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부활의 증인 (2) (마 28:11-20)

Author
Myung Myung
Date
2007-04-15 14:12
Views
3546
마 28:11-20 부활의 증인(2)



세상에는 쉽게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들이 많습니다.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누가 죽였는가? 박정희대통령의 암살은 김재규의 우발적인 행동이었는가 아니면 미국이 배후에 연관되어 있는가?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한 배후에는 누가 있는가? CIA or CUBA. 분명히 사실은 있을텐데 좀처럼 단서가 나타나지 않아 사건들이 미궁에 빠져 있습니다. 본문에도 보니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며 전하려는 그룹과 부활 사건을 어떻게 하든지 감추고 덮으려는 그룹이 등장합니다.  한 그룹은 진짜 증인들이고 다른 그룹은 진짜인 척하는 가짜 증인들입니다. 한 사건을 놓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진리는 하나인데 마귀는 진리 비슷한 것을 만들어 퍼뜨리며 사람들을 헷갈리게 합니다. 분별력이 없으면 엉뚱한 것을 믿고 엉뚱한 것을 따르게 됩니다.



* 종교지도자들은 군병들에게 거짓증인이 되라고 유혹합니다. (11-15절)

여인들은 천사를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들었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직접 보았습니다. 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여인들이 부활의 소식을 전하러 가는 동안 두려움에 떨던 경비병들은 대제사장에게 가서 새벽에 자기들이 목격한 것을 그대로 보고합니다. 그들은 지진을 경험했고 천사를 보았고 그가 돌을 굴리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그 소식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을 것입니다. 염려하던 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비상대책 회의가 열립니다. 그러나 그 회의는 회개를 위한 모임이 아니라 은폐를 위한 모임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이 메시야를 죽였다고 하는 여론이 생길까봐 두려워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힘을 얻을까 두려워합니다. 로마 군대에서 경비를 서는 자들이 자기들의 임무를 충실히 하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면 중죄에 해당하여 문책을 받아야 합니다. 대제사장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이 거절하기 어려운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가룟 유다에게 은 삼십을 주어 예수를 체포했던 종교지도자들은 경비병들에게“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 하여 갔다”고 하라면서 그 대가로 많은 돈을 주겠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총독이 이 사실을 알고 문책을 하게 된다면 자기들이 알아서 잘 해결해 줄 테니 경비병들은 그저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가지고 갔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라고 합니다. 파수꾼이 잠들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는지 어떻게 압니까? 만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가는 것을 보았다면 왜 중무장한 경비병들이 그 제자들의 행동을 막지 못했겠습니까? 대제사장들이 꾸며낸 말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뇌물을 받고 거짓 증언하는 군병들, 부활의 소식을 감추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함께 죄의 사슬에 매여지는 것을 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헛소문이 마태가 복음서를 쓸 때까지 널리 알려졌습니다. 사단의 사주를 받은 무리들은 은밀하게 행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들의 모의를 아십니다. 그 사건이 벌어진 후 2000년이 흘렀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그들이 거짓으로 소문을 퍼뜨린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만 이 사실이 기록된 이유는 마태복음의 독자들이 주로 유대인이요 마태는 이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의 시신을 제자들이 훔쳐갔다는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이 부활함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는 모의가 있고, 뇌물이 전해지고, 헛소문이 퍼지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에서 앞으로 참증인의 역할을 담당하게 될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곳에 사단의 방해도 있게 마련입니다. 진리의 씨앗이 뿌려지는 곳에 사단도 진리 비슷한 가라지를 뿌립니다. 그러나 마귀가 어떤 방해를 하든지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여전히 진행됩니다.



* 제자들은 함께 갈릴리로 갑니다. (16-17절)

지난 한 주간동안 제자들에게 너무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종려주일만 해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호산나 외치던 무리사이를 누비며 의기양양하게 예수살렘 성안에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못 되어 예수님은 유대인 관원들과 로마당국자들에 의하여 재판을 받고 십자가형에 처해진 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났습니다. 삼년동안 열두 명이 예수님과 더불어 동고동락하였는데 제자의 수는 열하나가 되었습니다. 갈릴리를 떠날 때에는 예수님과 더불어 갔으나 갈릴리로 돌아올 때는 예수님 없이 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갈릴리까지 보통 삼일 길입니다. 그 삼일 동안 제자들은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았을 것입니다. 흥분과 아쉬움과 부끄러움이 교차되는 삼일이었습니다. 어떤 제자들은 여인들을 통하여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여 어서 갈릴리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삼일 길이 지루한지 몰랐을 것입니다. 또 다른 제자들은 예수를 배반한 것을 인하여 마음에 무거운 부담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열한명의 제자들이 제 갈 길로 가지 않고 함께 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흩어지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함께 있었을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을 고치시고 귀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갈릴리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모습이 또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교인들을 보더라도 믿음에 굳게 서서 신앙생활 하는 분들이 있는가하면 겨우겨우 신앙 생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언제나 자신 있고 웃음을 띠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상황에 눌리어 항상 어두운 표정을 짓거나 자신 없이 행동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할 수 있어, 길이 열릴거야 매사에 긍정적인 말을 하며 주위 사람들을 격려하고 소망을 주는 분들이 있는가하면 안 돼, 못해, 없어 부정적인 말을 앞세우며 주위까지 답답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인지라 말도 많고, 주장도 많고, 갈등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영광, 주 안에 하나됨이란 공동목표를 가지고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고 섬기며 나아가야 합니다. 어려움은 있으나 끝까지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나가 되어 함께 나아가는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 갈릴리는 제자들에게 화해와 회복의 장소입니다.

예수께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필이면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기 원하십니까?



1) 제자들을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을 배반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체포를 당하실 때 결단코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던 제자들은 다 도망쳤으며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동안 어느 제자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거나 예수님을 돕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십니다. “내 형제들”중에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도 물론 끼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예루살렘에서 만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인한 곳이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곳입니다. 그들의 부족함이 많이 드러난 곳입니다. 반면에 갈릴리는 가룟 유다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의 고향입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을 처음 부르신 곳이요, 그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시면서 많은 추억이 깃든 곳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 책망하고 벌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통하여 그들을 회복시키시고 주님이 원하시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원하십니다.



2) 제자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갈릴리는 예루살렘에 비하여 이방인들과의 교류가 많은 곳입니다. 많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마 4:15-16,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성전과 종교지도자들의 본거지가 있는 예루살렘에서 볼 때 갈릴리는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종교지도자들이 무시하던 갈릴리에서 도리어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세계선교의 사명을 주십니다.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참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18-20절)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16하)

마태는 그 장소에 대하여 특별한 언급은 없으나 제자들은 이미 그 장소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리에 가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에 이르렀더니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경외감을 가지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그런데 17절에 보니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의심한다는 말은 주저하였다 망설였다는 뜻입니다. 왜 주저하였을까요? 자기들이 보는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인지 확신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다시 사셨는지 확신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환상을 보는지 실제 인물을 보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도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말을 하였을 때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25절) 예수님의 말씀이나 제자들의 증거보다 자신의 눈과 손을 더 의지하겠다는 불신앙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이 그의 앞에 나타나시자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라는 위대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요 20:24-29) 그렇다면 의심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열한 제자중의 일부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입니까? 다른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에 오기 전 예루살렘에서 이미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갈릴리에 와서 또다시 의심한다는 것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의심하던 이들은 누구일까요?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난다는 소문이 무덤에 갔던 여자들을 중심으로 퍼졌을 것입니다. 그 장소도 알려졌을 것이므로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이 16절에 나오는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모였을 것입니다. 고후 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정황적으로 볼 때 50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는 바울의 증언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갈릴리의 산에서 의심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열한 제자라기보다는 평소에 예수님을 알고 따르던 갈릴리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요한이나 누가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여러 가지 에피소드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제자들에게 앞으로 감당해야 할 사명을 전하시는 것만 적고 있습니다. 18절부터 20절은 Great Commission 즉 위대한 사명이라고 불립니다. 그 위대한 사명은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39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Great Commandment 즉 위대한 계명과 더불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기억하고 지켜야할 신앙생활의 핵심내용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권세를 힘입어 세상 모든 족속을 제자를 삼아 세례를 베풀고 예수의 삶을 가르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제자들에게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에 이미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 사역을 위임하실 뿐입니다. 그 명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오늘날의 모든 성도들이 여전히 귀담아 듣고 실천해야 합니다.



1.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18절)

복음서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서는 내용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는 누구신가 기독론적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구원론적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주간 동안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처음부터 집행했던 백부장은 어떤 결론을 내립니까? 진실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본문에 보니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이미 다니엘은 메시야가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가지고 만물을 다스리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단 7:14) 빌립보서에도 보니 예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전과는 다른 분입니다. 이제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셨습니다.



2.  모든 족속을 예수님의 제자들로 만들어야 합니다. (19-20상)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19절부터 20절 상반 절까지 나오는 동사 중에 본동사가 하나 있고 분사가 세 개 나옵니다. 제자를 삼으라는 동사가 본동사요, 가고, 세례를 주고, 가르치는 것은 본동사를 수식하는 분사로 되어 있습니다. 제자를 삼으라는 동사는 과거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제자들을 삼으라는 뜻입니다. 주어진 표현을 통하여 어떻게 제자를 삼는지 살펴봅니다.



1) 가야합니다.

구약의 일반적인 구조는 ‘오라’입니다. 모든 것의 초점이 예루살렘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봉헌하면서 이방인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주께서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으며 간구하는 것을 그대로 다 들어 주셔서, 땅 위에 있는 모든 백성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주님을 경외하게 하시며, 내가 지은 이 성전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곳임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왕상 8:44)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방인들까지 사랑하신다는 생각을 가진 유대인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구약에서는 특이하게 ‘가라’는 명령이 나오는 책이 있습니다. 요나서 1장 2절을 보니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에 대고 외쳐라” 그 명령을 받고 요나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하나님의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않고 도망칩니다. 지금의 이라크인 동쪽 니느웨로 가기는커녕 정반대방향인 서쪽 그것도 제일 먼 다시스, 지금의 스페인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원수 나라인 바벨론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이면 바벨론 사람들입니까? 그놈들은 멸망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반응은 어떠하십니까?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욘 4:11-12)



이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갈 것을 명령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가 이 말씀에 처음부터 순종하여 가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다려도 가지 않으니 스데반의 순교 사건을 통하여 그들을 사방으로 흩으셨습니다. 비소소 믿는 자들이 사마리아, 안디옥,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유럽으로 가면서 가는 곳마다 복음이 전파하였습니다. 제자들이 가야할 대상은 특정 민족이 아니라 모든 민족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유대인들도 포함이 됩니다. 롬 10:14-15하, “저희가 믿지 않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하나님이 전도자를 보내어 불신자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게 하여 사람들이 듣도록 하십니다. 우리도 부족하지만 선교사역에 열심히 참여하는 교회가 되어 주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일꾼들을 파송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이 명령은 반드시 복음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나라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이나, 일터나, 우리의 이웃에 아직도 주님을 전혀 모르거나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구세주도 되심을 삶 속에 보여주고 증거해야 합니다.

  

2)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전도를 받고 복음을 듣는 자 중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믿음을 갖게 되고 그런 자들은 이미 믿은 성도들 앞에서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요 구세주로 고백하며 하나님께 헌신의 삶을 살 것을 다짐하며 세례를 받게 됩니다. 특히 주님은 이제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십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를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를 가지게 되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게 됩니다. 세례를 주라는 말이 현재 진행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믿게 하고 세례를 주는 것이 지속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이에 따라 세례를 베푸는 것은 초대교회에서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는 무리들을 향하여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8)



3) 가르쳐야 합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세례는 믿는 자가 되어져가는 과정의 첫걸음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 수 없습니다. 그러려면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잘 지킬 수 있도록 계속하여 가르칠 것을 명합니다. 교회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이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세례만 받으면 끝난 줄 알고 예배시간 한번 참석하면 그것으로 다 된 것으로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분부한 대로 따르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것이 전부라면 굳이 예수님은 제자들을 삼년동안 데리고 다니시며 가르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마 4:4) 시몬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요 6:68)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힘이 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할 때 응답이 임합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히 사회생활의 연장이 아닙니다. 자기의 소견에 좋은 대로 교회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자의 삶을 살려면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어떻게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할지, 교회는 무엇이며 어떻게 섬겨야 할지, 어떻게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할지, 헌금생활은 어떻게 해야 할지 등에 대하여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수요일 귀납법적 성경공부 시간에 말씀을 깊이 배웁니다. 목적이 이끄는 클래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사역에 적용합니다. 벧전 2:2,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함이니라.” 성도가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워야 합니다. 배운 말씀을 삶에 적용하면서 우리의 삶이 점차로 변화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3.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18-20절에 ‘모든’ 이란 단어가 몇 번 나옵니까? 모든 권세, 모든 족속, 모든 것. 하나가 더 있습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항상’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원어에는 ‘all the time’ 같이 있겠다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시간에 걸쳐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즉 예수님은 사명만 주시고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는 제자 삼는 사역에 동참하는 모든 자들에게 미래에 있을 것만을 약속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형을 사용하시면서 지금부터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언제나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보다 큰 복이 없습니다. 창 26:24,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이삭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창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야곱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수 1:5,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여호수아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니 그의 범사가 형통하였습니다. (창 39:23)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갔습니다. (대상 11:9)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을 시작하는 1장이나 마지막 28장이나 임마누엘을 똑같이 언급하십니다.



2000년 전에는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게 나타나셨는데 오늘날은 어떻게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까? 성령을 통하여 믿는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특히 복음 전파는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오순절에 기도에 힘쓰던 제자들은 성령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 충만한 성도들이 성령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면서 복음이 전파되어져가는 과정을 기록한 책입니다. 예배, 교제, 사역, 훈련, 전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경험합니다.  



기독교는 화해와 용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목숨 바쳐 우리 인간을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죽음을 정복하고 다시 오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다시 오십니다. 실패한 자, 소외된 자, 소망을 잃고 방황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으로 지금도 찾아오십니다. 어긋난 우리의 인생을 바로 잡아 주시고 새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오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아픔과 슬픔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십니다. 오늘도 주님은 치유의 하나님으로서 회복과 소망의 메시지를 안고 우리들에게 오십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사랑에 감격하여 남은 생을 주님을 위하여 드렸습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다가 오순절에 성령 충만하게 되어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열두 명의 소그룹을 데리고 시작한 사역이 예수님의 부활 후에는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전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세계선교의 사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 주님의 크신 사랑을 경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제가 설교하는 것도 이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모두 문제가 있고 상처가 있지만 주님으로부터 치유함을 받고 이제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베풀고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솔로몬이 쓴 아가서 8:6절에는 “도장 새기듯, 임의 마음에 나를 새기세요. 도장 새기듯, 임의 팔에 나를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이라고 합니다. 죽음보다 강한 그 사랑으로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붙드십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회복시켜서 귀한 사명을 감당하는 자로 만들기 원하십니다. 주님의 이 크신 사랑에 붙들리며, 그 사랑에 감격하며 이 마지막 때에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영혼 구원의 사명을 온전하게 감당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