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알지 못하는 신에게 (행 17:16-34)

Author
Myung Myung
Date
2007-05-27 16:40
Views
3900
행 17:16-34  알지 못하는 신에게



얼마 전에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 CD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내용인즉 자기가 목회를 시작하던 50년대 말과 60년대는 한국이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웠다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조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한 곳은 서울의 변두리 지역인지라 당장 생계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동네 분위기가 아주 험악하였습니다. 마음이 닫힌 사람들에게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라는 말을 전해보았자 반발만 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지옥이다. 남편은 날이면 날마다 술 먹고 주정을 하고 주먹을 휘두른다.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기는커녕 깡패로 소매치기로 살아간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당장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죽고 나서 천국보다 당장 만져지고 보이는 복을 달라고 하였답니다.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소망임을 깨달았다고 하였습니다.



살다 보면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고 공식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고난의 이유가 죄 때문에 올 수 있고 믿음의 연단을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는 말은 들었지만 막상 그러한 고난이 내게 닥쳐오고 그 기간이 길어질 때 우리는 지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과연 살아계시는가 하나님은 과연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가 의심을 하면서 신앙의 기초가 흔들리게 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성령님이 주시는 지혜입니다. 우리 모두는 상황을 극복하고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돌 때 하나님은 왜 침묵하라고 했습니까? 힘들다고 어렵다고 위험하다고 떠들면서 입방정을 떨지 말고 눈으로는 하나님의 궤를 바라보고 귀로는 제사장들이 부는 양각 나팔 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께 계속하여 초점을 맞추라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교훈을 줍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일어난 일을 적고 있습니다. 바울이 베뢰아에서 전도하면서 많은 열매를 거두었는데 데살로니가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방해를 하는 바람에 실라와 디모데를 그곳에 두고 바울만 아테네에 갔습니다. 아테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아직까지도 철학계에 영향을 미치는 현인들이 많이 배출한 곳입니다. 물론 바울이 아테네에 왔을 때는 과거의 전성기는 지났지만 헬라 문화의 중심지로서 영향력은 여전하였습니다. 또한 지성과 문화를 자랑하는 아테네는 우상이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전도팀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도시를 둘러보았습니다. 바울이 아테네로부터 받은 첫 인상이 어떠합니까?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격분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회당에서 유대 사람들과 이방 사람 예배자들과 더불어 토론을 벌였고, 또한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날마다 토론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구약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합니까?

이 문제를 바울이 어떻게 푸는지 살펴보면서 우리의 삶에 적용하기 원합니다.



바울이 아테네를 방문한 것은 그저 수많은 전도자 중의 한 사람이 한 도시를 방문한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2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헬라의 철학 사상과 만나면서 처음으로 변증할 기회를 갖게 됩니다.



아테네 사람들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별로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루스드라 사람들과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다만 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아테네 사람들은 세상적으로는 유식한 사람들, 소위 지성인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느 도시에 가든지 제일 먼저 회당을 방문하여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아테네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바울이 먼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고,  만나는 사람들과 날마다 토론을 벌이는데 그중에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몇몇은 "이 말쟁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가?" 하며 비꼬았고 또 몇몇은 "그가 외국의 낯선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다" 면서 호기심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예수를 전하고 부활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말쟁이로 번역된 spermologos라는 단어는 ‘씨앗을 줍는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씨앗을 주은 다음에 집에 가져와 분류도 하지 않고 여러 곡식이 뒤섞인 추수를 거두는 가난한 농부들을 묘사합니다. 철학자들에게 바울은 일관성 있는 체계 없이 여기저기서 조금씩 따다가 말하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의 사역의 특징:

1) 말씀 전도: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2) 능력 전도: 성령의 능력으로 이적을 행합니다.

3) 받는 사람들의 상황에 따라 메시지의 변화가 있습니다.

구약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전도 내용을 유연하게 바꿉니다.



바울이 1차 전도 여행 중에 루스드라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은 유대인들이 별로 살지 않았기에 회당이 없었고 우상을 숭배하는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고쳤는데 그것을 보고 무리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들로 오해하고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상황을 도리어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구약이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기에  유대인 회당에서 전하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접근하였습니다. 구약의 언약이나 메시야를 언급하지 않고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시면서 음식과 기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하나님임을 강조면서 능력을 행한 자신들을 신으로 섬기려는 무리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갔습니다. 아레오바고는 아크로폴리스 광장 서쪽에 위치한 작은 언덕으로 당시 아테네 사람들이 주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교훈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아테네 사람과 거기에 살고 있는 외국 사람들은 무엇이나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일로만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 바울은 유연한 전도전략을 가집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듣기 위하여 아레오바고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복음을 전하기에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그런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구약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에게 출애굽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에 대하여 말해보았자 알아들을 리가 없습니다. 메시야의 구원에 대하여 말해 본들 감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에게는 유연한 전도 전략이 필요하였습니다. 복음을 받는 자들의 필요가 무엇이고 관심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습니다.



바울은 항상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사역했습니다. 바울의 9편의 설교 가운데 아레오바고 설교만이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을 위하여 행해진 것입니다. 바울은 아테네의 상황과 그곳 사람들의 관심사에 맞게 설교를 시작하지만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아테네를 방문하면서 그가 관찰한 내용을 가지고 변론을 시작합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습니다. 종교심이 많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볼 때는 종교를 향한 열심히 있다는 뜻이고 부정적으로 볼 때는 지나치게 미신적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다니면서, 여러분이 예배하는 대상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는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그 대상을 알려 드리겠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1)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생명을 유지하는 분입니다.  

헬라인들은 신을 많이 섬깁니다. 그러나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 한분만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또 하나님은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섬김을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창조주와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우리가 할 것은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사람들과 가까이 계신 분입니다.

헬라의 신관에 따르면 헬라의 신들은 인간의 일에 무관하여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예배와 헌물은 받지만 인간들의 고통에 동참하지 못합니다. 헬라 사람들은 신과 인간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아테네인들은 자기들이 다른 민족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우월감이 잇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인류가 공통된 조상을 지으셨으며 민족의 연대와 거주의 한계가 하나님의 통제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특별한 민족을 편애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찾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잠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사 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우리와 매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그분의 능력에 힘입어 살아가야 합니다.



3) 하나님을 인간의 손으로 만든 우상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헬라 시인인 에피메니데스나 아라투스가 쓴 시를 인용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다' 하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우리가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고,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고, 민족들을 다스리시고, 자신을 계시하셔서 그분을 구하도록 하셨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가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만들어 낸 것들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우상이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들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보다 더 우선순위를 가지고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을 지배하려는 보이지 않는 우상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우상을 아울러 섬길 수 있습니다. 그 우상이 취미, 도박, 정욕, 마약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녀나 일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면 ‘알지 못하는 신’에게 끌려 다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대를 종교적 다원주의 세대라 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행 4:1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성경은 말하지만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전하는 기독교를 편협하다고 비판합니다.  

모든 종교에는 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다고 관용을 베푸는 듯한 자세를 취합니다. 자기들이 하나님보다 더 똑똑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2000년 전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 7:13-14)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전에는 각종 이방신을 섬기는 죄를 참으셨으나 이제 더 이상 우상 숭배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기에 우리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지의 시대에는 그대로 지나치셨지만,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정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사람을 내세워서 심판하실 터인데,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셨다고 합니다. 부활이 심판의 근거라고 합니다. 인류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지금 만유를 통치하시는 신이기 때문에 회개하고 그분에게 나올 것을 촉구합니다. 바울은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간접적으로 전합니다.



* 바울의 사역은 성공적입니까?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보통 호의적인 반응을 가진 무리와 적대적인 반응을 가진 무리로 나뉩니다. 아테네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설교가 여기까지 이르자 무리들 사이에 소요가 생겨 더 이상 전할 수 없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바울을 통하여 전도를 받은 사람들의 반응이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조롱하는 사람들, 바울의 말을 나중에 다시 듣고 싶다고 하며 결단을 미루는 사람들, 그리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의 전도를 받은 사람들 중에 몇몇 사람은 바울 편에 가담하여 신자가 되었습니다. 숫자적으로 보면 아덴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한 열매가 신통치 않은 것 같습니다. 과연 아테네에서 사도 바울의 사역이 실패한 것일까요? 회심한 사람의 숫자만 보고 바울의 사역이 성공이냐 실패냐를 판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바울의 아테네 사역이 실패했다고 보는 사람들은 고린도 전서 2장 2절을 근거 삼아 그러한 논리를 폅니다. 바울이 회당이나 광장에서 아테네 사람들과 더불어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전서에는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즉 바울이 아테네에서 논쟁을 중심으로 사역을 했더니 별로 열매가 없었기에 자기의 사역의 실패를 인정하고 다시는 논쟁을 하는 등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겠다는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성령 충만한 바울도 잘못 생각하여 비효율적인 사역을 했습니까? 그가 설교한 결과 몇몇의 유력한 사람들이 회심하였습니다. 그 가운데는 아레오바고 법정의 판사인 디오누시오도 있고 다미리라는 부인도 있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나중에 더 이야기하기를 희망하였지만 결단을 연기하는 정도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희롱하며 기독교의 독특성을 비웃기도 했는데 이는 헬라 사상에 젖어 있어 전혀 낯선 부활의 교리를 잘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후에 아테네의 유명한 거리 중에 ‘사도 바울의 거리’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이 생겼습니다. 아덴에서 바울의 사역은 결코 실패라 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오순절 마가의 어머니 다락방에 있던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함으로 초대교회가 시작되었다. 베드로나 바울의 사역은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진행되었기에 풍성한 열매들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행 9:17-22,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 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은 직후부터 바울은 바로 성령에 충만함을 받아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바울의 아테네에서의 사역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사역이 틀림없습니다.

  

본문은 물론 바울의 선교 사역과 관련되어있지만 우리의 삶의 현장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열매 맺는 삶을 위하여 필요한 성경적인 원리를 발견합니다.  



바울은 아테네에 온통 널려진 우상을 보고 흥분은 했지만 정작 복음을 전하게 되었을 때는 듣는 이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지혜롭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전하는 내용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성경이나 신앙의 배경이 없는 이들에게는 금방 의식할 수 있는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종교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하나님임을 소개하였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전도의 센스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종교성을 인정하고 그곳 시인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폭넓은 접근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의 전도열정과 더불어 복음을 전할 때의 지혜를 찾아보게 됩니다. 복음전파는 영적인 전투이므로 말씀으로 강하게 도전해야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상대방을 이해하며 부드럽게 공격할 필요도 있습니다. 이 둘을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메시지의 내용을 일관성 있게 유지했지만 적용의 과정에서 복음을 받는 지역과 청중들의 상황에 맞도록 적절한 변화를 주었습니다. 복음이라는 놀라운 보배를 상황이라는 질그릇에 담아 효과적으로 전달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바울과 같은 열정과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주님의 향한 열정과 어떻게 하면 주님의 뜻대로 섬길 것인지 지혜가 동시에 필요합니다.



1) 항상 성령에 인도되는 삶

2)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섬기는 삶

3) 열정과 지혜가 균형을 이룬 삶



효과적인 증인이 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하신 일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군대귀신 들린 청년을 온전하게 치유하자 청년은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였습니다. 마가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중에 데가볼리 지방에 오셨을 때에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께로 몰려들 수 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온전해진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가 경험한 예수를 열심히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시간아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자기를 통하여 하신 일이 너무나 크고 놀랍고 생생하였기에 그 사실을 담대하게 증거 하였습니다. 그 청년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수고한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에피쿠르스 학파나 스토아 학파의 가르침을 아침마다 묵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가르침은 한때를 풍미했으나 더 이상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거나 영향력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은 지난 20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시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하나님의 많은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문제는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판단하는 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주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가에 달려 있습니다.

  

바울은 다신론을 주장하는 아테네에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전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샌디에고나 LA는 아테네와 그 도시적인 분위기가 아주 비슷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적인 목표의 성취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했던 것처럼 오늘날도 성도들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어떻게 전합니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에서 전해야 합니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진 삶의 필요나 관심을 접촉점으로 삼아 주님을 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2:13-14) 그러려면 바울처럼 항상 성령에 인도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전하려는 열정과 지혜가 균형을 이룬 삶을 살아야 합니다. 먼저 각자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면서 구원을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전도의 열매를 많이 거두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