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첫 표적 (요 2:1-11)

Author
Myung Myung
Date
2008-02-24 15:08
Views
4706
요 2:1-11 첫 표적

제가 대학 졸업 후에 진해에 근무할 때입니다. 미군은 아니고 민간인의 신분으로 제가 다니는 연구소에 와서 영어를 가르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중의 한분이 자기 집에서 파티가 열리니 오라고 초청하였습니다. 미국인이 여는 파티에 처음 참석하는지라 우리는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점심도 거르면서 저녁 7시에 그의 집에 갔습니다. 막상 가보았더니 팝콘, chip, 과자, 코카콜라가 전부였습니다. 한창 많이 먹던 시절에 그런 간식거리를 먹자니 속이 쓰리고 너무 허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을 나와서 한국음식점에 가서 동료들과 매운탕과 다른 음식들을 실컷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몇 달 있다가 또 다른 분이 저희를 저녁에 초대하였습니다. 한 번 속지 두 번은 안 속는다 생각하며 모두들 밥을 잔뜩 먹고 갔습니다. 그랬는데 저녁식사에 말로만 듣던 스테이크가 나왔습니다. 먹고는 싶은데 배가 불러서 제대로 먹지 못했던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잔치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푸짐한 음식, 많은 사람들이 기쁨으로 먹고 마시고 떠들어 대는 장면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잔치’라는 단어가 61번 나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족장이나 왕이 신하들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가 주종을 이룹니다. 이를 테면 이삭이 베푸는 잔치 (창 26:30), 솔로몬이 꿈에 하나님을 만난 후 모든 신하들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왕상 3:15)가 있습니다. 가장 화려한 잔치는 페르샤 제국의 아하수에로 왕이 신하들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입니다. 180일 동안 잔치를 벌인 후 그것도 부족하여 일주일 동안 잔치를 더 벌입니다. 이를 계기로 에스더가 페르샤 제국의 왕비가 됩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이 땅에서 벌이는 잔치보다 천국 잔치에 대한 언급이 많습니다. (마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눅 13:29)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계 19:9)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본문에도 잔치가 언급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그 잔치에서 예수님은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요한은 그 기적을 표적이라 부릅니다. 신구약에서 표적이라는 말이 종종 이적과 동의어로 쓰인 경우가 많은데, 이적은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 생겨나는 사건을 주로 가리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출된 사건을 표적으로 표현합니다. (출 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신약에 있어서는 기사라는 단어를 표적과 함께 사용합니다. 기사라는 말은, 어떤 일에 의해 생겨난 사건을 목격한 자의 놀라움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적은 행해진 이적 그 자체에 중요성이 있다기보다, 그 행해진 분의 은혜와 능력을 보여줍니다. 예수를 만난 많은 사람들은, 예수의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행하는 표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밤에 니고데모가 사람들 몰래 찾아와서 고백합니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3절)

예수님께서 첫 번째 표적을 행하신 곳은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13km 쯤 떨어진 갈릴리 지역의 한 마을인 가나입니다. 이곳에서 열린 한 혼인잔치에서 예수께서 참석하시고‘사흘 되던 날’에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제3일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삼일 만에 다시 일어나신 것처럼 오늘 장면에도 삼일 째 되는 날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가나라는 지명이나 사흘 되던 날을 요한이 언급한 것은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 비유적이거나 가공된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공생애의 사역을 막 시작한지라 아직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갈릴리 지방에 널리 퍼지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참석하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과 함께 초청된 것을 보면 아마 혼인잔치를 주관하는 집과 예수님 집안과는 잘 아는 처지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는 먹고살기 힘들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결혼식은 그야말로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잔치가 한참 흥겹게 진행되는 도중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잔치를 벌이면서 준비해야 할 가장 중요한 품목 중의 하나인 포도주가 동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잔치를 보통 일주일간 벌이는데 많은 사람들을 초청하였습니다.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은 일주일동안 손님들을 대접할 충분한 음식들을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만약 음식이나 포도주가 떨어지면 두고두고 사람들의 이름에 오르내리는 창피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잔치를 벌이는 이 가정이 경제적으로 별로 넉넉지 못해서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그날따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동이 났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음식을 준비하던 사람들은 당황하여 술렁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큰 일 났어. 포도주가 떨어졌대. 잔치 온 사람들이 알면 어떻게 해. 잔치의 흥은 깨어지고 신랑은 큰 낭패를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4절)

그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음식을 만들거나 혹은 준비하는 것을 돕고 있었던 같습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곁에서 듣고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급한 상황에서 마리아는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어떻게 해보라는 기대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우리가 볼 때 좀 냉담하게 보입니다. Justin 엄마 좀 도와줄래? 그때 Justin이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대답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다. 요 녀석이 좀 컸다고 엄마한테 하는 말투 봐라 하면서 펄펄 뛰는 엄마들이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는 대신 ‘여자’라고 부르며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응답하십니다.  헬라어 원문을 직역해 보면 ‘여자여 나와 당신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왜 예수님이 그런 대답을 하셨습니까? 이래봬도 하나님의 아들인데 하면서 자기를 무시했다는 투로 말하는 것입니까? ‘여자여’ 하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사용하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 ‘여자여’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마담”과 같은 점잖은 표현입니다. 물론 자기의 어머니에 대하여 잘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점잖게 거리를 두는 의미에서 말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은 공생애의 삶을 사신다는 말이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시겠다는 뜻입니다. 내 때가 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시겠다는 뜻입니다. ‘내 때’는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때, 동시에 영화롭게 되는 때이고 영생이 세상에 열리는 때입니다. 그것은 자신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는 때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들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엄마인 마리아가 섭섭했다든지 그냥 돌아섰다는 말이 없습니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엇을 말하든지 순종하며 오히려 주저함이 없는 확고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7절)

그 잔치 집에는 커다란 돌 항아리가 여섯 있었습니다. 한 통이 10갤론쯤 되니 두세 통 든다면 돌 항아리 하나에 20-30 갤론의 많은 물을 담을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항아리마다 물을 아구까지 가득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문법적으로 보면 지금 당장 채우라는 명령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물을 부어 무엇을 하느냐고 어느 누구도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인들은 그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항아리 아구까지 물을 가득 채웁니다.



하인들이 물을 채운 돌 항아리의 원래 용도가 무엇입니까? 술독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혹시 부정한 것에 접촉되어 자기들이 부정해지지는 않을 까하는 종교적인 이유로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었습니다. 예수님은 하필이면 결례용으로 사용하는 돌 항아리에다 물을 부으라고 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알았다면 예수님을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행동입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벨사살 왕은 파티를 하다가 술기운이 돌자 유대에서 가져온 금은 그릇, 성전에서 사용되는 그릇들을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술을 채워 마시다가 하나님이 진노를 받아 그날 밤 죽고 말았습니다. 벨사살이 한 행동과 예수님이 하신 것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율법에 규정된 의식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기 위하여 하신 행동은 아닙니다. 지나치게 경직된 신앙의 틀에 자신들을 집어넣고 보수정통 따지며 그 기준에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기 좋아하는 바리새인들과 다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건져 놓고 봐야 합니다.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왜 물에 빠졌느냐고 야단칩니까? 먼저 구해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종교의식보다는 친구의 잔치에 더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무리 없이 기쁨으로 잔치가 계속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8절)

그 당시 연회장의 역할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술을 마셔서 잔치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고 또한 도중에 술이 부족할 것을 같으면 더 가져오라고 하면서 술의 공급까지도 주관하였습니다.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금 부어넣은 돌 항아리에서 물을 퍼서 가지고 갑니다. 가지고 가면서 하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아무리 사람들이 취했다 해도 이것을 마시면 포도주가 아닌 줄 다 알텐데 이거 어떡하지? 왜 포도주 대신 물 가져왔느냐고 야단맞는 것이 아니야? 들고 가기는 하지만 마음이 조마조마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인들에게 내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고 말씀을 안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저 하신 말씀은 단 두 마디. 퍼라. 갖다 주어라.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10절)

연회장은 새로 가져온 포도주 맛을 보고 감탄하였습니다. 지난 며칠 동안 마셔온 포도주와는 차원이 틀립니다. 이렇게 극상품의 포도주 (vintage wine)를 마셔본 적이 없습니다. 자꾸 포도주를 이야기 하니 입맛을 다시는 사람이 두 분 계십니다. 그런데 연회장은 그 포도주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맛에 감탄한 연회장은 신랑을 부르라고 합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불려온 신랑은 연회장에게 칭찬을 듣습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신랑은 연회장이 왜 자기를 그토록 칭찬하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물을 들고 간 하인들만이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잠시 위기가 있었지만 예수님이 개입하심으로 사람들은 그 잔치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를 통하여 예수님의 사역의 특징이 몇 가지로 나타납니다.

1) 예수님은 더불어 일하십니다.

예수님이 주관하시지만 그 과정에 여러 사람이 자의든 타의든 참여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나아가 상황을 설명하며 도움을 요청합니다.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항아리에 물을 붓고, 물을 돌 항아리에 담고, 그 물을 연회장에게 가지고 갑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작은 수고들이 합쳐져서 커다란 열매를 거둡니다. 본문에는 물을 붓고 나른 하인들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주님의 역사에 동참하였습니다. 주의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감추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만 알아주시면 된다는 자세로 뒤에서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조그마한 섬김이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자신을 과시하는 것은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아시고 우리의 수고에 넘치도록 갚아주시는 분입니다.



2) 항상 놀라운 변화를 동반합니다.

묻겠습니다. 어느 순간에 물이 포도주로 변하였을까요?

1) 항아리에 물을 부었을 때

2) 물이 통에 있을 때

3)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가지고 가는 동안

4) 사람들이 마실 때

저도 모릅니다. 언젠지는 모르지만 변화가 일어난 것만은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이 정결하게 하는 의식을 하는데 사용되는 돌 항아리가 가득차지 못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영적인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주님은 그 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 하였습니다. 주님에 베푸시는 복은 항상 풍성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충만하게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단순한 물리적인 변화, 외양적인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물: H2O  술: C6H5OH. 주님이 개입하시니 없던 탄소가 생겼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전에 영적으로 죽었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이 함께 할 때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부족한 포도주가 채워진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주님은 그것도 아주 맛있는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조바심과 초조의 순간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더니 문제가 해결될 뿐 아니라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보너스의 하나님. 예수님이 개입하시면 평범한 것도 특별한 것이 됩니다. 가치 없는 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바뀝니다. 물동아리는 유대교 정격예식에 따라 식사 전후에 손과 발을 씻기 위한 물을 받아두는 항아리입니다. 그것은 외적인 더러움을 씻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내면의 죄를 씻기시는 분입니다. 포도주는 유대교의 옛 방식을 뛰어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때는 아직 아니었지만 마리아의 간청 때문에 미리 맛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은 천국잔치를 미리 앞당겨 맛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하기 때문에 보여줄 것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련을 당하면서도 예수를 믿기에 도리어 담대하고 연약한 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모습에서 이웃을 감동을 받습니다. 사람들의 우리의 말보다 삶의 열매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우리의 변화된 삶이 강력한 전도수단이 됩니다.



3) 기쁨이 충만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여 우리와 전혀 다른 삶을 사신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 오셔서 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어울리셨습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의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보여주시며 사람들에게 치유와 회복, 기쁨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곤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예수님께서 개입하시니 문제가 해결되고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의 역사 하신 것을 알았던지 몰랐던지 상관없이 잔치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기쁨에 동참하였습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주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가 충만한 공동체인가 알 수 있는 간단하고도 분명한 사인이 기쁨입니다. 성도들이 모인 곳에 기쁨이 넘친다는 말입니다. 혈기가 있고 갈등이 있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기 좋아하는 것은 결코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표적을 보이신 장소가 즐거움이 넘치는 결혼식 피로연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주님을 제대로 모실진대 우리의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충만해집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11),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바울은 선포합니다.



4) 처음보다 나중이 더 아름답습니다.

회당장이 신랑에게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었다는 것은 예수가 오심으로 가장 좋은 것이 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선물 중의 가장 큰 선물인 구원의 선물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세상 나라에는 좋은 것으로 시작했다가 끝이 나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는 처음보다 나중이 더 아름답습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에 창대해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특징입니다. 겨자씨는 정말 작지만 그것이 자라면 공중의 새들이 깃들 정도로 크게 자랍니다. 작은 것이라고 결코 소홀히 여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작은 일을 소홀히 여기지 않는 자에게 큰일도 맡기십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1). 세상적으로는 별 볼 일 없는 열두명과 함께 시작한 예수님의 사역은 2000년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결신자를 얻었고 지금도 전세계로 그 영향력이 확신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 11:1-2)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지금 현재 이 자리에서 보는 것같이 끌어당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도들의 미래는 아름답습니다. 갈수록 풍성한 것을 누리게 됩니다.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5) 열매를 통하여 믿음을 갖게 합니다.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다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기뻐한 이유는 달랐습니다. 많은 하객들은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서 일주일동안 먹고 마실 기회를 가진 것이 기뻤을 것입니다. 잔치를 주관하는 연회장은 훌륭한 포도주를 계속 공급할 수 있었으니 기뻤을 것입니다. 신랑은 결혼한 것도 즐거운데 연회장으로부터 맛있는 포도주를 인하여 칭찬을 들으니 기뻤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기쁨의 원인을 제공해준 예수님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가졌던 기쁨은 잔치가 끝나고 나면 사라지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표적을 본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드러나지 않고 뒤에서 수고하던 마리아나 물을 붓고 나르던 하인들과 그 자리에 있던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새로운 창조의 증인들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통하여 자칫하면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시원하게 해결한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물을 붓고 나르던 하인들은 자기들 눈앞에서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을 보면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를 통하여 요한은“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라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표적을 보여주신 이유는 제자들 때문입니다. 그들은 장차 주님의 뒤를 이어 사역을 감당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 표적을 통하여 믿음을 가지게 되고 예수님의 증인들이 됩니다.  



본문을 통하여 문제해결 방법을 발견합니다.

1)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자기의 문제든지, 다른 사람의 문제든지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님께 도움을 요청함으로 시작됩니다. 우리의 한계와 부족을 깨달을 때가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시작할 때입니다.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마리아의 청을 거절하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사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이시기에 자기를 찾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상황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2)  문제 해결을 주님께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이 마르다라는 여인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가장 귀한 손님이 왔다고 마르다는 부엌에 들어가 음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습니다. 한참 일하다 보니 일손이 달립니다. 자기 동생 마리아가 보이지 않습니다. 방안에 들어가 보니 마리아는 예수님 발밑에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괘씸한 생각이 들어 방안에 가서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예수님께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하라고 명령을 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기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해주기를 원합니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포도주가 없는데 어디서 구해오라든지 하면서 재촉하거나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황만을 이야기하며 예수의 도움을 청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문제의 해결사가 아니라 우리의 목자요 인생의 주관자이십니다. 주님께 맡길 뿐이지 주님에게 강요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사건의 열쇄를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맡기면 우리의 미래를 책임지십니다.



* 성도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기적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을 말합니다. 성경은 기적에 대하여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그들의 연약함을 치유하시고 돌아보셨습니다. 출애굽 할 때 모세를 통하여 일어난 첫 표적은 물을 피로 바꾸며 바로와 이집트 백성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고 여호와만이 참 신인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표적의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드러냄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단순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선포자가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계시며 자신을 믿고 그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에게 그것을 전해주는 전달자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은 기적을 경험합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도 기적이요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것도 기적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도 주의 은혜를 사모하며 주님을 믿는 믿음을 따라 살면서 크든 적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기적을 경험해야 합니다.  



* 성도들은 천국잔치를 준비해야 합니다.

잔치에는 원래 많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먹을 것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잔치가 세상 사람들의 잔치와 다른 점이 있다면 주님이 계신 곳이기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공생애를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식사를 나누며 마무리를 짓습니다. 잔치에서 시작하여 잔치로 끝을 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잔치와 같습니다. 모일 때마다 먼저 주님께 대한 celebration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 간에 귀한 교제가 있고 기쁨이 충만해야 합니다. 오고 싶고, 보고 싶고, 참여하여 무엇인가 해 보고 싶은 그러한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먼저 믿은 사람들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항상 준비해야 하는 이유는 신랑 예수께서 언제 오실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 오실지 모르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하여 모든 성도들은 깨어있어 영적인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인 준비가 의미하는 것은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요, 또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구체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본받아 영혼구원의 사역에 주님의 증인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현재 나의 삶 가운데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 변화되어져야 할 부분이 무엇입니까? 어디가 자꾸 아픈 것 같고 쉽게 피곤하고 무슨 일에도 도무지 의욕이 생기지 않습니까?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매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섭섭한 생각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두려워하고 불안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먼저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문제를 주님께 내어놓아야 합니다. 사람들을 통한 문제해결은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듯이 일시적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공급해 주시는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문제 가운데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였으면 이제부터 믿음을 갖고 주님의 신실한 제자들이 되어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삶 가운데 주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 무엇이며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섬길 수 있는 부분들이 생각해 봅시다. 주님이 베푸시는 풍성한 은혜를 받으며 주님이 원하시는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다가 천국의 혼인잔치에 다 참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