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역경 속에 맺은 열매 (행 17:1-15)

Author
Myung Myung
Date
2007-04-29 22:14
Views
4206
행 17:1-15  역경 속에 맺은 열매



어제 뉴욕에 있는 제 아들이 전화를 했습니다. 전에는 별로 전화하지 않다가 무엇인가 아쉬운 것이 있을 때에만 전화하곤 했는데, 요즈음은 신앙적인 내용을 가지고, 혹은 좋은 설교나 세미나를 참석하고 나서 흥분하여 전화걸 때가 많습니다. 지난 주 어떤 교회에서 도시 선교를 주제로 하는 business man들의 세미나에 참석하였는데 마침 특별강사로 자기가 현재 다니고 있는 Redeemer 교회의 담임목사인 Tim Keller가 와서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야기인즉슨 요즈음 뉴욕의 영적인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뉴욕에 오는 것은 대개 세상적으로 성공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다 보면 경력을 쌓고 돈도 많이 버는 것이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이제 적지 않는 New Yorker들의 생각이 바뀌고 영향력 있는 크리스천들을 중심으로 영적 부흥이 일어나고 있고 도시 선교의 길이 열리고 있다고 합니다.



바울 당시의 로마제국에도 이미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는 큰 도시들이 있었습니다. 그 도시에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여러 민족들이 섞여 살았습니다. 바울은 선교전략을 보면 그 지방의 수도나 제일 큰 도시를 방문합니다. 만약 바울이 북아프리카 모로코에 가서 몇 동안 언어를 배우고 몇 년 사역 하다가 또 다른 동네에 가서 몇 년 동안 언어를 배우고 몇 년 사역하고 이런 식으로 했더라면 오늘날과 같이 기독교가 전세계적으로 전파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시아나 아프리카 오지에 선교하지 말자는 취지는 아닙니다. 그런 사명을 받은 선교사들은 가야 합니다. 그런 분들을 도와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큰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니 그때 믿는 사람들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사례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뉴욕이나 LA와 같은 미국의 대도시마다 전세계 사람들이 모여와서 삽니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복음을 전하여 믿게 하고 그들을 자국민을 위한 선교사로 훈련시키면 외국선교사들이 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복음 전파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루마니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소수민족이 헝가리인들입니다. 루마니아는 헝가리인의 정체성을 없애기 위하여 공공장소에서 헝가리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갖은 핍박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핍박이 강해질수록 헝가리인들은 더욱 헝가리인의 정체성을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10년 동안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미국에서 들어온 M-TV 프로그램에 젊은 헝가리인들이 완전히 빠져들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지켜왔던 헝가리인의 정체성이 너무나 쉽게 무너지고 미국의 문화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자녀들은 더 이상 부모세대들이 붙들었던 가치관이나 문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세속의 영향력이 그들을 강타하고 있습니다.



이제 크리스천들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 선교의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믿음에 든든히 서고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있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영혼 구원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크리스천들이 각 분야에서 탁월함을 나타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기독교적인 기준에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기준에서 평가하게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고 주목할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의 영향력이 그만큼 커집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 탁월함에서 나오는 영향력이 우리 주변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저희 교회가 이런 역할을 감당하기 원합니다. 훈련을 받는 것도, 교회당 건축을 하는 것도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 주님의 제자를 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를 떠나 2차 선교 여행을 계속합니다. 사도행전 17장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복음의 불모지인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지 보여줍니다.



바울의 사역은 계속 진행됩니다.

그동안의 바울의 사역을 보면 결코 순탄하지 않습니다. 가는 곳마다 방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이방인의 사도라는 사명감이 한 번도 약해지거나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역은 계속됩니다.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는 심한 매를 맞고 아직 상처가 제매로 아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습니다. 행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명감에 불타는 바울의 열정적인 자세를 보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를 보면 그가 그 지역에서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사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살전 2: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데살로니가에서 쫓겨났을 때 바울 일행은 어둠을 타서 서쪽으로 85km 떨어진 베뢰아로 갑니다. 거기서도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다시는 회당에 들어가지 말자 할텐데 바울의 선교 전략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런데 이 산기슭에 있는 도시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를 베푸십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과는 달리 열린 마음으로 바울의 말씀을 받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은 계속됩니다.



때로 우리의 상황과 형편이 좋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지치고 영적, 정신적 침체를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셨습니까? 저 문제만 아니었다면 내가 더 행복할 텐데 생각지는 않습니까? 이제 살만해졌는데 갑자기 몸에 문제가 생기고, 잘 나가던 사업에 문제가 생기고,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가시가 있으면 물론 아픕니다. 괴롭습니다. 죄로 인하여 생긴 가시는 회개하면 용서함 받고 즉시로 없어지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어서 성도들에게도 심어주시는 가시는 금방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가시는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계속 거하게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고난을 허락하심은 우리를 계속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감당할 만하니 시험을 주십니다. 이길 수 있는 시험만 주십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서도 쉽게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연약하지만 주님이 능력 주시니 감당합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주님이 채워주시니 주의 일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받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내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려고 일어날 때 능력을 주시고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 바울은 전도전략은 변함이 없습니다.

“자기 관례대로” 어느 지방을 방문하면 큰 도시로 가고 그곳에 있는 유대인 회당을 먼저 방문하는 바울의 전도전략은 변함이 없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소아시아 지방이나 빌립보는 유대인 회당이 없어서 이 선교전략을 제대로 실천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마게도니아의 수도인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정치와 상업의 중심지로서 발칸 반도의 복음의 전진기지로서 아주 좋은 곳입니다. 그곳은 큰 도시인지라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기에 그곳을 들릅니다. 바울은 회당을 복음 증거의 장소로 사용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회당에서 메시야의 오심과 사역에 관한 구약 예언이 읽혀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회당에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들(God-fearer)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실 때도 회당에서 권세 있는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본받는 사도 바울도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합니다. 전하되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증거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와 받는 자가 하나가 될 때 많은 열매를 거둡니다.

바울이 평소의 습관대로 데살로니가의 회당에 가서 세 주간 동안 안식일마다 성경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과 토론하였다. 바울이 어떤 식으로 그들에게 접근합니까?



먼저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지 살펴봅니다.

눅 24:44-47,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예수님은 율법서와 선지서와 시편에서 메시야와 관련된 구절들을 토대로 논리를 전개하며 그 메시야가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바울은 네 단계로 그들에게 접근합니다.

1) 강론합니다.

회당은 전직 랍비인 바울에게는 아주 익숙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구약 성경에서 메시야에 관한 구절들을 가지고 회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논리적으로 가르칩니다.

2) 설명합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정치적 해방, 경제적 번영 번영과 사회적 안정을 주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던 유대인들을 행하여 메시야가 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는지를 자세히 풀어 설명합니다.  

3) 증명합니다.

구약에 예언된 분이요, 지금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예수가 바로 약속된 메시야 즉 그리스도인 것을 증명합니다. 자신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증인인 것을 말하고, 자기 외에도 많은 사람이 부활의 증인인 것을 말해주었을 것입니다.

4) 선포합니다.

자기가 전하는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그분을 구주로 받을 것을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복음의 원리는 죽음으로 사는 것. 십자가의 죽음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문제는 내가 안 죽으려고 할 때 생깁니다. 자기는 바뀌지 않으면서 자기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서 다른 사람이 바뀌기만을 원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내가 죽을 때 주님이 나를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고난 가운데 성도들은 소망을 가집니다. 이 소망의 이유를 방황하는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바울이 베뢰아에 가서 그곳 회당에 들러 복음을 전할 때 베뢰아 유대인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1)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보다 더 고상한 인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2)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모하는 만큼 받게 되어 있습니다.

3)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는 사도 바울이 전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고 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전하는 말을 듣고, 돌아가서 그 설교가 과연 성경에 근거한 것인지를 상고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너무 비판적인 자세를 가지고 듣는 것도 문제이지만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입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결론적으로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들이 하나가 될 때 진리의 깨달을 수 있고 은혜를 충만하게 체험합니다.

  

복음 전파에 대한 반응은 언제나 두 가지입니다.

1) 복음에 대하여 호의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도하는 중에 많은 고난이 있었으나 그런 속에서도 풍성한 전도의 열매를 거둡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몇몇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많은 이방인들 그리고 적지 않은 수의 귀부인들이 바울이 제시한 복음을 들으면서 믿게 됩니다. 베뢰아에서는 바울 일행이 환영을 받았는데 유대인들까지 바울 일행을 영접했습니다. 베뢰아의 유대인들 가운데서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겼을 뿐 아니라, 지체가 높은 헬라 여자들과 남자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습니다.

  

2) 복음에 대하여 적대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사역하는 바울이지만 그럴지라도 그의 사역은 결코 평탄하지 않습니다. 한 선교지에서 다른 선교지로 옮길 때 모든 교우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환송을 받으면 간적은 별로 없습니다. 대개의 경우 쫓겨서 다른 지역으로 갔습니다. 복음을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배척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복음전파를 사단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하지 않으면서 남이 하면 공연히 심술이 날 때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자기들은 복음을 거부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는 것을 보자 시기심이 생겼습니다. ‘괴악한 사람들’이란 할 일이 없어 시장 근처를 배회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거리의 불량배들을 모아다가 소요를 일으켜서, 성을 혼란에 빠뜨리고, 바울의 전도팀이 머물던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 일행을 끌어다가 군중 앞에 세우려고 하였으나 바울은 이미 피신한 후였습니다. 대신 야손과 다른 믿음의 형제 몇 사람을 성읍의 관원들에게 끌고 가서, 그들이 바울 일행을 숨겨 준 죄로 고소했습니다. “세상을 소란하게 한 그 사람들이 여기에도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야손이 그들을 영접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거슬러 행동을” 한다고 합니다. 그들의 행동은 예수님을 못 박을 때 무리가 보인 행동을 연상하게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무리를 선동하여 소동을 일으키고 예수를 왕으로 인정하느니 차라리 가이사를 왕으로 모시는 백성이 되기 원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악의로 한 말 가운데도 중요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합니다. 어떤 경우에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람이 됩니까?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과 세상의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갈등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믿음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 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삶의 주관자가 되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인생의 운전대로 잡고 자기 원하는 대로 가려고 합니다. 주님께 맡기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주님을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읍의 관원들은 야손과 그 밖의 사람들에게서 보석금을 받고, 그들을 놓아 주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밤을 이용해서 데살로니가를 빠져 나와야 했습니다. 하지만 디모데는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데살로니가를 나와 베뢰아에서 일행과 만났습니다. 마귀의 공격은 집요합니다. 바울이 베뢰아에서도 복음을 전한다는 소식을 듣자 거기까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극성스럽게 좇아와 무리를 선동하며 복음전파를 방해하며 소란을 피웁니다.



세상은 사도 바울 때나 지금이나 복음에 대하여 여전히 비호의적입니다.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더라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사람이라고 하여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가려 뽑았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 나의 말이나 행동 가운데 은근히 다른 성도나 교회를 시기하는 것이 없습니까? 약속의 땅 가나안에도 기근은 있었습니다. 주님의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에도 고난은 있게 마련입니다. 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복음 전파뿐 아니라 주의 일을 하는 데에도 우리를 낙심시키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인하여 분개하거나 포기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의 성숙함을 달아보시려는 주님의 의도인 것으로 알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기근이 올지라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주님을 인하여 혹은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다가도 시련은 있게 마련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임하는 고난은 믿음의 연단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주님의 위로와 확신을 경험해야 합니다.



* 믿음의 형제들이 바울의 사역에 동참합니다.

복음 전파 사역은 바울이나 그의 전도팀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바울을 돕고 섬기는 것도 복음전파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소동을 일으키자 바로 그 날 밤에 그리스도인 형제들은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을 대적하던 유대인들이 바울이 베뢰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와 군중들을 선동하여 소동케 했습니다. 실라와 디모데는 며칠 더 머물면서 베뢰아 교회의 성장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곳 형제들의 도움으로 해안으로 빠져 나와 아덴으로 향하는 배를 탔습니다. 베뢰아의 형제들은 바울이 아덴에 안전히 도착할 때까지 바울을 떠나지 않고 동행했습니다. 아덴에 안전하게 도착하자 바울은 자기를 호송한 사람들에게 베뢰아에 돌아가면 실라와 디모데를 속히 아덴으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 열두 제자들 외에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예수님의 사역을 도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눅 8:3절을 보면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성경의 여인들의 이름이나 행동이 기록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사역을 기억하신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도망가고 전하고 도망가고. 별로 열매를 거두지 못할 것 같은 상황인데도 지나고 보면 하나님께서 많은 열매를 거두게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불과 삼주밖에 머물지 못한 데살로니가 교회였지만 데살로니가 전서를 보면 그 교회는 아름답게 성장하였습니다. 살전 1:3, “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의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살전 1:8,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통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널리 퍼졌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의 믿음에 대한 소문이 곳곳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여러분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살전 3:7-8, “형제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여러분의 믿음으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게 서 있으므로 이제는 우리가 살 것 같”다고 간증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믿음의 씨를 부리기만 하면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환경을 탓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약함을 통하여 도리어 복음의 능력이 크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몰라주어도 주님만 아시면 된다는 자세로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영혼 구원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항상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깊이 상고하고 묵상하고 적용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복음 전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성령의 지혜와 능력에 힘입어 거룩한 영향력을 세상에 끼침으로 잃어버린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21세기의 추수꾼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