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부활의 증인 (1) (마 28:1-10)

Author
Myung Myung
Date
2007-04-08 13:48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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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8:1-10 부활의 증인(1)



지금부터 꼭 10년 전인 97년, 부활절을 한 주 앞두고 이곳에 멀지 않은 랜초 산타페라는 부촌에서 집단 자살 소동이 있었습니다. Applehead라는 사람을 리더로 한 Heaven's Gate 그룹은 자기들이 죽으면 Hale-Cobb 이라고 불리는 혜성과 함께 오는 외계인들이 우주선에서 자기들의 영혼을 픽업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독약이 든 보드카를 마셨습니다. 사단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파멸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영원히 살아보겠다고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though he dies, and whoever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요 11:25-26) 구원을 받아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이 가능합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there is no other name under heaven given to men by which we must be saved) 베드로는 담대히 선포합니다.  



인간 스스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개입하신 것이 성육신 즉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려는데 사단은 집요하게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방해하였습니다.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체포하여 재판을 받게 하고 채찍질하고 희롱을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삼일동안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고통과 좌절과 절망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가운데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커다란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을 기념하는 부활절에 부활의 주님을 만난 여인들이 가졌던 기쁨과 평안을 가지며 부활의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결단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오후 3시에 돌아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가 지면서 시작됩니다. 안식일이 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예수님의 시신은 급하게 처리되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놓였습니다. 예수님이 금요일 오후에 돌아가셨다가 일요일 새벽에 다시 사셨으니 시간으로 따져보면 하루 반인데 왜 삼일 만에 살아났다고 합니까? 유대인들의 날짜 계산법에 의하면 하루에 약간만 걸쳐도 하루로 계산합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12월 31일에 태어난 아기를 새해가 되면 두 살로 치는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 안식 후 첫날, 지금으로 따지면 주일 새벽에 평소에 예수님을 따르고 섬기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이 있던 무덤으로 갑니다. 그들은 지난 금요일에 예수님의 시신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는 것을 다 지켜보았기에 그 장소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무덤에 찾아가 시신이 없어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인들은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향품을 사두었다가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컴컴한 새벽에 겁도 없이 무덤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이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7:22,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20: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16:21,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그렇지만 어느 제자도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생각지는 못하였습니다. 도리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장사가 치러진 다음날 즉 토요일에 예수님이 부활에 대하여 예언하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빌라도에게 찾아갔습니다.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27:63) 종교지도자들은 혹시라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 한 후 예수님이 부활하였다고 떠들어 댄다면 문제가 더욱 커질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무덤을 사흘 동안 굳게 지켜달라고 요청합니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종교지도자들은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봉인하고, 경비병을 두어서 무덤을 단단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예수님의 부활을 막거나 방해할 수 없습니다. 마귀가 방해하는 일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도움을 줍니다. 잘 훈련받은 로마의 경비병들이 무덤을 삼일 동안 열심히 지켰는데도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처음으로 듣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찾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안식일이 시작되기 직전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서둘러 예수님의 장사를 지냈는데 여인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해드리지 못한 것이 그렇게 마음에 걸릴 수 없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장례는 끝났지만 그래도 예수님께 무엇인가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라도 바르면서 예수님을 보내드리고 싶었습니다. 여인들이 좀더 차분한 마음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생각했더라면 무덤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덤에는 경비병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기에 예수님의 시신에 무엇을 바르기는커녕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설령 무덤에 간다할지라도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여인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굴려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인들은 무덤을 향하여 갔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섣불리 다니다가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붙잡힐 거야 이럴 때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야 좀 더 사건이 전개되는 것을 보면서 신중하게 행동하자 면서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습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주님이 말씀하셨을 때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장담하던 베드로를 비롯하자 다른 제자들도 결단코 주를 배반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전부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심문을 당하고 각종 모욕과 수난을 당하실 때 어느 제자도 주님의 아픔에 동참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에 가는 행동은 생각이 짧고 무모하게 보였습니다. 대책 없이 행동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 모든 것을 지켜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간섭하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새벽에 큰 지진이 있었습니다. 왜 지진이 일어났습니까? 개역성경에는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원어에는 큰 지진이 났다 ‘왜냐하면’하면서 접속사가 들어 있습니다. 지진이 일어난 이유는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굴려 냈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왜 돌을 굴려놓았습니까? 다시 사신 예수님이 나가시는데 그 큰 돌이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들을 꽁꽁 걸어 잠그고 모여 있었는데 예수님이 그 방에 나타나셨습니다. 문도 안 열어주었는데 어떻게 그 방에 들어오셨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아무리 크고 무거운 돌이 놓여 있을지라도 예수님은 그대로 통과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사가 그 돌을 굴려놓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로 하여금 무덤이 비어 있음을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막았던 돌이 굴려진 무덤 안에 예수님의 시신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열린 무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이 되었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사복음서가 모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언급하지만 실제로 부활이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한 설명은 없고 단지 빈 무덤에 대한 언급을 통하여 예수님이 부활하였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굴려낸 돌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천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더라” 천사가 입은 옷은 눈부실 정도로 광채가 났습니다. 변화산에서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되셨던 주님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갑자기 자기들 눈앞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고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너무 무서워 꼼짝 못하고 벌벌 떨었습니다.

  

천사의 뜻이 무엇입니까? 메신저입니다. 천사의 사명은 하나님이 보내신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누우셨던’으로 번역된 동사는 미완료 시제를 사용합니다. 과거의 계속된 동작을 나타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일정한 시간 동안 그곳에 누워계셨음을 보여줍니다. 분명히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날에는 예수님의 시신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비어 있습니다. 요 20:7절에 보니“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몸만 빠져나간 것처럼 예수님의 시신을 싸맨 그대로 있다는 말입니다. 누우셨던 곳을 보라는 말은 눈으로 확인하고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찾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사셨다고 합니다. 이제 여인들은 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할 뿐 아니라 그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전에도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왕기 18장에 보면 엘리야갸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렸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중에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렸고,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렸고,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들이 살아난 것도 부활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호흡이 돌아온 후 얼마 동안 살았지만 나중에 다시 죽고 말았습니다. 부활은 한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뿐 아니라 다시 죽는 것이 없고 병들거나 아픈 것이 없어야 합니다. 계시록 22:4절에 보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진정한 의미에서 부활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20에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부활에 참여할 것입니다.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증인이 되는 사명이 주어집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빨리 가서 전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셨다는 것은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그것보다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죄와 사망의 사슬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얻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 희년이 되면 대제사장은 나팔을 붑니다. 그러면 빚으로 팔려가서 종으로 있는 자들이 아무 조건 없이 풀려나 가족 품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희년에 나팔을 불었다는 것을 알면 그 가족이나 친척들 중에 그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산을 넘고 강을 건너 형제가 종으로 있는 곳까지 갑니다.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사 52:7) 종으로 있는 자에게 자유함을 얻는 것보다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소식을 듣고 믿는 자는 죄와 사망의 사슬에서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이 다시 사신 증거이기에 여인들은 더 이상 빈 무덤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여인들은 천사를 보고 무서워했지만 그와 더불어 주님이 다시 사셨다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제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관심을 두지 말고 예수님의 부활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여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소식을 전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달려가는 여인들에게 갑자기 나타나셨습니다. Shalom 평안의 인사를 하십니다. 여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까는 천사가 전해준 말을 들었는데 이제는 직접 주님을 봅니다. 여인들은 부활의 주님을 처음 만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누이신 것을 보면서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죽으신 주님이 다시 사셔서 자기들 앞에 선 것을 보니 그들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 속에 여인들이 엎드려 예수님의 발을 잡습니다. 발을 잡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영으로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몸을 가지신 분임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경배를 드린다는 것은 예수님이 신성을 가지신 분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여인들은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경배를 드립니다. 갈릴리에서 정식으로 제자들을 만날 것이지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달려가는 여인들에게 나타나실 정도로 예수님은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시겠다고 합니다.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예수님은 천사가 전한 말을 반복하십니다. 제자들에게 가서 갈릴리로 가라는 말을 전하라고 합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제자들을 만나시겠다고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기 원하십니까? 갈릴리에서 괘씸한 제자들에게 한번 손을 봐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갈릴리는 잊을 수 없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처음 부른 곳도 갈릴리 해변에서였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처음 부르시면서 그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비록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갔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인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그들을 사랑하셔서 회복시켜주기 원하십니다. 관계를 회복하고 그들에게 새롭게 사명을 주시기 위하여 갈릴리보다 더 좋은 장소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구약의 대제사장의 속죄제사와 연결이 됩니다.

일 년에 한 번씩 대제사장은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 피를 뿌리며 백성을 위하여 중보하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다 용서 됩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제사를 드리고 나서 지성소에서 살아나오기를 간절하게 기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다시 사시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것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사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제사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 15:18)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우리 죄의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기에 이제 우리가 할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뿐입니다. 모든 성도들의 부활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일어납니다. 그때가 세상의 마지막 때입니다. 그때에는 구원의 문이 닫히게 되고 더 이상 믿을 기회가 없고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이 있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이유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베드로 후서 3:9절에 나옵니다.



*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기뻐하십니까?

1) 주님은 가슴으로 섬기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여인들은 부활의 소식을 처음 듣는 복을 누립니다. 여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나는 복을 누립니다. 여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전하는 복을 누립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이 있는데 어떻게 여인들이 부활의 첫 증인이요, 부활의 주님의 첫 전도자들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까?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은 여인들의 행동을 기특하게 보셨습니다. 여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음을 보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는 수고가 수고로 여겨지지 않고, 희생이 희생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야곱이 라헬을 연애하여 칠 년을 수일같이 여기며 힘든 목동의 일을 능히 감당하였듯이 여인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온 세상이 잠든 그 새벽에 무서움도 없이 예수님의 시신이 있는 무덤으로 갔습니다. 주님을 섬기되 지나치게 논리적으로 따지고 경험적으로 따지고 자기 형편과 처지를 따져서는 안 됩니다.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겨자씨만한 믿음을 보고 기뻐하십니다. 과부의 동전 두 잎을 보고 감격하십니다. 순진하게 부모를 의지하는 아이처럼 그저 믿음으로 주님을 붙드는 자들을 기뻐하시고 위로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 8:17)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삼상 2:30)주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그분을 붙들면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책임지십니다.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스스로 인생을 헤쳐 나가야 하는 것처럼 주님께 제대로 맡기지 못합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자기 경험과 머리를 의지하려고 합니다.  



2)  예수님은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죽음과 더불어 다시 사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할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여인들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였기에 이른 새벽에 주님의 시신이 있던 빈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때 천사는 그들에게 나타나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찾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고 합니다. 여인들이 언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제자들에게 부활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달려갈 때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인들에게 나타나셔서 평안의 인사를 하십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을 본 여인들의 기분이 어떠하겠습니까? 지난 며칠 동안 그들을 눌렀던 모든 마음의 짐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기쁨이 충만하여졌을 것입니다. 감격의 눈물이 나왔을 것입니다. 태풍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태풍의 눈 주변에는 고요하고 바람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에 우리를 두렵게 하고 분하게 하고 낙심하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의 형편이나 처지에 상관없이 주님의 평강을 체험합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발견하기 위하여 기도하시고 그 뜻대로 순종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때 주님의 위로가 임합니다. 주님의 평강이 임합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 1:21-22) 우리에게 있는 복은 있을 때가 있고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그런 엄청난 시련을 당하고도 하나님을 어리석게 원망하거나 불평을 쏟아 놓지 않고 여전히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였습니다. 욥이 누리던 평안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당장 어렵지만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만 붙들고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언젠가 회복시키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마귀의 시험이 올지라고 쉽게 넘어지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3) 예수님은 성도들이 주님의 증인으로 사역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중에는 종교지도자들과 자주 충돌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인가 꼬투리를 잡으려고 찾아오기도 하였습니다. 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마귀의 하수인으로 고용된 사람들로부터 갖은 수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나 사도행전이나 서신서를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전혀 악한 자들과 만나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는 오직 택함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나타나시고 그들에게 다시 사신 주님의 증인이 되라는 사명을 주셨을 뿐입니다. 공생애의 기간은 제자 훈련 기간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이 하시던 사역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감당할 몫입니다. 주님의 복음은 지금도 사단의 세력에 눌린 사람들을 자유케 합니다. 사복음서에 이어 나오는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역하면서 복음이 전파되는지 보여주는 책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감당했던 증인의 사명을 이제는 저와 여러분들을 통하여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면서 사단의 권세에 눌린 자들을 주님께로 이끌기를 원하십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부활절은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타성에 젖어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의 정도를 점검해야 합니다. 2000년 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어디로 달려가십니까? 혹시 주님이 계시지 않는 빈 무덤으로 달려가는 분은 안 계십니까? 혹시 주님이 원하지 않는 곳으로 달려가지는 않으십니까? 주님의 사심을 단순히 기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부활의 능력과 열매를 보여줄 수 있을지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머리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 속에 담겨진 주님의 뜻을 발견하며 그 뜻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이 무엇입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이 사명을 감당할 때 주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주님의 평강이 임합니다. 부활주일을 맞이하면서 이제부터는 주님을 향하여 달려가는 성도들, 주님을 위하여 달려가는 성도들, 주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