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바울의 일차 선교여행(3) (행 14장)

Author
Myung Myung
Date
2007-01-28 20:07
Views
3760
행 14장 바울의 일차 선교여행(3)

  

지난 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도미니칸 리퍼블릭을 방문하여 전영구 선교사님의 사역지를 둘러보았습니다. 그 나라는 캐톨릭이 제도종교로 자리를 잡고 국가의 지원을 받고 있지만 토속신앙과 혼합이 된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혼구원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 미사를 집전하고 헌금만 거두어 간다고 국민들이 욕을 한다고 합니다. 도미니카는 한국이 경제적으로 어렵던 60년대나 70년대를 연상하게 합니다. 수도인 Santo Domingo는 전 인구 900만중 4분의 일이 모여 있습니다. 교통이 복잡하고 매연이 심합니다. 수도에는 시내버스가 다니는데 남자들이 차장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게 보였습니다. 도미니카 대통령이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지도자들부터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기보다 개인주의가 만연합니다. 빈부격차가 몹시 심한데 마땅한 일거리가 없다보니 도둑이 많습니다. 집집마다 쇠창살로 둘렀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에도 믿음 장로교회에 도둑이 들어와 쇠창살을 뜯고 스피커와 키보드를 훔쳐 갔습니다. 전기 사정이 좋지 않으니 수시로 전기가 나갑니다. 그래서 보조 발전기가 집에 있습니다. 25명의 한인 선교사중 23분은 수도인 Santo Domingo에서 사역하는데 전 선교사님은 수도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Bonao라는 시골에서 사역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Bonao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 구원에 관심이 있으셨기에 Corea에서 한 선교사 부부를 파송하셨습니다. 지난 11년 동안 6개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하는데 특히 어린이들의 전도에 많은 힘을 쏟고 있습니다. 이번에 여러 교회를 방문하는 동안 생명 장로교회 율동팀이 함께 다녔습니다. 10세에서 15세까지 학생들로 구성된 율동팀이 찬양과 함께 율동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그들의 초롱초롱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앞으로 5년 10년이 지났을 때에 그 지역의 현지사역자들로 양성되어 귀한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을 소망 중에 그려봅니다.  



본문에 보니 하나님은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상업 중심지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를 보내셔서 그들에게 은혜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셔서 영혼을 구원하게 하십니다.



바울의 선교팀을 통하여 어떤 점을 관찰할 수 있습니까?

1) 복음이 계속하여 전파됩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여정을 보면 비디시아 안디옥에서 핍박을 피하여 이고니온에 옵니다.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는 늘 하던 대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많은 결신자를 얻습니다. 거기서도 일부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기를 거부하고 그들의 사주를 받은 이방인들과 함께 바울과 바나바를 돌로 치려하자 루스드라로 쫓겨 갑니다. 루스드라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거기까지 쫓아온 유대인들로 인하여 바울은 돌에 맞아 죽을 지경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바울은 다시 일어났고 다음 선교지인 더베로 옮겨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결신자를 얻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왔던 곳들을 다시 돌아보면서 성도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굳건히 세워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파송했던 안디옥 교회로 돌아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 여행 중에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였습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마 10:23)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주님을 충실하게 전하는 전도자들이 주님의 말씀처럼 이 동네에서 전 동네로 쫓겨 다니지만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합니다. 불씨를 때리면 때릴수록 불꽃이 퍼져나가는 것처럼 복음의 진보를 방해하려는 마귀의 역사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여전히 전파되어 가는 곳마다 믿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3절에 보면 주를 힘입어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했다고 합니다.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신다고 누가는 적고 있습니다.  27절에 바울 일행이 안디옥에서 선교보고를 할 때“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였습니다.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단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세우신 선교사들을 통하여 선교 사역을 계속 진행하십니다. 선교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며 그분의 인도하심에 민감하며 순종할 때 풍성한 선교의 열매가 맺어집니다.



2) 복음에 대한 방해가 계속 됩니다.

전도자들을 통하여 복음이 계속 전파되는데 이에 따라 마귀의 사주를 받은 무리들이 계속하여 전도 사역을 끈질기게 방해합니다. 이고니온에서도 비시디아 안디옥의 경우처럼 복음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나쁜 감정을 갖고 두 사도를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간신히 피하여 루스드라에 갔는데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있는 유대인들이 거기까지 쫓아와서 무리를 선동하였습니다. 우리도 유대인인데 알고 보니 저 친구들은 엉터리들이고 사깃꾼들이야. 바울은 미혹된 무리들이 던진 돌에 맞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바울에게 역사함으로 그가 다시 힘을 얻어 복음 사역을 재개합니다.



3) 복음에 선포되는 곳에는 사람들이 둘로 나누어집니다.

복음이 전해질 때는 예외 없이 복음에 호의적인 반응을 가진 무리와 적대적인 반응을 가진 무리가 나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 설득력 있게 복음을 전했고 표적과 기사까지 행하였으나 듣고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유대인을 좇는 자들과 두 사도를 좇는 자들로 나뉘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능력이 있었고 많은 능력을 보여주었으나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은 철저하게 닫혀 있었습니다.

히 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복음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는 기쁨이요 감격의 소식이지만 그것을 반대하는 자들에게는 걸림돌이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주님께서 영광중에 다시 오시는 날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날입니다. 이때 심판의 결과는 아주 분명하여 마치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 구별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은 영생을 누리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주님을 향한 우리들의 사랑이며 그 사랑의 표현으로서 이웃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이 땅에서 얻는 복과 고통은 영원 속에서 직면하게 될 영생과 영벌이 그림자일 뿐입니다. 참복은 천국에서의 영원한 영광을 누리는 것이요, 진정 두려워할 저주는 지옥의 형벌입니다. 영생 얻은 자로서 합당한 사랑과 순종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바울의 사역의 특징:

1) 말씀 전도

바울과 바나바는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합니다.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합니다.

핍박은 있으나 ‘주를 힘입어’ 담대하게 전합니다. 사단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바울 일행을 핍박하지만 선교팀은 가는 곳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이 주의 손에 힘을 입어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데 그 이유는 은혜의 말씀을 확증하기 위함입니다.



2) 능력 전도

이미 베드로 때에도 사도들을 사도들을 통하여 기이한 일과 표적이 많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행 2:43)

주님께서는 바울과 바나바의 손으로 이적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행하시는 이적은 영적 전쟁이 심할 때 더 분명히 나타납니다. 이적을 행하게 하신 것은 두 사도가 전하는 복음이 진실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단적인 예로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고치는 이적을 통하여 말씀을 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바울이 행한 이적은 행 3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이적과 비슷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던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뛰어다녔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앉은뱅이의 믿음이었습니다. ‘듣거늘’이라는 동사의 시제는 미완료형으로 계속해서 듣는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는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습니다. 그 앉은뱅이는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를 들으면서 마음이 열리고 뜨거워지고 은혜로 충만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 앉은뱅이 속에 구원을 얻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성령의 감동 가운데  보았습니다. 결국 바울은 그를 향해 너는 당장 일어서라 외치니 그가 즉시 일어나 걷습니다. 그 앉은뱅이는 완전히 나았습니다. 앉은뱅이의 믿음은 그가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생겼습니다. 구원을 얻을 만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옵니다. 설교를 하면서 내려다보면 보입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달게 받는 자는 표정은 밝습니다. 생동감이 있습니다.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그러나 몸은 와 있으나 마음은 딴 데 가있거나 근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무표정하거나 어둡습니다. 지금도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의 표징이 나타날 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능력을 사모할 때 주님께서 부어주십니다.  



3) 상황에 따른 메시지의 유연성

바울이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같으나 구약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에 대하여 전개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루스드라는 퇴역한 로마 군인들이 많이 사는 도시였습니다. 유대인들을 별로 살지 않았기에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 도시는 원시적 우상숭배 도시였습니다. 자연히 그 곳 사람들은 구약이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비시디아 안디옥이나 이고니온에 있는 유대인 회당서 전하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접근합니다.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 내가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라 (고후 9:19-22)  선교학 용어로는 contextualization (상황화)라고 부르면서 전도 상황에 따라 메시지를 유연하게 변화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핵심은 같으나 접근 방법이 다릅니다. 구약의 언약이나 메시야를 언급하지 않고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자연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사건을 통하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는데 신학 용어로는 ‘일반계시’라고 부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시 19:1-4)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시면서 음식과 기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하나님임을 강조합니다. 물론 자연현상을 통하여 나타난 일반계시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분명하게 알 수는 없기에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용어로는 ‘특수계시’라고 합니다.



* 복음을 전하면서 회심을 촉구합니다.

바울은 자신들을 신으로 섬기려는 무리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회심의 중요 요소를 언급합니다.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15절)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모습이 어떠한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돌이켜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전에 짓던 죄나 헛된 삶의 방식에서 방향을 돌이켜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물론 회심의 과정은 바울처럼 급진적일 수도 있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점진적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을 통해서 본 전도자의 자세:

1) 복음전파를 위한 열정

무리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은 것으로 생각되었던 바울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얻어맞은 것을 인하여 온몸이 쑤시고 결렸겠지만 바울은 그 다음 날로 다시 복음을 전하러 나섰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겠다는 의지가 얼마나 강한 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고후 4:8-10,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사단이 아무리 넘어뜨리려고 해도 넘어지지 않고 일어나는 오뚝이 신앙을 바울에게서 보게 됩니다. 열심을 내다가도 작은 일에 쉽게 낙심하거나 주저앉기 잘 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대조가 됩니다.



* 하나님의 일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게 된 제자들을 권면할 때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면서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지고 이 고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일차 전도 여행 때를 회상하며 그의 실제적인 체험에서 나온 권면을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해줍니다. 고후 4:10-12,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2) 성령 충만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의 지식이나 전략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3절에서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했다는 것은 성령에 충만하여 말했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였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적을 행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성령이 시키는 대로 전도지에 가서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전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이적을 보여주니 가는 곳마다 풍성한 전도의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3) 겸손

바울이 앉은뱅이를 일으켰을 때 루스드라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치유는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았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이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말합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우상을 섬기는데 익숙한 그들에게 당연한 반응입니다. 바나바는 나이가 많고 리더처럼 보이니 그를 그리스도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왕인 쓰스 즉 제우스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주로 말을 많이 하니까 신들의 대변인인 ‘허메’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당장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물을 바치고 경배하려고 했습니다. 두 사도는 루가오니아 방언을 몰랐기에 처음에는 그들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소와 화관을 가지고 자기들 앞으로 나아오는 것을 보고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로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헬라말로 물었을 것입니다. 무리가 자기들을 신으로 여기고 제사를 드리려는 것을 알자 옷을 찢으며 그들을 적극적으로 만류하였습니다. 바울은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 가서 외칩니다.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 어찌하여 이런 일들을 하십니까? 우리는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이 각자의 방법대로 살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게 하시고, 먹을거리를 주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하면서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 왕은 사람들이 그를 신처럼 높였을 때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교만하게 행동했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죽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높일 때 그 삶이 가치가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바울 일행은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헛된 행동을 용납하지 않았고 도리어 하나님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우상 숭배는 헛것이라고 가르치면서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촉구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 떼와 같이 몰려들어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자기 앞에 무릎 꿇고 죄를 자복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치고 요한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왕이 가로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왕하 1:8)  저 분이 혹시 엘리야가 아닐까?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여깁니다.  갑자기 높아진 인기로 인하여 인간적으로 볼 때는 얼마든지 우쭐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업적을 과시하면서 자신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설 자리를 잘 알았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예수님을 높였습니다.  그는 모여든 무리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샌달의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 당시 누가 샌달의 끈을 풉니까?  끈을 푸는 것은 종이 하는 일입니다.  자기는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의 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예상외의 인정을 받게 되면 자신에 대하여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럴 때 일수록 자기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의 반응에 민감하기보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선줄로 안즉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 바울은 복음을 받은 자들을 양육시켰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전했던 도시들을 다시 방문하여 이미 믿은 사람들을 권면하였습니다. 각성에 흩어져 사는 성도들을 일일이 다 돌볼 수 없었기 때문에 장로들을 택하고 금식 기도를 통하여 그들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요즈음으로 따진다면 현지 사역자들을 세운 것입니다. 이번 선교지에도 가보니 현지인 사역자를 세우는 것이 가장 큰 일 중의 하나였습니다. 현지인 사역자만큼 현지인들의 심성을 제대로 알고 그들에게 합당한 메시지를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지인 사역자는 단기간에 세워지지 않습니다. 어떤 현지인 사역자들은 금전적인 이익을 바라고 접근했다가 그것이 채워지지 않거나 다른 선교사가 더 많이 사례비를 준다면 훌쩍 떠나버리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고 합니다. 현지인 사역자를 세우기 위한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복음의 씨를 뿌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씨가 싹이 터서 뿌리를 내리며 제대로 서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도처에 든든히 서게 됩니다.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예수를 믿은 사람이 믿음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전도가 중요하지만 그와 더불어 믿음 사람들에 대한 양육이 필요합니다. 새 신자들뿐 아니라 기존 신자들에게도 양육이 계속 필요합니다. 그래서 목적이 이끄는 사역 클래스를 2월 둘째 주일부터 시작합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였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입장에서 본 그들의 관측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닙니다. 성경적인 관찰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고 해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대표하여,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고 사흘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나는 누군지 알고 그분께 돌아와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진정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믿고 섬기는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보여주어야 합니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바울을 통하여 복음 전파가 계속 되었던 것처럼 오늘도 택하신 사람들을 통하여 계속 주님이 증거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이 택하신 사람들의 전도를 듣고 마음이 열려지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며 끝까지 주님만을 가리키는 삶을 살면서 주님이 예비하신 심령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람 낚는 어부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