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준비하십니까(5): 주님을 기념해야 (마 26:17-30)

Author
관리자 관리자
Date
2007-04-01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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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6:17-30 준비하십니까(5): 주님을 기념해야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의 여정은 예루살렘 입성으로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 일행에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감람산에 이릅니다. 종교지도자들에게 잡하시기 전 일주일 동안 낮에는 주로 성전에서 보내시고, 밤은 감람산에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감람산의 동쪽에 있는 베다니 동네에서 출발하여 벳바게로 갔습니다. 벳바게는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에 위치한 마을인데 봉우리에 위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여기서 나귀를 구하여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가시는 길에  군중이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였습니다. 예수님과 관련된 이 모든 일들은 이미 구약성경에 다 예언되어 있었고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하나 이루어가십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아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성찬식이 그저 절기 때마다 드리는 형식적인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찢기시고 흘리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가슴 깊이 느끼면서 주님에 대한 사랑과 열심을 회복하면서 성찬식에 참여하기 위하여 성찬의 의미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26장에는 식탁이 두개 등장합니다. 하나는 예루살렘 성 밖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차려진 식탁입니다. 예수님이 손님으로 초청되어 대접을 받고 마리아는 소중히 간직하였던 옥합을 깨뜨리며 값비싼 향유를 부어 드립니다. 여인의 행위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한 것이었기에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면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행한 것을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부어드린 향유의 향기는 이내 사라졌지만 여인의 아름다운 행위는 아직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식탁이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어떤 집 다락방에 차려집니다. 그 식탁에는 유월절에 먹는 평범한 음식이 차려져있었지만 주님이 축사하시니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모든 성도들이 찢기신 주님의 몸과 흘리신 주님의 피를 기념하여 계속해서 성찬식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1) 순종과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유월절 만찬은 유대인들이 출애굽 사건 이후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기념하며 지켜 오던 전통적인 관습입니다. 유월절이 될 때마다 예루살렘은 전 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인하여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당연히 방을 구하기란 하늘에 별따기입니다. 제자들은 어디서 유월절 식사를 해야 할지 전혀 대책이 없었습니다. 무교절의 첫날 즉 유월절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유월절 만찬을 어디에서 들기 원하시는지 물어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미 유월절 식사를 들 수 있도록 준비하셨습니다. 왜 제자들도 모르게 비밀히 준비하셨습니까? 지금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머무시지 않고 저녁이면 베다니로 가신 것도 그들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곳에 있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월절 만찬은 반드시 예루살렘 성안에서 해야 하는 것이 유대인의 전통이기에 예수님은 성안에서 유월절 식사를 할 장소를 미리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하신 장소에 가서 “예수님의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고 하니 집주인이 순순히 방을 내줍니다. 때가 가까웠다는 것은 예수님이 죽으실 때가 가까웠다는 뜻입니다. 그 방은 이층에 있는 큼지막한 다락방이요 이미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고 유월절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입니다. 다락방은 주로 손님 접대를 위하여 사용되는 방인데 다락방까지 가진 것을 보면 집주인은 상당히 부자인 것 같습니다. 주님이 쓰시겠다 하니 그는 기꺼이 주님께 자기의 다락방을 사용되도록 내어놓았습니다. 복음서에는 열두 제자나 몇 명의 여인들 외에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의 사역을 돕는 무리들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 집주인도 자기의 다락방을 예수님을 위하여 기꺼이 제공함으로써 그의 다락방은 주님을 위한 식탁이 마지막으로 차려진 장소요 주님의 재림 때까지 기념하라는 성찬식이 시작된 장소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 나귀 주인은 나귀새끼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두 제자가 그 나귀새끼를 끌고 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새끼의 등위에 걸쳐 놓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자기 겉옷을 길에 펴놓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밭에서 벤 나무가지를 길에 펴놓았습니다. 모인 무리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의 입성을 환호하였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들은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어떤 것을 드리기 원하십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려 하고 우리가 가진 것을 주님을 위하여 사용할 때 우리가 미처 생각지 않은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2) 회개가 필요합니다.

유월절 식사는 해가 저물어야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더불어 유월절 만찬이 미리 마련된 예루살렘 성안의 어떤 집 다락방에 올라가셨습니다. 식사를 하는 분위기가 어떠할까요? 이미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들을 누릅니다. 출애굽을 준비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날밤에 느꼈던 불안과 긴장이 지금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에게도 느껴집니다.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먹고 있을 때에, 뜻밖의 발언을 하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의 말씀 어느 하나 참되지 않은 것이 없지만 특별히 말씀을 하실 때에 ‘진실로’란 말을 사용하십니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이미 가룟 유다는 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밀약을 한 상태이지만 예수님이 그들에게 넘겨지는 것은 미래의 일이기에 “나를 팔리라”하고 미래형으로 말하십니다. 아무도 모르게 제사장들과 은밀히 거래한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유다는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해도 속으로는 간이 콩알만 해졌을 것입니다. 아마 식은땀이 흘렀을 지도 모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을 알면 다른 제자들이 유다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이 깜짝 놀랍니다.  자기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누가 이런 일을 했어 하면 공연히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을 서로 보았을 것입니다. 누가 도대체 선생님을 배반한다는 말인가?  "나는 아니지요?" 하고 저마다 근심하면서 하나씩 물어옵니다. 그때 주님이 약간의 힌트를 줍니다.  “나와 함께 이 대접에 손을 담근 사람이, 나를 넘겨 줄 것이다.” 유대인들도 한국식과 같이 각자에게 따로 음식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운데에 음식을 가져다 놓으면 각자가 떠다 먹기에 예수님의 하신 말은 그저 우리들 중에 하나라는 의미밖에는 누가 배반자인지 추측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이 말에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계략에 빠져 어쩔 수 없이 죽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성경에 이미 기록된 대로 죽으실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임을 알고 억지로가 아니라 기꺼이 순종하시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십니다.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거기에 순종하는 마음, 고난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부터 얻게 됩니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24절) 유다는 지난 3년 동안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다니기는 했으나 자기가 생각하던 그런 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제사장들에게 예수를 팔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랍비여 내니이까” 얼굴에 철판을 깔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는데 유다는 예수님을 아직도 선생이라고 부릅니다. 마태는 다른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기록하고 있지 않았는데 유독 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적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자기를 배반한 사실을 알면서도 태연하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흥분하여 귀싸대기라도 때리면서 ‘이 괘씸한 것, 얘네들아 저 유다가 나를 배반한단다’ 하면서 사람들 앞에 톡톡히 망신을 줄 텐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에 주님의 사랑이 있고 인내가 있습니다. 이미 “네가 말하였도다” 그 말 한 마디만 하십니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 자리에서는 전혀 몰랐습니다.

  

유다가 나면서부터 예수님의 배반자로 미리 정해졌을까? 하는 질문을 가끔 던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각본에 따라 예수님을 배반해야만 했기에 유다를 배신자로 몰아세우는 것은 지나친 처사이고, 유다를 재평가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을 인하여 예수님의 죽음을 통한 인류의 구원이라는 목적을 이루시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유다 본인의 의사에 상관없이 억지로 죄를 짓도록 강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를 흐르는 하나님의 성품에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고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또 스스로 아무도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1:13)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을 자유도 있었고 따먹지 않을 자유도 있었으나 자기 의지로 따먹은 결과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시 41:9, “내 떡을 먹던 가까운 나의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배반행위 자체는 성경에 이미 예언된 것이요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지만 예수님을 배신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유다자신의 선택이요 그로 인하여 유다는 예수님의 배반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일부러 그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으면서 마지막까지 회개할 기회를 주셨으나 유다는 끝내 거부하였기에 하나님의 심판밖에 받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붓던 마리아에게 허비한다고 꾸짖던 가룟 유다는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향유보다 값진 인생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3) 예수를 중심으로 한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으로부터 한 조각 받고나서 그에게 사단이 들어갔고 곧 만찬자리를 떠났다고 요한복음 13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디로 갔겠습니까? 제사장 무리에게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갔습니다. 가룟 유다가 나가자 만찬석에는 택함을 받은 주의 제자들만 남아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성찬식은 누구나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만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성찬식은 유다가 나간 후부터 시작됩니다. 성찬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만의 이벤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참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믿고 또한 주의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같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 우리가 믿음에 서 있는지 항상 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주님만 바라보고 계속해서 신앙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4) 주님께 맺은 언약을 새롭게 기억해야 합니다.

다락방에서 열한 사람의 제자들이 유월절 만찬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제자들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유월절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유월절 만찬을 들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치하에서 구원하셨는지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유월절 만찬은 구운 양고기와 무교병 (Matzoh)과 쓴 나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양은 애굽을 나오기 전 문설주에 발랐던 양의 피를 생각나게 합니다. 무교병은 미처 반죽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애굽에서 급히 나오던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쓴 나물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때를 생각나게 합니다. 거기에다 유대인들은 포도주를 마시는 전통을 추가했습니다. 유월절 만찬이 끝나고 나면 집의 가장은 남은 무교병을 떼어 식구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예수님이 떡과 포도주를 나누시는 모습은 앞으로 교회가 성찬식을 통하여 어떻게 주님과 교제할 것을 보여주십니다. 예수께서 떡을 들어 축사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  받으라는 말의 의미는 구원이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 가능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떼어주신 빵을 들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나를 위해 유월절 빵이 되시는구나. 또한 잔을 가지고 감사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니 그들이 다 마시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제자들은 잔을 마시면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 유월절 포도주가 되시는 구나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떼어 주시는 빵과 돌리는 포도주를 들면서 숙연한 분위기 속에 젖었을 것입니다. 성찬이 영어로 Eucharist인데 그 의미는 give thanks,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만찬을 들면서 빵과 포도주를 들었는데 주님이 축복하시니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거룩한 빵, 거룩한 포도주가 됩니다. 평범한 것일지라도 주님의 손길이 닿으면 거룩해집니다. 우리가 있는 곳마다 우리가 하는 일마다 거룩해지는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이 인정하시는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야합니다.  



예수님은 성찬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새 언약을 선포합니다. 언약은 쌍방간에 맺는 약속입니다.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언약을 맺을 때 모세는 백성들에게 언약서를 낭독하니 온 백성이 한 목소리로 주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을 지키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모세는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서 짐승의 피의 절반은 단에 뿌리고 반은 백성에게 뿌리며. "이것은 주께서 이 모든 말씀을 따라 너희에게 세우신 언약의 피다."  (출 24:8)  즉 첫 언약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순종을 전제로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들의 왕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베푸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우상을 섬기고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면서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하여 나라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예레미야를 통하여 약속하셨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렘 31:31) “내가 이스라엘 집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렘 31:33) 새 언약은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의 순종 즉 모든 사람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전제로 하며 예수님의 피가 흘려져야 합니다. 시내 산의 언약은 육신적인 이스라엘과 맺었으나 예수님을 통한 새 언약은 새로운 이스라엘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과 맺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예언을 한 지 600년 후에 나타나신 예수님이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막 14:24) 하셨고 사도 바울도 고전 11:25,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하시면서 예수님의 피가 새 언약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일부는 하나님의 단에 나머지는 우리에게 뿌려집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을 이루시고 새 언약이 세워졌습니다.  



새 언약의 피를 말씀하시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때가 오기 전에는 다시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이십니다. 원래 유월절 만찬에는 잔을 네 번 듭니다. 이 네 번의 잔은 출애굽기 6:6-7에 나오는 네 가지 약속을 상징합니다.  출 6:6-7,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1)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2)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3)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4)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예수께서 24절에 하신 언약의 피에 대한 언급은 ‘구속’의 개념이 들어가 있는 세 번째 잔을 들 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인 네 번째 잔은 들지 않으셨습니다. 그 마지막 잔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때에 들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다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잔치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 메시야의 잔치에서 포도주를 들기 전에는 다시 잔을 들지 않겠다고 하시며 마지막 잔은 미래를 위하여 남겨 두십니다.



유월절의 만찬은 찬송으로 끝납니다. 유대인들은 할렐이라 부르는 시 113-118편을 불렀는데 아마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그 부분을 불렀을 것입니다. 찬송을 부르며 감람산으로 갑니다. 감람산은 유월절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가지전에 하루를 지내고 가는 곳입니다. 거기서 잡히시기 전날을 보내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켰습니다. 출애굽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후대 유대인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유월절을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의 더 깊은 영적 의미를 이루기 위하여 영적인 출애굽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은 출애굽사건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합니다. 예수님이 그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오셔서 사단의 노예상태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되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야겠습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한 떡과 한 잔을 나누어 먹고 마시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반목과 질시와 오해를 떨쳐버리고 이해와 관용으로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찬식을 잘 요약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전 11:23-26)



성찬에 기억해야할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기념해야 하고, 선포해야 하고 참여하여야 합니다. 주님을 기념하는 것은 그의 죽으심의 의의를 기억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그의 구원을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성도들이 함께 참여하여야 합니다. 성찬이 의례적인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 없이 성찬식에서 포도주와 떡을 먹는다면 그것은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종교행위에 불과합니다. 주가 죽으신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그의 죽으심을 전하기를 다짐해야 하며 우리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블레셋을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물리치고 나서 에벤에셀, 도움의 돌을 세우며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서도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한 동편의 창문을 열고 기도하며 감사하였던 다니엘처럼 조국을 떠나 낯선 미국 땅에 이민 와서 비록 언어의 장벽이 있고 문화적 이질감이 있는 곳에 살지만 인도하시는 하나님,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서로 사랑하며 형제나 자매들을 믿음으로 섬기면서 주님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가야합니다.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영적인 이스라엘이 참여하여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성찬식을 통하여

1)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음을 선포합니다.

2)  성찬식을 하면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념하고 믿음으로 기다립니다.

3)  성찬식을 통하여 믿음의 공동체가 주안에서 하나된 것을 확인합니다.



이제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정신없이 살아왔던 그 동안의 생활을 한 번 정리하여 보시면서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다시 한 번 주님이 베푸신 풍성한 사랑을 기억하고 뜨거운 사랑과 열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는다면 우리도 주님처럼 화평케하는 사람, 다른 사람을 품어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가 쓰시겠다 할 때 나귀의 주인이 기꺼이 주님께 드렸던 것처럼, 다락방 주인은 그 방을 주님에게 기꺼이 내어드렸던 것처럼 주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실 때에 주저하지 않고 아낌없이 주님의 뜻대로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시간과 달란트와 물질을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이제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참된 성찬의 의미를 깨닫고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예수님의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를 생각하면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 아니라 주님께 헌신을 다짐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