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기도의 열매 (행 1:12-26)

Author
Myung Myung
Date
2006-05-07 19:31
Views
3922
행 1:12-26 기도의 열매

요즈음 유다복음서가 매스컴과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대하여 비판적인 사람들은 2000년 동안 존재한 기독교를 뿌리부터 흔드는 결정적인 문서를 발견하였다고 흥분합니다. 그들이 흥분하는 것은 마치 16세의 젊은 나이에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주장하는 통일교 교주 문성명의 글을 2000년 후의 사람들이 읽고 흥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문선명은 어떻게 주장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나타나 당신이 이루지 못한 과업을 수행하도록 명령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오직 문선명만이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우깁니다. 결국 문선명은 예수의 끈질긴 강요에 못 이겨 그 명령을 받아들임으로 통일교를 시작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지금 우리가 볼 때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입니까? 복음서 중에 정경으로 인정받는 책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네 권뿐입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네 권의 책 외에도 복음서라고 이름을 붙인 책들이 여럿 있습니다. 유다복음서는 2 세기경에 한 영지주의자가 그리스어로 쓴 글을 3-4세기에 이집트 콥트어로 번역하여 파피루스에 기록한 것입니다.  유다복음서는 서기 185년경 기독교 변증가인 이레니우스 주교에 의하여 처음으로 언급되었습니다. 그는 유다복음이 초기 기독교 이단인 영지주의의 가인파에 속한 사람들의 작품으로 여겼습니다. 가인파 영지주의자들은 아담의 맏아들로서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을 숭배하는 사람들로 가인이 단지 동생을 미워하여 죽인 것이 아니라 잔인한 신의 저주를 받아 어쩔 수 없이 살인한 것으로 믿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유다복음은 4세기 이후로 사라졌다가 1945년 이집트에서 발견된 문서들 중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사본들은 여러 주인을 거쳐 스위스에 본부를 둔 메세나 재단이 소유하게 되었고 그들은 이집트 콥트어 전문가인 루돌프 케세르를 통하여 복원과 번역에 성공하였습니다. 얼마 전 메세나 재단이 재정지원을 대가로 출판권을 가지고 있는 내셔널지오그래픽지와 공동으로 사본을 공개하였습니다. 유다복음서애서는 유다를 예수를 배반한 후 죄책감에 빠져 자살한 제자가 아니라 반대로 예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부탁받은 영웅적인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오히려 유다가 예수를 십자가형에 넘겨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보다 더 나은 제자라는 것을 예수로부터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배반과 죽음이 예수님의 명령에 따른 영웅적 행위라는 주장에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처럼 반응을 보이는 자체가 영지주의와 같은 신기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대상을 반영합니다. 다빈치 코드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지는 뉴욕타임스를 통하여 ‘유다복음은 복음서가 아니다. 유다에 의하여 쓰인 것도 아니다. 가장 비성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교회사를 통하여 볼 때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러한 시도는 끊임없이 있어왔습니다. 이런 시대적 조류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말이 아니라 삶을 통하여 그들이 부인할 수 없는 열매를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은 교회사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120명의 성도들이 성령충만함을 받고 각 나라 방언으로 복음을 말할 때 이를 인하여 모여든 수많은 유대인들 앞에서 베드로가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의 용서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또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들, 곧 주 우리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 모두에게 주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 잘못된 세대로부터 구원을 받으라고 그들에게 권하니 그날 하루 동안에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수가 3000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탄생됩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준비과정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감람산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모습을 구름에 가려 안 보일 때까지 계속 지켜보던 제자들. 그러나 천사들이 나타나서 하늘로 올리우신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을 말했을 때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까지는 안식일에 걸어가지 알맞은 거리. 그 당시 유대인들의 규례에 의하면 그 거리가 2000규빗입니다. 한 규빗이 45cm이니 2000규빗은 900m 정도 떨어진 거리입니다. 자기들 생전에 다시는 예수님을 다시 볼 수 없었지만 제자들은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갔습니다. (눅 24:52)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성령 받기를 기다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제자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할 것을 알았습니다.



120명의 성도들의 기도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순종하기 드린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세상을 바꾼 기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 속에 한 획을 긋는 성령강림을 앞두고 드린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모임은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어디서 어떻게 기도를 드렸기에 그와 같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는지 본문을 중심으로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제자들이 머물렀던 다락방은 예루살렘 성안에 있습니다. 부활 후 두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난 곳입니다.

이 다락방이야말로 초대 교회의 요람입니다. 다락방에 있는 제자들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누가 빠졌는가? 예수님과 더불어 삼년을 같이 먹고 자고 사역을 하였는데 유일한 낙오자 - 가룟 유다. 다른 열한 제자들과 달리 유일하게 남쪽 유대 출신으로 셈도 빨라서 회계를 맡았던 똑똑한 유다였지만 그만 중도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조금만 참았으면 유다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예수님의 사역을 참여하는 축복에 참여하였을 텐데 마지막 순간을 넘기지 못하고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은전 삼십 냥에 예수님을 종교 지도자들에게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유다가 그 은 삼십 냥을 가지고 먹고 마시며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썼습니까? 아닙니다. 한 푼도 써보지 못하였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죄의식 속에 그 돈을 다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였으나 자신들에게는 책임이 없다면서 발뺌을 하니 유다는 그 돈을 성소에 던져 놓고 스스로 목매어 자살을 하였습니다. 누가는 그가 나중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왔다고 비참한 최후를 기록합니다.



그렇다고 다락방에 있는 나머지 열한 제자들은 전혀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 주를 버릴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마 26:33) 장담하던 베드로였으나 불과 몇 시간도 못 되어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베드로와 유다는 둘 다 예수님을 배반했을 때 밖으로 나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서 통곡을 하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정죄 받으시는 것을 보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을 때 스스로 뉘우쳐 밖에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생명의 길로 갔으나 유다는 스스로 죄 짐을 지고 가다가 멸망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통곡이 자살이라는 행위보다는 훨씬 가벼운 행위지만 베드로는 회개함으로 구원받는 자의 본을 보였고 유다는 회개를 거부함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자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십자가가 서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배신한 인간들의 죄를 사하기 위함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습니다. 그 증거가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만나서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느냐” (요 21:15) 하시면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는 부탁을 하십니다. 교회는 전혀 죄가 없는 사람들만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착한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구원이 확신이 분명한 사람만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이상적인 교회를 찾고 계신다면 착각입니다. 교회는 상처받은 사람들, 문제가 있는 사람들, 어른이나 아이나 남자나 여자나 건강한 사람이 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함께 모여서 믿고 변화되는 곳입니다. 부족하지만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실 것을 믿고 은혜를 베푸실 것을 바라보면서 겸손하게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용서받은 죄인들이 점점 많아지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맹세하며 저주하며 부인하던 베드로도 은혜의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고 제자들 중에 누가 크냐 공연히 시기심을 불러 일으켰던 요한과 야고보도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 제자들과 함께 있었습니까?

1) 여자들 -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의 사역을 도왔던 여자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도 평소에 따르던 제자들은 다 흩어져 버렸으나 여인들은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왔을 뿐 아니라 십자가와 무덤에까지도 있었습니다. 어느 교회나 성장하는 배경에는 앞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남자들이 있기도 하지만 이면에 열심히 기도/봉사하는 헌신적인 여인들이 많이 있기 마련입니다.

2) 예수의 모친 마리아/예수의 아우들

마리아가 신약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마 13:55,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 예수의 가족들은 예수님이 누구 신지 무엇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날이면 날마다 사람들과 함께 몰려다니며 며칠씩 집을 비우고 집안일은 도무지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막 3:21, “그가 미쳤다” 단정하고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불렀습니다 (막 3:31). 요 7: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일러라. 그런데  무엇 때문에 예수의 가족들에게 변화가 나타났습니까? 고전 15:7  부활하신 주님이 제일 큰 동생인 야고보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경험을 인하여 야고보는 예수가 단지 육신의 형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았을 것이요 그로 인하여 자기의 동생들에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예수님의 말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성령의 강림을 기대하며 기도 그룹에 동참하였습니다. 그 야고보는 초대 교회에서 베드로 이상 가는 리더가 되었는데 그 야고보는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였는지 그의 무릎은 낙타의 무릎과 같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고전 15장 예수는 부활하신 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1) 베드로, 2) 열두 제자, 3) 갈릴리에 있는 오백여 형제, 4) 주의 형제인 야고보, 5) 모든 사도들 6) 바울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에 있는 오백여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런데 다락방에서 함께 한 무리는 약 120명. 1/4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나머지 3/4는 어디에 갔습니까? 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은혜의 기회는 있지만 막상 그 은혜를 누리는 자는 적게 마련입니다. 요즈음 같이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때라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삼일을 걸려 오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집가고 장가가고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본 자들이 다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들음이 믿음과 연결되지 않고, 말씀을 들음이 순종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듣고 끝까지 순종한 자가 성령을 통한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 초대 교회 개척 멤버들이 되었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땅 끝까지 퍼져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모인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성령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한참 기도하는 중에 베드로가 배반한 가룟 유다 대신 부활의 증인으로 사도의 사명을 감당할 사람을 새로 뽑자고 제안합니다. 자격 요건: 주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는 동안에,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로부터 시작해서 예수께서 우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날까지 늘 우리와 함께 다닌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의 말씀 하신 것을 직접 듣고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



그래서 모인 무리들은 두 사람을 후보로 내세웠습니다. 한 사람은 바사바라고도 하고, 유스도라고도 하는 요셉이요, 다른 한 사람은 맛디아입니다. 그들은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 주께서 이 두 사람 가운데서 누구를 뽑아서 이 섬기는 일과 사도의 직무를 맡기시겠는지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가 갈 곳으로 갔습니다." 간절하게 기도하고 나서 120명이 제비를 뽑았는데 맛디아가 뽑히게 되었습니다.



120명의 성도들이 어떻게 기도하였기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열매를 거두었습니까?

1) 함께 모여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체도되실 때 예수님을 위하여 죽기까지 장담하던 제자들은 다 흩어졌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후 그들의 고향인 갈릴리로 가지 않고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에게 적대적인 예루살렘 성에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려고 제각기 흩어져서 우두커니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다락방에 함께 모였습니다.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말세에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롬 13:11-13,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신록이 우거지는 귀한 계절에 우리의 흐트러진 신앙생활의 고삐를 다시 조이며 결실을 맺기 위하여 준비해야 합니다.



2)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마가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도착하여 어느 집에 머무실 때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예수님은 사단의 종노릇하는 불쌍한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버지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시는데 제자들은‘누가 크냐’ 는 논쟁을 벌였습니다. 예수님은 수난의 길을 가시는데 한심한 제자들은 그 길을 영광과 지위를 차지하는 길로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적지 않은 신경전을 펴면서 논쟁까지 벌였습니다. 네 복음서에 제자들의 자리다툼이 다 나오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 것 같습니다. 누가 크냐 논쟁을 벌일 때 제자들이 입에 미소를 머금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했겠습니까? 가시가 돋친 말을 했을 것입니다. 지난 3년 동안 자기들이 관찰한 상대방의 문제점이나 허물을 끄집어내며 흠집 내기에 열을 올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면서도 이런 논쟁을 벌였는데 만약 예수님이 안계셨다면 그들은 아마 멱살을 잡고 싸웠을지도 모릅니다. 논쟁을 하고 난후 제자들은 서로 씩씩 대면서 자기에게 말로 상처를 준 다른 제자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말씀도 않으시고 묵묵히 길을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 앞에서 도토리 키재기 하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을 주님으로 섬기면 믿는 자들은 다 주님의 종일 텐데 종들끼리 자리다툼을 하면서 power game을 벌이니 얼마나 자기 주제를 모르는 행동입니까?  예수님의 표현을 빈다면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개는 일을 제대로 안 하는 사람들이 감 놓아라 팥 놓아라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을 성실하게 맡아 수행하는 사람들은 조용합니다.  교회는 자기를 선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주님을 증거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가 크냐 싸울지라도 주님의 제자들은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같이 계시던 주님이 안 계시니 낙심이 되고 방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요 자기들 중에 누가 크냐 논쟁을 벌일 수 있는 상황이지만 120명의 무리들은 한 마음으로 모여 성령 충만을 받겠다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합심하여 기도합니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예수님과 멀어지게 되었으나 기도를 통하여 영적으로는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3) 힘써서 기도하였습니다.

철광석을 녹여서 철강제품을 생산하는 제철소의 용광로는 늘 일정한 온도를 유지한다고 합니다. 만일 정전이 되어 용광로가 식어버리는 사태가 벌어지면 그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해 여러날 작업을 중지해야 하고 엄청난 비용이 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철소들은 비상용으로 자가발전기를 갖춰 놓고 용광로의 온도가 떨어지지 않게 쉬지 않고 용광로를 작동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쉬임 없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과 성령의 거룩한 불길을 접해야 영적으로 승리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할 것을 명합니다. 기도를 쉰다는 것은 영혼의 호흡을 중단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중단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소멸치 말라'(살전5:19)고 명합니다. 하나님과 충만한 교제를 나누는 생활이 곧 '성령충만'의 생활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를 게을리하거나 멀리하면 사단의 시험과 올무에 빠지기 쉽습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 같이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에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쉬지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엡 6:18,“온갖 기도와 간구로 늘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또 이것을 위하여 늘 깨어서 끝까지 참으며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시오.” 히 4:16,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래서 우리는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14절에 나오는 프로카스테레오라는 헬라어는 ‘헌신하다,’‘꾸준히 지속하다’는 뜻입니다. 120명의 성도들은 다락방에서 한두번 잠깐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때까지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습니다. 열흘 동안 기도하였습니다.  



4)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였습니다.

120명의 성도들은 막연하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였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려라.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구체적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니 그들의 기도에 힘이 있었습니다.



지난 수요찬양예배에 합심하여 통성으로 뜨겁게 기도하였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 짧은 시간이었지만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기 위하여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예수님도 사역을 하시면서 기도에 의존하셨는데 하물며 우리들이 제대로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겠습니까? 기도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모하는 만큼 누립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마음으로 모였습니다. 불과 40일전의 제자들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가 종교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죽으실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리로 가셔서 제자들을 만날 것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어느 누구도 그 말씀을 제대로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체포되시고 난 후 두려움에 사로잡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대로 부활하시고 나셨고 두려워 떨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언제 그들에게 임할지 알 수 없었지만 전처럼 믿음 없이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두 한 마음이 되어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면서 그들은 한 마음으로 뜨겁게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하고 나니 응답을 받습니다. 모인 무리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사도의 사역을 감당할 일꾼을 뽑았습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성도들에게 최선의 방법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비결입니다. 시대는 바뀌어도 하나님의 복의 받는 법은 같습니다. 우리도 초대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처럼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처럼 기도의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어야겠습니다. 그들처럼 성령의 능력을 받고 그들처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겠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사는 자들입니다. 그날이 언제인지 알 수는 없으나 언제 오실지라도 부끄럼 없이 선다는 각오를 가지고 영적으로 깨어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실 믿는 사람들조차도 주님의 재림은 그저 막연히 미래에 있을 사건으로 알고 자기의 스케줄에만 맞추어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믿는 자들은 주의 증인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루하루 주님 앞에 선다는 각오로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서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 살아야 합니다. 오순절에 하나님의 성령이 모인 무리들에게 권능으로 임하여 초대 교회가 부흥될 수 있었던 것 같이 팔로마 한인 교회 모든 교우들에게 성령의 바람이 불어올 때 우리의 삶이 변화가 되고 하는 일 가운데 능력이 나타나고 주안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기도하며 성령 충만 받음을 인하여 초대 교회 교인들이 가졌던 그 생동감을 맛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