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와 보라(요 1:35-42)

Author
Myung Myung
Date
2008-02-10 15:43
Views
4207
요 1:35-42  와 보라

저희 팔로마한인교회가 95년 7월 9일에 장년 18명 주일학교 학생 8명으로 창립되었습니다. 96년에 접어들면서 그중에 여러 가정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예배 참석인원 20명, 헌금 169불이 통계상 가장 적었을 때입니다. 지금은 추억거리지만 그 당시는 앞으로 어떻게 인도하시겠습니까 하며 주님께 엎드린 적이 있습니다. 97년 12월에 이르러서야 주일예배 참석인원이 처음으로 50명을 넘어섰습니다. 사역하면서도 힘들고 지칠 때도 있지만 그때의 어려웠던 때를 생각하면 위로가 됩니다. 본문에 보니 예수님도 사역 초기에는 주변에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세례자 요한의 소개로 제자 두 사람이 처음으로 생겼습니다. 무슨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미약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기 바랍니다. 주님을 붙들면 때가 되어 하나님의 풍성한 위로가 임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흔히 신약교회가 언제 생겼느냐고 하면 오순절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였을 때라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사역을 시작할 때가 교회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12명으로 시작하고 갈릴리에서 온 많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도운 것은 아닙니다.400년 만에 등장한 하나님의 선지자를 인하여 요한에 거는 기대가 아주 높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나는 메시야가 아니라” (요 1:20)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 1:7-8) 증거할 때 사람들은 메시야가 올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사람들은 실망하였습니다. 메시야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큼 대단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목수요 나사렛이란 조그만 동네에서 자라난 예수가 오랜 동안 기다려오던 메시야라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요한이 그를 소개하였으나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제자가 생기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고 어떻게 예수님의 초청에 반응했는지 살펴보면서 저희 모두가 어떻게 하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제자의 삶을 살고 어떻게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지 배우기 원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먼저 예수님의 제자들이 됩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6절)



본문에는 처음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그들은 원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요한의 전도를 통하여 예수님을 따르게 된 자들입니다. 그 두 사람의 이름이 무엇일까요? 한 사람은 안드레요, 또 한 사람은 이름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바로 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나서 몇 십 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난 후였습니다. 두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때가 제 십시 즉 오후 4시쯤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예수를 만난 경험이 너무도 생생하였기에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 시간을 기억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두 제자 중 한 사람은 아마 요한일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 하면서 간접적으로 자기를 표현할 뿐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이 요한의 스타일입니다.  

(요 13: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 21: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보자마자 적극적으로 따른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셨지만 요한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는데 아직 사람들이 모이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본문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또 이튿날”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소개했습니다. 아직까지 전도의 열매가 없었는데 이튿날이 되자 또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전했더니 그제야 요한의 두 제자가 반응을 보입니다. 예수를 좇기 시작합니다. 그 당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오늘날 생각하는 사제지간보다 더 깊은 것이었습니다. 제자는 자신의 삶을 스승의 가르침에 맡기기로 작정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자가 스승 곁을 떠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자기의 두 제자가 예수의 제자가 되었을 때 요한의 마음이 어떠하였을까요? 자기를 떠난 제자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가졌을까요? 예수님에게 자기 제자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예수님을 원망하였을까요? 하나님이 세례자 요한을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고 사람들을 예수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의 한계를 잘 알았고 또한 그 사명을 갈 감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에게 세례 받으실 때부터 요한은 자기의 때가 다 되고 이제부터 예수님의 때가 된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의 두 제자가 예수님의 사역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보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요즈음으로 따진다면 개척교회를 이제 시작하신 예수님께 자기의 핵심멤버 두 사람을 보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참다운 스승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전도 결과 안드레는 베드로를 주님께 인도하였고 요한은 요한복음을 저술하였습니다. 요한이 그들을 자기제자로만 붙들고 있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왜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소개하였습니까?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어린양 한 마리를 죽이는 유월절 예식을 행하였습니다. 일 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에는 염소 한 마리를 택하여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지고 광야로 나가게 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누군가 죽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사도 바울은 허물과 죄로 인하여 우리들은 죽었다고 합니다.(엡 2:1)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 심판을 피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대속의 피를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심판이 이르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함은 다른 사람들의 죄악을 위하여 대신 죽으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38절)

예수님은 자신을 좇는 요한의 두 제자를 보시고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본문에 보니 예수께서 돌이켜 보셨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결코 못 본 체 하시거나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돌이켜 보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첫 번째 질문입니다. 제자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무슨 동기로 나를 찾아왔느냐? 무슨 목적으로 제자가 되려는가 하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그 질문은 또한 이 자리에 있는 저희 모두에게 던지시는 질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기 원하십니까? 물질이나 명예를 얻기 위하여? 질병의 치유를 위하여? 사명을 감당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그저 주님이 좋아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예수님은 세상적인 것들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은 아니지만 주님께 우선순위를 두면 이 세상에 사는 데 필요한 것은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어디 계시오니이까” (38절)

예수님의 질문에 두 사람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질문으로 대답합니다. 랍비는 ‘나의 큰 자’라는 뜻으로 예수님을 스승으로 인정하고 존경심을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얼핏 들으면 제자들의 답변은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질문 속에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들어 있습니다. 자세히 묵상해보면 모든 제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답변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선생과 같이 먹고 자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어디에 계시느냐는 질문은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다는 말입니다. 교제를 통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싶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본받기 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제자가 되기 원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님께서 어디에 머무시든지 자기도 머물기 원하고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자기들도 함께 가도 싶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구하는 것은 주님 그 자체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을 지내면서 자기 소유의 집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 하실 정도로 거의 노숙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예수님을 따를 각오를 합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룻을 연상시킵니다. 룻기 1장을 보면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 1:16-17) 주님의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의 대답은 다른 어떤 것보다 주님, 그분만을 구한다는 뜻입니다. 이전의 관계를 끊고 주님을 따르기로 작정한 모든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돌이켜 보시고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 앞에 ‘오직 주님입니다’라고 응답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기 원한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와 보라” (39절)

주님은 진리와 생명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두 제자들을 기특하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와 보라”는 말로 초대합니다. 직역하면 오라 그리하면 볼 것이라 하십니다.  보기 위해서는 와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두 제자를 초청하시며 자신이 있는 그곳에 그들의 자리를 마련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최상의 선물입니다. 주님의 초청을 받고 주님 안에 거하게 된 사람에게 더 바랄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하였습니다. 구약에 그런 곳이 어디 있습니까? 성전 안에 있는 지성소입니다. 두 사람이 간 곳은 단순히 예수님의 숙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지성소 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마 11:28) 주님은 우리를 만나기 위하여 높으신 하늘 보좌를 버리고 오셨는데  피곤하다고, 시간 없다고 핑계를 대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을 자기가 머무는 곳으로 데리고 가셨는데 때가 열 시쯤 즉 오후 4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어느 장소에 머물렀는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부터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초청을 받고 주님 안에 거하게 된 이들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 84:10)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41절)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지내면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말씀의 내용, 말씀을 통하여 전하여지는 예수님의 인격과 생각,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이 보통 만나는 이스라엘 랍비들에게서 느끼지 못하던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막 1:22, 회당에서 무리를 가르치는 것을 듣고 무리들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었습니다. 잔잔하게 하시는 말씀이 가슴을 치고 진한 감동을 줍니다. 주님을 직접 만나는 경험을 통하여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확신을 가집니다. 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따를 때에는 “랍비”(38절)라고 부르다가 예수님을 알고 나서는 “메시아”(41절)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깨달음에 도달하자마자 안드레는 자신의 형제인 베드로에게 찾아가 예수님을 전합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만났다는 동사가 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메시야임을 깨달은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분과 교제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는 안드레 외에 누가 포함됩니까? 요한. 안드레와 더불어 요한도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안드레는 베드로에게 아무 설명도 없이 메시아를 만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의 오심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아마 두 사람도 형제로서 메시아에 대한 대화를 많이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베드로는 안드레의 초청을 받고 진리를 사모하며 예수님에게 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요 초대교회의 핵심지도자 중의 하나인 베드로가 드디어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아마 요한도 자기 형제인 야고보에게 예수님의 메시아이심을 증거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도 두 제자들과 같은 교제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두 사람은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하여 주님을 발견하고 일생을 주님을 따르고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지만 분주한 삶 속에서 주님과의 교제가 약해지다 보면 사랑이 식어지고 지식이 메마르게 됩니다. 예수님을 한번 만나는 경험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더불어 지속적으로 교제를 나누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삼 년 동안 따라다녔고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을 통하여 지속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2000년 전에 제자들은 육신으로 계신 예수님과 구체적인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주님과 교제를 나눕니다. 교회가 왜 중요합니까? 성도들의 모임이 왜 중요합니까? 그곳이 주님의 몸이며 주님이 그곳에 성령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사모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 그 자리는 하늘의 지성소가 되어 영광이 나타나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집니다. 오늘의 만남을 이런 곳으로 만들지 않겠습니까? 매번의 만남을 이런 곳으로 만들지 않겠습니까?



“장차 게바라 하리라” (42절)

새 이름을 주신 것은 새사람이 되고 새로운 사명을 주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에게 베드로를 소개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를 아셨습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주님, 우리의 중심을 들여다보시는 주님.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면서 시몬이라는 이름에서 게바(헬라어는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게바는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입니다. 지금은 안드레의 인도를 받고 왔지만 앞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반석같이 귀하게 쓰임 받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머리털 하나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으며 어떠한 죄를 지었으며 우리의 약함이 무엇인지 다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잘 아시고 우리를 위한 당신의 계획까지 다 세워 놓으셨습니다. 내가 주님을 선택한 것 같지만 실상은 주님이 그저 주님이 먼저 arrange를 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주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 모습 그대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베드로를 사용하신 주님은 부름에 응한 성도들을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은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예수를 소개한 동기는 무엇입니까? 안드레가 말로만 듣던 예수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니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보물은 발견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감추려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한 사람은 자꾸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합니다.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변화된 자기의 모습을 나타내고자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은 지 오래된 사람들보다는 보통 믿은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 전도를 더 잘 합니다. 1) 아직 안 믿는 친구들이 주변에 많기 때문이요, 2) 받은 은혜가 아직도 생생하여 누군가에게 자기가 경험한 것을 전하려는 열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안드레도 자기가 만난 예수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이 자기의 형제인 베드로였습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우리 유다 민족이 몇 백 년 동안 기다려 오던 바로 그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면서 베드로를 자연스럽게 예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Calvary Chapel of Escondido에서 새 교인이 되는 경우 90%는 가족이나 친구의 소개로 온다고 합니다.  전화번호부나 광고를 통하여 혹은 지나가다 보고 들어와 교인이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합니다. 먼저 우리 자신이 주님과 만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확신을 가지고 자기가 만난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38절),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41절),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42절)‘번역하면’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의 독자들이 주로 헬라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증거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달은 전도자들을 통하여 유대인에게서 헬라인에게로 전파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릴레이 선수를 자기 몫을 달린 후에 그 다음 선수에게 바톤을 넘겨주듯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3-14).



증인이 되는 것은 세상적인 여건, 시간이나 장소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증인의 역할은 풀 타임 선교사, 목사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크리스천들은 God's Missionary People (하나님의 선교하는 백성들)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이방인 땅인 거라사에 가셨다가 거기서 군대 귀신 들린 청년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 청년이 예수님과 함께 가려고 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막 5:19)  그 결과가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마가복음 8장에 의하면 나중에 예수님이 데가볼리 지역에 가셨을 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사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고 몰려들었습니까? 바로 귀신들렸던 그 청년이 예수님이 자기에게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열심히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청년은 전도에 대한 특별 교육을 상당 기간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를 흉악한 귀신들에게서 자유케하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도 감격스러웠기에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전하였을 뿐입니다. 누구나 자기가 만나고 경험한 예수를 전할 수 있습니다. senior group도 젊은 학생들도 다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선교지에 나가야만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교사로 부른 자들이면 선교지에 가서 증인이 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각자의 삶의 현장이 바로 선교의 현장입니다. 작게는 자기의 가정에서부터, 학교, 자기의 일터,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 어디든지 될 수 있습니다. 선교를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 끝으로 하면서 복음이 점차 전파되어져 가는 과정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증인이 되도록 부름 받은 자들, 온 유대에서 증인이 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 사마리아에서 증인이 되도록 부름 받은 자들, 땅 끝까지 가서 증인이 되도록 부름 받은 자들처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능력 주시는 대로 다양한 곳에서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평소에 알고 지내는 이웃을 목장에 데리고 올 수 있습니다. 목장이 단순히 친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믿지 아니하는 이웃이나 교회를 정하지 않은 이웃들에게 주님을 소개하는 전도의 장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을 세우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을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안드레와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보니 베드로보다 안드레가, 야고보보다 요한이 먼저 예수님을 만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서로 모순된 것이 아닙니다. 안드레와 요한이 먼저 예수님을 알았고 그들을 통하여 베드로와 야고보가 전도를 받게 되었고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정식으로 제자로 부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사람을 미리 세워 놓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사역보다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람을 세우는데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안드레와 요한은 처음 믿을 때부터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른 모범적인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자마자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어디 계시오니이까”  “와 보라” 주님은 오늘과 저와 여러분들과 이런 대화를 나누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이런 간증을 하기 원하십니다. 두 제자가 경험했던 벅찬 구원의 감격,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에 합당한 열매 맺는 삶을 원하십니다. 요즈음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얼마나 진리를 사모합니까? 그 진리를 얻기 위하여 마음과 정성을 투자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증인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미리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주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삶에 기쁨과 활기가 있고 축복 받는 삶을 살게 되면 자연스럽게 전도의 문을 열어 집니다. 전에는 예수를 믿으라는 말에 무관심하고 배척하던 사람들도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하여 도전이나 감화를 받고 신앙생활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에 단 12:3,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히 비취리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하여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변화된 삶 자체가 살아있는 간증이요 고백이 되어 풍성한 전도의 열매를 거두며 성도들의 이름이 밤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히 비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