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저에게 생명이 있다 (행 20:1-16)

Author
Myung Myung
Date
2007-06-24 21:26
Views
4407
행 20:1-16 저에게 생명이 있다



이제 설교를 막 시작한지라 아직은 조는 사람이 없지만 설교 중에 단에서 내려다보면 조는 분들이 곧잘 눈에 뜨입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묵상하는 사람, 졸지 않으려고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가 하기를 여러차례 하는 사람,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여 고개를 연신 꾸벅거리는 사람, 내친 김에 코까지 골고 자는 사람. 별 사람이 많습니다.



본문을 보니 졸음과 관련된 특이한 사건이 하나 벌어집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다가 졸던 유두고라는 청년이 삼층에서 떨어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먼저 의견을 물어보겠습니다.



* 유두고 사건을 오늘날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1) 설교 듣다가 졸면 큰일 난다. 그러므로 설교를 들을 때 졸아서는 안 된다. - 설교 중에 졸지 말자

2) 졸아도 교회 와서 졸자. 그러면 짜투리 은혜라도 받는다. - 졸더라도 교회에 와서 졸자

3) 설교를 들을 때 앞자리에서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졸거나 잡념이 생긴다. - 설교는 앞자리에서 듣자.

물론 본문이 설교를 듣는 자세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주기 위하여 쓰인 것은 아니지만 귀중한 도전을 제공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울이 3차 전도 여행할 때 일어난 일을 적고 있습니다. 그가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니아의 교회들을 방문하고 헬라 지역으로 가서 사역하다가 다시 마게도니아를 거쳐 드로아에 들렀다가 예루살렘에 가기 직전에 밀레도에 이르는 숨 가쁜 전도의 여정이 전개됩니다.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니아로 갑니다.

에베소에서 데메드리오가 일으킨 소동이 그치자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오게 해서 그들을 격려한 뒤에 작별인사를 하고 마게도니아로 떠났습니다. 그가 에베소를 떠난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에베소에서 더 이상의 곤란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아데미 여신의 우상을 만들어 파는 직공들이 일으킨 소요가 서기장의 만류로 인하여 일시 진정되기는 하였으나 그 불씨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바울을 재판정에 고소하고 무리를 동원하여 바울을 대적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부득불 에베소를 떠나게 됩니다.

2) 마게도니아 지방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2차 전도여행 중에 마게도니아 지방은 유대인들의 소동을 인하여 오래 머물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지역을 다시 방문하고 교제를 나누기 원하였습니다.

3) 디도를 만나기 위함입니다.

고후 2:12-13에 의하면 바울이 드로아에 갔을 때에 디도를 만나지 못했으므로,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그곳 성도들과 작별하고 마게도니아로 갔습니다.

4) 예루살렘 교회를 부조하기 위한 헌금을 모으기 위함입니다.

고후 8:1-3,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케도니아 여러 교회에 베푸신 은혜를 여러분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다고 하면서 마게도니아 교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했다고 적었습니다. 롬 15:25-26, “지금 나는 성도들을 돕는 일로 예루살렘에 갑니다.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낼 구제금을 마련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손해를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종종 환난과 핍박을 인하여 전도자들이 다른 지역으로 피하지만 그곳에서 새로운 전도의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바울이 배를 타고 마게도니아 지방으로 갑니다. 마게도니아는 그리스 북부 지역으로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의 도시가 있는 곳입니다. 2차 전도 여행 때는 유대인들 때문에 급히 떠나게 되어 그들과 충분한 교제를 나누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데살로니가에서는 불과 삼주만 머무르다가 밤중에 도망치듯 떠났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시 그 지역을 찾아와 여러 가지 말로 성도들을 격려하니 피차간에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바울이 쓴 서신을 참조하면 마게도니아에서 제법 머물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19절에 의하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남김없이 전파하였”다고 하는데 일루리곤은 지금의 유고슬라비아 지역을 말합니다. 이제 마게도니아를 떠나면 예루살렘에 갔다가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끌려가는데 언제 복음이 발칸 반도에 위치한 일루리곤까지 전파되었겠습니까? 아마 바울이 마게도니아에 머무는 동안 발칸 반도까지 복음을 전했든지 아니면 그의 제자들이 전했을 것입니다.



마게도니아를 떠나 헬라로 갑니다.

여기서 헬라라 함은 고린도와 아테네가 있는 아가야 지역을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석 달을 지내면서 로마서를 씁니다. 시기적으로는 주후 57-58년경으로 추측합니다. 3차 전도 여행 중에 쓴 고린도 후서나 로마서를 보면 유대 성도들을 향한 헌금을 언급합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니아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후 8:1-2)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롬 15:25) 이방인 교회들로 나온 헌금을 예루살렘에 직접 전달해야 하는 부담이 없었더라면 바울은 굳이 아가야에서 예루살렘까지 가지 않고 직접 로마로, 로마에서 스페인까지 갔을 것입니다. 바울이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가려고 하는데, 유대 사람들이 그를 해치려는 음모를 꾸몄으므로 배편을 포기하고 마게도니아를 거쳐서 돌아가기로 합니다. 위험을 피하여 할 수 없이 마게도니아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그 결과 마게도니아의 성도들과 다시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작별한 줄 알았는데 다시 오니 얼마나 반갑습니까? 이래서 성도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바울에게 동행자들이 있습니다.

바울의 전도여행에 여러 사람이 동행합니다. 베뢰아 사람인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더베 사람 가이오, 루스드라의 디모데, 아시아 사람 두기오와 드로비모, 그리고 빌립보의 누가입니다. 이들은 바울이 여러 지방을 다니며 전도하여 얻은 바울의 제자들이었고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바울 곁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이들을 먼저 드로아로 보내고 닷새 후에 그곳으로 갔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오순절에 맞추어 예루살렘을 방문하고자 하는 바울의 의도에 뜻에 같이 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삼인칭으로 서술하다가 갑자기 우리로 바뀝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바울의 여행에 다시 합류하였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이런 표현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니아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행 16:10)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면서 ‘우리’라는 표현이 다시 빠집니다. 누가는 빌립보에 계속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5절에 다시 ‘우리’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소위 ‘we-passage'라 불리는 부분이 사도행전에 네 번 나옵니다. (16:10-17, 20:5-15, 21:1-18, 27:1-28:16) 아시아 사람들은 먼저 무시아에 있는 항구 도시 드로아에 가서 바울과 그 일행을 기다립니다. 바울과 그 일행은 유대인의 중요한 절기인 무교절이 지난 후에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도착하여 먼저 온 형제들과 합류합니다.  



드로아에서 이적이 일어납니다.

바울 일행은 드로아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는데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마지막 날 밤에 일어난 일만을 누가는 상세히 적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안식 후 첫날’ 모였습니다. 초대 교인들이 이미 유대인이 지키는 안식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더 중요한 날로 지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주일에 그들은 공식 예배를 드렸을 뿐 아니라 떡을 떼기 위하여 모였습니다. 떡을 뗀다는 말이 무엇을 뜻합니까? 고전 10:16-17과 11절 17-24절에 비추어 보면 떡을 뗀다는 것은 성찬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는 성찬과 함께 애찬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떡을 뗀다는 말이 상황에 따라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을 나타내기도 하고 함께 음식을 들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애찬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주일 날 성도들이 예배 후에 함께 식사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행 2:42절에도 보면 초대 교회 성도들이 모여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고 떡을 떼며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바울은 주일을 지나 드로아를 떠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다락방에서 말씀을 전하는 모임은 지금으로 따진다면 주일저녁예배라 할 수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위대한 전도자가 와서 인도하는 특별사경회라 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떠나면 또 언제 다시 오게 될 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바울의 강론은 밤늦게까지 계속 됩니다. 바울은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하든지 더 전하려는 것을 볼 때 바울은 예수님과 같은 목회자의 심정을 (pastoral heart)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습니다.

  

밤이 깊어집니다. 등불을 많이 켰다는 것은 집회하는 장소가 다락방이 넓은 아주 큰 집이요 집회에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두고라는 청년이 3층 창에 걸터앉은 것은 그 집에 모인 사람이 많아 별로 여유가 없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애를 써서 말씀 듣기 좋은 자리에 앉으려는 열성이 부족한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거기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울의 입에서 증거 되는 말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들었을 것입니다. 밤이 깊어지다 보니 유두고라는 청년이 졸기 시작합니다. 설교를 듣다가 조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이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이 자리에도 벌써 눈이 게슴츠레 해지는 분들이 눈에 뜨입니다. 본문을 보면서 위대한 사도인 바울의 설교를 듣다가도 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유두고는 꾸벅꾸벅 졸다가 그만 삼층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급히 달려가 그 청년을 일으켜 보니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9절에 사용된 ‘죽은’ (네크로스)이란 단어와 12절에 사용된 ‘살아난’ (존타)이란 단어를 볼 때 이 청년이 잠시 기절한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의사인 누가는 유두고가 죽었다가 바울에 의해 살았다는 것을 기록함으로 유두고가 그저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이 아님을 확인합니다. 그런데 유두고란 이름은 ‘행운'을 의미합니다.



방금까지 바울을 통하여 은혜의 말씀을 받다가 청년이 죽은 것을 알고 그 방에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서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죽은 청년의 몸 위에 엎드리기 전에 또는 엎드렸을 때에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이 행한 기적은 엘리야(왕상 17:21)와 엘리사(왕하 4:34-35)의 사역을 연상시킵니다. 열왕기상 17장에서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엘리야는 몸을 펴서 그 아이 위에 세 번 엎드리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이 아이의 영혼이 돌아오게 하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주셨으므로 그 아이의 영혼이 몸으로 돌아와 되살아났습니다. 열왕기하 4장에서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을 때 엘리사는 여호와께 간절하게 기도한 다음에 자기 입과 눈과 손을 그 아이의 입과 눈과 손에 맞대고 엎드리자 그 아이의 몸이 점점 따뜻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서 엘리야는 몸을 펴서 그 아이 위에 세 번 엎드리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이 아이의 영혼이 돌아오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침대에서 내려와 방 안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다가 다시 올라가서 그 아이 위에 엎드리자 그 아이는 재채기를 일곱 번 하고 눈을 떴습니다. 유두고가 죽었으나 바울의 능력 있는 기도가 그를 다시 살렸습니다. 그 장면을 지켜 본 사람들이 얼마나 흥분되었겠습니까? 말씀의 은혜와 죽은 청년이 다시 살아난 이적을 인하여 그 밤에 함께 나눈 애찬은 참으로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날이 새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다락방에 모인 드로아 교인들은 그야말로 말씀 충만, 은혜 충만, 능력 충만, 기쁨 충만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밤늦도록 성도들이 모여 교제를 나누고 말씀을 나누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물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이 필요합니다. 일찍 자야 그 다음날 일을 하지. 나는 아침 체질이야. 하면서 밤에 모이는 것을 꺼려하는 분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것이 이해가 되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좀 무리를 해도 괜찮습니다. 너무 공식대로만 신앙생활만 고집해서는 폭포수와 같이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어렵습니다.



유두고 사건은 베드로가 행했던 다비다 사건과 짝을 이룹니다. 욥바에는 다비다라는 여신도가 있었는데 그녀는 착한 일과 구제 사업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병들어 죽었을 때 베드로가 방문합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낸 후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나서 시체를 향해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자 그 여자가 눈을 뜨고 베드로를 보며 일어나 앉았습니다. 베드로는 그 여자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그녀가 살아난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죽은 유두고를 살립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통하여 바울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와 비교하여 전혀 손색없는 사도임을 보여줍니다. 말씀과 성령의 능력은 바울 전도의 핵심입니다. 바울이 보여준 이적은 바울의 강론을 들은 청중이 그 말씀이 진리이며 하나님은 정말로 살아 계시다는 것을 강하게 믿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드로아에서 에베소 근처의 항구도시인 밀레도까지 갑니다.

드로아를 떠난 바울과 그 일행은 두 편으로 나뉘어 바울은 홀로 앗소로 가고, 나머지 일행은 배를 타고 먼저 앗소에 가서 기다립니다. 앗소에서 함께 배를 타고 선교팀은 미둘레네와 기오와 사모에 들른 후에 밀레도에 도착하였습니다. 밀레도는 메안더(Meander) 강 하류에 위치한 항구로 에베소에서 남쪽으로 약 50km 떨어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들르지 않기로 작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에베소는 큰 도시이며 거기에 들르면 오래 지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어찌하든지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그의 행로를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밀레도에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작별인사를 합니다.  



* 본문에 나타난 성경적인 교훈이 무엇입니까?

1) 사역의 열정이 필요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던 일을 한다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더구나 그 일을 하면서 많은 열매가 있다면 더욱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로 이방인의 사도로 자기를 부르셨다는 소명의식이 철저하였습니다. 그 소명의식이 바울 특유의 열정과 합쳐지면서 주변의 방해나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주신 사명을 감당합니다. 바울은 아가야에서 시리아로 가려했으나 유대인들의 음모로 힘들어지자 육로로 왔던 길을 돌아가며 헤어진 교우들과 다시 교제를 나눕니다. 그곳에 전에 세웠던 교회를 돌아봅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교인들과 반갑게 만나고 말씀으로 양육하고 또한 작별을 합니다. 선교를 하는 바울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손님이 별로 오지 않는 가게를 지킬 때 힘이 들지 손님이 계속 밀려들면 육신적으로 다소 피곤할지라도 별로 힘들다고 느끼지 않는 것처럼 바울이 많은 곳을 다니며 흩어져 있는 형제자매들을 만나고 교제를 나누면서 힘들고 고생스럽다는 생각보다 복음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기쁨이 충만하였을 것입니다.



2) 말씀을 통한 성도들의 양육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견고하게 서 있는 성도들은 어지간한 시험이 와도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말씀 속에 담겨진 약속을 붙들면서 소망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마게도니아와 아가야지역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는 이번 여행은 다른 때와는 좀 다른 성격을 가집니다.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면서 새롭게 결신자를 얻는 것보다 이미 복음을 받은 자들이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 받는 것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짧은 기간에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여러 말과 편지로 성도들을 권면하고 양육합니다. 바울은 드로아에 있는 한 다락방에서 밤늦게까지 말씀을 열심히 전하였습니다. 더구나 죽은 유두고가 다시 살아난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가 간절히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을 것입니다. 자연히 그 다락방의 영적인 분위기는 아주 뜨거웠을 것입니다. 예수 믿게 된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세례 받은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세례는 믿는 자가 되어가는 첫 번째 과정입니다. 새가족반에 등록한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 교회의 멤버십을 가지는 과정일 뿐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을 얼마나 기뻐합니까? 지속적으로 말씀을 통한 양육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적용하는 데에 시간과 정성을 투자해야 합니다. 다른 지체들이 주 안에서 잘 자라도록 끊임없는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3) 받은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보면 바울 혼자 한 적이 없습니다. 일차 전도여행에는 바나바가 동행하였고, 이차 전도여행에는 실라가 동행하였습니다. 아가야에서 드로아로 갈 때는 여러 형제들이 동행합니다. 그 형제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고 바울과 함께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로 결단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왔다고 하셨습니다. 은혜를 받은 것으로만 그치면 안 됩니다. 받은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다른 지체들을 섬겨야 합니다. 7월 초에 대학생들 12명이 몽고와 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과 러시아로 단기선교를 갑니다. 각자가 받은 은혜를 현지 대학생들과 잘 나누기 위하여 가는 이번 여정에 많은 열매가 있도록 본인들도 기도하지만 아울러 교우들의 지속적인 기도가 필요합니다.

  

4) 주님과의 개인적인 교제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선교팀을 드로아에서 배에 태워 앗소로 먼저 보내고 혼자 도보로 34km를 걸어가서 그들을 다시 만납니다. 앗소까지 바울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의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바쁜 분이십니까? 그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로 붐빕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때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은혜를 체험하는 영적인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시는 기록이 여러 번 나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신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니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는데 예수님은 조용히 물러가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눅 5:16)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셨습니다. (마 14:23)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기 전에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셔서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눅 6:12)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전에 겟세마네에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습니다. (눅 22:44) 누가는 바울이 앗소에서 왜 혼자 갔는지 설명하지는 않지만 아마 앗소로 가면서 앞으로 감당할 일들을 구상하며 필요한 지혜를 구했을 것입니다. 바울처럼 함께 열심히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나만의 조용한 시간을 가지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 얼마나 분주하게 살아갑니까? 그러나 분주한 속에서도 여유를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엘리야처럼 세미한 가운데 들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우리 영혼이 쉼을 경험하게 됩니다.



5) 교회는 위로와 격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1절의 “권한 후에”, 2절에 “권하고,” 12절의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권하고 위로한다 라고 번역은 다르게 되어 있으나 헬라어 원문에는 ‘위로한다’ 혹은 ‘격려한다’는 뜻의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성도들이 위로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드로아에서는 바울이 밤늦도록 전한 은혜의 말씀과 죽은 유두고가 다시 살린 하나님의 능력을 인하여 교인들이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있고, 성도의 교제가 있고,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많이 나타내는 은혜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우들이 와서 마음이 평안하고 쉼을 얻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여 많은 결신자를 얻었고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자기가 세운 교회들을 나중에 다시 둘러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며 교우들을 든든하게 세웠습니다. 바울의 사역에 동참하여 섬김을 실천한 형제들이 있습니다. 바울과 같은 사역의 열정을 갖고 바울과 같이 이웃을 내 몸과 사랑하는 자세로 이웃을 섬기며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바쁠지라도 주님과의 교제를 갖는 여유를 놓치지 말기 바랍니다. 바울이 보여준 사역을 본받아 복음 안에서 깊은 교제를 통하여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사랑을 베풀며 회복을 경험하는 공동체의 일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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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장 모 임



1단계: 경배와 찬양 (Worship & Praise)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찬양을 통하여 주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2단계: 친숙해지기 (Ice Breaker)

  한 주일의 삶을 돌아보면서 감사하는 내용을 나눕니다.  지난 주 기도제목을 점검합니다.



3단계: 말씀 나누기 (Word)

사도행전 20:1-16절을 읽습니다.

1)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여행의 목적 중의 하나가 구제헌금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롬 15:25-29) 이때 바울이 혼자 가지 않고 여러 사람과 함께 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후 8:16-23)







2) 바울은 분주하게 다닙니다.(1-6절) 말씀을 전하고 죽은 자를 살립니다. (7-12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집니다. (13-16절) 바울의 모습을 통하여 어떤 것을 느끼는지 나누어 봅니다.







3) 바울의 설교를 듣던 유두고가 떨어져 죽은 사건은 설교를 듣는 성도들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각자 말씀을 듣는 자세를 한번 나누어 봅시다.







적용: 성경적 교훈을 각자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나누어 봅시다.

1) 사역의 열정이 필요합니다;  2) 말씀을 통한 성도들의 양육이 필요합니다.

3) 받은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4) 주님과의 개인적인 교제가 필요합니다.

5) 교회는 위로와 격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4단계: 목표와 계획 세우기

1. 각자의 삶을 나누며 기도의 제목을 (가정, 사업, 교회) 교환합니다.  서로를 위하여 중보기도 합니다.

  





2. 후원하는 선교사를 위하여 기도와 헌금을 드립니다.



3. 주변에 전도할 대상에 (불신자나 아직 교회를 정하지 못한 분들) 대한 정보를 나눕니다.

전도방안을 세우고 그분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