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와 보라(2) (요 1:43-51)

Author
Myung Myung
Date
2008-02-17 23:11
Views
4552
요 1:43-51  와 보라(2)

교회적으로 사역부서를 지원하라고 하는데 첫날부터 무엇을 하겠다고 바로 지원하는 분들이 있는 반면에 누가 끌어주지 않으면 나서기를 꺼려하는 분들이 있고, 나는 조용히 있고 싶어 하며 도무지 참여하지 않으려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우연히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삶들을 향한 계획을 이루어나가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알고 그 목적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타고난 재능들과 성품들, 영적 은사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삶의 경험들을 주신 후에 그것들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본인이 가진 재능이나 은사들을 아십니까? 그것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 섬길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먼저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도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함께 사역할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예수님을 보거나 듣는 순간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진리에 관심을 가지고 따르겠다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편견이나 선입견 때문에 선뜻 나서기를 주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적극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만이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소극적인 사람, 의심하는 사람, 편견을 가진 사람 누구에게나 목자가 되셔서 삶을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이 빌립을 초청하십니다.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43절)

예수님은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요한에 이어 두 사람을 더 제자로 부르십니다. 이 두 사람은 앞에 부른 제자들과 관계가 있습니다. 빌립은 안드레, 베드로와 같은 동네인 벳세다 사람이었습니다. 안드레와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예수님을 소개하는 세례자 요한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베드로는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안드레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빌립이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은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려고 갈릴리를 향하여 떠나시려다가 베다니에서 빌립을 만나시고 제자로 직접 부르셨습니다. 왜 다른 제자들과 달리 직접 부르셨을까요? 빌립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내용이 요한복음 6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5천 명에게 떡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려 하실 때 빌립을 시험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요 6:5,6). 이때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현실적이고 타산적인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빌립은 이해하지 못하여 "주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요 14:8-12). 빌립은 철저하게 계산적인 사람인지라 예수님에 대하여 들었을지라도 요한이나 안드레와 달리 처음부터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초청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 말 외에 어떤 부차적인 설명이 필요하지 없습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빌립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에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먼저 안 후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까? 빌립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제자됨의 조건이 나옵니다. 제자는 스승에게 무엇인가 배우기 전에 스승의 제자가 되기를 결심합니다. 그 후에야 스승의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들이 처음부터 주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마가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삼년을 예수님과 함께 지나면서 점차로 주님을 알아가는 과정이 잘 나옵니다. 능력 있는 가르침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서 예수,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시는 선지자로서 예수, 백성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메시야로서의 예수, 왕으로 오신 다윗의 아들로서의 예수, 구약에서 예언한 그 인자로서의 예수,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가 차례로 소개됩니다. 제자입니까? 그렇다면 순종함으로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 안에 있는 진리는 순종으로 알게 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 다닌 지는 오래 되었는데 아직도 주님을 따를 것인지 주저하고 손익계산서를 작성하며 마당만 밟는 분은 안 계십니까?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45절)

예수님을 따르면서 빌립은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자 빌립은 그 기쁜 소식을 가까운 사람에게 전하기 위하여 나갑니다. 안드레가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깨달은 후 베드로에게 가서 전도하였듯이 빌립은 친구인 나다나엘에게 찾아갑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분을 만났다고 합니다. 율법과 선지서는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분은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빌립과 나다나엘은 평소에도 영적인 차원의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친구들과 혹은 교우들과 주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십니까?



나다나엘은 외모로 판단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절)

빌립은 확신에 차서 예수를 전했지만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나다나엘은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나사렛(Nazareth)은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 산간 지방을 거쳐 북으로 약 134Km 지점, 갈릴리 바다 남단과 갈멜산 사이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산간 지방에 속하며 산들이 둘러 서 있는 산간의 분지로 해발 약 375m 입니다. 나사렛은 예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가 살던 곳이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다윗의 자손 요셉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아들을 낳을 것을 계시해 준(눅 1:26-38) 곳으로 동네 중심에 수태고지 교회와 성 요셉 교회가 있습니다. 또한 나사렛은 예수께서 출생 후 잠시 애굽으로 피난했던 때를 제외하고는 태아에서부터 유년기를 거쳐 성년이 되기까지 일생을 보낸 고향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실 때는 나사렛을 떠나지만 예수님의 이름 앞에는 항상 나사렛이라는 말이 붙어 다녔습니다.(마 21:11, 26:71, 막 16:6, 눅 18:37 등)  



그 당시 유대 사람들은 갈릴리를 ‘이방의 갈릴리’(마 4:15)라고 부르며 무시하였습니다. 나다나엘도 그 영향을 받아 나사렛과 같은 촌 동네에서 메시야 같은 큰 인물이 날 수 없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전 1:27,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은 출신, 배경, 학벌, 세상적인 지위 등을 따지지만 성도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얼마나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잡힌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과 권력자들이 많이 있던 예루살렘에서 주로 사역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사람들이 보기에 변두리인 갈릴리에서 주로 사역하셨습니다.



빌립은 한 마디 말로 나다나엘을 전도합니다.

“와 보라” (46절)

가짜를 소개할 때는 진짜처럼 보이게 하려고 수식어가 많이 붙습니다. 그러나 진짜는 소개할 때는 별로 말이 필요 없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의 반응이 시큰둥할 때 그를 설득하려고 말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와 보라” 이 한 마디뿐이었습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한 사람이 ‘와 보라’는 그 한 마디는 다른 천 마디의 말보다 더 힘이 있습니다. 원래 ‘와 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요한과 안드레를 초대하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빌립의 말을 듣고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러 갑니다. 빌립은 평소에도 나다나엘에게 믿음직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음에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빌립이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이 자리에게 계신 분들은 평소에 신뢰감을 쌓는 말이나 행동을 보여줍니까?  



예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절)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출신을 듣고 부정적으로 반응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기 앞으로 나아오는 나다나엘을 괘씸하게 생각하며 핀잔을 줄 수도 있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외모를 보았으나 주님은 그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나다나엘도 사람인데 그에게 흠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의 좋은 점을 칭찬하셨습니다.



요즈음 새벽기도 본문으로 사용하는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부릅니다. 거기에는 믿음을 따라 살다 간 믿음의 선배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평가가 어떠합니까? 칭찬일색입니다.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가 홍수 후에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옷을 벗고 잠이 들었다. 세 아들들은 아버지가 주책스럽게 옷을 벗고 자는 것을 다 알았고 특히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벗고 자는 것을 동네방네 소문을 냈다더라 그런 말이 없습니다. 도리어 노아에게는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라는 아름다운 칭호가 붙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에 따라 행한 때도 있었으나 때로는 거짓말, 비겁함, 불순종의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하였다고 칭찬을 합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하나님이 신실한 분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스마엘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바가지를 긁은 내용은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다 하며 후한 평가를 내립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입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을 보고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무개는 내가 Pala Casino에서 여러 번 보았다, 또 아무개는 툭하면 주일 빼먹고 놀러간다더라. 아무개는 틈만 나면 아내와 싸운대더라. 아무개는 자신을 위하여 풍성하게 쓰지만 주님을 위하여 도무지 인색하더라. 우리에게 수많은 단점, 약점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을 붙들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날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주님은 우리의 허물을 십자가의 피로 가려주시고 우리의 겨자씨만한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시고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이 좋으신 주님을 찬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다나엘은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간사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는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것이요, 간사함이 없다는 것은 아첨하거나 악한 행동을 안 한다기보다 종교적인 행위로 스스로 의롭게 보이려고 하는 바리새인들처럼 위선적인 행위를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진실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베드로의 경우처럼 나다나엘이 주님께 나오기 전 이미 주님은 그를 아셨습니다. 나다나엘이 예수에게 되묻습니다. 나는 초면인 것 같은데 당신은 나를 어떻게 아십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고 하십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에서 무엇을 했길래 예수님이 언급하셨습니까? 랍비와 같은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을 율법을 묵상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나다나엘도 하나님의 나라와 메시야의 오심에 관한 구절을 묵상하며 간절하게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모든 것을 이미 파악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

자기는 은밀한 가운데 기도하였는데 주님이 자기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말씀하시니 이것은 보통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순간 그의 마음이 주님께 열려지며 감격 속에 예수님에게 대한 고백을 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최초의 신앙고백입니다. 이미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여러 차례 나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 양’, 안드레 ‘메시야’, 빌립은 “율법과 선지자가 예언한 분” 그런데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마태복음에서는 중반쯤에 베드로를 통하여 고백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끝부분에 가서 백부장의 입을 통하여 증거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사역초기에 그런 고백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위로를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깊이 만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일을 말씀하십니다.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50-51절)

귀한 신앙고백을 한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하십니다. 더 큰일이 무엇입니까? 앞으로 행할 표적을 말할 수도 있고 예수님의 본질에 계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는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은 지금 나다나엘과 대화를 나누시는데 ‘보리라’는 이인칭 복수로서 ‘너희들이 보리라’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그 인자’로 소개하십니다. 문자적인 뜻은 사람의 아들이지만 예수님은 보통명사로서 인자를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서 7장에 보면“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단 7:13-14) 다니엘이 환상 중에 본 인자가 바로 나다.  복음서에 인자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오는데 영어에는 the son of man으로 되어 있습니다. 인자 앞에 정관사 the가 붙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인자’는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기에 ‘그 인자’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번역입니다. 장차 구름 타고 오실 이가 바로 나다.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자들 즉 천사가 예수 위에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나옵니다. 그는 장자의 축복을 사모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입니다. 사기를 쳐서라도 장자의 축복을 받으려고 하는 못된 기질을 가진 야곱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은 특별훈련을 예비하셨습니다. 그 기질을 꺾지 않으면 야곱은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들어갈 수도 없고, 하나님의 복의 전달자도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을 철저하게 낮추십니다. 야곱이 자기를 두 번씩이나 속였다고 억울해하며 아버지가 죽으시면 야곱을 죽이겠다고 분노한 에서의 낯을 피해 야곱은 할 수 없이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외삼촌이 있는 하란을 향하여 길을 떠납니다. 길을 가다가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루스라는 곳에서 첫 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춥고 배고프고 오라는 곳도 없습니다. 마침 눈에 띄는 돌을 취하여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잠을 청합니다. 이슬을 맞으면서 자야하는 자기의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부잣집 둘째 아들로 잘 먹고 잘 지냈는데 지금은 들짐승이나 강도의 위협을 염려하면서 길에서 혼자 잠을 자야 합니다. 아버지를 통하여 장자의 축복을 받음으로 족장의 상속자로 대접을 받기는커녕 목숨을 구하려고 가진 것도 없이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길바닥에 누워있던 야곱에게 그 밤은 절망의 밤이요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밤이었으나 도리어 하나님을 만나는 귀한 밤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꿈에 땅에서 하늘로 이어진 사닥다리를 보았고 그 위에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과 그 꼭대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꿈을 꾼 다음 야곱은 그 계시의 장소를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창 28:17) 야곱이 꿈에 본 사닥다리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절망 가운데서도 하늘로 올라가는 사닥다리가 보이고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는 것은 야곱에게 소망을 주었을 것입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요 1:50-51)



이제 예수는 그 꿈을 언급하며 야곱이 꿈에 본 환상이 이제 자기를 통하여 이루어짐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야곱이 꾼 꿈에 나타난 사다리에 그 인자를 대신함으로써 자신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또는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 위에 발을 딛고 계시며, 하나님의 모습으로서 하늘 끝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유일한 사다리요 중보자이십니다. 오직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닥다리가 되어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처럼 기도가 올라가고 응답이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세상에서의 문제를 도와주기 위한 해결사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러 오셨습니다. 그가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의 중보자가 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지금은 하늘과 땅이 사닥다리로 연결된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성령으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여기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사함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요한복음 1장 35절부터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모여들면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 인자로 계시하시면서 믿음을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51절에는 너희들이 보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여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거하십니다. 오직 이 공동체만이 예수의 영광을 보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공급을 받아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게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제자입니까?” 물으십니다. 교회는 예수를 찾아가 그와 삶을 공유하며 그의 삶을 배우는 공동체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나다나엘은 예수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이름이 언급되는 다른 복음서에는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다나엘은 누구일까요? 바돌로매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주님을 경험한 사람이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1) 주님을 만나는 경험이 다양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까? 사람마다 다릅니다. 요한과 안드레는 자기 스승의 말을 듣고, 베드로는 형제인 안드레의 전도로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이 직접 부르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친구인 빌립의 전도로 주님께 나왔습니다. 주님 앞에 나오는 동기도 다 틀립니다.

요한과 안드레는 진리를 사모하며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왔고, 베드로는 안드레의 전도를 받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나왔고, 나다나엘은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친구가 이끄니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마다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틀립니다. 각자의 신앙경험에 따라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다릅니다. 그러나 보니 예수님이 누구신지 전하는 내용들이 다릅니다. 요한 : 하나님의 어린 양,  안드레: 랍비, 메시야,  빌립: 모세의 율법과 여러 선지자의 글에 기록된 이. 나다나엘: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예수님은 스스로를 ‘그 인자’로 소개합니다. 처음 두 제자와 베드로가 예수님을 먼저 찾아왔다면 빌립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그를 먼저 부르십니다.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하니 그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경험이 각자 다르므로 다른 고백을 합니다. 내가 아는 것만이 내가 체험한 것이 최고요 전부라는 라는 독선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2) 상황에 따라 전도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성격이나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역사 하십니다. 꼼꼼하고 계산적인 빌립을 부르실 때 “나를 좇으라” 예수의 권위로 그를 부르십니다. 진실하고 조용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던 나다나엘에게는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고 하시면서 깊은 감동을 주며 그를 부르십니다. 예수 믿으라는 기본 메시지는 같지만 전도의 시기와 방법은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며 성령의 지혜를 구하고 전도의 문을 열어달라고 해야 합니다.  



3) 전도를 통하여 공동체가 확장됩니다.

안드레와 요한이 처음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에 베드로가 참여합니다. 주님이 빌립을 전도하고 나니 그를 통하여 나다나엘이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예수님의 개척교회 교인이 점차로 늘어갑니다. 누가 전도했든지, 어떤 동기로 갔든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든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교회만 오래 다닌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단 예수를 만났으면 변화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자기가 만난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빌립이 안드레와 공통적으로 가졌던 생각이 무엇입니까? 자기들이 받은 은혜를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누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막 시작한 개척교회처럼 예수님과 몇 사람의 적은 무리들로 구성되었으나 열심히 전도하기 원하는 살아있는 공동체였습니다. 전도의 공동체가 된 것은 주님과의 활발한 교제가 기초가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주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삶에 기쁨과 활기가 있고 복 받고 누리는 삶을 살게 되면 자연스럽게 전도의 문을 열어 집니다. 지속적인 주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우리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을 새로이 바라보며 확신을 가지고, 이제는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살겠다는 다짐을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수가성 여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남의 눈을 피하여 뜨거운 대낮, 사람이 다니지 않던 시간에 우물가에 온 여인,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여인이었으나 생명의 구주가 되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무거웠던 죄의 짐이 벗겨지고 한 여인으로서의 존귀함을 회복하는 경험을 합니다. 주님을 만난 감격을 인하여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지고 왔던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달려갑니다. 예수 만난 체험이 너무도 분명하니 예수 믿고 변화 받는 순간 즉시로 자신의 믿음을 남들에게 전합니다. “와 보라 이 사람은 우리가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라.” 하나님의 은혜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여겨지던 여인이 예수를 만나고 나니 변화를 받고 도리어 복음을 전파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여인의 전도를 듣는 동네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여인은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고 담대하게 주님을 전했습니다. 주님은 수가성 전도에 제자들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여인이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일을 하였습니다. 남자를 여섯 번이나 바꾸었어도 만족을 찾을 수 없었던 여인이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수를 마시고 나니 물동이를 던져버릴 수 있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니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가지게 되고 하나님이 귀하게 쓰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여인의 전도를 통하여 동네 사람들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수가 성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는지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요 4:42)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현재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예수님을 필요에 따라 쫓아다니던 무리 중의 한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함께 있고자 다짐하던 제자들 중의 한사람입니까? 팔로마 한인 교회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일꾼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자고 동행하면서 주의 삶과 사역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말씀을 묵상하거나 기도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로서 훈련받기 위하여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변화를 받고 주님이 누구신지 깨달으며 그 주님을 삶의 현장에서 전하며 주님의 칭찬을 받으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