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22)

Author
Myung Myung
Date
2007-09-23 10:37
Views
4971
요 21:15-22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못 믿어도 저 사람만은 틀림없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다면 그 충격이 더욱 클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관계로 연결되는데 만약 믿었던 사람에게 그런 상처를 받았다면 그 관계는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배반자는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 보통 사람의 반응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이런 경우를 당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전히 씩씩대며 자기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을 미워해야 할까요? 예수님 같으면 어떻게 하실까요?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관점에서 보려고 해야 하고 주님처럼 행동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이요 그런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본문에 보니 배신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세 번이나 자기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심지어 저주하며 맹세하며 부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와 관계를 끊고 다시는 보지 않으려고 하셨습니까? 찾아와서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셨습니까? 그것으로도 속이 풀리지 않아 실컷 두드려 팼습니까? 아니요. 도리어 그 사람을 위하여 따뜻한 아침까지 차려주셨습니다. 아침을 마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셨습니다. 한 마디 책망도 없이 그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의 말이 그 사람을 완전히 녹였습니다. 그 사람은 주님을 왕으로 모시기로 새롭게 결단하였습니다. 그분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칠 각오를 하였습니다. 실제로 그 사람은 주님을 위하여 순교하였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였습니까?



교회적으로 현재 진행되는 세부설계가 끝나면 건축을 해야 하는 저희 교우들이 과연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까요? 교회당 건축을 그저 여느 건물을 짓듯이 그런 자세로 지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성전을 짓기 전에 삶 속에서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인지 함께 알기 원하여 이번 시리즈를 계획하였습니다.



먼저 지난 주 다루었던 역대기 28장을 요약해볼까요?  

1) 성전은 누구를 통하여 지으십니까?

택함을 받은 사람들을 통하여 지으십니다. 다윗을 택하시고 솔로몬을 택하시고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2) 성전을 짓기 위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택함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에게 믿음의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한 마음이 되고, 자발적으로, 최선을 다하여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3) 언제 성전을 지으십니까?

평강이 이루어질 때 성전을 짓게 하십니다. 샬롬을 이루기까지 다윗은 수많은 전쟁을 치렀습니다. 하나님은 전쟁의 사람 다윗이 아닌 평화의 사람 솔로몬을 통하여 성전을 짓게 하셨습니다. 평화를 이룰 때까지 다윗은 많은 피와 땀을 흘렸습니다.



역대상 28장을 우리 교회의 상황에 적용한다면 저희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는 확신이 있어야 하고, 주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헌신하며 사역에 참여해야 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우리들 사이에 화평이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각자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실 때 가능합니다. 왕 되신 주님과 동행할 때 우리는 성전이 되고 눈에 보이는 성전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짓게 됩니다.



본문은 부활절 때에 많이 언급되는 구절입니다. 본문을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는지 하는 관점에서 다루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7명이 갈릴리 호수에서 예전처럼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밤새 그물을 던져보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호숫가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그물을 던졌는데 그물을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도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는데 예수님이 나타나 ‘깊은 데로 가서 던지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했더니 어찌나 고기가 많이 잡혔던지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의 능력을 보면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하며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베드로는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기억하는 요한은 호숫가에 서서 말한 사람이 예수님임을 직감합니다. ‘예수시다’ 요한이 외친 소리를 듣고 베드로가 얼른 물에 뛰어듭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물을 간신히 끌고 해변으로 나오니 큰 고기가 무려 153마리나 잡혔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해변으로 올라오니 예수님께서 이미 그들을 위하여 숯불을 피워놓고 아침을 준비하셨습니다. 차가운 아침에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나누어 주십니다. 식사 중에 어느 누구도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침을 드는 제자들을 묵묵히 바라보십니다. 특히 베드로를 주목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 변화산에 올라가실 때, 겟세마네에서 마지막으로 기도하실 때 야고보, 요한과 더불어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였는데 예수님이 붙들려 간 대제사장 집 뜰에서 예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는 무리의 당혹스런 질문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세 번째 부인할 때는 뜰 안에서 심문을 당하던 예수님과 눈이 마주 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자 베드로는 밖으로 뛰쳐나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을 하였습니다. 그 시간 후로 베드로는 자기가 주님을 부인했다는 죄책감에 강하게 사로잡았을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찾아오시지 않았더라면 베드로는 아마 평생 주님을 배반하였다는 부담을 안고 살았을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할지라도 주님을 배반한 자라는 손가락질을 계속하여 받았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세 번째로 제자들을 찾아오십니다. 본문에 제일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사랑. 일곱 번 나옵니다. 설교자들 중에는 사랑을 뜻하는 헬라 단어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뜻하는 agapao와 친구 간의 우정을 뜻하는 phileo가 있다고 하며 두 단어의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고 하여, 예수님은 agapao로 물었는데 베드로는 아직 믿음이 깊지 못하여 phileo를 사용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전체를 볼 때 요한은 agapao와 phileo를 구별하지 않고 동의어로 사용합니다. 다만 스타일의 변화를 추구하기 위하여 요한이 두 단어를 섞어 사용하였을 뿐 의미는 같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어떻게 회복시킵니까?  

1 단계: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예수님이 왕인지 확인하십니다)

주님께서 직접 준비하신 아침을 다 먹은 후에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그를 주로 베드로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시몬이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한 베드로를 자기의 제자로 처음 부르셨을 때의 그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리게 하며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시몬이라 부르신 이유는 주님을 처음 만날 때 가졌던 사랑과 감격을 회복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너는 나를 세 번씩이나 부인했느냐? 예수님께서 화를 내며 베드로를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배신자라고 부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베드로가 한 행동을 무조건 용서하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시는데 공통적인 부분이 무엇입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보다 주님께서 아시잖습니까 하면서 간접적으로 대답합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처음 물으실 때는 단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무슨 뜻입니까? 베드로가 주님께서 잡히시는 날 밤에 다른 제자들은 혹시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저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기에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며 장담을 하였습니다. (마 26:33) 주님은 베드로가 한 말을 염두에 두시고 네가 그때 장담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묻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주여 그렇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그랬더니 주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전과 같이 “주여 그렇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세 번째로 같은 질문을 하실 때 베드로는 근심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간신히 대답하였습니다.



왜 주님은 베드로가 고민할 정도로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던집니까?  베드로를 의심하고 그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였기에 주님께서는 주님에 대한 세 번의 사랑을 고백하게 함으로 그가 가진 마음의 상처를 고쳐주시고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는 사실에 심각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마귀는 우리의 양심을 공격합니다. 어떻게 네가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니? 너는 주님의 제자가 될 자격도 없어. 하며 부정적인 생각을 불어 넣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수많은 단점, 약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붙드시고 회복시키십니다. 베드로와 대화를 나누면서 주님은 베드로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던 주님에 대한 사랑을 끄집어내십니다. 그리고 거기에 불을 지피십니다. 그러자 베드로의 마음이 열리고 믿음으로 반응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주변의 돌아가는 상황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도 베드로처럼 육체에 져서 주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다는 자책감에 빠지지는 않으십니까? 방향감각을 잃고 방황하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함으로 베드로는 원래의 모습을 찾게 된 것처럼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믿음으로 고백할 때 어떤 위기 속에서도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에는 네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이냐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네가 나를 주로 섬기느냐 네가 나를 왕으로 모시고 있느냐 묻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을 때 마가복음에 의하면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까?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 의하여 세례를 받으실 때였습니다. 눅 3: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하며 예수께서 백성들과 함께 세례를 받으신 것을 언급합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늘이 갈라지는 것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모습을 예수님께서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 문을 여시고 하나님의 아들 위에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사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며 이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예언하였습니다.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임한 사건은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보여줍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늘의 음성이 들리면서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임명하시는 메시야라는 확인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세례식은 메시야 즉위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기름 부음을 받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선지자, 제사장, 왕.

그들이 취임하거나 사역할 때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1) 선지자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하는 사명을 감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계실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하는 선지자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메시지의 요약이 마가복음 1:15절에 나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은 광야에서 호숫가에서, 성전에서, 회당에서, 길가에서 어디서든지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서기관들 것과는 차원이 다른 능력 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을 포함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적을 보고도 마음이 완악하여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비추어보며 하나님을 모독하였다고 십자가에 죽게 하였습니다.



2) 제사장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 있는 성소와 제단에 봉사하는 일을 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백성에게 가르치는 일을 하고, 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일을 수행하는데 그중의 가장 큰 역할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중보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께 고하고 그들의 죄를 위하여 사하기를 구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오르셨을 때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롬 8:34,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예수님은 부활 후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역할을 하는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히 5:10에 의하면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하였습니다.



3) 세 번째로 기름부음을 받는 사람이 왕입니다.

왕은 나라를 다스립니다. 백성들은 왕의 말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오순절에 간절히 기도하던 120명의 무리들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성령은 예수의 영이요 부활의 영인데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부어졌습니다. 행 2:3절에 보면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성령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믿는 자들 가운데 내주하셔서 우리의 삶을 주장하십니다. 빌 2:9-11,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성령이 이끌려 산다는 것이고 성령을 보내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왕 되신 주님을 우리가 모시고 살면 예수님을 닮아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육체로 오셨을 때 선지자 역할을 감당하셨고, 부활 승천 하신 후에는 제사장 역할을 수행하시고, 오순절 후에는 성령의 부어주심을 인하여 우리의 왕이 되셔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2 단계: 사명을 주십니다. (왕의 명령을 따를 것을 촉구합니다)

주님과 화목한 자들만이 주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일은 주님을 먼저 그리고 더 사랑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할 때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사랑하시고 베드로의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라고 하시면서 다른 영혼에 대한 책임을 맡기십니다.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눅 10:27)고 하셨는데 네 이웃을 네 몸과 사랑하라는 말은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그들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주님의 양들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자들만이 주님의 양들을 돌볼 수 때문입니다.  

  

3 단계: 사명자의 자세를 언급하십니다. (왕을 따르는 자세는 한결같아야 합니다)

1) 끝까지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막 14:31)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장담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체포되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이나 고백한 베드로는 진심으로 주님을 따르기 원하였습니다. 주님은 앞으로 베드로에게 될 일을 말씀하십니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8 절). 주님은 베드로가 당할 고난의 성질과 때와 방법까지 이미 알고 계십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주후 64년 로마 황제인 네로의 박해 때에 순교하였습니다. 후대 역사의 전승은 그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죽음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합니다. 즉 주님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순교를 예고하시면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의 배신으로 인하여 손상된 주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음을 증명합니다. 나를 좇으라는 것은 일생동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야 하는 주님에 대한 전적인 순종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희생할 자세를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릅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기 적성이나 기분에 따라 자기 좋아하는 일만 하고 싫어하는 일은 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비록 내가 원치 않는 길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원하시면 기꺼이 자신을 복종시키며 주님을 따라갈 각오를 해야 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런 길을 갔기에 그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와 동행하며 신앙생활을 하기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살다 보면 뜻하든 뜻하지 않든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주님을 실망시킬 때가 있습니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시간 우리 각자에게 던지는 주님의 질문입니다. 우리의 실패와 절망과 낙담의 이유와 변명을 듣고 싶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를 사랑합니다” 라는 답변을 듣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완벽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나아오는 자를 받아 주십니다. 토기장이가 흙을 빚어 자기가 원하는 그릇을 만들어가듯이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의 뜻대로 우리를 빚어 가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너무도 귀한지라 그를 믿는 성도들을 귀하게 보십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 끈질긴 사랑이 있었기에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그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허물이 클지라도 진심으로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면 우리를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먼저 더 사랑하고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기도와 말씀과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우리와 만나시기 원하십니다.  



2) 내게 주신 사명만 충실하면 됩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을 하고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때 베드로에게 주님 곁에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였습니다. 누굽니까? 요한. 그는 최후의 만찬 때도 예수님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그 요한이 예수님 가까이 있는 것을 보니 베드로의 마음에 동요가 생깁니다. 주여, 나는 예수님을 따라 사명을 감당하다가 죽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데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 주님은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를 살려둔다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며 베드로를 책망하십니다. 요한이 어떻게 되든 네가 알 바 아니고 너는 나를 따르기만 하면 돼. 내가 너에게 준 사명, 나의 양 무리를 섬기는 사명만 감당하면 돼. 시기심은 공동체를 멍들게 하고 분열을 일으킵니다. 그 동안 겉으로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베드로는 요한이 평소에 예수님 가까이 있는 것이 은근히 마음에 걸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믿음의 형제들과 비교하면서 우월감을 가지거나 열등감을 갖지 말고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뜻입니다. 언제 섭섭한 마음이 듭니까? 저 사람이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하지 못한 것을 하거나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을 때입니다. 나보다 어린데. 나보다 배우지 못하였는데. 나보다 늦게 이민 왔는데. 나보다 늦게 예수 믿었는데 등등. 과거의 기준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거나 그의 현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시기, 질투, 섭섭함은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가 되는데 방해가 됩니다. 평화를 깨뜨립니다. 하나가 되려면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베드로가 요한에 대하여 가진 마음을 혹시 우리 형제나 자매에 대하여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섭섭한 마음은 주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에만 충실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한 사역이나 열매를 인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일 것이 아니라 함께 기뻐하고 격려하는 자세를 가지라는 뜻입니다. 갈 6: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라”  



* 주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가 나타납니까?

1) 주님을 사랑합니다.

2) 주님이 맡기신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3) 주님을 끝까지 따릅니다.

4) 주님이 맡기신 사명에 충실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주님을 배반합니까? 그것을 깨달을 때마다 나는 역시 안 돼. 내가 언제까지 이런 추한 모습을 가질 것인가 자책합니까? 그럴수록 자신의 부족함, 죄인 됨을 인정하고 더욱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뿐 아니라 더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병든 자를 치료하고 상처받은 자를 싸매 주고 평강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을 걸고 사랑할만한 분, 우리의 인생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을 내 문제나 해결해주거나 아쉬울 때만 찾는 하인으로서가 아니라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능력 달라고 산에 가서 소리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사십일 금식기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나머지 모든 것이 따라옵니다. 능력의 근원, 지혜의 근원, 우리의 모든 문제를 아시고 해결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만 붙들면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면 됩니다. 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더 이상 신앙생활 하는데 주변만 돌지 마시고 주님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삶이 고달프다고 낙심하지 맙시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예배를 통하여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나타나 주시고 우리와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그분을 따르면서 각자를 향한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자연스럽게 우리는 성령의 전이 됩니다. 그런 성도들의 헌신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교회당이 지어집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굴레에서 자유함을 얻게 하신 주님과 관계를 회복하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는 체험을 하며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쓰임 받으시는 왕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