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야곱의 축복(1) (창 48)

Author
Myung Myung
Date
2007-08-26 14:28
Views
5259
창 48:1-22 야곱의 축복(1)



한번 이 땅에 온 인생은 반드시 떠날 때가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그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성도들은 이 세상을 떠날 때 무엇을 남기시겠습니까? 특히 부모가 떠날 때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저희 아버지도 암으로 투병하시던 중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때는 돌아가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암이 다시 퍼지기 시작하여 2번째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병원에 계셨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이 상태가 좋아지셨습니다. 계속 누워계시다가 침대에 앉으셨습니다. 고통이 많으니 거의 말이 없으셨는데 농담도 하셨습니다. 불이 꺼질 때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이 그게 마지막 사인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저희 식구들은 그저 상태가 좋아지는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예수님을 영접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습니다. 어머니와 남동생과 병실에 있었는데 갑자기 기도를 하십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할 수 없으나 신앙생활 잘 하고 가족들끼리 잘 섬기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말이 아버지로부터 들은 처음이자 마지막 기도였습니다. 그 말이 유언이 되고 말았습니다. 며칠동안 병상을 지켰는데 저는 아버지가 회복되는 줄 알고 근무지인 진해로 내려갔고, 어머니는 그날 밤 동생과 함께 집으로 가셔서 쉬셨습니다. 아버지는 그날 밤 돌아가셨습니다. 저희 세 식구 아무도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본문을 보니 야곱이 요셉과 그 두 아들 앞에서 유언을 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하는 유언과 성격이 다릅니다. 야곱의 유언은 자식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기 위한 신앙 간증이요, 조상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전수하는 기회였습니다. 야곱의 유언은 자식들을 향한 축복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깨닫습니다.

야곱이 이집트에 이민을 온 지 17년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늙고 병들고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문병을 갔습니다. 야곱은 자기 아들 요셉이 문병하러 왔다는 말을 듣고 힘을 내어 침대에 일어나 앉습니다.



늙고 병든 야곱이 자식을 위하여 마지막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조상과 자신이 믿고 섬긴 하나님을 전수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을 믿음으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사실 야곱의 집은 보통 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복의 줄기가 흐르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 12:2-3) 하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될 것이요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얻는 복의 전달자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붙들고 이민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아들 이삭에게 전수하였고 이삭은 그 아들 야곱에게 전수하였습니다. 이제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운 야곱이 그 약속을 요셉에게 전합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자신에게 주신 말씀을 근거로 요셉에게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가나안 땅 루스에서 나에게 나타나셔서, 나에게 약속을 주셨다. '내가 너에게 많은 자손을 주고 너를 번성하게 하여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겠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복은 크게 두 가지: 자손의 복과 땅의 복. 야곱의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 하였는데 과연 야곱이 이집트에 정착한 이래 후손들이 번성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에 있는 야곱의 자손들은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식이 아니라,‘날 수 있을 때 얼마든지 낳자’는 식이었습니다. 야곱은 자녀들이 많아지는 현상을 보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 다른 약속은 가나안을 야곱의 후손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겠다는 것입니다. 가나안이 그들의 영원한 소유가 되려면 그들이 이집트에만 머물 수 없고, 언젠가는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야곱은 자기의 후손들이 언젠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돌아갈 것을 알았기에 자신의 시신을 조상들이 묻힌 가나안 땅에 장사를 지내라고 요셉에게 맹세를 시켰습니다. 이집트에서 야곱의 자손을 큰 민족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어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인 것을 알았기에 야곱은 자신의 열두 아들을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으로 세울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자식으로 입양합니다.

야곱은 뜻밖의 말을 요셉에게 합니다. 내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이집트에서 너에게 태어난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아들이다. 내가 그들을 르우벤과 시므온과 같은 아들로 삼겠다. 앞으로 네가 아들을 더 낳게 되면 그들은 네 아들이 될 것이며 또 그들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이름으로 유산을 받게 될 것이다. 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의 친 아들로 입양합니까? 요셉의 아내는 히브리 여인이 아니라 이집트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인 아스낫입니다.(창 46:20) 요셉의 아들들은 이방인의 피가 섞였으나 야곱은 이들을  요셉의 아들인 아닌 자기의 친아들로 여겨 갑절의 복을 베풉니다.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이유는 라헬 때문입니다. 야곱은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을 보면서 자기가 사랑하던 아내 라헬을 생각하였습니다. 라헬을 얻기 위하여 수고를 수고로 여기지 않고 외삼촌 밑에서 무려 14년을 열심히 일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라헬과 다른 아내들을 데리고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고향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헬이 막내아들 베냐민을 낳다가 가나안 땅에서 죽고 말았는데 그 곳은 베들레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를 떠나보낸 슬픔을 억누르고 야곱은 라헬을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옆에 묻었습니다. 야곱은 아픔을 딛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참고로 아브라함과 이삭이 묻힌 무덤에 또 누가 묻혀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묻혀 있습니다. 이제 야곱의 곁에 어느 아내가  묻히게 됩니까? 그가 사랑하던 아내 라헬이 아니라 그의 첫 아내인 레아가 묻히게 됩니다.



야곱이 너무 늙어 볼 수 없었기에 자기 앞에 있는 젊은이들이 누구인지 요셉에게 묻습니다. 야곱의 모습은 창세기 27장에 나오는 그의 아버지 이삭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27:1) 야곱은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속이고 형이 받아야 할 장자의 축복을 대신 받습니다. 야곱도 이삭처럼 눈이 어둡지만 두 사람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야곱은 영안이 어두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아이들은 누구냐?" 이곳 이집트에서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자식들입니다. 그래? 아이들을 나에게로 가까이 데리고 오너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겠다. 요셉이 두 아들을 아버지 앞으로 데리고 가자 야곱은 그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자기 무릎 사이에 세움으로써 그들을 애굽인이 아닌 진정한 이스라엘 자손으로 받아들입니다. 내가 너를 다시 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네 자녀들까지 보게 하셨구나 요셉에게 하면서 감격해 합니다.



요셉은 장자의 명분을 누립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요셉 지파 대신 장차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될 열두 지파의 기초를 세웁니다.  그러면 열세지파가 되는데 레위지파는 제사장 지파로서 하나님만 섬기도록 기업이 별도로 없으므로 결국 열두 지파가 됩니다. 그들이 야곱의 다른 아들들과 함께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됩니다. 신명기에 의하면 장자는 두 몫을 받습니다.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신 21:17) 그런데 요셉은 두 아들을 인하여 두 몫을 받음으로 실질적으로 장자의 명분을 누렸습니다. 르우벤은 맏아들이지만, 그의 아버지의 잠자리를 더럽혔으므로, 맏아들의 권리가 요셉의 아들들에게 넘어갔고, 족보에 맏아들로 오르지 못하였습니다. (역대상 5:1) 그러나 궁극적으로 장자권을 소유한 사람을 유다였습니다. 창 49:10절에 보면 "왕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않고, 통치자의 지휘봉이 자손만대에까지 이를 것이다. 권능으로 그 자리에 앉을 분이 오시면, 만민이 그에게 순종할 것이다." (창 49:10)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이끌고 나갈 권세와 능력이 유다 지파에게 주어집니다.



야곱은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을 얹고 축복합니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데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무릎에서 두 아들을 물러서게 하고 바닥에 엎드려 아버지에게 절한 후 에브라임을 야곱의 왼편에,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편에 각각 앉힙니다. 야곱이 팔을 펴기만 하면 오른손으로 요셉의 장남을, 왼손으로는 차남을 축복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팔을 어긋맞게 펴서 에브라임이 차남인데도 오른손을 그의 머리 위에 얹고 므낫세는 장남인데도 왼손을 그의 머리 위에 얹습니다. 요셉은 그 장면을 보면서 당황했지만 미처 말릴 사이 없이 야곱은 요셉을 축복하기 시작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이란 단어 앞에 세 가지 수식어를 붙입니다. 내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내 아버지 이삭이 섬기신 하나님, 오늘날까지 평생 나의 목자가 되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져 주신 사자께서 요셉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요셉의 자손이 이 땅에서 크게 번성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축복하는데 요셉은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영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오른쪽은 능력을 상징하고 귀한 자들이 차지하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요셉은 히브리 전통에 따라 장자인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쪽에 두었습니다. 장남이 당연히 더 큰 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그 손을 잡으며 아버지! 이 아이가 맏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오른손을 큰 아이의 머리에 얹으셔야 합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눈이 어두워 실수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반응은 단호합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차남인 에브라임에게 자기의 오른 손을 얹은 것을 알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요셉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기준에 따라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로만 이해가 됩니다. 세상이 대단한 인물로 여기는 사람들을 형편없이 낮추려고 천한 사람과 멸시받는 사람과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전 1:28-29) 하나님은 작은 자에게 더 복을 주기 원하셨습니다. 사실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을 보면 장남이 영적인 장자가 된 경우가 없습니다. 이것을 보면 야곱은 나이 많아 육신의 눈은 어두웠으나 영의 눈은 밝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간교했던 야곱이 험악한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대 최강대국인 이집트. 그 이집트의 총리를 아들로 둔 이집트에서 영화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지만 야곱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이 그의 후손들을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여 가실 것을 믿었습니다. “므낫세도 한 민족의 조상이 되어 크게 되겠지만 그의 동생은 그보다 더 크게 되어 그 후손이 여러 민족을 이룰 것이다." 야곱은 계속하여 그들을 축복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축복을 할 때 너희 이름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너를 에브라임과 므낫세처럼 되게 하시기를 원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들이 되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이를 테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 나도 에브라임처럼 복을 받게 하여 주옵소서 한다는 말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이와 같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복을 주는 자의 모델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야곱은 특별히 요셉에게 비옥한 세겜 땅을 줍니다.

마지막으로 야곱은 요셉에게 약속을 합니다.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와 함께 계셔서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 내가 특별히 비옥한 세겜 땅을 네 형들에게 주지 않고 너에게 주겠다. 이것은 내가 아모리 족속에게서 칼과 활로 빼앗은 땅이다." 창세기를 보면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성 남자들을 죽였다는 기록은 있어도 야곱이 전쟁으로 하여 아모리 족속에게 땅을 빼앗았다는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땅은 여호수아 이전에 전쟁을 통하여 땅을 차지한 첫 번째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땅을 요셉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야곱이 붙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내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내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조상의 하나님은 백성을 부르시고 그분의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뜻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지켜주신 하나님입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아브라함과 이삭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부족한 점도 많이 드러났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붙드셨기에 그들은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고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야곱도 비록 나그네의 삶, 험난한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이 자기의 삶에 간섭하셔서 인도하심으로 믿음을 갖게 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방황하고 외롭고 낙심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벧엘에서, 얍복강 나루터에서 그는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였습니다. 이제 그가 경험한 하나님을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믿음으로 살도록 지켜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거친 세상에서도 믿음으로 이기게 하시는 주님을 우리 모두 붙들어야 합니다.



2) 오늘날까지 평생 나의 목자가 되신 하나님

목자는 양을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합니다. 사나운 짐승이 오면 쫓아냅니다. 웅덩이에 빠질지라도 건져냅니다. 야곱은 일생동안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가나안에서 메소포타미아로, 메소포타미아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계속 옮겨 다녔습니다. 야곱이 목자이신 하나님으로 부르는 이유는 당신의 종을 인도하시고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주야로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길러주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목자 되신 하나님을 자식들에게 소개하며 그들의 삶 또한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3)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져내신 천사

야곱은 조상들에 비하여 짧지만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바로 앞에서 고백하였습니다. 야곱은 요셉과 그의 아들들 앞에서 자신이 많은 환난을 당한 것을 숨기지 않습니다. 나그네의 여정에 많은 환난을 겪었지만 그때마다 그를 건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였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모든 환난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는 천사로 묘사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몇 번이나 천사의 형상으로 야곱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천사를 경험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치려고 할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며 급하게 불렀습니다. (창 22:11)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창 28:12)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32:1) 그곳을 마하나임이라 불렀습니다. 세겜에서 곤욕을 당한 야곱이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 약속을 했던 베델로 올라갑니다. 창 35: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4) 우리를 대신하여 값을 치르시는 하나님

야곱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면서 자기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분이라고 합니다. ‘건진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가알’은 자기 친족의 어려움이나 위험에서 구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룻기에 보면 나오미는 10년 전 베들레헴을 떠날 때 자기 남편이 소속된 엘리멕렉 가문의 땅을 팔았습니다. 판 땅을 다시 가지려면 가까운 친족 중에 누군가가 토지를 사야하고 그 집 며느리인 룻을 아내로 취하여 아들을 낳아 그 이름으로 토지를 상속시켜야 합니다.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는 기업 무를 책임을 감당하다가 손해를 볼까봐 포기하였습니다.  그는 눈 앞에 있는 이익 때문에 공동체로서의 의무를 회피하였습니다. 그러자 보아스는 성읍의 장로들을 불러 모으고 나오미의 팔아버린 기업을 무르는 일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는 땅값을 지불하고 룻을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보아스와 룻 사이에 난 자손 중에서 다윗이 나왔습니다. 다윗의 자손 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났습니다. 보아스가 값을 지불하고 룻을 아내로 맞아 들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당신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 것을 예표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정정당당하게 값 주고 사셨기에 우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실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들은  잃어버린 기업을 회복하게 되었으며 다시금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친족으로서 모든 환난에서 건지십니다. 즉 하나님은 각 사람의 고엘이 되어주십니다. 그러니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더라도 염려하거나 낙심하지 아니하고 담대함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야곱은 그의 고백처럼 험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험난한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환난에서 구원하시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야곱의 모습을 통하여 얻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1) 믿음으로 자손을 축복해야 합니다.

인생의 마지막 때가 되어 자식들에게 무슨 말을 하시겠습니까? 내가 남겨 놓은 재산이 어디에 얼마가 있고 그것을 관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고 하면서 세상에서 사는 비결을 알려주시겠습니까? 그것이 잘못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보다 귀한 모습을 야곱은 자식들에게 보여줍니다. 야곱이 요셉과 그의 아들들에게 물려준 것은 돈이나 물질이 아닙니다. 그가 경험한 하나님입니다. 로이스의 믿음이 유니게에게, 유니게의 믿음이 디모데에게 내려갔다고 바울을 디모데후서 1:5절에서 말합니다. 자식에게 믿음의 유산을 남겨주는 것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조상이 섬겼던 하나님,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알려줄 뿐 아니라 그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붙들게 하면서 자식들에게 믿음을 전수합니다.

물론 임종 전에만 자식을 축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날마다 축복해야 합니다. 요즘같이 험난한 세상에서 자식들은 더욱 부모의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아빠의 축복, 엄마의 기도를 받고 자란 아이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잠시 치우칠지라도 다시 돌아옵니다.



2)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떠났지만 형통할 수 있었습니다. 벧엘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 야곱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 28:15) 신실하신 하나님은 과연 야곱과 함께 하시면서 그를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야곱이 가족들을 이끌고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내려왔을 때, 그리고 이집트에서 정착할 때도 함께 하나님은 여전히 함께 하셨습니다. 요셉이 종으로 팔려 갔었고 감옥에도 갇혀 있었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그의 집안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모세는 나일 강물에 던져졌으나 이집트 공주의 손에 건짐을 받아 살 수 있었고 종으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에 비하여 모든 면에 걸쳐 열세였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형제 중 막내이던 다윗이 왕이 되었고 솔로몬은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되어 그의 나라가 창대케 되었고 성전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사망 권세에서 자유함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가 주님의 인도하심과 은총을 받으며 삽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수 1:9)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을 고백하는 성도들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인하여 담대해야 합니다.



야곱이 경험한 하나님의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고난은 삶의 일부입니다. 믿음의 여정 가운데도 여전히 고난은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면 당연히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막지는 못합니다. 바울이 일차 전도 여행 중 소아시아를 다니면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기 위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권면하였습니다. (행 14:22)  야곱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신실하십니다. 목자가 되십니다. 환난에서 건지십니다.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4-15)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짐을 대신 지고 죽으시면서 기업 무를 자의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고 (마 28:20)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며 야곱과 같이 하나님의 복의 전달자로서 사명을 감당하고, 특별히 자손들을 축복하며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 지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