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창 47:1-12)

Author
Myung Myung
Date
2007-08-12 15:32
Views
5443
창 47:1-12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제가 신학교에 다니기 시작 이후로 수백 번 받은 질문이 있습니다. “왜 멀쩡히 공학을 하다가 목회의 길로 가셨습니까?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는 거 아닙니까?” 목회를 하면서 많이 받기 시작한 또 다른 질문은 “목회하는 것 골치 아픈데 목사가 된 것을 혹시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제가 새가족반을 인도할 때마다 신상발언을 하니까 혹시 저에 대하여 궁금하신 분들은 다음 달에 시작하는 새가족반에 오시기 바랍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과거를 잠시 돌아보면서, 공학을 전공하였으니 학교에서 가르치든지 아니면 석유회사에서 일하면 되는데 왜 목회를 하게 되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그와 함께 그동안 사역한 것을 돌아봅니다. 후회는 없지만 아쉬운 것들은 많습니다. 내가 좀 더 믿음으로 나갔더라면, 그때 지혜 있게 행동하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쨌든 정신없이 달려가기만 할 것이 아니라 수시로 달려온 길을 점검해보고 끊임없이 달려갈 길을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수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누가 묻는다면 이 자리에 있는 성도님들은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1)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 2) 정신없이 살았다. 3) 부끄럽게 살았다. 4)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  본문에 보니 믿음의 조상 중의 하나인 야곱은 그런 질문을 받고 짧지만 험악한 삶을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족장들을 중심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시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중심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시려고 합니다. 새로운 구속 드라마를 준비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가족을 애굽으로 인도하시고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려고 요셉을 미리 보내셨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것이나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사건입니다. 본문은 야곱과 요셉의 만남, 바로와 다섯 형제들의 만남, 바로와 야곱의 만남을 계속하여 보여줍니다. 일련의 만남들을 주관하시고 연출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살펴보며 야곱과 요셉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인 것을 믿고 그분과 동행하면서 복 받은 이민자의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야곱과 요셉의 만남(46:28-34)

야곱은 70명의 가족들과 많은 소유물을 가지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야곱은 유다를 자기보다 앞세워서 요셉에게로 보내어, 가족들이 고센으로 간다는 것을 알리게 하였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을 보면 장남이 반드시 영적인 장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비록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낳은 아들을 아니었지만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장자였는데 이삭이 영적인 장자가 됩니다. 이삭에게 에서가 장남이었지만 야곱이 영적인 장자가 됩니다. 야곱에게는 르우벤이 장남이었지만 아버지의 첩인 빌하와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였기에 영적인 장자의 자리를 상실합니다. 도리어 결정적인 순간마다 넷째 아들인 유다가 리더십을 발휘하며 형제들의 리더로 부상합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할 때에 유다는 그들을 설득하여 애굽의 종으로 팔게 합니다.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 사실을 숨긴들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말고, 차라리 그 아이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 넘기자" (창 36:27)고 하니 형제들이 그 제안을 따릅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애굽에 내려온 형제들이 요셉에게 가족을 소개하면서 막내 베냐민이 있다고 하자 요셉이 그를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야곱은 펄쩍 뜁니다. 요셉도 죽었는데 베냐민마저 위험한 지경에 내어 놓을 수 없다고 계속하여 버티자 유다가 나섭니다. “내가 목숨을 걸고 그의 안전을 보장합니다. 그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겠습니다. 내가 만일 무사히 그를 데리고 와서 아버지 앞에 두지 않으면 내가 평생 동안 그 죄의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창 43:9) 요셉이 형들을 시험하느라고 베냐민의 곡식 자루에다가 은잔을 숨겨놓았습니다. 자기의 은잔이 없어졌다고 하며 각자가 가진 자루를 풀어보게 하니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왔습니다. 그 자루의 임자는 애굽에 붙잡혀 있어야 한다고 하니 유다가 나섭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목숨을 걸고 이 아이의 안전을 보장하며 '만일 이 아이를 아버지에게 데리고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평생 동안 그 죄의 대가를 치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니, 저 아이 대신에 소인을 주인어른의 종으로 삼아 여기에 머물러 있게 해주시고, 저 아이는 그의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창 44:33-34) 요셉은 간절하게 호소하는 유다의 태도를 보며 감격합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고센에 도착했을 때 요셉은 수레를 타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만나 목을 끌어안고 얼마 동안 울었습니다. 죽은 줄로 알았던 아들이 살아있을 뿐 아니라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전에 요셉을 잃어버렸을 때 자식들이 야곱을 위로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는 슬퍼하다가 죽겠다 하며 계속 울었습니다. (창 37:35) 그런데 지금은 어떠합니까? "네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고 합니다. 야곱의 고백은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난 시므온의 고백을 연상하게 합니다. “주권자이신 주님, 이제는 약속하신 대로 이 종을 놓아 주셔서 내가 평안히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눅 2:30)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야곱의 노년에 하나님의 위로가 찾아옵니다.



요셉이 자기의 가족들의 도착을 바로에게 알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왕 앞에서 할 말을 미리 귀띔해줍니다. 바로가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거든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조상들처럼 목축을 해왔다고 말하라고 시킵니다. 농경문화를 이루고 있었던 애굽인들은 목축을 가증히 여겼기에 바로는 야곱의 가족들을 고센에 살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가증히 여긴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천하게 여기고 경멸한다는 뜻입니다. 고센은 어디입니까? 애굽의 북쪽이요 나일강 삼각주의 동편에 위치해 있습니다. 라암셋이라고도 하며 초목이 풍성하여 목축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입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그의 가족들을 위해 좋은 곳을 예비해주셨습니다.



바로와 다섯 형제와의 만남 (47:1-6)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이 양과 소와 모든 재산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서 와서 지금 고센에 있다고 보고하면서 형제들 가운데서 다섯 사람을 뽑아서 바로에게 소개하였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바로가 그들에게 직업을 묻습니다. 요셉이 일러준 대로 그들은 조상 때부터 대대로 목축에 종사하였다고 합니다. 가나안 땅에는 기근이 심하여 우리 짐승을 기를 목초지가 없으므로 우리가 이곳에 잠시 살려고 왔다고 하면서 고센 땅에 살게 해 달라고 공손하게 부탁을 합니다. 가나안에 기근을 피하여 잠깐만 애굽에 살려고 왔음을 강조합니다. 바로는 요셉에게 명하여 야곱과 그 가족들을 라암셋에 살도록 승낙합니다. 라암셋은 바로 고센을 가리킵니다. 또한 그들 중에 유능한 자는 왕실의 가축을 주관하도록 합니다. 바로가 그렇게 쉽게 허락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셉이 그동안 성실하게 맡겨진 직무를 수행하였기에 그를 전적으로 신임하기 때문입니다. 보다 큰 그림으로 볼 때는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불러와 큰 민족을 이루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과 바로의 만남 (7-12)

1) 바로를 축복합니다.

바로에게 형들을 소개한 요셉은 이어 아버지 야곱을 바로에게 데리고 갑니다. 시골 노인이 왕 앞에 선다고 생각해 보세요. 더구나 바로는 야곱이 만나고 싶다고 쉽게 만날 사람이 아닙니다. 총리인 요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절대 권력을 가진 바로 앞에 서서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그 앞에 서자마자 바로를 축복합니다. 야곱은 바로 앞을 물러나올 때도 그를 축복합니다. 야곱이 단지 바로보다 나이가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야곱으로 하여금 담대하게 행동하게 합니다.



2) 자신을 험악한 삶을 산 나그네로 소개합니다.

연세가 얼마냐고 묻는 바로에게 야곱은 자신의 생애와 그의 조상들의 생애를 나그네 길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조상들의 생애에 비하여 길지는 않지만 험악한 (few and difficult)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175세, 이삭은 180세를 살았습니다. 이삭이 족장들 중에 제일 오래 살았지만 가장 평탄한 삶을 살았습니다. 다른 족장들에게 비하여 특별한 사건들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창세기를 보면 그에 대하여 기록된 부분이 가장 짧습니다. 그런데 야곱에 관한 에피소드는 매우 많습니다. 130년이란 세월을 짧고 험악한 나그네 삶으로 표현한 것은 인생을 부정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짧게 느껴지는 인생을 살면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곳을 다니며 수많은 고난을 겪었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이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형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왔을 정도로 적극적이었습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장자의 직분을 사모하는 것은 좋았으나 그것을 속임수로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속이고 배고파하는 형을 속여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냈습니다. 두 번씩이나 자기를 속인 야곱을 죽이겠다고 분노한 에서의 낯을 피해 야곱은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브엘세바를 떠나 외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20년 동안 종살이를 했는데 결코 쉽지 않은 삶이었습니다. 나중에 라반과 헤어질 때 야곱이 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20년 동안 있으면서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해 14년을 일하고 또 외삼촌의 양떼를 위해 6년을 일했습니다. 그런데도 외삼촌은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셨습니다. 만일 내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내 아버지 이삭이 두려워하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외삼촌께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냈을 것입니다.” (창 31:42-43) 라반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형 에서를 인하여 불안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에서가 400명을 몰고 자기에게 달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창세기 34장을 보면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벧엘로 바로 올라가지 않고 세겜성에서 머뭇거리다가 자녀들에게 문제가 생깁니다. 그의 딸 디나가 세겜 성읍에 놀러갔다가 추장 아들에게 욕을 당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성 남자들을 속여 할례를 행하게 했습니다. 할례한 지 삼일이 되어 고통스러워할 때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성 남자들을 다 죽이고, 야곱의 다른 아들들은 세겜 성에 가서 모든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사건을 인하여 야곱을 다시 한 번 불안에 떱니다. 그 후 사랑하는 아내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죽습니다. 라헬에게서 낳은 요셉이 얼마 안 있어 행방불명이 되어 적잖은 마음고생을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수많은 환난을 겪으면서 조금씩 믿음의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형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다가 환상 중에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으며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자기가 평안히 돌아오면 벧엘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로 삼겠다고 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형 에서를 만나기 전 야곱은 얍복강 나룻터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더불어 씨름하면서 자기를 축복하지 않으면 결코 놓지 않겠다고 끈질기게 매달립니다. 야곱은 기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가 얻은 이스라엘이란 이름만큼 신앙적으로 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정착하여 네가 네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하던 때에 너에게 나타났던 나 하나님에게 단을 쌓아라." (창 35:1)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야곱은 신앙을 다시 한 번 새롭게 합니다. 야곱은 130세가 되어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가면서 하나님께 단을 쌓으며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야곱의 삶을 보면 야곱이 먼저 하나님께 나아왔다기보다는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오셨다는 편이 맞습니다. 야곱의 수많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 끈질긴 사랑으로 야곱을 붙드셨기에 야곱은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축복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로는 야곱과 그의 가족에게 애굽의 좋은 땅 라암세스를 그들의 기업으로 주라고 요셉에게 명령합니다. 여기서 기업으로 사용된 “아후자”라는 단어는 자손에게 계속 양도하는 재산이 아니라 받지만 양도할 수 없는 재산을 가리킵니다. 요셉은 바로가 명령한 대로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을 애굽에 정착시키고 그들에게 이집트의 제일 좋은 땅인 라암셋을 주었으며 또 요셉은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과 그들의 모든 가족들에게 식구 수에 따라 양식을 공급하였습니다. 요셉은 바로로부터 애굽 통치의 전권을 위임받은 국무총리였지만 자기 가족의 거주지를 정하는 일에 처음부터 끝까지 바로의 뜻을 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의 명령대로 준행하였습니다. 아직도 중근동 지방에 기근이 심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가족은 기근 중에도 하나님의 풍성함을 경험합니다. 성도들은 자기 위치를 바로 자각해야 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 위치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본문을 통하여 얻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1) 인생은 나그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벧전 2:11,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대적하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이기십시오. 성도들을 나그네라 부르는 것은 이 땅을 목적으로 삼고 영원히 살 곳처럼 살아갈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야곱도 자신의 인생이 나그네 세월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야곱은 임종 때에 요셉을 불러 맹세를 시킵니다. 자기를 애굽에 묻지 말라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묻어달라고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애굽도 야곱에게는 잠시 있다가 가는 곳이었습니다. 히 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믿음의 조상들은 인생이 나그네임을 깨닫고 장차 가게 될 본향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믿는 자들은 천성을 향하여 나가는 순례자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의 삶은 천국에서 살기 위한 예행연습을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세상에서 삶이 다인것처럼 행동합니다. 믿는 사람들조차 더 편하고 쉬운 삶을 살려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가능하면 부담 없이 시간도 정성도 들이지 않고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마 6:19-20) 영원한 것, 보다 귀한 것을 위하여 우리 인생을 투자해야 합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져 버릴 것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예수님을 알게 된 때부터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도 권면합니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벧후 3:11-14) 이것이 이 땅에서 나그네임을 깨달으며 사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2) 성도들은 축복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복과 축복을 종종 구별하지 않고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고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을 축복합니다. 야곱이 바로 앞에 서자 그를 축복합니다. 나중에 바로에게서 물러나올 때도 축복합니다. 몇몇 번역판에서는 그저 ‘인사하다’ 또는 ‘경의를 표한다’ 정도로 번역하고 있지만 여기서 축복은 인사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히 7:7) 축복하는 자가 높은 자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바로가 아무리 애굽의 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사람들보다 권세가 있다는 말입니다. 축복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12장 2절을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을 축복하는 것이요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완전히 아브라함 편이 되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더구나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힘입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똑같이 주시는 약속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성도들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기업을 함께 나누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얼마나 수지맞았습니까? 따라서 다른 형제나 자매에게 시기나 불평이나 원망을 늘어놓거나 혈기를 부리는 대신에 자꾸 복을 비는 말, 위로하는 말, 격려하는 말, 감사하는 말을 하게 되면 그 말이 씨가 되어 하나님의 복, 위로, 격려, 감사의 열매를 받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주게 됩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들은 부지런히 다른 사람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믿음에 온전히 서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뿐 아니라 복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들에게 영적으로 신령한 복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있음을 소개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삶의 아름다운 열매들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상적으로 내세울 것이 없다하더라도 세상에 대하여 주눅이 들지 말기 바랍니다. 성도들은 세상을 축복하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지런히 축복해야 합니다.



3) 성도들은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 요셉은 가족들에게 자신들의 직업을 목축이라고 말하게 하였습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의 크신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야곱의 집안은 목축을 주업으로 삼아 왔습니다. 그러나 애굽은 비옥한 땅과 풍부한 물로 인해 농경을 주업으로 삼았습니다. 애굽은 엄격한 계급사회인데 제사장이 가장 높은 계급이고 목축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가장 천민으로 여깁니다. 그렇기에 요셉은 자기의 과거 출신을 감추려고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거짓말하지 않았습니다. 떳떳하게 직업을 밝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야곱의 가족이 애굽을 언젠가 떠나야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애굽에 너무 잘 적응하면 가족들이 애굽을 떠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 사람들과 접촉이 가장 적은 곳을 찾았습니다. 출애굽 하기 쉽도록 가나안 지방과 가까운 곳을 찾았습니다. 그곳이 바로 고센입니다. 본문에는 바로가 야곱의 가족들에게 고센 땅을 순순히 허락하는 장면만 나오지만 아마 그 자리에서 바로를 비롯한 애굽 사람들은 야곱의 가족을 향하여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서로간의 이해가 맞물려 야곱 가족의 고센 땅 거주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이스라엘의 번성을 위해 애굽으로 인도하셨으나 결코 애굽인과 같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는 강대국 애굽의 보호 아래 이스라엘이 큰 민족이 되게 함과 동시에 애굽의 이교적인 문화로부터 언약 백성들의 순수성을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세상의 문화와 타락한 도덕에 오염되지 않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세상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성도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면서 세상의 부패를 막고 어둠의 세력들을 몰아내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과 진리와 세상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하시고 그것을 주시려고 인도하시고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가나안의 기근을 피하여 야곱과 그의 가족이 애굽으로 이민 온 것이나, 가나안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면서도 비옥한 고센 땅에 정착하게 된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 모든 과정을 주관하도록 하나님은 요셉을 미리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인간의 시기와 반목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맺은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복을 처음부터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을 준비를 시키십니다. 야곱이 믿음의 사람 이스라엘이 되기까지 하나님은 그를 연단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험악한 삶이었으나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야곱은 비로소 믿음의 사람으로 변합니다. 야곱은 연단을 통하여 주신 복을 감당할 만한 믿음의 그릇을 가지게 됩니다. 야곱의 청장년기는 시련의 연속이었으나 믿음의 완숙한 경지에 이르니 하나님의 야곱의 노년을 아름답게 마무리 지으십니다. 흉년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아직 5년이나 남았습니다. 그러나 야곱과 그의 가족은 애굽 땅에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풍요로운 삶을 삽니다.



야곱이 부러우십니까? 그의 노년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오기 전 야곱의 삶은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기보다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고 원하는 것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차지하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연단을 통하여 결국은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노년에 복을 받았지만 인생의 많은 시간을 낭비하였습니다. 지름길을 두고 빙 둘러왔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야곱과 같이 험악한 삶을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주님과 동행한 이후로 나의 삶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많은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이런 고백을 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름대로 험난한 세월을 보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을 인하여 지치고 힘들어 하십니까? 야곱을 통하여 역사하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더불어 행하기 원하십니다. 야곱의 노년을 복 주신 하나님은 우리의 생애에도 간섭하시고 귀한 것 아름다운 것으로 채우기 원하십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71)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뜻에 따라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습니까?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첫째는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짐을 대신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함으로 중생을 하지만 그것은 믿음 생활의 첫 단계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자아가 철저하게 부서지고 깨어져서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하게 하셔야 합니다. 성령이 시키는 대로 사는 삶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살 때 주님은 비로소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왜 예수를 믿으면서도 삶은 여전히 눌리고 기쁨이 없습니까? 하나님과 관계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웃과의 관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물론 욥과 같이 믿음의 연단을 위하여 잠시 고난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도리어 믿음에 견고하여 주님을 붙들고 그분의 말씀대로 행하면서 주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이제는 부활의 산 소망을 갖게 하신 주님. 베푸신 은혜에 감격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의지할 때 항상 기뻐할 수 있고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야곱의 노년에 복을 주신 바로 그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기쁘신 뜻을 이루면서 가정과 교회와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과 평강을 경험하며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