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으니 (창 47:13-31)

Author
Myung Myung
Date
2007-08-19 15:05
Views
3354
창 47:13-31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으니



북한에서는 90년대에 닥친 기근으로 인하여 삼백만 가까운 주민들이 굶어죽었다고 합니다. 수십만 명의 탈북자가 중국과 인근 나라에 흩어지게 된 것도 이 기근의 영향이 큽니다. 북한에서 지난주에 있었던 폭우로 또다시 북한 동포 수백 명이 죽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립니다. 기근은 예나 지금이나 천재지변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부터 거의 4000년 전 중근동 지방에 기근이 몰아닥쳤습니다. 얼마나 그 기근이 심했던지 바로 직전에 있던 7년 동안의 풍년이 기억이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7년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으니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래로 있다가는 모두 굶어죽을 수밖에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가족이 애굽에 정착한 이후로도 5년이나 더 기근이 계속되었지만 그들 또한 애굽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 도리어 생육하고 번성하였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서 엄청난 기근 속에서 애굽 사람들과 주변 나라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했습니다. 요셉은 지혜로운 정책을 수행하면서 이 난국을 극복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줄 알았는데 애굽 사람들에게까지 그 손길을 뻗치십니다. 왜 그럴까요? 본문을 살펴보면서 그에 대한 답변을 얻기 원합니다.



요셉의 식량정책 (47:13-26)

1) 애굽의 모든 토지가 바로의 소유가 됩니다.

계속 되는 기근으로 도처에 식량부족사태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왕의 창고에는 충분한 양의 양식이 비축되어 있었습니다. 요셉이 장차 임할 7년 기근에 대비하여 한 가지 대책을 바로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임금님께서는 전국에 관리들을 임명하셔서, 풍년이 계속되는 일곱 해 동안에, 이집트 땅에서 거둔 것의 오분의 일을 해마다 가두어 왕의 권한으로 각 성의 창고에 비축해 두십시오. (창 41:34) 요셉의 제안대로 애굽 땅에서 거둔 곡식의 5분의 일씩을 거두어 창고에 쌓아 두었습니다. 풍년 때 모아두었던 양식으로 기근을 겪는 백성들에게 공급합니다. 그런데 요셉의 식량 공급 정책은 어떠합니까? 그냥 나누어주지 않고 전부 사먹게 하였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처음에는 돈을 가지고 곡식을 사러왔는데, 돈이 떨어지니 요셉은 그들에게 가축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들은 말과 양 떼와 소 떼와 나귀를 끌고와서 양식을 얻습니다. 그러다가 가축도 떨어지니까 이번에는 그들이 가진 땅을 팔게 합니다. 그 결과 애굽 사람들의 돈, 가축, 땅이 모두 바로의 소유가 되었고 나중에는 그들의 몸까지 팔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모든 백성을 노예로 삼고 애굽 전역의 토지를 사들였으나 제사장들의 토지는 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바로가 제공하는 양식을 먹고 살았으므로 자기들의 땅을 팔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2) 토지 소산의 오분의 일을 바쳐야 합니다.

기근이 계속되면서 애굽 사람들은 모두 바로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애굽 전역을 여러 성읍으로 나누고, 백성을 옮겨서 살게 하였습니다. 땅을 분배한 후에 종자씨를 그들에게 주고 농사를 짓게 합니다. 추수 때가 되면 그들은 바로에게 5분의 1을 바쳐야 했습니다.  



3) 토지 소산의 오분의 4는 농사짓는 자들의 몫이 됩니다.

애굽의 토지는 국가 소유이므로 농사를 지은 사람들은 세금 명목으로 5분의 일을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들의 몫으로 가집니다. 여기에서 토지 공개념이 나옵니다. 땅을 빌릴 수는 있으나 영원히 소유하지는 못합니다. 계약한 기간 동안만 그 토지를 사용하며 그에 합당한 사용료를 지불해야 합니다. 이런 개념 하에서는 한국에서 흔히 보아온 땅 투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요셉의 경우는 백성들의 토지를 강제적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양식을 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토지정책을 채택한 이유는 바로에게 권력을 집중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백성을 기근에서 건지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려운 시절에 경제장관을 맡으면 욕을 먹기 십상입니다. 한국에서 IMF 사태 이후 구조조정을 하느라 관련자들이 많은 욕을 먹었습니다. 요셉도 어떤 의미에서 식량 공급을 이용한 구조조정을 하였습니다. 요셉이 철저하게 정책을 수행하는 동안에 백성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바로에게 넘기고 말았습니다. 흉년이 들기 전까지 바로가 애굽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였습니다. 애굽인이 아닌 가나안 출신의 힉소스 왕조가 애굽을 다스리려다보니 인심을 얻기 위해 애굽인들에게 포용정책을 쓰면서 많은 자유를 허락하였습니다. 게다가 애굽 사람들은 칠년 풍년에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씀씀이가 컸습니다. 불황을 이기기 위하여 허리띠를 졸라 매는데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세를 가지고는 칠년의 기근을 지낼 수 없었기에 요셉은 식량 공급정책을 엄격하게 시행하였습니다. 먹고 살자니 백성들은 가지고 있던 것들을 숨김없이 다 내어 놓고 양식을 구해야만 했습니다. 사람도 먹을 것이 없는데 가축 먹일 것이 어디 있습니까? 뿌릴 씨도 없는데 땅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나중에는 자기들의 몸까지 바로에게 팔면서 양식을 구했습니다.



야곱의 유언 (47:27-31)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의 고센 땅에 살면서 재산을 모으고 생육하고 번성하였다고 합니다. 이 문장은 야곱의 가족이 단지 형통하고 많은 자녀를 낳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생육하고 번성한다는 말이 창세기에 여러 차례 나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창 1:28)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셨습니다. (창 9:1) 이삭이 야곱을 라반의 집으로 보내면서 축복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창 28:3) 하나님이 벧엘에서 야곱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창 35:11) 본문에서 생육하고 번성한다는 표현을 한 것은 야곱의 가족이 애굽에서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줍니다. 야곱이 애굽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야곱의 가족은 애굽의 고센 땅에 살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에 신실함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야곱의 가족은 큰 민족을 이루어갑니다. 그 과정에 야곱의 가족을 선대한 바로도 복을 받습니다.



야곱은 가나안과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130년 간 살았고, 애굽에서 17년을 살았습니다. 이제 그의 나이 147세가 되었습니다. 그의 생애 마지막 해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때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곳에서 생육하고 번성할 것을 야곱은 믿음의 눈으로 보았기에 죽을 날을 앞두고 요셉을 부릅니다. "네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네 손을 내 환도뼈 아래에 넣고” (창 24:2) 이 명령은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의 신부감을 자기 고향에서 데려오도록 하인을 보낼 때 한 명령과 동일합니다. 손을 환도뼈 아래에 넣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허벅지 밑에 남자의 성기부분을 가리킵니다. 맹세할 때 쓰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죽든지 살든지 상관없이 어떤 일이 있어도 이삭의 아내는 가나안이 아닌 아브라함의 고향에서 데려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야곱은 요셉에게 자기를 애굽에 장사하지 않겠다고 엄숙하게 맹세시킵니다. “내가 죽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들이 묻혀 있는 곳에 나를 매장하여라.” 아브라함과 이삭이 묻힌 곳에 자기도 묻히겠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가족의 끈끈한 관계가 강조됩니다. 야곱은 죽을 때에 자기 친척들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요셉이 아버지의 말씀대로 하겠다고 하니 맹세를 시킵니다. 요셉이 맹세하자 야곱은 침대 머리맡에서 하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1) 성도는 하나님의 소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애굽 백성들은 자기들이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 양식을 얻는 과정에서 그들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었고, 그들은 바로의 종이 되었습니다. 소유권이 이전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로의 소유가 되어 바로가 하라는 대로 순종해야 했고, 바로에게 바칠 것은 마땅히 바쳐야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를 믿기 전에는 죄 아래 있었고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에서 자유함을 얻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은 거듭나게 되고 마귀의 소속에서 주님께로 소속이 바뀌게 됩니다. 애굽의 토지가 바로의 것이 된 것처럼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마귀의 종살이 하던 저희를 자유케 하신 그 은혜에 어떻게 보답해야 합니까? 고전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 말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자기의 삶에 주인이 되어 하나님 보시기에 죄악된 행동을 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책망입니다.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고 주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신앙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그분이 나를 위하여 하신 것을 믿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 길이 열려졌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이제가 내가 그분을 위하여 사는 삶입니다. 신학적인 표현을 빌면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별로 변화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성화의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닮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속적인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속사람이 변화되는 것을 게을리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신지라 우리의 인생을 책임지십니다.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근심과 걱정과 염려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살아서는 안 됩니다. 죄로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하여 베풀어놓으신 영생의 길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성도는 복을 전하는 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세기 기자가 야곱 가족의 애굽 정착을 이야기 하면서 갑자기 요셉의 식량정책에 대하여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심각한 기근을 겪지만 요셉으로부터 양식을 얻은 백성들은 굶어 죽지 않았습니다. 기근을 겪는 동안 제사장의 토지를 제외한 애굽의 모든 토지가 바로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기근을 통하여 바로는 더 막강한 권력과 재물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부르는 사건과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 12:3)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은 복을 받을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다른 민족들을 복 주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요셉이 애굽으로 갔습니다. 요셉을 인하여 애굽이 복을 받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애굽을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요셉을 인하여 애굽 주변 나라가 복을 받습니다. 기근으로 먹을 것이 없어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요셉이 다스리는 애굽에서 양식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애굽에 피신을 와서 바로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야곱은 담대하게 바로를 축복하였고 (4, 9절) 애굽의 총리로 세움 받은 요셉의 지혜로운 정책을 인하여 중근동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기근에도 굶지 않고 삽니다. 기근을 통하여 누가 축복하는 자인가? 누가 복을 주는가 분명히 보여줍니다. 복을 비는 자는 이스라엘이요, 복을 베푸는 자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다른 민족들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섬기면서 복을 받을 때 그들의 삶 자체가 강력한 전도의 수단이 됩니다. 살아있는 간증이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온 세상이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게 복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 또는 우리라는 경계를 넘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주기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주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라는 경계를 넘어 다른 곳으로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고 역사를 볼 때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을 축복하는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만 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도리어 그들이 복 받는 것을 시기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복 받을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복에 관심도 없었고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갈 복의 통로도 막아 버렸습니다. 요나서에 나타난 요나의 태도가 바로 그런 이스라엘의 편협한 자세를 대변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 23:13) 나는 혹시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려는 문을 막지는 않았습니까? 교회당 문에 서서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말이나 행실을 인하여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거나 실망을 주지는 않았느냐는 말입니다. 갈 3: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하였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과 같이 복을 받게 되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그 복을 전하게 됩니다. 이 자리에 있는 성도들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3) 신앙의 구조조정이 필요합니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파문이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이번 문제는 신용도가 낮은 사람들에게 대출을 하는 과정에서 생겼습니다. zero down에 처음 몇 년 간은 이자만 갚는 다는 상술에 넘어가 여력도 별로 없으면서 투자 명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집을 샀습니다. 그런데 이제 거품이 터졌습니다. 금리 인상으로 이자 및 원리금 상환에 압박을 받습니다. 은행빚을 갚지 못해 많은 집들이 은행으로 넘어갑니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주택 공매를 통하여 은행이 대출금을 회수하는데 상당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파급혀과가 전세계로 퍼져가고 있습니다. 기근이 들었을 때 평소와 같이 흥청망청 먹고 쓰다가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고난의 때에는 허리띠를 졸라매야 합니다.



1997년에 한국에서 IMF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외국에서 잔뜩 빚을 끌어다 쓰면서 십대 선진국, 국민소득 2만 불이라는 장밋빛 환상 속에 흥청망청 소비하다 보니 나라의 경제가 거덜나고 기업이 도산하고 살아남겠다는 기업들은 구조조정을 실시하고 그 와중에 수많은 가정이 깨어졌습니다. 그때의 위기는 극복하였다는데 요즈음의 한국 상황을 보면 벌써 IMF 때의 교훈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IMF 사태 이후에 한국에 전에 별로 보지 못하던 홈리스 피플이 많아졌습니다. IMF 사태도 믿음의 눈으로 볼 때는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인 기근에는 민감하면서 혹시 영적인 기근에 대하여 둔감하지는 않습니까? 혹시 우리가 영적인 홈리스는 아닌지요?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보시면서 혹시 주님께서 안타까워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모스 선지자는 말합니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암 3:11) 영적이 기갈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서는 안 됩니다.



요셉의 경제정책은 뼈를 깎는 구조조정이었습니다. 요셉을 그냥 곡식을 나누어주지 않았습니다. 모두 돈을 내고 사게 하였습니다. 돈을 없으면 가축을 팔게 하였습니다. 가축도 떨어지면 땅을 팔게 하고 나중에는 몸까지 팔게 하였습니다. 종이 된 신분에서 생산량의 5분의 일을 바치라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셉이 인정머리 없는 잔인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어려운 때를 이용하여 자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함이었습니까? 요셉은 경제 정책을 통하여 개인의 이득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애굽 사람들이 백성들이 불평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요셉의 식량 정책이 너무 지나치다고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말이 없습니다. 만약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의 소유를 포기하기 않았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포기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은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신앙생활에도 구조조정이 때로 필요합니다.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에 벗어나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나의 삶에 변두리로 밀려나 있지는 않습니다. 어디에 가장 많은 시간과 정성을 쓰고 있습니까?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즐기고 싶은 것 다하고 짜투리 시간만 주님을 드리면서 생색을 내지는 않습니까?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고전 4:8)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고 탄식하였습니다. 내 자신의 삶이 주 앞에서 완전히 깨어져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의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복만 받으려 한다면 예수님의 구원을 값싼 것으로 만드는 결과가 됩니다. 곪은 데가 있으면 잘라내야지 무조건 덮는다고 치료가 됩니까? 치유와 회복을 외치기 전에 우리의 허물들이 주님께 내어 놓고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다윗은 노래합니다. (시 32:1) 이제 중요한 것은 철저한 회개를 바탕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받은 은혜가 가정에서 실천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롬 13:11-12,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바로 설 때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우리를 몰아가십니다. 그런 상황에 이르기 전에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께 우선 순위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할 때 우리는 얼마나 주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애굽의 온 땅이 기근으로 난리인 상황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어떠합니까? 그야말로 고센 땅에서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부지런히 아이를 낳으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였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애굽의 모든 조건과 환경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하심이 나타납니다. 야곱은 자기와 요셉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다시 한번 전능하신 하나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 28:15)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신 약속은 한번 이루어진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야곱은 그 약속을 계속 붙들었습니다. 하란에서 돌아올 때로 붙들었습니다. 죽을 때가 가까워 애굽에 있으면서도 그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그렇기에 가나안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요셉에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극한 기근 속에서도 이스라엘 족속은 하나님의 은혜로 점점 강성해져갔습니다. 이스라엘을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의 성취입니다. 야곱 또한 이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며 살아가십니까? 설령 우리의 삶에 기근이 있을지라도 야곱이 붙들었던 그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택하신 백성들에게 오셔서 동일한 은혜를 베풀기 원하십니다.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며 인생을 주님 보시기에 귀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주신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하며 예비하신 신령하고도 기름진 하나님의 복을 받으시고 나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