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오해와 박해 속에서도 (행 21:17-32)

Author
Myung Myung
Date
2007-07-29 14:59
Views
3301
행 21:17-32 오해와 박해 속에서도



오해는 해서도 받아서도 안되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됩니까?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상대방을 잠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직접 보지도 듣지도 않은 것에 지나치게 의지하여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비방해서는 안 됩니다. 확신이 설 때까지 성급한 행동을 삼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부끄러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른 분별력을 가지도록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또한 오해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사실이 아닐지라도 막상 오해를 받게 되면 얼굴이 벌개지고 가슴이 뛰게 됩니다. 변명하는 자신이 도리어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오해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그럴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같이 싸워야 합니까? 변명해야 합니까? 또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끌려가 폭행을 당했습니다. 거의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간신히 살아났는데 그때 바울은 어떻게 행동하였습니까?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믿음 지켰다는 찬송가 383장의 가사와 같이 바울은 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도리어 자기를 해치려는 자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합니다. 고난을 당할지라도 사명을 감당하는 바울의 모습을 살펴보고 각자의 삶을 돌아보면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이생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회가 바울 일행을 환영합니다. (17-20절 상)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던 것과 달리 바울과 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그곳 형제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나손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에 이튿날 바울 일행은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야고보와 교회의 장로들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하나인 야고보는 헤롯에 의하여 순교를 당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입니다. 장로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벧전 5: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하면서 베드로는 자신을 장로로 소개합니다. 이런 표현을 볼 때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이 아마 그 장로 중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과 인사를 나눈 후 선교보고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통해 이방인들 가운데서 행하신 일들을 낱낱이 설명하였습니다. 이방인들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때 바울은 마게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이방인 교회에서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보내는 많은 헌금도 전달하였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의 보고를 들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헌금을 보내준 이방인들에게 대한 감사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드리는 찬양의 핵심은 삶 속에서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이방인도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수혜자임을 바울은 증거합니다.



교회가 바울을 염려합니다.(20 하-25절)

여기까지는 아주 좋았습니다. 이대로 예루살렘 방문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도들이 바울에 대하여 경고한 예언이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받고 있는 오해를 인하여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염려합니다. “바울 형제,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유대인들 중에는 수많은 신자들이 있소.” 개역 성경에는 수만 명으로 되어 있는데 원어에는 many thousands 로 되어 있습니다. 120명으로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가 3000명으로 불어나고 5000명이 되었는데 그 후로도 주께서 날마다 그 수를 더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교회가 개척된 지 20여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유대 지역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이만 오천에서 오만 명 정도로 불어난 것으로 추산합니다. 스데반의 박해를 계기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팔레스타인 경계를 넘어 흩어지기는 하였으나 흩어진 교인들이 주로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이었을 것이기에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더욱 유대교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골고루 섞여 있어서 다양한 계층을 대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지나치게 지연이나 학연, 혹은 특정한 사람을 중심으로 매여 있으면 결코 정상적으로 자라기 힘듭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그것으로 족한 데 또 다른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모두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것 때문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모세에게 율법이 주어진 후로 유대인들은 1500년 가까이 율법을 중심으로 살아왔기에 유대교적 영향이 절대적으로 그들의 삶 속에 녹아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만 유대교적인 배경을 토대로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할례도 행해야 하고 율법도 지켜야 비로소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바울의 이방인 선교 사역은 유대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오해를 한 것은 그릇된 소문 때문입니다. 교회의 화목을 깨뜨리는 것들 중의 하나가 소문입니다. 누가 어떻게 했다더라는 이야기만 전해듣고 사실 여부는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엉뚱하게 반응할 때가 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고 안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갈 5:6) 바울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굳이 할례를 받고 율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으나 유대인들에게까지 할례와 율법을 금한 것은 아닙니다. 오하려 바울은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기꺼이 율법을 행하였습니다.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했고 (16:3) 자신도 서원을 지키기 위해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습니다. (18:18) 그런데 소문이 퍼지기를 바울은 이방인들 가운데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배척하고 그들의 아들들에게 할례도 행하지 말고 유대인의 관습을 따르지도 말라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바울의 사역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교인들이 많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온다는 사실이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오기 전 아마 대책회의를 했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을 무마하기 위하여 바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원한 네 사람이 있으니 그들과 데리고 가서 정결 의식을 행하고 그들의 머리 깎는 비용을 부담하도록 권합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바울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 아니고 바울도 율법을 지키며 산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제안이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에 위배되지 않음을 바울에게 확신시켰습니다. 무슨 결정입니까?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유대에서 온 어떤 사람들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가르쳤기에 바울의 선교팀과 심한 마찰을 빚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모교회를 방문하여 사도들의 결정에 의지하기로 하였습니다. 할례 문제로 사도와 장로들의 연석회의가 열렸습니다. 상당한 변론이 있은 후에 나온 절충안은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방인들이 흔히 범죄 하기 쉬운 죄인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구원을 율법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유교 사상에 젖어든 한국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저 공자의 가르침과 같은 윤리적인 수준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수난을 당합니다. (26-32절)

바울은 교회 지도자들의 제안에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고 이튿날 네 사람과 함께 자신도 결례를 행하였습니다. 결례의 기간은 7일이었습니다. 그런데 7일째 되는 날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백성을 자극해 폭동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오순절을 맞아 아시아에서 예루살렘에 온 자들로 성전에서 그렇게 미워하는 바울을 알아보고 그를 공격하기 위하여 근거 없는 말을 지어냅니다. “이 사람은 어디서나 우리 민족과 율법과 성전에 해가 되는 것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헬라인까지 성전에 데리고 들어와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습니다.” 그들은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 성내에 있었던 것을 보고 바울이 그를 이방인의 뜰을 구분하는 경계를 넘어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측하였습니다. 헬라인을 성전에 들이는 행위는 유대인들의 눈에 거룩한 곳을 더럽히는 행위였습니다. 이방인들은 ‘이방인의 뜰’을 넘어서 더 이상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거짓으로 고소하는 말을 듣고 유대인들이 잔뜩 몰려와서 바울을 붙잡아 성전 밖으로 끌어내었습니다. 여기서 성전은 남자의 뜰을 말합니다. 그들은 바울을 데리고 나갔고 누구도 이방인의 뜰을 넘어 들어와 성전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즉시 성전 문을 닫았습니다.



성전의 북동쪽에 인접하여 성전 바깥뜰로 나가는 두 개의 층계를 나가면 안토니아의 요새가 있었습니다. 군대에 그곳에 주둔해 있었으며 유대의 명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에 병력을 더 보강했습니다. 시기적으로 오순절인지라 로마군대는 평소보다 많은 군인들을 배치하였을 것입니다. 그 요새의 지휘관인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예루살렘이 소요에 휘말려 있다는 보고를 받자 자신이 직접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무리에게로 현장에 달려갔습니다. 성난 군중은 천부장이 이끄는 군대가 오는 것을 보고 바울을 때리던 것을 그쳤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사역 때문에 무리가 선동된 여섯 번째 사건입니다. 누가는 바울을 둘러싼 무리들의 반응을 상세히 기술합니다. 충동하여(27절), 소동하여(30절), 끌어내니(30절), 죽이려고 (31절), 때리기를(32절), 소동을(34절), 폭행을 (35절) 여기에 사용된 일곱 단어는 소요가 일어났을 때의 전형적인 현상입니다. 천부장은 법을 집행하는 장교입니다. 그의 의무는 폭동을 중단시키는 것이었기에 바울을 보자마자 죄의 여부를 따지기 전에 우선 체포하여 병영 안으로 데려가도록 지시하였습니다. 폭도들이 군사들을 밀어붙였기에 바울은 군사들에게 들려가야 했습니다. 백부장들이 있었다면 적어도 200명 이상의 로마 군인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무리들은 바울은 잡으려고 그 군인들과 몸싸움을 벌였습니다. 군인들이 바울을 층계 위에 데리고 갔을 때 무리는 바울을 없이하자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아마 20여 년 전에 계셨던 그 근처에 예수님의 충실한 제자인 바울이 무리들에게 곤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병영 안으로 끌려 들어갈 즈음에, 천부장에게 한 말씀 드려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천부장은 무리들에게 맞아 상하고 멍든 죄수의 입에서 세련된 헬라어가 나오는 것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에게 당신 혹시 얼마 전에 폭동을 일으키고 사천 명의 자객을 이끌고 광야로 나간 그 이집트 사람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자신을 소개합니다. 자기는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요 유명한 도시의 시민인데, 무리들에게 한 마디 말을 하게 허락해 달라고 합니다. 천부장이 허락하니, 바울은 층계에 서서, 무리에게 손을 흔들어 조용하게 하였다. 잠잠해지자, 바울은 히브리 말로 연설을 하였습니다. 무리가 조용해집니다. 이는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때문입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예수를 만났는지 소개를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 사도행전 22장에 나옵니다.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 무엇입니까? 바울을 본받는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고 바울과 같이 풍성한 삶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중심으로 행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자기를 드러내려하고, 조그만 일을 해 놓고도 자기만 할 수 있는 무슨 큰일이나 한 것처럼 우쭐대려하고, 사람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선교 사역을 보고하면서 자기의 수고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고 자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는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았을 뿐이며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용하셔서 이방인들에게 역사하셨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모든 공을 돌립니다. 바울의 보고를 들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도 하나님께 먼저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참으로 귀하게 여겨집니다.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중심에 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 주의 뜻대로 순종하는 이 시대의 선한 청지기를 주님은 지금도 찾으시고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2) 형제들을 겸손하게 대합니다.

바울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어떻게 행동하였습니까? 바울이 한 일을 악의적으로 해석하고 과장하고 비난하였습니다. 허위 사실을 유포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부끄러운 줄 몰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성을 가진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입니다. 율법과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한 것 같지만 실상은 바울에 대한 증오와 질투합니다. 예수님 당시나 초대교회 때에만 있는 일이 아니라 오늘날도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일을 보거나 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돌린다는 명목으로 엉뚱하게 형제나 자매의 행동이나 말에 대하여 악의적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본문에 나타난 유대인들이 보여준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무심코 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나님은 다 기억하시고 훗날 그분 앞에 섰을 때 그것을 가지고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권면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서로 비방하지 마십시오. 서로를 비방하거나 서로를 심판하는 사람은,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심판하면, 그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심판하는 사람입니다. 율법을 제정하신 분과 심판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그분께서는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당신이 누구이기에 이웃을 심판합니까?” (약 4:11-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 20:12)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들의 오해를 받았을 때 어떻게 행동하였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변명하고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겸손한 자세를 가졌습니다. 자기를 예루살렘 보내실 때는 분명한 주님의 뜻이 있는 것을 알고 위기 속에서도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믿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각기 다른 성격과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와 다른 부분이 있으면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서로 용납하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끝까지 자기주장만을 내세우며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윽박지르거나 무시하려 한다면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의 사역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면서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강조한 결과로 생긴 유대인들의 오해에 대하여 염려하였습니다. 이들은 바울에게 이 오해를 풀어주도록 정결예식에 참여하고 그 비용을 대도록 요청을 하였을 때,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고, 누구보다도 선교에 많은 열매를 거둔 사도이지만 바울은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들이 원하는 대로 예식에 참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할수록, 열매를 많이 맺으면 맺을수록 더 겸손해져야 합니다. 오해가 있으면 풀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위하여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모습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3) 영혼구원에 우선순위를 둡니다.

사역을 하면서 바울이 깨달은 진리가 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8)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 없이 하나님은 구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전도 대상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고전 9:20) 바울은 나실인의 서약을 하면서 4명이 서원하는데 드는 막대한 큰 비용을 부담하였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성결예식에 참여함으로 자신이 율법의 정신에 충실한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더구나 그 행위는 유대의 관습과 관련된 문제요, 구원의 문제는 아니었기에 구원을 위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이 율법을 따라야 할 필요가 없다는 자신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영혼구원이란 보다 고귀한 목표를 위하여 성결예식 참여란 덜 중요한 것을 감수하였습니다.



무리들의 폭행을 인하여 바울의 생명이 위협을 받게 되었을 때 로마군대가 나타나서 바울을 구해주었습니다.  바울은 로마군대의 호위 속에서 흥분한 유대군중들을 향하여 자신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을 하게 되었는지 간증을 하고 또한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을 닮는 다는 것이 때로 그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런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구원하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절묘한 손길이 바울과 함께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울은 오해를 받거나 계속되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열망은 조금도 식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바라보았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지혜와 용기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성령의 기름부으심. 우리 모두는 바울을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주님의 뜻을 이루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저희도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주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면서 하나님의 기쁘시게 하며 귀한 상급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