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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회의 (행 15:1-34)

Author
Myung Myung
Date
2007-02-04 20:32
Views
5516
행 15:1-34 예루살렘 회의

  

살다보면 견해차로 인하여 논쟁이나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도 예외는 아닙니다. 교리 상의 차이를 인하여 대립이 있고 그것이 심해지면 심지어 분열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6.25 전쟁 후에 한국의 장로교가 예수교 장로교와 기독교 장로교로 나뉘었습니다. 기독이란 단어는 Christ를 한자로 표기한 말입니다. 미국 선교사가 그 당시 한국교회 상황을 본국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예수와 그리스도가 싸우니 이건 막을 재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1959년 예수교 장로교가 영락교회로 대표되는 통합 측과 충현교회로 대표되는 합동 측이 나뉘어 보수냐 진보냐 하는 시각차로 이견을 보이며 분열을 하였습니다. 분열이 있을 때마다 교단이 새로 생기고 서로 자기가 정통이요 장자 교단이라고 주장합니다. 겉으로는 교리를 내세우지만 사실 분열 뒤에는 누가 교단의 주도권을 가질 것이냐 하는 헤게모니 싸움이 있음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보수, 정통을 주장하면 더 보수, 더 정통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합동 측은 그 후에도 계속 분열하여 지금까지 100개 이상의 교단으로 나뉘었습니다. 장로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감리교나 성결교도 교단분열의 과정을 겪었습니다. 선배 목사님들이 복음에 열정을 가지고 열악한 상황에도 귀한 사역을 감당하셨는데 교단의 계속적인 분열만은 없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가집니다.



사도행전 15장의 핵심단어는 갈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리 상의 문제로 교회 안에 갈등이 있고 2차 선교여행을 떠나면서 마가를 데리고 갈 것인가 하는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사단의 역사를 통하여 밖으로부터 문제가 올 뿐 아니라 때로 믿는 자들 가운데서도 의견이 달라 갈등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궁극적으로 갈등이 있지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갈등을 통해서도 복음의 진보를 이룹니다. 갈등이 없을 수는 없으나 이 갈등을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하는지 본문을 통하여 배우기를 원합니다.



1. 안디옥 교회에서의 갈등

바울과 바나바가 일차 선교여행을 다녀온 후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보고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함으로 유대인들뿐 아니라 많은 이방인들이 믿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바보 성에서 바예수가 대적하다가 눈이 멀게 된 사건, 비시디아 안디옥이나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쫓겨난 사건,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을 주님의 능력으로 일으킨 사건, 유대인의 선동을 받은 무리들이 던진 돌에 맞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나 계속 복음을 전하게 된 사건 등등 그들의 보고를 들으면서 안디옥 교인들은 마음이 뜨거워지고 기쁨이 충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유대에서 온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 교인들에게 가르친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안디옥 교회 최초로 위기를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이후로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율법과 그에 근거한 전통에 따라 살아왔습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에는 유대교적인 것이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을 때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교적인 색채가 아주 강했습니다. 할례가 왜 생겼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징표를 주셨습니다. 노아와 맺은 언약의 징표는 무지개였고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징표는 할례였습니다. 언약의 징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언약의 은혜와 언약의 징표를 혼동하게 되었습니다. 할례를 행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은혜에 감사하기보다 할례 자체가 유대인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특권의식을 나타내는 표시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하려면 당연히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를 믿게 된 상황에서도 할례 = 구원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은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일부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파 출신 신자들의 의견이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안디옥 교회가 율법과 상관없이 사는 것을 보며 어떤 통제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입니다. 안디옥에 온 유대주의자들은 그런 생각을 가진 그룹을 대변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고 실제로 많은 전도의 열매를 거두고 있던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런 유대인들의 가르침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을 가리켜서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라고 불렀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돌 세례를 받고 죽기 직전에서 살아난 그 다음날에도 복음을 담대하게 전했던 열정의 사나이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유대주의자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갈 5:6) 하면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을 주장하였습니다.  

  

* 바울과 바나바, 예루살렘 교회로 파송

안디옥 교회에서 발생한 심각한 교리 논쟁은 교회 전체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바울을 지지하는 그룹이 있었지만 유대에서 온 사람들을 지지하는 그룹도 있었기에 교회가 시끄러웠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전에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할 때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문제를 지혜롭게 풀려고 합니다. 갈등의 상황에서 안디옥 교회는 적당히 타협하거나 대립하면서 분열하지 않고 이 문제를 예루살렘 교회에 의뢰하기로 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교우들 가운데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그곳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심각한 교리 문제를 가지고 안디옥을 떠나 예루살렘까지 420km의 여정을 가면서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로 흩어진 주로 헬라파 전도자교인들이 세운 베니게와 사마리아 교회들을 돌보았습니다. 방문하는 교회마다 키프로스와 소아시아 지방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나누며 그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2. 예루살렘 회의

1) 베드로의 변론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 교인들과 사도들과 장로들에게도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미 그들도 바울의 선교 소식을 소문을 통해 들었을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행하신 일들을 모두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선교보고를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바리새파 출신 교인들은 이방인 신자들도 자기들과 같이 의식적 관행들 즉 할례, 음식법 기타 여러 가지 지침들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 민감한 문제를 다루려고 모였습니다. 이 회의는‘예루살렘 회의’또는‘예루살렘 공회'로 부릅니다. 이 회의는 이방인 신자들도 유대인 신자들과 교회의 같은 지체로 인정해야 할지 논의하기 위해 소집한 모임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공회의 구성원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증인으로 초청되어 참석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의견과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이방인들이라 할지라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의견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마침내 베드로가 일어나 말합니다. 사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삼년 동안 따라다녔고 오순절에 성령 체험을 하였지만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성령 시대의 새로운 영적인 안목을 가지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셨고 로마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말씀을 전할 때 고넬료와 그의 집에 모인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전에 보았던 환상이 단순히 먹는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계획과 관련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있었다는 사실이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알려지자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있었다고 추궁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며 담대하게 말하자 예루살렘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셨”다고 말했었습니다. (행 11:17-18) 예루살렘 교회에서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사역에 공개적으로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이미 자기들도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인지라 머리로는 성령께서 지금 이방인들에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가슴에 와 닿지가 않았습니다.‘과연 하나님이 이방인도 구원하시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진 유대인들이 여전히 많았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다름이 없이 구원하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 나를 택하셨다, 하나님이 ...  성령을 주어 증거하셨다, 하나님이 ... 이방인과 유대인을 차별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가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이방인 형제들의 목에 메워서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합니까? 베드로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사도의 권위를 가진 베드로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의 경험은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의 간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회중은 하나님께서 바나바와 바울을 통하여 이방인들 가운데서 행하신 여러 가지 기사와 표적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그들의 간증은 베드로의 변론에 더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2) 야고보의 제안

베드로의 변론과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보고를 들으면서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분위기로 흐릅니다. 이방인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을 직접 경험한 사도들의 보고를 들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도 택하셨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야고보가 발언합니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요 요한의 형인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계기로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있게 되었고 마가의 어머니 다락방에서 기도할 때도 함께 있으면서 성령의 부어주심을 경험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야고보가 베드로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부상하였습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취하시려고 이방 사람들을 처음으로 돌보셨다고 베드로의 발언을 지지합니다. ‘돌보신다’는 단어가 출애굽기 4:31절에도 나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굽어 살피시고, 그들이 고통 받는 것을 돌아보셨다.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을 돌아보신 것처럼 이제 하나님의 때가 되어 이방인들을 돌보셔서 자기 백성을 삼으신다고 합니다. 또한 백성으로 번역된 'laos'라는 단어는 원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가리키던 단어인데 이방인에게 처음 사용됩니다. 이방인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야고보는 아모스 9:11-12절을 인용합니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방인의 구원 문제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획 속에 있었고 때가 되니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 사람들에게 새삼스럽게 할례를 받아라 율법을 지켜라 하면서 괴롭히지 말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유대인 신자들이 가지는 불안과 불만도 고려해야 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이 양심상 거리낌 없이 새로 믿게 된 이방인 신자들을 맞이할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이방인 신자들에게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짐승의 고기나, 피를 완전히 빼지 않은 고기 등 유대인들이 꺼리는 특정 음식을 삼가고 음행을 금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3) 공회의 결의

야고보가 제안한 것을 예루살렘 공회가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공문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편지는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 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예루살렘 교회 대표자들이 이방인 형제들을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형제로 여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모교회로서의 기득권이나 우월감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이방인 신자들을 포용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공문만 보낼 수도 있었지만 교회가 인정한 사람들을 선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방인 신자들에게 공회의 내용을 설명하도록 배려를 하였습니다. 진리 안에서 이방인 신자들과 원만한 교제를 가지려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와 다른 입장을 취하는 다른 형제들을 사랑으로 용납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 가운데 몇몇 사람이 안디옥 교회에 가서, 지도자들이 시키지 않은 여러 말로 안디옥 교인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마음을 어지럽게 하였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할례를 주장하던 자들에게 그런 일을 할 권한을 준 일이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할례를 주장하는 것은 교회의 공인된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그릇된 가르침이 침투하여 문제가 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어디서 개인적으로 은혜 받았다고 해서 목회자와 먼저 상의하지 않고 다른 교인들에게 그 교재나 설교 tape를 나누어주거나 같이 공부하는 것이 때로 위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목장에서 교회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임의로 교재를 택하여 사용하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가르침 가운데 이단적인 요소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성령의 인도 아래 결정했음을 분명히 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에 모든 결정이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공회에서 결정된 사항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 참석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보통 회의에서는 안건을 토론한 후에 다수결로 결정합니다. 투표로 가부를 정한다면 반대한 쪽이 있게 마련이요 그 결과를 인하여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다수결로 결정하기보다 가능하면 기도와 충분한 토의를 거쳐 만장일치로 이끄는 것이 덕스럽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투표할 기회를 줄이는 것이 건강한 교회 행복한 교회가 되는 비결입니다.



이방인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방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강요하지 않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도록 권면합니다. 이 요구는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은 성도들의 경건 생활을 위하여 제시된 사랑의 규정입니다. 유대인들이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계명을 이방인들이 행하면 유대인 신자들과 원만한 교제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 9:22-23) 교회 안에서 신앙의 덕을 세우며 함께 세워져가기 위하여 서로 양보하고 존중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특히 초신자들이 교회생활에 부담을 느껴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그렇게 해 왔으니 아무 생각 없이 하는 행동이나 규정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거북하게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안디옥 교회에 결정 사항 설명

예루살렘 교회는 유다와 실라를 파송하여 공문의 내용을 설명하도록 했습니다. 공문의 내용을 알게 된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신자들은 그 권면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유다와 실라도 설교자들인지라 안디옥 교우들을 말씀으로 권면하면서 믿음으로 굳게 하려는 열정과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갈등과 혼란의 위기가 있었으나 지도자들의 신속하고도 지혜로운 조치를 통하여 안디옥 교회는 기쁨을 회복하였습니다. 유다와 실라는 안디옥 교우들로부터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받고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거리낌 없는 사귐을 갖게 하였고 더 나아가 교회가 하나 되게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 예루살렘 공회의 의의

할례와 연관된 이방인의 구원 문제로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와 유대에서 온 사람들 사이에 논쟁을 벌어지고, 이로 인하여 예루살렘 공회가 소집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공회는 선교현장에서 일어난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소집된 모임이었지만 이 모임이 가지는 역사적인 의미는 매우 큽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고 할례나 모세 율법이 아니라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만이 구원과 교회의 근거라는 것을 확인한 회의였습니다. 물론 그런 결정이 쉽게 나온 것은 아닙니다. 강한 유대교적 배경에서 출발한 교회였기에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대한 고정 관념을 깨뜨리기가 쉽지 않았고 또한 변화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논쟁, 대립, 갈등은 있었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의 구원에 관한 일치된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기독교가 율법을 토대로 한 유대인 중심의 지방 종교가 아니라 만민을 포용하는 기독교의 기초를 확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회의 결의 사항이 교회 역사상 최초로 공문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또한 의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함께 이방인들도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면 기독교는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 더 이상 율법의 짐을 지우지 않도록 한 공회의 결정은 예수님께서 사도행전 1:8에서 말씀하신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라는 이방선교 사역을 지지하는 공식적인 근거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회의는 사도행전에서 중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예루살렘 회의가 이방 선교의 전환점이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있어 제2차 선교여행을 떠남으로써 복음이 소아시아에서부터 유럽까지 확산되며 선교의 다변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 교회 안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신앙 공동체 내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기 때문에 서로간의 견해차이나 덕스럽지 못한 일들이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 자기의 주장만 옳다고 고집을 피우거나, 몇 사람의 주장으로 소수의 의견을 묵살하고 그냥 넘어가거나, 혹은 자기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자기주장과 같지 않은 사람들을 은근히 비방하며 험담하는 것은 교회 안의 갈등을 일으킬 뿐입니다. 갈등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만 옳다고 고집을 부리거나 감정대립을 보이거나 상대방을 적대시하여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목소리를 높이며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타난 갈등과 이를 지혜롭게 해결하는 초대교회의 모습은 저희에게 도전이 됩니다. 그들이 보여준 해결방법은 영적이면서도 상식적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당면한 문제를 말씀 안에서 성숙하게 토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교회의 지체들이 함께 기도하며 의견을 나누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해야 합니다. 주목되는 것은 교회 내부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공개적으로 토의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만장일치로 회중의 의견을 수렴한 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면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 하나님의 말씀, 개인의 의견, 교회의 결정 등 모두가 필요합니다.



* 갈등을 최소화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공동체가 하나 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지라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를 수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시는 영인지라 하나님의 성령에 인도함을 받는 교회는 다양성 속에서도 하나됨을 추구해야 합니다. (unity in diversity) 기도가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하고 대화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의 모습을 보이며 다른 형제나 자매들의 유익을 구해야 합니다.



2) 율법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신자에게 할례와 율법 준수의 멍에를 씌워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오늘날의 교회에도 복음이 아닌 다른 것으로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혹시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도록 복음의 진리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할수록 율법주의 경향을 띠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로 지속됩니다. 그런데 믿음과 은혜에서 떠나 행위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런 실수를 많이 하였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자는 취지는 좋지만 안식일을 보다 잘 지키기 위하여 39가지의 항목을 정해 놓고 각 항목마다 부대조항들을 잔뜩 붙여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이삭을 따먹은 것을 보면서 오죽 배가 고팠으면 그랬을까하는 생각보다는 제자들의 행동을 추수행위로 간주하고 안식일을 범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안식일에는 2000규빗 즉 900m 이상 다니면 안 된다는 규정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어기면 죄인 취급하였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사랑을 베풀어 사람들의 삶이 보다 풍요로울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인데 복잡한 안식일에 대한 규정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안식일은 쉼을 얻는 축복의 날이 되기보다 도리어 바리새인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당하는 부담의 날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자유함을 누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여 그 은혜를 보답하려는 자세로 살아가는 헌신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법에 규정되었기에 예배 참석하고 헌금을 드리고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나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 감사하여 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십일조를 했다고 헌신생활은 다 한 것이 아닙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말은 다시 말하면 너희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야 하면서 새로운 차원에서 전적인 헌신을 요구합니다.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아름다운 사귐을 통하여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를 이룰 뿐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