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바울의 일차 선교여행(2) (행 13:13-52)

Author
Myung Myung
Date
2007-01-21 14:31
Views
3447
행 13:13-52 바울의 일차 선교여행(2)



70년 만에 캘리포니아 지방에 한파가 몰아닥쳐 농작물 피해가 여간 큰 것이 아닙니다. 어제 San Diego Tribune지를 보니 일면 top 기사로 가주 지역의 농산물 business가 각종 재해로 시달린다는 것을 보도하였습니다. 작년 일월에 북가주 지방에 내린 엄청난 양의 비로 인하여 많은 농작물이 물에 잠겼습니다. 지난여름에는 열파가 몰아닥쳐 수천 마리의 소와 백만 마리 이상의 닭이 죽고 농작물이 타버렸습니다. 가을에는 E-coli가 Salinas에 있는 시금치 밭에서 퍼져서 9월에 세 사람이 죽고 수백 명이 아팠습니다. 이 때문에 다른 지역에 있는 시금치까지 폐기처분되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많은 농장들이 일 년 내내 노동력 부족으로 시달렸습니다. 그러더니 새해부터 이상 저온이 계속 되면서 아보카도를 비롯한 과일과 채소들이 얼어 채소 값이 폭등하고 음식 값이 오르는 추세를 보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장로님의 밭이 Riverside County에 있는데 이번 저온으로 인하여 겨울 농사를 망쳤다고 합니다.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이 이런 경우에 사용됩니다. 한 가지 고비를 넘겼다 싶으면 또 다른 고비가 있습니다. 바울의 선교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키프로스 섬에서 바예수와의 영적인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으로 마귀의 도전을 물리치고 총독인 서기오 바울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됨으로 키프로스 지역에 복음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배를 타고 소아시아 지방으로 갑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영적인 전쟁이 벌어집니다. 단순한 대면이 아니라 자칫하면 생명의 위협까지 당할 정도로 위협이 거세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이 세우신 종들을 통하여 계속 진행됩니다. 바울 일행이 두 번째 선교지에서 어떤 열매를 어떻게 거두는지 살펴보면서 우리가 날마다 겪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를 맛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마가가 선교팀을 이탈합니다.

키프로스를 갈 때까지는 바나바가 선교팀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바보에서 바예수를 물리친 사건 후로는 바울이 선교팀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선교팀을 언급하면서 바울과 및 동행한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바울 일행이 키프로스를 떠나 배를 타고 소아시아 남단에 위치한 버가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를 수행하던 마가 요한이 그곳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부잣집 청년으로 고된 선교 일정을 수행하기 힘들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는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일로 인하여 바울이 마가에 대하여 몹시 실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차 선교여행 때는 우리를 두고 떠나버린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갈 수 없다고 주장하는 원칙주의자 바울과 마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격려자 바나바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다가 결국 바울은 실라와 함께,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따로 선교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 누가 더 바른 판단을 했는지는 함부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통한 제2차 전도여행을 통하여 소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바나바를 통하여 다시 한 번 사역의 기회를 얻는 마가는 초대 교회에서 훌륭한 인물이 되었고 마가복음까지 쓰게 됩니다. 나중에 바울이 디모데 후서를 쓰면서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딤후 4:11)하다고 디모데에게 부탁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마가가 선교팀에서 빠졌으나 바울의 선교 여행은 여전히 계속된다는 사실입니다. 모세 없는 이스라엘은 상상할 수 없었지만 모세가 떠나자 하나님은 모세의 시종이었던 여호수아에게 기름을 부어 가나안 정복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때로 함께 신앙생활 하던 교우들이 무슨 이유든지 우리 곁을 떠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떠남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이 교회를 통한 주님의 사역은 누가 맡더라도 계속 됩니다. 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때그때마다 쓰임을 받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계속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수고를 감당한 자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참여한 자들에게 상급을 주십니다.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언급하였지만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사용하는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그중에 첫 번째 원칙은 큰 도시나 수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원칙에 따라 바울과 바나바는 버가를 통과하여 소아시아 지방의 큰 도시인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갑니다. 두 번째 원칙은 유대인 회당에 먼저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믿음의 조상들에게 하나님이 언약을 세우셨고 율법이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고 이스라엘만이 성막과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고 다윗의 혈통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셨기에 바울은 이스라엘이 이방인들보다 복음을 먼저 받을 우선권이 있다고 생각하여 안식일에 유대인 회당을 먼저 방문했습니다. 회당에는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이방인이면서 유대교의 높은 윤리적인 가르침과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유일신 사상에 끌려 예배를 드리는 소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God-fearer)들도 꽤 있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바울 일행에게 묻습니다.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바울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하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16절부터 41절까지 나오는 바울의 설교는 이미 구약에 대한 지식을 가진 무리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이 됩니다.



바울의 설교는 족장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을 언급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택하셨다. 높여 주셨다,  인도하여 내셨다. 참으셨다,  멸하셨다, 유업으로 주셨다 하는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주권적으로 택하시고 이끌어 오셨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베푸신 그 크신 은혜에도 불구하고 불순종으로 일관하였음을 언급합니다. 바울은 사사들과 사무엘과 사울을 거쳐 다윗을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가문을 영원히 견고케 할 한 사람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다윗의 자손 가운데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구원자 예수님입니다. 모세를 보내시고 다윗을 보내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뜻을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약속된 메신저인 세례자 요한이 약속된 메시야인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구원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그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구주임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그를 배척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면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계시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목적은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하고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던 것처럼 누가는 베드로와 바울을 똑같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도들로 취급합니다. 베드로가 했던 사역을 사울도 했음을 균형 있게 보여줍니다. 베드로가 병자를 고쳤고 바울도 고쳤다. 베드로가 귀신을 쫓아냈고 바울도 쫓아냈다. 베드로가 죽은 도르가를 살렸는데 바울도 죽은 유두고를 살렸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이 충만하여 유대인들에게 한 설교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바울도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합니다. 시 16:10절을 인용하여 베드로가 행 2:27절에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하였는데 바울도 바로 그 구절을 인용하여 35절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2장 32절에 말했는데 바울도 13장 31절에서 자기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인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전하는 사람과 전달하는 방법이 다르고, 전하는 시대나 장소가 달라도 전달되는 복음의 핵심은 같다는 말입니다.  



특히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강조합니다. 시 49:9에는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 예언이 다윗의 자손인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 중의 왕으로 여기고 존경하는 다윗이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겼지만, 죽고 나서는 조상 곁에 묻혀 썩고 말았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썩지 않게 하셨다고 합니다. 바울의 메시지를 보면 복음의 핵심적인 다 들어 있습니다. 고전 15장에 나와 언급된 내용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무덤에 장사되었다.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여기까지 하고 바울이 설교를 마쳤다면 바울의 설교는 예수가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증명한 것으로 그치게 됩니다. 십 수 년 전에 팔레스타인에서 죽었다가 부활한 그 예수라는 사람이 지금 비시디아 안디옥의 한 회당에서 바울의 설교를 듣는 무리들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사실 예수님 당시에 수백 명의 유대인들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정부에서 요주의 인물로 찍힌 중범자들이었기에 십자가에 며칠 동안 달린 채 고통 가운데 서서히 죽어 가는 벌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는데 왜 하필이면 예수라는 사람의 죽음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가? 왜 하나님은 그를 다시 일으키셨는가? 바울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로 연결시킬 뿐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지금 회당에 모여 설교를 듣는 무리들에게 무슨 관련이 되는지를 말하면서 자기의 설교를 듣는 자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그 죄의 본질을 살펴보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지 못한데서 비롯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롬 6:23) 죄를 지음으로 인하여 죽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제한된 존재라 스스로 구원할 수 없기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십자가상의 죽음은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은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을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한 사건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행 4:12)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약을 먹음으로 약효가 나타나듯이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효력이 우리에게 비로소 역사 하게 되어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38-39절에서 바울은 모세의 율법이 주지 못하던 두 가지 약속을 언급합니다.

1)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습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는 것이 (히 9:22) 하나님의 공의이기에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어 짐승을 죽여 제사를 드림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나 양과 같은 짐승을 제사장에게로 끌고 갑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짐승에게 손을 얹으며 짐승을 가져온 사람의 죄를 대신 짐승에게 씌웁니다. 그리고 나서 짐승을 죽이면 그 사람의 죄가 대신 사하여 집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를 통한 대속은 일회용이기에 다음에 또 죄를 지으면 또 제사장에서 짐승 한 마리를 끌고 가야 했습니다. 그러니 죄를 질 때마다 애꿎은 짐승들이 희생되어야만 했습니다. 요즈음과 같은 동물 보호론자들이 그 당시에 있었다면 매일같이 데모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불완전하기에 제사를 드리고 나서도 원죄 즉 죄의 뿌리가 여전히 남아 있기에 또 범죄 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또 다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와 같은 반복되는 제사를 그만두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히 9:28,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완전한 제사였기에 구약 시대와 같은 반복된 제사가 필요 없고 단번에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것을 믿음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려는 인간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예수를 믿음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이 말은 예수 믿는 다고 혈기를 부려도 괜찮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어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는 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잘 하고 모이면 싸운다고 비판하면서, 그럴 바에야 나는 안 믿는 다고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가끔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은 원죄와 실행 죄를 구분하지 못해서 그런 말을 합니다. 원죄는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관계를 막는 것이라면 실행 죄는 우리가 말로, 생각으로, 행동으로 평소에 짓는 악한 것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원죄가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게 됩니다. 담이 허물어져도 흐트러진 조각들을 다 치우기 전까지는 허물어진 담사이로 지나가기가 힘들 듯이 우리가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한다고 해도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까지는 우리의 부족한 부분들이 여전히 드러납니다. 다만 믿기 전에 하던 죄를 짓던 정도가 약해지고 회수가 줄어들게 됩니다. 담배를 하루에 세 갑을 피우던 사람이 신앙을 가지게 되면서 한 갑으로 다섯 개피로 줄이다가 나중에는 아예 끊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루에 여러 차례 아내나 자녀들에게 혈기를 부리던 사람이 신앙을 가지게 되면서 혈기의 정도와 횟수가 점차로 줄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변화되는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신앙생활 하면서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신앙을 가진 외적인 증거가 됩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 즉 성도가 거룩하여져 가는 과정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경건 되지 못한 부분이 전도를 막고 안 믿는 자들에게 비방의 구실을 주게 되므로 기도와 말씀을 기초로 한 경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내가 무심코 던지는 말이나 한 행동을 인하여 형제자매를 실족하게 하거나 전도를 막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2)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미국 법무성의 영어 이름이 Department of Justice입니다. 정의를 다루는 기관이라는 뜻입니다. ‘의롭다’는 말은 원래 법정에서 쓰는 말입니다. 재판관에 의하여 죄가 없다고 무죄 선고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 용어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적용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 앞에서 무죄 판결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규정된 모든 조항을 다 지킴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율법은 죄인을 의롭게 만들 수 없고 다만 죄를 깨닫게 할 뿐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 진정한 의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주어집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됩니다. 비록 예수님 우편에 있던 강도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말씀을 듣거나 그의 사역에 참여한 적이 없지만 죽기 직전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니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었습니다. 마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일군의 비유를 보면 아침 일찍 와서 온종일 일한 품꾼이나 저녁 다섯 시에 와서 한 시간 일한 품꾼이나 똑같이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 소식을 주니 먼저 온 자들이 불공평하다고 주인을 원망합니다. 그때 주인이 말하기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라면서 그들의 불평을 일축합니다. 다른 사람이 받은 것과 비교하며 원망할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인하여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래 믿은 사람이나 믿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나 구원을 받는 사실은 같지만 각자가 주님께 충성한 데 따른 상급은 틀립니다.  



전에는 똑같이 죄인이었으나 예수께 대하여 믿음을 고백한 자는 하나님께 죄가 없다고 선언 받고 하나님이 백성이 되어 구원을 받게 되지만 안 믿는 자는 여전히 죄인인 상태 그대로 있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가 되어 그에게 기다리는 것은 무서운 심판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사람입니다. 그의 삶 가운데 부족한 부분, 부끄러운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았기에 의인이라 불립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이제 구원은 최소한 받았으니 내 마음대로 살아보자 이것은 구원받은 참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 성령의 열매를 얻으려고 애써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현상을 관찰할 수 있습니까?

1)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한데 복음을 방해하는 자들은 시기로 충만합니다.

4.29 폭동 때 왜 많은 한인 업주들이 피해를 보았습니까? 근본 원인은 흑백의 갈등이라는 미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였지만 소요가 일어나는 과정에 흑인들은 자기들이 당한 억울함을 한인들에게 쏟아 놓았습니다.  한인 업주들이 자기들의 돈을 다 긁어 간다는 시기심 때문에 엉뚱하게 한인들이 피해를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구원은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만 베푸시는 것이라 생각해 왔는데 엉뚱하게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공연히 심술을 부립니다. 롬 11:11,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유대인들이 배척하자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구원을 보고 시기심을 일으켜 구원을 향해 나오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이 방해로 인하여 안디옥에서 쫓겨 가면서도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왜 그런가요? 자기들은 그 성을 떠나갈지라도 복음의 씨를 뿌림으로 그 성에 전도의 열매가 많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믿음의 공동체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전도할 때 기쁨이 넘치고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2) 복음을 받는 자들은 사도의 말씀을 좇지만 복음을 방해하는 자들은 사도들을 쫓습니다.

바울의 전도에 호의적인 무리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1)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많은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복음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나올 때에 다음 안식일에도 이러한 말씀을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회중은 흩어졌지만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 중에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두 사도들과 더불어 더 이야기를 나누면서 구원의 진리에 대하여 궁금한 부분들을 질문하고 설명을 듣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권면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들이 말씀 안에서 교제를 나누는 것보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2)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알립니다.

복음에 대한 이방인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입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은 자기들이 가졌던 감격을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전하기 원하였기에 그 한주일 동안 안디옥 성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이 말씀을 전한다는 것을 열심히 알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 안식일에는 성 사람들이--대부분 이방인들이--거의 다 모인 가운데 대규모 집회를 가질 수 있었고 모인 자들은 바울을 통하여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결신자들이 생겼습니다.



3) 구원이 이방인에게 향한다는 말을 듣고 기뻐합니다.

바울이 사 49:6의 말을 인용합니다.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영접하기를 거부하므로 이제는 예수를 이방인들의 어두움을 밝히는 구원의 빛을 삼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향한다는 바울의 말을 듣고 이방인들은 기뻐하며 주의 말씀을 찬양하였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사람은 모두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의 전도에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극단적인 칼빈주의자(hyper-calvinist)들은 하나님은 이미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를 정해 놓으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애를 써서 전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4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기로 작정된 자들은 있었으나 그들이 믿기로 작정한 것은 바울의 전도를 받고 난 후입니다. 49절에 보면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어떻게 하면 말씀이 퍼집니까?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마음을 열어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받은 것을 전함으로 사방에 퍼집니다. 우리가 전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믿을 수 없고 믿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의 응답이 합력하여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롬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여기에 전도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롬 10:15,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 반면에 복음을 방해하는 유대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키프로스에서 바예수를 만났을 때 바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그를 물리쳤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영적 전쟁은 계속됩니다. 마귀는 또 다른 하수인들을 붙잡아 자기의 목적을 이루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자기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울의 설교를 듣고 수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니 시기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합니다. 아마 예수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아니라 갈릴리 출신의 한낱 범죄자라고 주장했을지 모릅니다. 예수의 부활을 부정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믿는 자에게 대한 약속과 더불어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경고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인데 이 방법을 무시하거나 멸시한다면 그들은 망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심판밖에 기다리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들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는데 그 은혜를 거부합니다. 그것도 부족하여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아예 그 동네에서 쫓아 버립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고도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영안이 어둡고 영의 귀가 막혀서 그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기보다 도리어 배척하고 죽일 궁리를 하였습니다. 들음이 믿음과 합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고 도무지 마음이 열려지지 않습니다.

  

전도하는 것이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지만 그들이 전도하는 과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여도 시기와 방해는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러한 인간적인 방해조차도 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됩니다. 예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지만 믿음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구원은 그 효력을 발생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구원을 받게 된 것도 감사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 모두가 바울과 같이 세상을 다니며 전도 집회는 갖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가까운 이웃에게 우리의 변화된 삶의 열매를 보여주고 주님이 나를 통하여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나눔으로 주님께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부르심에 순종하는 자들을 통하여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사역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붙여 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나 받는 자들이 함께 기쁨에 충만하였던 것처럼 복음의 원리를 분명히 깨닫고 담대하게 제시하면서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들을 추수하는 기쁨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영적 지혜와 능력을 받아 날마다의 영적인 전쟁,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이기며 하나님께 풍성한 열매를 보여드리는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