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성전이신 예수님(요 2:13-25)

Author
Myung Myung
Date
2008-03-09 13:19
Views
4255
요 2:13-25  성전이신 예수님



지난 1월과 2월 MBC <뉴스 후>라는 프로그램에서 일부 종교인과 집단의 ‘변칙세습’, ‘세금회피’, ‘회계부정’ 등을 고발한 후 교계 안팎으로 논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MBC의 보도를 보며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교회와 목회자들의 이미지를 크게 왜곡했다”는 비판을 합니다. 한기총을 비롯한 일부 기독교계는 이 보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MBC 시청 거부 운동’, ‘MBC에서 방송되는 광고 제품 불매 운동’, ‘규탄 집회’, ‘법적 대응’ 등을 벌이겠다고 경고합니다. 반면에 시사프로그램의 목적은 사회 부조리에 대한 침묵이 아니라 적극적 고발과 비평에 있다면서 이 보도를 지지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한국에 있는 구제기관의 삼분의 2를 개신교회에서 운영하는 것과 같은 긍정적인 내용은 별로 보도되지 않고 부정적인 내용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 아쉬운 점이 없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런 내용들이 세상에 오르내린다는 이유만으로도 교회가 진지하게 반성해야 할 부분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80년대 말부터 성장이 둔화되거나 정체 상태에 있는데 이런 일을 통하여 긍정적으로 나아가는 계기로 삼아야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민교회는 어떨까요? 한국 교회의 상황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교회가 교회의 본질과 과제를 성경적으로 이해하고 실행하고 있는가? 교회가 혹시 교회다움을 잃어버리고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지는 않는가?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감당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들을 항상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 던져보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오늘날의 모든 교회가 귀담아 들어야 할 교훈을 제공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이적을 보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새 시대가 왔음을 알려줍니다. 가나안 잔치 마당에 있던 여섯 개의 돌 항아리는 결례를 위해 물을 담는 용기였습니다. 결례란 하나님의 백성이 물을 씻어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준비하는 예였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성전 체제를 상징하는 그 항아리들은 그 자체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유대교는 마치 포도주가 떨어져 파장한 잔치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구원도 잔치도 없습니다. 기쁨도 생명도 없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의 표적이 뜻하는 것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구원을 가져오셨다는 것입니다.



유대교는 성전 중심의 종교였습니다. 성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집.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죄 많은 인생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로 만날 수 없습니다.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것이 죄인데 이 죄를 제물의 피로 덮어 버림으로써 다시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하는 것이 성전 제사의 의미입니다. 제사라는 잔치를 통하여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비로소 교제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예루살렘 성전은 더 이상 그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유대인들의 타락한 성전 제사를 받아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어떻게 종말의 메시아적 잔치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가져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에서 살펴 볼 내용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성전 시위사건은 공관복음에도 다 나옵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마지막 주에 이 사건이 언급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앞부분에 넣고 있습니다.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이 각각 다른 사건을 언급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요한은 연대기적으로 기술하기보다 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예수님 사역 앞부분에 가져다 놓음으로 예수님께서 무의미해진 유대교 성전의 진정한 의미를 완성하고 대치하여 종말의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왔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성전에서 시위 하시는 예수님(2:13-22)

예수님은 유월절 관습대로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유월절을 ‘유대인의 유월절’이라고 부르면서 의도적으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구별합니다. 옛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뜻입니다. 유월절은 430년간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나오게 된 것을 기념하는 유대인 최대의 명절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뜻 깊은 유월절에 하나님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 많은 무리들이 자기들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해방시켜 줄 메시아로 기대하며 자기들의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열광적으로 외쳤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는 무리들의 함성을 들으시며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셨습니다. 공관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 오셔서 제일 먼저 간 곳이 어디입니까? 성전. 성전 안에 들어 가셔서 모든 것을 둘러보셨습니다. 유월절을 맞이하여 많은 사람들이 성전 안에 있었을 것이고 소나 양의 울음소리, 구구 대는 비둘기 소리가 어우러진 가운데 장사치들은 제물로 사용될 짐승들을 파느라고 돈 바꾸는 자들은 성전에서만 통용되는 화폐로 바꾸어 주느라고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소나 양들을 매어 놓은 뜰에선 짐승들이 똥을 싸느라고 냄새도 났겠고 지저분하였을 것입니다. 성전을 묵묵히 둘러본 예수님의 심정은 한마디로 비통함입니다. 날이 저물어 그대로 베다니로 나가셨습니다. 아마 밤새 예수님은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다음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를 떠나 성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성전 예배의 핵심은 희생 제사입니다.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흠 없는 짐승을 바쳐야 했습니다. 유월절에 모든 유대인들은 성전세로 이틀 치 노임에 해당하는 반 세겔을 내도록 되어 있는데 시이저와 같이 이방인의 화상이 생겨진 화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성전에서 통용되는 화폐로 바꾸는 과정에서 제사장들은 막대한 이익을 챙겼습니다. 또한 제물을 검사하는 자들은 공인된 상인을 통하여 구입한 짐승만을 정결한 것으로 규정하였고 짐승들을 시중보다 훨씬 비싼 값으로 그것도 독점하여 팔았습니다. 마땅히 지켜야 할 종교적인 의무를 이용하여 제사장과 또한 그들과 결탁한 무리들이 막대한 돈을 긁어모았습니다. 세리들은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들을 착취하는데 제사장 무리들은 조직적이고도 제도적인 방법으로 연약한 백성들을 착취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제는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성전 안에 들어가셔서 그들을 향하여 시위를 하십니다. 과격하게 보일 정도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성전 안에서 거행되고 있던 상업 행위를 중단시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 제사에 쓰이는 양과 소를 모두 성전에서 몰아내시고 돈 바꿔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며 그들의 상을 둘러엎으셨습니다.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니 쫘르르 하며 동전들이 쏟아지고 사방으로 굴러갔을 것입니다. 제사를 드릴 때 소, 양 등이 많이 사용되었고 특별히 비둘기는 소나 양 같은 짐승을 제물로 드릴 형편이 되지 못하는 아주 가난한 자들이 드리는 제물이었습니다. 예수가 난지 팔 일이 되어 요셉과 마리아가 할례와 더불어 결례 의식을 행하는데 그때 사용한 것이 비둘기 한 쌍이었습니다. (눅 2:24)  그 당시 성전 안에서 합법적으로 비둘기를 파는 자들을 통하여 비둘기를 구입하려면 시중 값의 20배 이상을 지불해야 했다. 가난한 자들을 등치던 그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니 비둘기들이 놀라서 사방으로 퍼덕거리며 날아갔을 것이고, 소나 양도 뜰 안에 매어 있다가 도망가느라고 뜰 안은 온통 수라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들을 당장 치우고 앞으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비난하신 것은 성전 자체가 아니라 성전 내 이방인의 뜰에서 행해지는 상거래 행위입니다. 예수님이 비난하는 대상은 성전 제물을 사는 사람이나 성전세를 지불하기 위해 환전하는 순례자가 아니라 성전을 장사하는 장소로 변질시킨 제물 판매상과 환전상입니다. 스가랴 14:21,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가나안이란 히브리 단어에는 ‘장사꾼’이란 뜻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 복음서를 쓸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무너진 상태로 더 이상 제사가 드려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1:17절에 보면 예수님은 성전을 정결하게 하고 나서 모인 무리들에게 가르치시는 중에 예수님은 사 56:7을 인용하십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이라” 예루살렘 회복 후에 이방인들이 제사에 참여할 것을 가리키는 동시에 메시야 시대에 이방인들이 유다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 것을 예표합니다. 주님은 이 부분을 인용하시면서 성전의 본질을 이야기하십니다.

1) 성전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곳이기에 마땅히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으셔야 합니다.

2) 성전은 유대인만을 위한 곳이 아니라 만민을 위한 곳입니다. 그 동안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거룩한 민족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이방인들을 경시하는 교만함을 가졌었는데, 예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3) 유대인들은 성전을 제사 드리는 장소로 주로 생각했으나 예수님은 기도의 장소로 생각하십니다. 성전의 존재 목적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신령하고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은 본래의 목적을 망각하고 자기들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면서 성전을 더럽히고 습관적인 종교 행위만을 지속함으로써 이 성전을 기도하는 집에서 강도의 소굴로 전락시켜 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  렘 7장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 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가증한 일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자기들은 하나님과 무관한 형편없는 삶을 살고 심지어 우상을 섬기면서도 성전에 한 번 와서 예배 한 번 드리기만 하면 자신들은 구원받은 자라고 착각하는 영적으로 타락한 유다의 생각은 잘못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아가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고 말한 지 600 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도 자기 조상들과 같은 전철을 밟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였습니다.  

  

제자들의 첫 번째 회상(2:17)

제자들은 예수님의 성전 시위 사건을 시편 69편 9절과 연결시켰습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을 인용합니다. 예수님은 인자하고 온유한 분이시지만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어 버린 유대인들을 향하여 ‘거룩한 분노’를 보이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보여주신 행동은 감히 어느 누구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행동의 배후에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히 예수님을 삼키게 되었습니다. ‘삼키다’는 헬라어 ‘카타파고’의 번역인데 이는 열심을 품은 사람이 그 열심히 말미암아 파괴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즉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하신 행동을 인하여 예수님이 희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을 향한 ‘거룩한 열심’을 가지고 시위하였는데 그 결과 ‘거룩한 희생’을 당하게 되었음을 나중에 제자들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2:18-21)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기능을 다한 옛 성전 제도의 한계와 부정함을 보시고 거룩한 분노를 쏟아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분노하신 것은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으로 이해하셨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모독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모독하고 경외하지 않는 교만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시위 사건을 통하여 자신을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로 나타내시며 성전은 그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가 있는 거룩한 곳임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요구하며 권세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의 일이 옳았으므로 그가 하신 말씀에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고 그 일을 행한 예수님의 자격을 거론합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예루살렘 성전은 성전으로서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유대인들에게 이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세우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성전을 허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예언서에 등장하는 새 성전도 사실은 이 땅에 재건되는 성전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새 성전입니다. 그렇기에 어느 유대인도 성전을 헌다는 말조차 하기 꺼려했습니다. 구약을 완성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은 비로소 자신이 성전임을 밝힙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는 것을 통해 자신을 믿는 자들이 죄사함 받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예수님과는 다른 성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인 헤롯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주전 20년부터 재건축을 시작한 이래로 46년간이나 짓고 있고 아직도 건축 중인 이 성전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써 허물어질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과연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70년에 티토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에 의하여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성전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두 번째 회상(2:22)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이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 시위 사건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해석학적 열쇄는 구약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말씀으로 풀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매이지 않는 예수님(2:23-25)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구원으로 연결되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그저 한사람의 선지자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단순히 표적을 보고 믿는 그들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지 아니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모든 사람을 아시고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표적 자체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표적이 아닌 표적을 행하시는 예수님께 믿음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은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시면서도 사람들의 평가나 인정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과 우리는 차원이 다르신 분이지만 이점은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의지할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알게 모르게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은 없습니까? 가치 있는 신앙은 예수님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분을 자기 삶의 주인과 구원자로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그 성전 제사를 중심으로 한 유대교는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제물에 쓰일 짐승들을 내쫓고 헌금을 위한 환전을 방해한 것과 환전상의 상을 뒤엎은 것은 이 사실들을 극적으로 표현한 선지자적 행위였습니다. 새 성전은 예수님 자신의 몸을 뜻한다고 요한은 설명을 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죽음은 새 언약을 세운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받아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을 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 언약 세움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함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심으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던 것 같이 속죄와 새 언약의 제사로서 예수 자신의 죽음을 통해 용서받고 의롭게 된 하나님의 새 백성을 창조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무한함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 안에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거하시게 되고 그래서 그의 백성이 새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초월, 신성, 영광에 참여하고 신적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이것을 성경 숙어로 영생이라고 합니다. 영생이란 말의 뜻은 문자적으로는 ‘오는 세상의 삶’이란 뜻인데 내용적으로 하나님적 생명입니다. 피조물들이 하나님적 생명을 얻고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과 유대교 성전 체제를 완성해서 이런 생명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성전에서 시위하시는 예수님의 권세 있는 행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말론적인 새 성전 되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되심을 부인하며 예수님을 불신하는 유대인들이 섬기는 지상의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2장은 세상 앞에 계시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요약하는 밑그림입니다. 예수님이시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새 성전이시며, 그분이 하신 일은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는 것처럼 그를 믿는 자를 새로운 피조물 되게 하는 생명 사역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본질과 생명 살리기에 전념해야 할 교회의 과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영혼 구원입니다. 교회는 구원 받은 자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이며 훈련을 받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 잃어버린 영혼들을 불러 모으는 곳입니다. 팔로마한인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성령으로 변화된 성도들의 모임이 될 때,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새로운 성전이며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될 때,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생명을 얻게 하는 사역에 전념할 때 하나님은 이 교회를 들어 사용하실 것이요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성전에 들어가셔서 유대인들의 비리를 지켜보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하나님의 공의가 제대로 실천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는 종교 지도자들. 그들과 결탁한 장사치들. 주님께서 오늘의 교회를 보시고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면 과연 어떻게 하실까요? 감격하시겠습니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시겠습니까? 내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곳이라는 것은 기도 외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구원하신 것에 대한 감사와 헌신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주님을 위한 원래의 목표는 사라지고 껍데기뿐인 사업만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자칫하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통한 다이내믹한 신앙생활을 하기보다는 형식적인 종교 행위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오랫동안 종교 행위에 젖어 있기는 하지만 주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통한 신앙의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이 자신도 모르게 변화되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 이기적인 욕심이나 채우는 곳으로 전락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모든 활동, 부서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교회의 모든 계획, 행사, 경영에 하나님의 뜻이 무시되고 세상의 방식이 적용될 때 주님은 채찍을 드십니다.  우리 가정과 교회에서 예수님을 본받아 주님이 원하지 않는 것을 쫓아내는 열심이 필요합니다. 이번 사순절에 다시 한 번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고 점검하고 조정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한 심령이라도 멸망치 않고 다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며 주님께 초점을 맞추어야겠습니다.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주신 사명 온전히 감당하며 얻은 열매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