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행 18:1-11)

Author
Myung Myung
Date
2007-06-05 14:25
Views
3934
행 18:1-11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살다보면 피곤하거나 지칠 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의욕이 전혀 생기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나는 힘든데 주위 사람들은 내게 별로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는 것 같아 섭섭하게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귀찮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렸으면 하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있을 때 어떻게 하십니까?



본문에 보니 바울이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그에게 나타나심으로 인하여 그는 회심을 하고 이방인의 전도자라는 사명까지 받았습니다. 온갖 역경 속에서도 1차 전도여행을 잘 마치고 지금 2차 전도여행 중에 있습니다. 박해를 피하여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에 왔는데 흩어진 선교팀이 아직 합류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며 그의 사역을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사역이지만 계속되는 방해를 인하여 그도 지쳤습니다. 고린도에서 빨리 떠나 다른 곳으로 사역지를 옮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이 어떻게 끝납니까? 일 년 6개월을 고린도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보다 더 오래 머물면서 사역하였던 곳은 삼년을 머물렀던 에베소밖에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바울이 고린도에 더 머물게 되었을까요? 어려움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함께 하시면서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 즉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계속하게 하십니다. 꿈은 ★ 이루어진다. 2002년 한국에서 열린 월드컵 때의 구호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약속 중의 하나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택하신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본문을 잘 살펴보고 각자의 삶에 잘 적용하여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여전히 주님의 원하시는 길을 가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많이 거두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며 말씀을 전하다가 아덴의 남서쪽 80km 지점에 위치한  고린도로 갔습니다. 아테네와 고린도는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았지만 두 도시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습니다. 아테네는 문화와 지식을 대표하는 도시였고, 고린도는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정치적으로 고린도는 로마의 식민지였고, 아가야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해상 무역이 동서로 교류되고 육상 무역은 고린도를 통하여 남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언덕에는 사랑의 여신이라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어 향락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기에 고린도인 같다는 말이 방탕하다는 말과 동의어가 될 정도였습니다.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4절)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5절)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11절)

세 구절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강론하고 권면하고, 밝히 증거하고, 가르치니라.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였다는 점입니다. 상황은 다른 도시들과 별반 다른 것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방해와 반대는 여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붙여주시든지 바울에게 직접 격려하시면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4절)

1) 바울이 아굴라 부부와 함께 일하면서 말씀을 전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은 쉽지 않습니다. 말씀을 받는 사람들의 반응이 호의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사역에는 많은 동역자들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아무리 성령에 충만하고 누구보다도 많은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일꾼이지만 그에게도 동역자들이 필요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아굴라(Aquila)와 브리스길라(Priscilla) 부부를 만납니다. 그러나 이들의 만남이 누가 주선해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아굴라 부부가 왜 고린도에 왔습니까? 본인들이 원하여 온 것이 아닙니다. 쫓겨서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우연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진행됩니다. 아굴라는 본도 (Pontus) 태생의 유대인이고, 브리스길라는 로마 태생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들은 주후 52년 로마에서 유대인의 소요가 일어났을 때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다 떠나라는 글라우디오 (Claudius) 황제의 칙령에 따라 추방되어 고린도에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이주했는데 이때 바울을 만났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랍비들은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도록 생계를 유지하는 기술을 하나씩 배웠습니다. 바울은 장막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아굴라 부부도 같은 일을 하였기에 바울은 그들의 집에 머물며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장막은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염소털을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장막을 만드는 일을 했다는 것은 바울이 자비량 선교를 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바울이 자비량 선교를 한 것은 그의 사도성을 의심한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오해를 피하기 위함이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돈 때문에 왜곡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사역자들이 사례 받는 것을 반대한 것은 아닙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갈 6:6) 바울 자신도 빌립보 교인들의 재정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빌립보의 교우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복음을 전파하던 초기에,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에, 주고 받은 일로 나에게 협력한 교회는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빌 4:15)  



아굴라 부부는 바울과 함께 장막을 만들면서 바울을 도왔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이름은 바울 서신과 누가의 글에 각 세 번씩 전부 여섯 번 나옵니다. 바울의 편지 중 두 번은 아내인 브리스길라가 먼저 나오고(롬 16:3-4, 딤후 4:19), 다른 한번은 남편인 아굴라가 먼저 언급된다. (고전 16:19). 누가의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행 18:18, 26). 브리스가(Prisca)가 정식 이름이고 브리스길라(Priscilla)는 애칭입니다. 바울은 브리스가를 사용하고 누가는 브리스길라라는 애칭을 선호합니다. 로마서 16:3-4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위해 나와 함께 일하는 동역자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나를 위해 자기들의 목숨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굴라 부부는 바울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을 정도로 아주 헌신적인 일꾼들이었다고 바울이 칭찬합니다. 그들의 헌신적인 모습이 이방교회들에게까지 잘 알려졌습니다. 행 18:26절에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가 에베소의 회당에서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듣고, 따로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요즈음으로 친다면 가르치고 봉사하고 섬기는 아주 헌신적인 평신도 부부라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에서 그들이 만난 이후로 아굴라 부부는 바울의 든든한 동역자요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바울의 동역자인 디모데와 더불어 에베소에 사역하였고, 많은 이방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저는 팔로마한인교회에서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같이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기쁨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아름답게 섬김으로써 귀한 믿음의 본을 보이는 부부들이 많아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정에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에 기름진 복을 허락하십니다.  



아굴라 부부와 같이 헌신적인 후원이 있는데 사역자가 어찌 힘이 얻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하나님의 경외하는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특히 강론하면서 그들에게 권면하였다고 하는데 ‘강론한다’는 동사는 과거 습관적인 동작을 의미하는 형태를 취합니다. 바울이 시간이 나면 회당에 가서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니라 안식일마다 계속해서 꾸준하게 말씀을 전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가진 전도의 열정을 엿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5절)

2) 바울이 실라와 디모데와 함께 일하면서 말씀을 전합니다.

바울은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 내려왔지만 함께 일하던 실라와 디모데가 자기에게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와 바울의 사역에 동참하니 바울은 얼마나 큰 힘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혼자 있던 바울에게 아굴라 부부를 만나게 하신 것이나 실라와 디모데를 햡류시킨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알게 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바울은 성령의 뜨거운 능력에 붙들려 전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는 그리스도.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는데 그 메시야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전합니다. 고린도 전서 15장을 부활장이라 부르는데 거기에 복음의 요약이 잘 되어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드린 말대로, 여러분이 복음을 굳게 잡고 있으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지 않았으면, 그 복음으로 여러분도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고전 15:2-4)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도가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이 되어 복음을 전하지만 사단의 방해는 지속됩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대적하며 그의 사역을 악의적으로 비방하고 배척하였습니다. 바울이 옷을 떨면서 말합니다. 그의 행동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받지 않는 곳에서 먼지라도 떨어버리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로 인해 바울은 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무슨 뜻입니까?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십자가에 죽인 그 죄를 염두에 두고 말한 것입니다. 복음을 받고 회개하지 않으면 메시야를 죽게 한 그 저주를 받게 된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복음을 받지 않아 죄값을 치르는 것이요 책임을 다한 바울에게는 잘못이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 하였기에 이제는 이방인에게로 가겠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기를 박해하고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을 포기하고 회당을 떠나, 디도 유스도(Titius Justus) 라는 사람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는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God-fearer)이고, 그의 집은 바로 회당 옆에 있었습니다. 디도의 집에서 전도를 하였는데 풍성한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회당장인 그리스보(Crispus)가 그의 온 집안 식구와 함께 주님을 믿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전도를 들은 고린도 사람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유대인의 반대로 잠시 상심은 하였으나 그가 복음을 전함으로 많은 고린도인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 바울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11절)

3) 말씀으로 격려하십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어려울 때 힘들어할 때 임마누엘의 약속을 붙들고 힘을 얻었고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이삭이 브엘세바라는 낯선 곳에 와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하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때 이삭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창 26:24)  믿음의 시각에서 볼 때는 문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염려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두려워 말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이 생길 때 염려합니다. 문제만 바라보고 두려워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문제에서 눈을 떼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도를 하면서 나의 믿음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구해야겠고 내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고난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두려워말라 다음에 하신 말씀이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입니다. 누가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됩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처음부터 대단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부족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끈질긴 사랑으로 아브라함을 붙드시고 늘 함께 하셨기에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삭도 믿음이 연약하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면서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시면 우리들은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이삭에게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합니다.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까지 이삭을 지키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삭이 가나안에 정착하는 과정에 힘이 들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면 이삭의 자손들은 가나안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붙들었더니 과연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시면서 약속하신 복을 베푸셨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나의 고난에 대하여 침묵하시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 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은 찾아오십니다. 간섭하시고 인도하시고 우리의 길을 형통하게 해주십니다.



바울은 여러 도시에서 계속되는 유대인들의 박해와 핍박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밤에 바울이 기도할 때에 “주께서 환상가운데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잠잠하지 말라. 계속해서 말해라” 주님께서 격려하십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영혼을 구원하여 주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바울을 부르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제자들에게 임마누엘의 약속을 주셨는데 바울에게 동일한 약속을 주시고 또한 고린도에서 앞으로 전도의 열매가 많아질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아무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많다. 고린도에 구원해야 할 백성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울을 강하게 하시고 사용하시겠다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려했지만 하나님께서 고린도에 구원할 백성이 아직 많이 있다고 하셨기에 그 말씀에 순종하여 유대인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고린도에서 계속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결과 고린도에서 1년 반을 더 머물렀는데 이는 1,2차 전도여행을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기간이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성하나 도덕적으로 타락한 도시였지만 바울은 고린도에서 많은 전도의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위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이 사역하면서 반대에 부딪치고 박해를 받지만 그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말고 계속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는 없다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그 말씀에 힘을 얻었습니다. 계속하여 말씀을 전하여 고린도에게서 많은 결신자를 얻었습니다.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어떤 침체에 빠져 있습니까? 도무지 의욕이 없습니까? 바울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위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찾아오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환상을 통하거나 목사의 설교, 다른 성도들의 삶과 격려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위로하십니다. 새롭게 구성된 목장들이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새롭게 힘을 얻고 담대해지는 은혜의 장소들이 되어야 합니다.



2) 뜻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교회를 핍박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을 거꾸러뜨리셨습니다. 강렬한 빛으로 그의 눈을 멀게 하시고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건이 바울의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주님이 바울을 부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기 위함입니다. 하필이면 바울을 선택하셨습니까? 그는 유대교의 랍비로서 촉망받는 젊은이였습니다. 구약의 전문가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가졌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이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가 바로 얼마 전에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죽은 나사렛 예수임을 알지 못하였기에 그 열정을 교회를 핍박하는 데에 엉뚱하게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붙들어 변화를 시키시니 그는 어느 누구 보다도 열정적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여 사역하였기에 그의 발걸음이 닫는 곳마다 교회가 생기고 그가 쓴 편지는 성경이 되었습니다. 그가 사역의 많은 방해를 받아 힘들어 할 때 주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격려하시면서 계속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영혼 구원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기 때문입니다. 한 심령도 멸망 받지 않고 구원을 받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를 행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시면서 이 모든 계획을 이루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새롭게 구성된 목장들이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장소들이 되어야 합니다.

  

3) 동역자들을 붙여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그 만남은 결코 우연의 만남이 아닙니다. 바울이 그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고 함께 일하고 함께 사역할 때 풍성한 열매가 나타났습니다. 그 사역은 고린도를 넘어 에베소까지 확장되었습니다. 마게도니아에 있던 실라와 디모데가 합류하니 바울의 사역은 날개를 단 것 같이 더욱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가 전하는 말씀에는 힘을 있습니다. 타락한 도성, 우상숭배로 가득한 도성에 말씀의 씨가 떨어지니 수많은 결신자들이 생깁니다. 잠깐 있으려 했던 고린도에서 일년 육개월이나 머물면서 일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한 사람으로서는 당해 낼 수 없는 공격도 두 사람이면 능히 막아낼 수 있으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전 4:12)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연합을 통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새롭게 구성된 목장들이 귀한 교제를 통하여 목장 식구들이 주 안에서 하나가 되고 주님의 사업을 함께 감당하는 동역자들로 만들어지는 장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바울과 함께 하시면서 위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뜻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동역자들을 붙여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의 현장에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에 고난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주님을 믿음으로 의지하고 소망 중에 주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지치고 낙심한 우리를 붙드십니다. 임마누엘의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를 향한 당신의 뜻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는 성도들입니다.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 나가도록 믿음의 사람들을 붙여주십니다.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저희들에게 복음의 보배를 담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같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헌신의 사람들, 충성스런 청지기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