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바울의 2차 선교여행 (1) (행 15:35-16:10)

Author
Myung Myung
Date
2007-02-11 21:29
Views
4449
행 15:35-16:10  바울의 2차 선교여행(1)



때로 우리는 우리가 가는 길을 잘 모릅니다. 나름대로 최선이라고 세운 계획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닐 수가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온 이유는 공학을 좀 더 공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마치고 대학에서 일하면서 어느 때부터인가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부담을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무엇인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어떤 쪽으로 몰아가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처음 경험해보는 것인지라 당황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기 위하여 아내와 함께 일 년 가까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부인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Pasadena에 있는 Fuller 신학교에 지원하였습니다. 신학교에 와서 리더십 과목을 듣는데 하나님께서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나 사건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반복하여 알려주신다고 하면서 이중확인 (double confirmation)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니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에게 당신의 뜻을 보여주기 위하여 double confirmation, triple confirmation의 과정을 사용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시는 방법은 다릅니다. 내가 이런 경험을 했으니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경험을 해야 한다고 일반화 시킬 수는 없습니다.



살다보면 정말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때와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본문을 보니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답답하게 여겨질 정도로 일이 안 풀릴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두 번째 선교 여행을 떠났는데 하나님께서 도리어 바울의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막으실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기에게 일어난 현상들을 종합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순종함으로 나아가니 이방 선교의 지경이 더욱 넓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바울의 사역을 인도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교여행을 하는 바울의 모습을 본받으며 영적으로 반응하는 성도들과 되어 하나님이 베푸시는 풍성한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갈등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머물러 있으면서,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였습니다. 기존 신도들에게 말씀을 통하여 양육을 하고, 불신자들에게 전도하면서 균형있는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바울이 지난 선교여행 때에 전도한 성들을 다시 방문하여 그의 전도로 믿게 된 형제들의 신앙을 살피고 그들을 격려하자고 바나바에게 제안하자 바나바가 승낙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자기의 사촌인 마가를 데리고 가려 하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린 마가를 괘씸하게 여기고 그의 동행을 반대하였습니다. 마가는 아마 예루살렘 공회에 참석하고 안디옥으로 온 사람들 편에 같이 끼어 왔는지 모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어떤 관계였습니까? 바울이 회심한 후에 예루살렘에 가서 그곳 교인들과 사귀고자 애를 썼으나 그들은 다 바울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교회를 핍박했던 사울의 과거의 모습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아무도 만나기 꺼려하던 바울을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소개하며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과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변호하였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예루살렘 교우들과 교제를 갖게 됩니다. 또한 다소에 있던 바울을 데리고 와서 안디옥 교회를 섬기게 한 사람도 바나바입니다. 소아시아 지방 선교 여행도 함께 다녀오고 예루살렘 공회까지 함께 참석하고 돌아온 후에도 안디옥 교회를 함께 잘 섬겼는데 그만 마가와의 동행 문제로 절친한 동역자였던 두 사람이 심하게 다툰 끝에, 서로 갈라서고 말았습니다.



성령 충만한 두 사도가 의견 차이로 갈라섰다는 사실이 충격입니다. 성령은 하나가 되게 하는 영이니까 성령으로 충만하면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잘못했습니까 아니면 바나바가 잘못했습니까?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키프로스로 떠난 이후로 사도행전에서 더 이상 바나바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바나바에게 특별한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누가는 바울을 통하여 복음이 로마까지 전파되는 데에 더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기에 바울이 제몫을 다할 때까지 돕는 역할을 한 것으로 바나바는 그 사명을 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후에 조용히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진 것과 같이 바나바가 바울을 떠남으로 바울이 독자적으로 활발하게 사역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번 설교 때도 말씀 드렸지만 바울과 마가의 관계를 그것으로 아주 끝난 것은 아닙니다. 디모데 후서 3장을 보면 어둡고 차가운 로마의 지하 감옥에 갇혀있던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네가 올 때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하며 부탁을 합니다. 마가에 대한 바울의 생각이 바뀐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바나바의 도움으로 다시 한 번 사역의 기회가 주어진 마가가 주님의 신실한 제자로 거듭나서 복음 사역에 헌신적으로 참여하였고 디모데와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으로 인하여 선교 사역 자체가 취소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두 개의 선교팀이 생겼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났고 바울은 실라를 새로운 동반자로 삼아 소아시아 지방으로 떠났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헤어진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갈등은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종들을 통하여 복음은 여전히 전파된다는 사실입니다.  



같이 일하다보면 의견의 차이로 인하여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능하면 일치를 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할지라도 사로 원수같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이런 갈등이 있다고 하여 하나님의 사역이 중단되어서도 안 됩니다. 각자를 향한 주님의 뜻을 계속하여 이루어야 합니다.  



신실한 종들이 바울의 선교여행에 동행합니다.

1) 실라가 바울과 함께 떠납니다.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갑니다. 바울은 실라를 예루살렘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신실한 지도자였습니다. 유다와 함께 안디옥에 와서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동안 실라가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모습을 주욱 지켜본 바울은 실라가 아주 귀한 일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바나바와 갈등이 생기니 바울이 실라에게 복음을 함께 전하러가자는 제안을 하였고 실라는 이를 수락하였습니다. 더구나 실라는 로마 시민으로서 로마 제국을 여행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실라는 바울의 2차, 3차 선교 여행에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2) 디모데가 선교팀에 합류합니다.

1차 전도여행에서 바울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와 더베를 차례로 방문하였습니다. 2차 선교여행에서는 지난번과 반대의 순서로 그 도시들을 찾습니다. 안디옥에서 육로로 길리기아를 거쳐 더베를 방문하였고 이어서 루스드라에 왔습니다. 제자(1절), 형제들(2절), 여러 교회(5절)이란 표현을 통하여 이미 그 지역에 믿는 사람들이 많고 교회들이 여럿 존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바울의 선교사역에 큰 힘이 된 것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디모데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함’ 혹은 ‘하나님의 영예’라는 뜻을 가진 디모데는 어떤 사람입니까?

- 제자입니다. (1절)

디모데는 바울의 일차 선교 여행 중에 바울의 전도를 받고 믿음을 갖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누가는 그를 제자로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이 제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든든히 서고 말씀대로 살며 주님을 위하여 헌신된 사람입니다.



-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입니다 (1절)

디모데의 부친은 헬라인이고, 모친은 유니게라는 기독교로 개종한 경건한 유대인이었습니다. 딤후 1:5절에서 바울은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한다고 썼습니다. 즉 디모데는 외할머니와 어머니로 연결되는 깊은 믿음의 뿌리를 가졌습니다. 디모데는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라 모친의 좋은 감화를 많이 받았을 것이요, 어려서부터 구약성경을 알았다고 바울은 딤후 3:15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할례를 받지는 않았었습니다. 디모데는 유대적인 배경과 헬라적인 배경을 동시에 갖춤으로 이중 문화권 선교에 아주 적합한 하나님의 일꾼이었습니다.



-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입니다. (2절)

디모데는 그가 살고 있는 루스드라 뿐 아니라 인근 지역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는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어떤 모습으로 교회를 섬겼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신앙은 소문난 신앙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사람 됨됨이를 보면서 선교의 동역자로 삼기 원하였습니다.



- 할례를 받았습니다. (3절)

바울은 디모데를 선교팀에 합류시키면서 그에게 할례를 주었습니다. 왜 이방인 회심자들에게 할례 행하는 것을 적극 반대했던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주었을까요? 그 지방에 있는 유대인들은 디모데의 부친이 헬라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디모데는 앞으로 이방인들 뿐 아니라 유대인들을 위하여 사역해야 하는데 방문하는 도시마다 유대인들이 디모데가 할례 받지 않은 것을 인하여 문제를 제기함으로 유대인 전도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바울이 이방인 회심자에게 유대인의 법을 부과하는 것은 거부하였으나 그 자신은 계속해서 유대인으로 살았습니다.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복음만 전해지기만 한다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 같이, 이방인에게는 이방인과 같이 행동하는 바울의 전도전략입니다.



바울의 2차 선교여행에 합류한 때로부터 디모데는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가 되어 바울의 말년까지 그의 사역을 돕게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고전 4:17),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딤전 1:2), 사랑하는 아들 (딤후 1:2) 로 불렀습니다. 바울이 마지막 쓴 디모데 후서에서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4:9)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4:21) 하면서 죽음을 앞둔 고독한 상태에서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가 자기 곁에 와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내용을 적었습니다.  



교회가 든든히 서갑니다.

바울 일행은 소아시아 지역의 여러 성을 두루 다니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정한 규정들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서 지키게 하였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할례를 받거나 율법을 지킴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상의 제물, 피,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의 이런 사역을 통하여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들이 주 안에서 서로 형제가 됨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소아시아 지방에 어떤 열매가 맺어졌습니까?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5절)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술하면서 한 단원을 마무리 지을 때마다 즐겨 쓰는 표현입니다.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발단: 오순절에 성령이 기도하던 120명에 임하면서 예루살렘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진행: 충만함을 받은 선도들이 모이기를 힘쓰고 배우기를 힘쓰고 교제에 힘쓰고 기도에 힘을 썼더니 성령이 활발하게 교회에 역사하심으로 온 백성에게 교회가 칭송을 받으며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의 수를 날마다 더하셨습니다.  



행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발단: 예루살렘 교회 내에 불공평한 구제로 인한 갈등

진행: 사도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하며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역할을 분담하는 교회요, 사역을 감당할 일꾼을 세우는 교회요, 소수를 돌아볼 줄 아는 아량을 가진 교회였기에 제자의 수가 심히 많아지고 심지어 많은 제사장의 무리까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행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발단: 스데반의 순교에 이은 예루살렘 교회에 임한 핍박

진행: 흩어진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갈릴리 등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더구나 바울이 회심하여 다메섹 성도들의 교제를 나누고, 전에 핍박하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과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가 든든히 서 가고 믿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아집니다. 교회를 건강하고 강하게 하는 것은 단순히 숫자가 늘기 때문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영적으로 변화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를 경외하였으며 그 결과 성령의 위로를 경험하였습니다.



행 16: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발단: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안디옥 교회가 혼란

진행: 안디옥 교회에 교리 상의 갈등이 있었고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갈등이 있었지만 바울 선교팀의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영적으로 든든히 서며 안정이 되고 믿는 사람의 숫자가 날마다 증가하였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의 선교팀을 인도하십니다.

1) 소아시아 사역을 막으십니다.

소아시아 지역의 성공적인 사역에 고무가 되어 바울은 내친 김에 소아시아 서쪽까지 진출하여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을 지나 서쪽으로 진행하여 아시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아시아에는 에게 해 연안의 최대도시인 에베소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가 그 주변 지역을 복음화하기 위한 기지로서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시아에는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바울의 선교팀이 아시아에서 사역하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를 거쳐 북쪽으로 비두니아로 가려고 하였으나 성령께서 이번에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할 수 없이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에 이르렀습니다. 사역은 열정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바울이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가지고 교회를 핍박하였는데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목적이 고상하고 방법이 좋아도 그리고 노력을 많이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뿌린 만큼 열매를 거두지 못합니다.



2) 유럽 사역의 문을 여십니다.

아시아로 가려고 했던 계획이 막히고 비두니아로 가려던 계획이 차질을 빚었을 때 바울은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드로아는 소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곳입니다. 에게해와 흑해가 마주치는 곳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 밤에 바울이 환상을 보았습니다. 마게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 앞에 서서 “마게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바울은 동료들에게 그가 본 환상을 말해주었습니다. 선교팀은 바울이 본 환상을 그동안의 경험과 연관을 지으며 왜 성령께서 소아시아 지역의 사역을 막으셨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에베소를 포함한 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마게도냐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지체 없이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누가는 소아시아 선교여정을 기록하면서 6절에 성령, 7절에 예수의 영, 10절에는 하나님을 언급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바울의 선교사역을 직접 주관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 그들에서 우리로

문장 표현에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10절부터 문장이 3인칭에서 일인칭 복수로 바뀝니다. 사도행전에는 ‘우리’를 사용한 단락이 네 번 나옵니다. (16:10-17; 20:5-15; 21:1-18; 27:1~28:16) 그중의 첫 번째가 본문에 나옵니다. 9절의 ‘우리’는 마게도니아 사람들이고 10절의 ‘우리’는 바울의 선교팀을 말합니다. 선교팀에 누가 들어갔기에 그들이 우리로 바뀌게 되었습니까? 힌트: 누가 이글을 쓰고 있습니까?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선교팀에 참여하였습니다. 자기도 그 팀에 포함되어 있으니 ‘우리’라는 말로 선교팀을 부릅니다. 누가는 직업이 의사로 알려졌습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개념의 의료선교를 위하여 누가가 참여한 것 같지는 않으나 선교팀의 구성멤버가 든든해지고 다양하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합니다.

바울은 목표를 향하여 담대하게 나아가는 추진력이 있는 사람이고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는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그와 더불어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삶과 사역을 주관하시는 성령께 철저히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의 선교 계획과 주님의 계획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였기에 주님의 뜻을 알았을 때 자기의 계획을 접고 하나님의 계획을 따랐을 때 그가 생각해보지 않은 유럽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의 계획을 막으시기도 하고 내가 뜻하지 않는 길을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합니까? 그것이 나의 계획과 다를지라도 순종할 자세가 되어 있습니까?  무슨 일을 할지라도 마음에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불안하거나 마음에 기쁨이 없으면 다시 한 번 주님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평강이 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나의 삶을 주님께 전적으로 맡긴다는 뜻입니다. 나의 삶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요 주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고백대로 살 때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무슨 희안한 능력을 많이 행하는 삶이 아니라 성령께서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역이 있고 하고 싶은 사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대로 계획하고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성령의 지시와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다고 하면서도 실패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면 과감하게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믿음의 선진들은 다 성령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그러한 믿음의 선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성경을 대할 때 좋은 관찰을 하면 바른 적용을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사역을 통하여 어떤 점을 관찰할 수 있습니까?

-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사역을 주관하십니다.

성령께서 때로 막기도 하시고 때로 열기도 하시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바울의 선교 사역을 인도하십니다.



- 하나님께서 사역에 필요한 일꾼들을 붙여주십니다.

바울이 훌륭한 사도이지만 그의 사역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신실한 실라와 디모데가 동역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여러 사람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나 혼자만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주변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도우미들이 있는지 찾아보아야 합니다. 안 보이면 붙여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 신자들의 양육과 불신자들의 전도가 균형을 이룹니다.

씨만 뿌려서 안 됩니다. 기르기도 해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에 머무르는 동안 신자의 양육과 불신자의 전도를 병행했던 바울은 일차 선교여행 때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을 다시 방문하여 그들을 양육하면서 교회를 굳게 세웁니다.



- 사역자들이 목표는 같지만 추진하는 방법이 다를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의 동행문제로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와 같지 않은 것을 인하여 분개하거나 섭섭하게 생각하기보다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각자 주어진 영역에서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 본질적인 것을 얻기 위하여 비본질적인 것은 양보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디모데에게 행한 할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지장을 받지 않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구원이란 본질적인 것은 타협할 수 없으나 그 외 덜 중요한 것은 양보하거나 포기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때에 민감합니다.

아시아를 복음화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생각하던 때와 하나님의 때가 달랐습니다.  얼마동안 머물러야 할지, 언제 떠나야 할지, 무엇을 해야할 지 미래를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하루하루가 우리에게 마지막인 것 같이 여기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바울의 선교팀이 아시아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지체하지 않고 유럽으로 건너가니 선교의 지경이 넓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만으로 불충분합니다. 뜻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찰즈 스탠리가 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에 몇 가지 내용을 소개하며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1)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다른 것을 듣게 된다.

2) 쉽게 속아 넘어간다.

3)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된다.

4) 영이 아닌 육체를 만족시키는 결정을 내린다.

5) 잘못에 대하여 변명을 한다.

6) 결과로 인하여 고난을 겪게 된다.

7) 주위 사람들이 상처를 입는다.

8) 하나님이 준비하신 가장 좋은 것을 잃게 된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가장 일반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우리의 영혼이 고요하고 잠잠해진다는 것이다. 마음의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7)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을 때 우리의 심령에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으려면:

1)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기대하는 믿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2)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 46:10) 기도하면서 자기의 요구사항만 하나님께 내어놓으려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침묵해야 합니다.

3) 기꺼이 인내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적극적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5) 자신이 들어야 할 것은 반드시 들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6)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분께 맡겨야 합니다.

7) 위로와 축복의 말만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책망 받을 것도 각오하면서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8)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집중력을 요하므로 주의 깊게 말씀을 들으려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9) 하나님의 말씀 속에 깊은 의미와 동기를 알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들어야 합니다.

10) 순종하려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11) 하나님의 은혜에 항상 감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12)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누가 주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입니까 아니면 주님이십니까?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믿는 성도들의 삶과 사역을 주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사람들은 항상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일을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일까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면서 항상 주님의 관점에서 보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계획을 세웠을지라도 주님의 뜻이 아니면 기꺼이 포기하고 주님의 뜻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에 이끌리어 인생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 특히 잃어버린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추수꾼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으며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