필요한 것이 인간관계의 회복입니다. 간수와 그의 집안사람들은 바울의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였습니다. 바로 그 밤에 바울과 실라를 데려다가 매 맞아 피투성이가 된 부분을 씻겨 주고 바울 일행과 함께 음식을 나눕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자결하려던 자요 무서워 떨던 자였으나 예수를 영접하고 나니 온 가족과 더불어 그 간수는 크게 기뻐하며 사랑을 베풉니다. 조금 전까지 무서운 간수였으나 도리어 죄수들인 바울과 실라의 상처를 씻겨줍니다. 바울과 간수는 더 이상 죄수와 간수의 관계가 아니라 주 안에서 형제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마음의 변화뿐만 아니라 행동의 변화를 동반합니다. 관계가 진정으로 회복되려면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나와 불편한 이웃과의 관계도 구체적으로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다소 껄끄러울지라도 은혜를 먼저 깨달은 사람이 먼저 교제의 악수를 청해야 합니다. 네가 잘못했다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그의 아픈 곳을 도리어 찔러대지는 않습니까?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우는 것입니다. 죄 용서함 받고 하나님과의 잃었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영생을 얻는 것, 즉 구원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어떻게 얻습니까?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요 구주인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십니다. 지금도 택한 성도들을 통하여 그들을 부르십니다. 또한 성도들이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어도 하나님은 구원 받은 백성들을 붙드십니다. 시련의 때를 지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감옥에 갇혀서도 주님을 찬양했던 바울과 실라처럼 현재는 어렵다 하더라도 앞으로 역사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기도와 찬양을 통하여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